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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황금 넘쳐나는 나라" 왜곡된 견문기가 약탈심 부추겨 .

이강기 2015. 9. 7. 22:43

"조선은 황금 넘쳐나는 나라" 왜곡된 견문기가 약탈심 부추겨 .

한말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의 기록을 찾다보면, 서방 세계에서 조선 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라는 호기심에 빠지 게된다. 문헌에 의하면 그 사람은 아라비아의 코르다드베드(Khordadbeth) 라고 한다.

▲ 김 담뱃대에 부채를 들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먼길을 떠나는 양반의 모습. 뒤 알드의 책에는 조랑말이 '과하마(果下馬)'로 묘사 돼 있다.
그는 9세기 경에 '도로-지방지'(Book of Road and Provinces)라는 책을 쓰면서 조선을 최초로 기록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 다. 아마도 그는 실크로드를 타고 동방(중국)을 다녀 갔거나, 아니면 대상들의 얘기를 듣고 중국사를 쓰면서 그 어느 언저리에 조선에 관한 얘기를 언급했던 것 같으나 아랍어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서구인들이 조선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서구에 조선을 소개한 책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뒤 알데(Du Halde) 신부의 "조선전"(Kingdom of Korea, London, 1741)이다. 한말 조선에 온 사람들은 당초 조선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 다.예컨대 저 유명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저자인 비숍(Isabella B. Bishop)이 조선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까 그 친구들이 '하필이면 흑해를 왜 가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조선에 대한 정보가 없던 차에 이 "조선전"은 방한객들이 조선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 어야 할 유일한 참고서가 되었다.

나는 외국인 기록을 수집-번역하는 과정에서 뒤 알데의 "조선전"이 많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과연 이 책에는 우리 나라가 어떻게 묘 사되었기에 외국인들이 조선을 그토록 오해하고 있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 책을 찾아 보았으나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의 로윈저기념도서관 귀 중본 서고에 이 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안것은 1985년이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가 사서(curator)에게 열람을 신청했더니 그는 우선 나의 몸수색부터 했다. 폭발물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책이나 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만년필과 볼펜 등 일체의 필기 도구를 지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가 제공하는 몽당 연필 하나와 백지 두 장을 가지고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 책을 열람할 수 있었고 그들의 특수 기술에 의해 겨우 복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 가마 탄 수녀. 성공회 수녀가 가마를 타고 외출하고 있다.
이 책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인 필자가 동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신부들의 안내서로 쓴 책이며 당초부터 조선을 의식하고 쓴 것 이 아니라 "중국사"(The General History of China) 전 4권 중에서 제4 권의 한 장을 넣은 것으로서 분량은 48쪽에 지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는 프랑스 신부 모방(P. Maubant)이 1835년에 입국하기 백년 전에 씌어 진 것이다.

따라서 필자인 뒤 알데 신부는 조선에 와 본 적도 없고 한만 국경 근처에서 조선을 기웃거리며 월경자들의 구전을 수집하고 중국에 산재 된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썼다. 자료를 실제로 수집한 사람은 그의 동료 인 레지(P. Regi) 신부였다. 그는 한만국경을 살짝 넘어와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뒤 알데 신부에게 전달했다. (이 책에는 조선에 관한 일체의 사진이나 그림이 없으며 따라서 이 글에 있는 풍속화들은 후대의 것을 참고적으로 게재한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프랑스 신부인 뒤 알데가 왜 이 책을 영어로 썼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는 이 책의 독자를 프랑스 신부에 국한시키지 않고 로마 교황청을 통해 세계 각지 에 동방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문제는 조선의 역사-지리-풍속에 관한 우리와 중국의 자료를 프랑 스 신부가 영어로 쓰자니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개재되었겠 느냐하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자료를 중국어로 발음하여 프랑스 사람 이 영어로 썼고 게다가 당시의 알파벳도 지금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지 명과 인명을 확인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상 이 책은 조선의 역사와 풍습을 그리면서 상당한 오류와 편견을 안고 있 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조선을 찾 아왔던 모든 탐험가와 선교사들이 이 기록을 사실로 믿었다는 데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풍속이 언급되어 있다. 지리 에 관해서는 거의 정확하다. 이것은 당시 선교사들이 복음을 기치로 들 고들어 왔지만 실상은 서세 동점기에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는 점과 무 관하지 않다.

역사는 주로 한중 고대사와 임진왜란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뒤 알데가 본 한중 관계사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은 당시의 독자들은 조선이 중국의 한 성 정도인 것으로 생 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건국 그 자체가 중국의 망명객인 기자에 의해서 이뤄졌으며, 그 이전의 고대사인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일체의 사실 언급이 없다. 적어도 조선왕조 숙종에 이르기까지 왕의 서 임도 중국 천자의 허가 사항이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서구인들로 하여금 조선과 수교를 한다거나 조선에 가톨릭을 포교하는 문제에서 중 국의 지원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중국에서의 경험 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이 서세동점 시기에 겪었던 비극들, 이를테면 함포 외교에 의한 국교 수립 을 획책한 것은 중국에서의 경험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 진왜란사는 주로 전쟁 중의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중국 자료에 의해 기록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빚어진 오류라고 볼 수 있다.

▲ 제사 촛대 물부리 등 놋제품을 늘어놓은 유기점.
문제는 한국의 풍물에 관한 기록이다. 우선 뒤 알데도 조선의 인종 이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혈임을 지적하면서 북방계가 더 건장하고 호전 적이며 강용하다고 지적한다. 생활 면에서는 특히 음악을 즐기는 모습 이 두드러진다고 그는 기록하면서 한국인들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뒤 알데의 눈에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 한국인의 생활상은 한국인들 의 법도가 엄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특히 한국인들이 사립문을 닫 지 않고 살아도 좋을 만큼 생활이 준법적이고 도적이 없다는 사실과 부 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미덕을 가진 민족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 다. 이밖에도 매장의 풍습과 혼례의 방식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뒤 알데의 기록 중에서 서방인들의 귀에 가장 크게 들린 대목은 한 국의 물산이 풍부하다는 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우수한 모피와 종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약이 발달되어 도자기가 아름답다는 말도 그는 빠트리지 않았다. 특히 금이 풍부하여 심지어는 옷의 장식까 지도 금으로 입혀 입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장례식은 매우 호화로 우며 많은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는 대목도 서구인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의 왕릉은 약탈의 일순위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국에는 과하마라는 특이한 종자의 말이 있는데 이 는 그 말을 타고 과일 나무밑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조랑말을 의 미한다. 땅은 비옥하고 인삼이라는 영약이 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 다. 이밖에도 꼬리가 3피트나 되는 닭이 있고 여우의 꼬리털로 만든 붓 이 명품이며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뒤 알데는 서구의 모험가들에게 무한한 약탈심을 부추겼음에 틀림없다. 유태 출신의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 Oppert)가 충남 덕산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 로 결심한 데에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그가 도굴에 실패하고 돌아가서 남긴 '금단 의 나라 조선 기행'(1880)이라는 책에는 뒤 알데의 기록이 수없이 인용 되어 있고, 그 길의 안내를 맡았던 사람도 뒤 알데와 마찬가지로 페롱 (Feron)이라는 신부였다는 점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시의 서구라파에서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은 정금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특히 서부 개척 시대(gold rush) 가 끝나 태평양 연안에 몰려 바다 너머 동양의 신비한 나라를 바라보고 있던 탐험가들로서는 이 책에 써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이야 말로 모험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라고 믿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평양 의 왕릉을 도굴하기 위해 쳐들어왔던 제너널 셔만호 사건(1866)이 발생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한국으로 하여금 쇄국이라는 비상한 조치 를취하게 만들었다. 쇄국 정책의 공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 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우리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지만, 당시 서세동점 속에서 그것은 위정자들이 취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서 국가 보위를 위해서는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었다.

그와 같은 쇄국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왕이 취한 정책이 곧 금의 채 광을 법으로 금하는 것이었다. 위정자들은 금이야말로 서구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약탈의 제일 목표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용어로 보석상을 금방이라 부르지 않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은방이라고 불렀던 것도 쇄국 정책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며, 외국인의 약탈심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연안 도서로 부터 주민을 소개하는 소위 공도 정책도 이때부터 실시되었고 그 결과 로 연안 어업과 해상권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뒤 알데의 "조선전"에 비친 18세기 초엽의 한국의 모습은 서 구의 모험가들로 하여금 약탈의 유혹을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었다. 그러나 문호 개방과 함께 합법적으로 조선에 상륙하여 조선의 현 실을 목격했을 때 조선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것임을 깨달았고 서서히 조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결국 대한제국이 멸망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묵시적 방조자가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요한 1674년 2월 1일 파리에서 출생.

르고비엥(Legobien) 신부의 뒤를 계승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이 여러 나라에서 보내 온 각종 문서(서신)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을 책 임맡음 왕의 고해 신부인 저명한 르텔리에(Letellier) 신부의 비서를 역임.

1741년에 "중국사"(The General History of China)를 씀 "중국에 대한 묘사"(La Description de la Chine)를 씀 1743년 8월 18일에 선종.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주간조선1999.07.01 /15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