'한국의 개화 여성'…'파란 눈의 명가' 원조 할머니 .언더우드여사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남자들이 역사에서 더 강하게 역할했다고 우 쭐대지만 인간의 내면에 들어가면 오히려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인하 다고한다.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지배자의 군상을 보면서 역사가 마치 남자들의 것인양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사건, 어느 위인의 배후에나 그 남자에 못지 않은 여인들의 역할이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일 수도있는 이들의 역할은 한국의 개화사에서도 마 찬가지이다. 예컨대 그 시대를 살다간 대표적 개화 여성이었던 언더우 드 여사가 그렇고 민비 또한 그렇다.
그럴 무렵 그의 주변에 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다. 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1916)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명문 뉴욕대학을 졸업 하고 다시 뉴 브런스위크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미 수교와 함께 고 종의 초빙으로 내한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한 편 새문안교회를 창설하여 목회를 하는 젊은이었다. 광혜원이라는 동 일한 공간과 이국의 외로움,그리고 같은 사명감을 가진 두 사람은 호 튼 양이 8년의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호 튼이 내한한 이듬해인 1889년, 국왕이 하객으로 보낸 한규설과 민영환 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에 골인했다. 1884년의 갑신정변 당시에 개화파의 저격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왔 던 척신민영익이 미국인 의사 알렌(H N Allen)의 도움으로 살아난 후 양의에 대한 경이로움이 자자하던 차에 서양의 여자 의사가 내한했다 는 사실은 왕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남자 어의에게서 치 료를 받아야 했던 민비로서는 언더우드 여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여 그의 결혼식에 축의금으로 100만냥을 보내주었는데, 당시 웬만한 부호 의 유동 자산이 3000냥이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액수의 크 기와 민비의 관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남편을 따라 서북 지방과 관서 지방의 선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비한 숙박 시설, 강도와 맹수로 인 한 생명의 위협, 그리고 처음 보는 서양 여자에 대한 한국의 호기심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은 전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방으로 여행 을 떠나면 서양 여자를 구경하기 위해 40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구경하는 바람에 자신의 여행이 마치 '순회동물원'과 같았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당시는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 문에 평안도에서 세례를 줄 때는 교인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세 례를 준 다음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개화기의 중요한 사건을 가장 근거리에서 바라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민비 시해 사건을 지켜 본 증인으로 당시의 정황을 소상하 게 기록하고있으며, 아관파천은 남편 언더우드와 알렌 공사가 꾸민 일 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모시지 않고 러 시아 공사관으로 모신 이유는 미국 공사관의 수비대가 러시아 공사관 의 수비대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이면사도 털어놓고 있 다.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 중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는 민비에 관한 부분이다. 그가 민비의 어의였다는 사실과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맞물려 그의 기록은 독보적인 가치 를 가지고 있다. 민비의 기록으로서 먼저 살펴 보아야 할 대목은 그의 모습에 관한 부분이다.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민비는 얼굴이 창백했으며 몸매는 가냘펐다고 한다. 눈은 날카로왔으며 어느 모로 보나 미인이라고는 할 수없지만 이목구비가 뚜렸했고 총명해 보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민 비를 알현하고 그의 모습을 기록한 비숍(I B Bishop)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한 민비 사진의 진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언더우드 여사에 의해 밝혀지 고 있다. 우선 우리 학계에서 민비의 사진이라고 거론되고 있는 것은 (1)번의 사진으로서 국정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 은 조선 주차 이탈리아 영사였던 로제티(Carlo Rossetti)의 "꼬레아 꼬레아니"(1905)와 언더우드의 "조선생활기"(Tommy Tomkins, 1905)와 헐버트(H B Hulbert) 목사의 "대한제국멸망사"(1906)에 수록되어 있 다. 그런데 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헐버트와 언더우드의 사진 은 배경을 오려내고(trimming) 인물만 부각시킨 것이며 로제티의 사진 만이 원형 그대로 배경까지 살아 있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 사진 을 민비의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민비의 사진이 아닌 첫번째 이유로는 언더우드 여사가 자신 의 책에서 소개한 사진 (2)를 '정장한 한국의 여인'(A Korean Lady in Full Custume)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헐버트가 이 사진을 '정장한 궁 녀'(A Palace Woman in Full Regalia)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로제티는 그의 근무 기간(1902년 11월∼1904년 4월)으로 볼 때 민비를 본 적이 없지만 민비의 어의로서 무시로 민비를 알현할 수 있었던 언더우드와, 대궐 출입이 빈번했고 고종이 가장 신임하던 헐버 트 목사가 이 사진을 가리켜 민비가 아니라는데 더 무슨 논의가 필요 하겠는가?. 이 사진이 민비가 아니라는 두번째의 논거는 사진 (3)이다. 이 사 진은 로제티의 책에 실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진 (1)번과 배경이 같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3)의 사진 설명이 '기생 의복 한 벌'이 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왕비가 사진을 찍었던 어좌에 기생의 옷을 걸쳐 놓고 찍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당시의 전제 군주 시 대의 풍속에 어좌에 기생의 옷을 걸어놓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사진 (1)번과 사진 (3)번은 어느 동일한 세트에서 촬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인물은 어느 궁녀가 대궐 밖 으로 출타하여 기념으로 찍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의와 문제점이 노출되자 제3의 사진으로 사진 (4)가 등장했 다. 이 사진은 라게리(V de Laguerie)의 "조선전"(La Coree, 1898)에 수록된 것인데 그 구도를 정밀하게 살펴 보면 이는 사진 (1)번을 스케 치한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도 또한 민비의 사진이 아니다. 끝으로 사진 (5)번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저 유명한 "독립졍신" (1910)에 수록된 사진인데 이 박사는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표제를 달았고 그의 명성에 힘입어 민비의 사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 나 이것도 민비의 사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을 민비로 보기에 는 두가지의 의문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 사진의 복식을 주목 해야 한다. 이 사진의 윗저고리는 여염에서도 하층민이나 입는 적삼이 다. 이 사진이 쪽을 찐 모습임을 미루어 볼 때 만약 이것이 민비의 사 진이라면 이는 왕비가 된 이후에 찍은 사진임이 분명한데 당시의 왕실 법도로 일국의 왕비가 적삼바람에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둘째로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에 이 책을 낸 다음 해방 이 되어 귀국한 다음에 이 책의 개정판을 냈는데 초판(1910)에 실린 민비의 사진과 개정판(1954)의 사진이 자세만 같을 뿐 얼굴 모습이 많 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독립졍신"에 수록된 민비의 사진은 민비가 아닌 상상의 초상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사진이 민비의 진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비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비와 그토록 가깝던 언더우드 여사도, 비 숍 여사도, 그리고 헐버트 목사도 민비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들이 수많은 사진 작품을 남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찍은 민비의 사진이 없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민비의 사진을 찍을 수 없 었기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라 함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민비는 수많은 정적들에 둘러싸여 늘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 문에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실제로 그는 처 녀시절에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아버지(민승호)와 어머니 한씨 그리고 남동생 셋이 폭사당하는 비극을 겪었고 이때로부터 늘 얼굴을 숨기며 살아왔다. 따라서 민비 시해 사건 당시에 일본의 낭인들이 민비의 얼 굴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마구잡이로 죽이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더 컸 다. 민비의 사진이 없는 두번째 이유는 당시 한국 사람들은 사진을 찍 으면 혼이 빠져 나가 곧 죽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진 촬영을 기피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조선의 사대부들 은 초상화를 그리기는 했어도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한 것은 개화가 한창 진행된 이후의 일이었다. 실제로 민비는 자신의 불우한 가정 환경 탓에 어느 누구보다도 미신에 경도되 어 많은 비용을 지출했음을 알 수가 있다. 비숍 여사와 언더우드 여사 는 한국인의 이러한 사진 기피 심리로 인하여 더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한 장의 사진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반문 할 수도 있지만 역사에서 정확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이기 때 문에,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 문제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민비의 역할에 대한 재평 가가 머리를 들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뉴욕주 알바니(Albany)에서 태어남 -결혼 전의 이름은 릴리아스 S 호튼(Lillias Sterling Horton). -시카고여자의과대학(Chicago Woman's Medical College: 지금의 노스 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을 졸업 -졸업과 함께 1888년에 미국 장로교 선교국에 의해 한국에 파견 됨. -1889년에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초기 선교사인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결혼< -광혜원의 의사로 활약. -민비의 총애를 받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어의로서 활약 하면서 궁중의 많은 이면사를 목격할 수 있었음 -한국에서 33년을 보낸 후 타계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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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1999.07.29 /15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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