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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치 - 노무현 정권 입체 大분석 - 2007.02.25 新東亞

이강기 2015. 9. 8. 17:05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치 - 노무현 정권 입체 大분석

 

 

[특별 기고]

송호근 교수의 노무현 정권 입체 大분석
단절·배제·이념과잉으로 몰락한 운동정치, 거리정치, 저항정치… 남은 1년은 ‘조정자’가 이끄는 실용개혁정치로!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knsong@snu.ac.kr

실망하고 분노하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아직 길은 있다. ‘실용개혁정치’는 이념적으로는 중도파이고, 좌와 우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기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운영 방식을 선택적으로 흡수·결합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장된 시장적 폭력과 불평등을 수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1부〉 상황 : 이제 우리가 눈물의 계곡으로 간다

 

정해(丁亥)년을 맞은 국민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언제 치솟을지 모를 집값이 그렇고, 금리와 물가가 그렇고, 장기 침체에 빠진 듯한 경제, 힘든 취업과 직장 불안, 점차 어려워질 노후 준비, 여기에 대선(大選)까지 겹쳐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정도다.

대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요동치게 할 굵직굵직한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또 한 차례 격돌을 예고하고 있기에 2007년 정국은 국민이 감당할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는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해 각 부문 간에 격렬한 이해충돌을 촉발할 전망이고, 올봄 춘투(春鬪)에서는 비정규직 보호법안 철폐가 다시 거론될 것이다.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다시 언급한 것처럼 집값과의 일전이 치러질 것이다.

혹시 6자회담이 그즈음 결렬되면 평양에서 핵실험이 또 한 차례 강행될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한나라당은 일정대로 경선 시작을 알릴 것이고, 열린우리당은 분당(分黨)과 합당(合黨)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당분간 분당파와 힘겨루기를 할 것이고, 우리당 내 친노파와 반노파 간 균열이 커지면서 잔존과 이탈의 드라마가 펼쳐질 예정이다.

경제는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쉽지 않다. 일반인은 한국이 지난해 3260억달러라는 미증유의 수출실적을 달성하고도 서민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런 업적을 달성하고도 그저 덤덤해할 뿐인 한국인을 두고 외신에서 ‘결코 만족을 모르는 국민’이라고 비꼰 것은 사정을 잘 몰라서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가 국내 투자와 소비로 풀린다면 서민이 실감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돈은 대부분 재벌 대기업들 수중에 묶여 급증하는 미래의 시장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유일한 경제정책은 재벌 규제

 

재벌 대기업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자금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재벌 대기업들은 선진국 유수기업의 끊임없는 혁신과 인도, 중국의 맹추격 사이에 끼여 나름의 생존전략을 고심 중이다. 여유 없기는 치솟는 땅값과 임금, 물류비용 상승 등으로 허덕이는 여느 중소기업과 다를 바 없다.

재벌 대기업의 구조조정, 예를 들어 지배구조 개선, 출자총액 제한 등이 기업경쟁력을 배양하는 최고의 지름길이라며 노무현 정권이 초기부터 밀어붙인 유일한 경제정책이다. 이론적으로는 설득력과 명분을 갖춘 이 주장이 왜 서민경제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는지를 따져보지 않은 채, 정책 선회의 필요성을 제언하는 업계와 학계의 권고를 보수세력의 정치적 음모로 몰아붙이는 정치적 경직성에 서민이 더 피곤해 하는 게 작금의 시장상황이다.

 

말하자면 서민의 눈에는 ‘실패와 실정’으로 보이는 것을 정권은 ‘성공을 향해 가고 있는 어떤 것’으로 확신하는 괴리가 있다. 이 차이는 점점 더 허물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져 급기야 토론을 그토록 강조하는 정권에서 ‘소통의 단절’이, 참여를 강조하는 정권에서 ‘배제와 소외’가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이 ‘상황 악화’라는 표현도 정권 내부의 인식과는 너무 달라 오히려 정권실세들의 오기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보수신문의 왜곡이거나 음모적 레토릭이지 민심(民心)의 실체는 아니라는 확신, 혹시 서민이 그렇게 느낄지라도 잘못 계도된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옳고 그들이 따라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인식, 마치 그 옛날 운동권 시절 ‘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며 독재타도 행진에 나섰을 때의 비장한 정의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모습, 이것이 민심에 대한 현 정권의 태도이자 통치양식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운동권은 민중의 말과 마음을 배우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민중의 소리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그 눈물겨운 신념을 갖고 말이다.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하방(下放)운동이 그것 아니던가. 그런데 20년 후 하방에서 돌아온 그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현장에서 가다듬은 ‘그들의 이론’에, 하방에 청춘을 바친 ‘그들의 생애’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단절과 배제’의 한숨소리가 들리게 됐겠는가.

그래서 민심은 이탈했다. 10%를 겨우 넘기는 지지율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 초기의 지지자들이 더는 돌아볼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이탈한 그 배경이 더 문제다. 노 정권의 실세들은 이탈자들이 끝내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이미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그들은 뚜렷한 대안 세력과 인물이 부상하지 않는다면 일시적 방황 끝에 결국 귀환할 것이라는 느긋함, 그래서 초지일관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심은 심하게 흔들렸고,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극도로 불안하다. 이 불안감은 2007년에 닥쳐올 사건과 쟁점이 하나같이 치열한 공방전을 예고하고 있기에 그렇고, 해결능력이 바닥난 듯 보이는 현 정권이 오히려 이해충돌을 부추겨 한국사회를 결딴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억측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동안 쏟아낸 막말 수준으로 미뤄 결딴내지 않으리라고 확신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오히려 순조로운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면 정치적 모험을 위해서라도 결딴내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야당들이 이런 충격파에 제대로 견딜 수나 있을지 의문이고, 또는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먼저 내파(內破)될 수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당면한 현실이다. 이른바 ‘오기정치’ 또는 버티기 전략으로 선회한 노 대통령과 이탈한 민심 사이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신할 것인지를,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

 

 

지지율 떨어뜨리는 정책만 골라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의 완패로 끝났다. 완패도 그런 완패가 없었다. 서울과 수도권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를 야당이 장악했다. 총선과 대선이 아니라고 지방선거를 얕잡아볼 일은 아니다. 지방선거는 지방자치단체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행정의 기본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계기이자 중앙정부로서는 지배구조(governance)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현 정권이 완패했다. 이것으로 노무현 행정부의 지배력은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수행의 손발이 잘린 것이다. 물론 전국을 포괄적으로 관장하는 중앙정부의 행정조직과 실행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사건건 지방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고, 정치적 의미가 큰 정책은 지역 차원의 정치적 이해와 갈등을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배력의 약화 내지 전면 붕괴를 뜻한다. 국가정책으로 수행되는 굵직굵직한 국책사업 외에 집권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낼 지역 차원의 정책은 잘 이뤄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2006년 초기부터 선거가 실시된 5월말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가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낼 어떤 정책도 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니, 정책을 펴지 않았다기보다 지지율을 한층 떨어뜨리는 정책 메뉴만 골라서 집행했고, 그것도 ‘미움을 사는 방식’이었다.

노 대통령의 오른팔이라고 할 김병준 정책실장이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집값을 기어이 잡겠다는 노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는 검투사였다. ‘헌법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정책’을 내놓겠다는 말이 그때 처음 세간에 회자됐고, ‘세금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동시에 선을 보였다.

2006년 6월, 신도시로 지정된 인천 검단지역에서 건설교통부와 국세청, 인천시 서구청에서 나온 합동단속반이 투기 조사를 하고 있다.

일차적 상대는 물론 집값 상승으로 상대적 이득을 보고 있던 서울의 강남지역민이었지만, 세금의 폭탄세례는 강남북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가해졌다. 마침 계절이 계절인지라 집값은 폭등일로에 있었는데, ‘세금폭탄’ 발언만으로 잡힐 집값이었다면 다른 것으로도 이미 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검투사는 계속 거친 말을 쏟아냈다. 강남과의 싸움에 한창 몰입할 때는 자신이 한 말에 도취해 모든 국민을 상대로 폭탄이 투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가 헌법처럼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겁을 줬던 부동산정책의 골자는 종부세와 재산세를 두어 배 올리고, 기준시가의 상향조정, 은행대출 억제를 법제화하는 것이었는데, 그 조치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강남아파트 가격은 또다시 오를 기세가 등등했다.

 

 

선거 앞두고 왜 그랬을까

 

여하튼 주택정책의 시비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국민을 상대로 다섯 달 동안 엄포를 놓았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 그랬을까. 상식 있는 정권이라면 선거를 앞두고 국민을 상대로 이런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택공급을 늘려 국민의 주택수요를 충족시키겠다, 복지정책을 이렇게 펴겠다, 경기부양책을 쓰겠다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선거용 정책 메뉴다.

선진국에서도 선거가 있는 해에 복지와 사회안전망 비용 및 선심성 정책비용이 급증하는 게 보통이다. 아무리 다급한 정권이라도 ‘세금’ 문제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다. 만일 건드린다면 세금감면이나 세율의 제한적 감축을 공언할 수 있을 뿐이다. 세금은 어느 정권에서나 가장 민감한 정책영역이기에 어리석은 정책입안자가 아니고는 세금인상안 발표는 절대 금물이다.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노 정권은 왜 그랬을까.

답은 몇 가지 중 하나다. 첫째, 지지율에 자신이 있다. 그래서 결코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는다. 둘째, 아예 지지율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정책일관성이 더욱 중요하다. 셋째, 선거 따위에는 관심 없다. 집권세력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최대 목표다.

그 답이 첫째라면, 현실인식이 매우 잘못됐다고 할 수 있고, 둘째라면, 정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는 얘기고, 셋째라면, 정치의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셋째가 가장 근접한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집권세력의 정체성 확립!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정체성 확립을 통해 완만한 지지율 상승을 꾀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 관심이 없는 정권이 있다면, 막나가는 정권임에 틀림없으므로 지지율 상승 내지 회복을 정체성 확립의 전리품으로 챙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정체성 확립이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지는 정치학적 분석의 대상이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정책 자체는 필요조건일 뿐이고, 그것이 충분조건이 되자면 일정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정체성 확립을 겨냥한 정책들이 엄청난 소란과 갈등과 부정적 성과만을 양산했던 집권 초기 2년의 경험이 아직 유권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을 환기해야 한다. 17대 국회가 개원한 2004년 6월부터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6년 5월까지 2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국민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터다. 이런 사실을 모두 감안하고도 세금폭탄이 답이었을까, 그 중차대한 지방선거 국면에서? 그렇다면 이 정권은 아주 초보적인 정치학적 상식마저 홀대하는 정권, 또는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권’이라는 진단이 가능하다.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치

 

2004년 개원국회에서 집권여당이 벌인 4개월간의 총력전을 보면 ‘정치학을 모른다’는 평가가 차라리 적절해 보인다. 4대 개혁입법안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진 법안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개정, 사학법안과 과거사청산법안에는 모두 구시대의 악습을 혁파하려는 역사적 비전과 열정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선지, 9월부터 4개월 동안 우리당 소속의 운동권 출신 초선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마치 30년을 기다려 이제야 때가 왔다는 듯이 말이다.

초선의원들의 기세에 밀려 중진의원들은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총공세에서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51명 중 102명에 달하는 초선의원은 우리당의 다수집단인 만큼, 뭔가 진보정치의 정수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불행의 징후는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총력전으로 밀면 결국 바리케이드는 쓰러진다는 것을 운동권 출신의 초선의원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해왔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병은 도처에 있었다. 야당은 노련한 저격수를 징발해서 용의주도하게 대응했다. 보수단체들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이 맞대응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보수지식인들도 서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상황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다. 초선의원들이 방송과 여론매체에 나가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미움을 샀고, 역풍(逆風)이 솔솔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태는 위태로워졌다. 결과는 엄청난 상처만 남긴 총퇴각이었다.

그해 12월 이후 지리멸렬된 초선의원들은 각개전투 태세로 전환했지만 국정의 최전선에서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당의 전력(戰力)은 17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철저히 무력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국회의 규칙과 질서를 배우고, 현실정치가 무엇인지를 학습하는 과정에 있었을 뿐, 진보정치의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데로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운동정치인들이 정치학을 차분히 배울 겨를도 없이 거리정치와 저항정치를 먼저 습득한 탓이고, 또한 그것에 기대 현실정치를 판단한 결과다. 현실정치의 준거가 거리정치이자 저항정치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불거졌다. 현실정치는 거리정치와 냉혹하리만큼 다르다. 현실정치에는 규칙이 존재하고 관습이 있다. 행동양식을 관할하는 별도의 정치적 기제와 힘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곳에는 정당이 있다. 정당은 운동권의 소속집단과 다르다. 운동권은 이념적 친밀성으로 뭉친 비공식적, 자발적 결사체이므로 행동이 일사불란하고 정서적이다. 이해갈등이 상호이해, 정서, 경험의 공감대를 통해 해소된다.

그러나 정당은 다르다. 모든 것이 공식 차원에서 결정되고 집행된다. 결정 하나하나는 이해갈등을 수반하고, 그것은 공식 채널과 루트를 통해 해소된다. 물론 여기에도 물밑 작업이 중요할 수 있지만, 공중(公衆)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공중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는 조직의 모든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공중과 대면했고 운동권식 밀어붙이기를 감행했다. 공중이 있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 즉 ‘저항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정치학적으로 말하자면, 거부권(veto power)이 도처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가 현실정치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이다.

 

 

위험하고 무모한 종교와의 전쟁

 

거부권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보수시민단체, 퇴역군인단체를 위시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뭔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잠재 세력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더욱이 종교집단을 건드린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사학법 개정이 적용될 사학재단은 줄잡아 400여 개인데, 여기에는 민주화운동 시절의 동지이던 개신교와 천주교단체가 포함돼 있었다.

애초 운동권 정치인들은 400여 개에 불과한 종교사학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무지에서 나온 섣부른 판단이었다. 유럽의 국가들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가 종교와의 타협이었다. 천주교로부터 교육 권한을 양보받는 것, 중앙정부가 국가 주도로 대중교육을 실행하는 것 모두 근대국가의 필수 과제였는데, 역사적 성장과정이 길수록 국가와 종교의 주도권 다툼은 치열했고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대부분 근대국가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종교집단에 대한 정치적 양보를 전제로 한 승리였다. 그런데 공(公)교육의 정상화라는 근대적 명분을 위해 종교집단을 비리와 부정의 온상으로 낙인찍는 일만큼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같은 논리에서 거부권의 중심소재인 야당을 정당한 정치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은 것도 치명적인 실수다. 아마 이런 지적에 대해 집권정당으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언제 야당이 협력하려는 자세를 보였는가, 야당 스스로 협력정치의 틀을 깼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데 어떻게 타협과 절충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고충을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의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멋진 정책을 내놓아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균점해 방향을 틀 수 있는가. 한국의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부하고’ ‘부정하고’ ‘막는 것’뿐이다. 정치구조가 그것만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혹시 열린우리당이 재집권에 실패해 야당이 돼본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림] 노무현 정권에게 남은 길

그러니 반대를 위한 반대라도 해야 하는 게 야당의 정치적 명분이다. 거부권이야말로 야당의 생명줄이자 정치적 존재이유다. 여당이 그런 야당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 자체가 정치력 부재(不在)를 드러내는 꼴이다. 정치력은 그런 그들을 국가운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건대, 우리당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을 유신독재의 잔재물로 간주했으며, 급기야는 대화 자체를 피해야 할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 취급하듯 했다. 민주당과는 견원지간이 됐기에 더 말할 나위 없다. 한나라당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열린우리당 의원을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본데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온한’ 혁명분자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뽑아놓은 것 자체는 유권자의 책임이지만, 사실 2004년 탄핵정국 총선에서 그런 사람들일 거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탄핵 역풍이 불 때, 그리하여 노무현, 김근태, 정동영계 사람들이라면 검열할 필요도 없이 선출해서 국회로 보낼 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는가.

그런데 기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고만고만한 지방유지들을 뽑아서 국회로 보냈다고 해서 사정이 확연히 달라졌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총선 이전에 ‘노무현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미미한 비주류 소수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세력이라고 할 것도 없이 대선 전부터 노무현 후보와 자주 접촉했고 저항운동과 민주화운동 경력을 갖고는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던 소수의 사람이 그들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자마자 소외돼 있으나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규합해 세를 넓히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탄핵정국이 정치적 기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자 대거 중앙정치 무대로 몰려나왔다.

이때 아무런 검열장치도 없었다. 그냥 ‘노무현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통과됐다. 그리고 백년정당을 만들자고 국민 앞에 굳게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돼 분당의 불가피성에 직면했다.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이 국회로 진출하는 과정에 이른바 현실정치의 무시, 거부권의 거부, 운동권적 행동양식에서 비롯된 ‘진보정치의 실패’가 예고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업적은 어느 정도 인정

 

백년 가는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게 2004년 5월31일이다. 총선 승리를 자축하는 청와대 모임에서 우리당 의원들과 노 대통령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산 자여 따르라’를 불렀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홀가분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진두지휘할 수 있는 정당이 다수당이 됐으니 그것만큼 감격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우리당 의원들은 입성(入城)의 감격을 노래했을 것이다. 초라한 재야생활에서 벗어나 화려한 중앙무대로 진출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오랫동안 꿈꾸던 혁명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로부터 2년6개월이 지난 시점에 우리당 지도부는 분당을 유일한 돌파구로 설정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 얼마나 빠른 변화인가.

관찰자가 보기에도 그러한데, 당사자들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2006년 12월 중순 어느 날, 필자는 우리당 비상대책위 저녁회의에 초대됐다. 무엇이 문제인지 솔직하게 진단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으므로, 필자는 시정(市井)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우리당의 이미지는 ‘성난 얼굴’ 그 자체이며, 국민을 편안하게 못해주었다는 것과, 실정(失政)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경직성, 시장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념적 오만함, 그리고 국민을 계몽대상으로 삼는 통치양식 등에 대해 얘기했다.

비대위 위원들은 진지하게 그 얘기를 들었다. 개중에는 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의원도 있었다. 그런데 참석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당의 정체성 유지 가능성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런 상황에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당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정의와 재정의를 반복해 어떤 가치로 수렴한다고 할 때 과연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지가 공통 관심사였다. 당의 내부자에게는 한층 복잡했을 이 문제가 외부자에게는 의외로 간단하게 비칠 수 있다.

이 문제를 단순명료하게 해부해보자.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남은 길은 무엇인가. 정권 재창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두 가지다. ‘개혁정책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와 ‘지지층의 확대/축소 여부’다(그림 참조).

‘어디로 가야 하나.’ 2006년 12월10일 친노(親盧) 당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열린우리당 당사 앞에서 비상대책위원회 해체를 요구하는 당원대회를 열었다.

‘정책의 성패 여부’는 조금 더 미시적인 지표로 분석해야 하지만, 편의상 사회적 업적과 경제적 업적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최근 지지율이 너무나 낮아져서 그렇지 노 정권이 정치·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면 소수자 인권, 성(性) 평등, 호주제 폐지, 취약계층 보호, 공공의료 확대, 안전망 개선 등 높게 평가할 만한 사회적 업적이 적지 않다.

정치영역에서도 정치자금의 흐름을 투명하게 만들었고, 공정선거 기반 조성, 공천 및 후보선정과 관련한 정당민주화 증대를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모 재벌 회장은 정치자금법을 높이 평가해 “선거철에 돈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됐다”고 할 정도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회적 업적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시장불개입 고수, 경기부양책 거부

 

그러나 경제적 업적이 문제다. 분명 집권세력은 아니라고 항변하겠지만, 경제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한국경제의 기본골격을 영미 자본주의와 같은 것으로 바꾸려 한 것이 무리였다. 시장불개입 원칙, 출자총액 제한과 순환출자 금지, 계열사의 기업분리, 공정경쟁과 독과점 금지와 같은 원리가 노 정권이 추구한 경제 운영방식이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아무 결점이 없지만, 한국경제의 현실에 과연 적합한지가 문제였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김대중 정권의 원리는 시장개입 쪽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시장불개입을 원칙으로 삼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경기부양책을 거부했다.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권 초기부터 경기부양책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경제의 모든 부작용은 단기적 처방인 경기부양책에서 비롯됐다는 게 노 정권의 경제관(觀)이다.

이런 바탕 위에 노 정권은 영미 자본주의적 기업구조를 재벌기업에 강제했다. 외국자본에 대한 주식개방(이것은 김대중 정권의 유산이다), 재벌오너의 주식소유 상한선 제한, 상속세 부과, 계열 분리가 그것인데, 이런 관행을 단기간에 이식하려 한 것이 화근이었다. 재벌기업은 정치권의 명령에 따라 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주 느리고 완만하게, 때로는 눈치를 봐가면서 적응 속도를 조절해 나갔다. 막대한 양의 현금보유는 그에 대한 재벌기업의 대응책이었다. 정치권의 요구가 언제 어떻게 강화될지 모르기 때문에 재벌기업들은 현금유동성을 강화했다.

그 결과는 고용축소와 소비결빙. 한국경제의 재벌의존성을 고려한다면, 투자위축이 고용에 미치는 악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마구잡이식 주택시장 개입이 정권 초기 그나마 고용창출에 기여했던 건설경기를 극도로 위축시켜 고용악화의 주범이 됐다.

경제정책 실패를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노 정권이 가장 아쉬워한 고용창출 문제 하나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용창출을 그렇게 귀히 생각했으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고용능력을 증대할 어떤 지원정책도 펴지 않았는데, 오히려 인권과 사회적 정의 차원에서 임금차별 시정과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먼저 시행했을 정도다. 인권과 임금 평등, 차별 철폐, 격차 시정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고용능력 향상을 위한 적극적 정책을 동시에 펴면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양손정책(two-handed approach)이 아쉽다는 말이다.

그것을 균형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균형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노 정권이지만 경제에 관한 한 애초부터 균형감각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경제에는 성공했으나 민생에는 실패했다”는 납득하기 힘든 언술이 집권세력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균형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과 희생양 만들기

 

결론은 이러하다. 사회적 업적은 절반의 성공, 경제적 업적은 실패. 물론 지지층은 심각하게 약화, 축소됐다. 예전의 지지층이 돌아올지, 아니면 영원히 다른 진영으로 가버렸는지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겠지만, 일단 정책 성패에 달려 있다고 보면, 복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노 정권의 현 위치는 그림에서 하단 중간 원으로 표시한 지점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 길이 있다.

①정책실패를 거듭해 아예 지배력이 붕괴되는 길(붕괴 및 정권이양)

②부진하나마 정책적 성공을 약간 이루지만 지지층 확대는 미미한 길(정권이양 또는 유지)

③정책실패를 거듭하지만 다른 탓으로 돌려 지지층을 동원하는 길(포퓰리즘)

④정책적 성공을 꾀하고 지지층의 확대도 수반되는 길(정권 재창출)

필자는 향후 1년 동안 집권세력에 열려있는 길은 ②와 ③이라고 생각한다. 노 정권이 아무리 죽을 쒀도 지금처럼 핵심지지층이 남아 있는 한 완전붕괴(①)의 길은 걷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현재의 정책양식(정책내용과 방향, 정책수행방식)을 전면 수정하지 않고는 정책적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고 보면 ④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다. 따라서 남은 것은 ②와 ③인데, 이것이 필자에게는 몹시 마음에 걸린다. 두 길 모두 정국이 비방전의 화염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뤄 정책방향과 기조를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획기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시간도 부족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방행정의 손발이 다 잘린 마당에 가시적 효과를 낼 영역은 정국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올 국책사업 정도다. 예를 들면, 행정복합도시에 첫 삽을 뜬다거나, 깜짝 놀랄 기상천외의 건설사업을 발표한다거나, 대북(對北)관계와 대미(對美)관계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발생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중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흔히 포퓰리즘은 정책실패를 책임질 희생양을 찾게 마련인데, 누가 원죄를 짊어질 것인가를 두고 엄청난 집단 세(勢)싸움이 벌어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내분이자 국론(國論)분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피해야 한다.

나머지 하나인 두 번째 길은 그야말로 이전투구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소수의 핵심지지층에 기반을 두고 힘겨운 싸움을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 상대적으로 느슨한 야당 지지층이 교란되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유시민 의원이 주류와 비주류를 교차시켜 ‘비주류의 주류’를 핵심지지층으로 분류해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단언했던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아마 포퓰리즘적 전술은 물론 상대 진영의 느슨한 지지층을 분열하는 온갖 유형의 전략을 동원하는 이전투구적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도 지금의 지지자 분포를 감안하면 열린우리당으로서는 힘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설령 2007년 대선에서 우리당이 힘겹게 승리하더라도 몇 달 후 실시될 총선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실 우리당 의원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도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2008년 4월 총선에서 자신들이 당선될 수 있는지에 훨씬 더 민감하다. 따라서 당의 대선전략뿐 아니라, 자신의 재선을 위해서도 현재 당의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분당이 최선의 돌파구?

 

당의 정체성은 정책의 성공에서 나온다. 무엇을 하겠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정체성을 구축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정권 초기에는 열정과 의지, 정책 천명으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지만, 중반기를 지나면 유권자는 집권당이 무엇을 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유권자의 손에 잡히는 것이 딱히 없고 불안감뿐이라면, 게다가 불안을 조성하는 ‘말’뿐이라면, 당의 정체성은 ‘없다.’ 없다기보다 ‘허망한 말’ ‘저속한 말’ ‘거친 말’로 남는다. 심하게 말한다면, ‘저속한 말과 성난 얼굴’이 우리당의 정체성이다.

이렇게 말하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2002년의 ‘정치적 전환’에서 유권자는 진보정치의 화려한 개막을 기원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세력이 이끄는 민주정치, 이 얼마나 멋진 퍼레이드이자 기회였는가. 그런데 운동권 정치 4년에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필자는 이 책임을 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는 한국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영역에까지 오랫동안 고착된 파행과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 필요한 시도였다. 그렇게 극단적인 형태로 추진되지만 않았더라도 진보정치의 실험은 그런대로 성과를 거뒀을 것이다.

하기야 아직 1년가량 남았으니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아무튼 지금까지의 업적으로 미뤄 진보정치의 실험은 오히려 극단적 혐오감을 심어주었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듯싶다.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은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사회의 발전에 그다지 긍정적인 효과를 낳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히고, 정책의 선택지를 풍부하게 만들고, 다른 이념집단과 노선에 대한 국민적 관용을 넓히는 것이 진보정치의 몫이라면, 노무현 정권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도저도 아닌 부정적 결과만 양산하고 말았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가 긍정적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다시 소요될 것인가. 열린우리당의 입지는 이처럼 초라하다.

그러므로 이런 정체성으로는 대선에 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2008년 총선에서도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워 보인다. 이런 현실 판단에 근거해 최선의 돌파구로 설정된 것이 바로 분당(分黨)이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왜 분당인가. 정책실패의 책임을 지고 권력을 물려주는 것이 도리이지 분당은 책임을 회피하는 술책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정책실패의 책임을 최대한 희석하는 방법이 분당이자 합당 혹은 신당 창당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 또는 얼굴을 바꾸는 것이 분당의 목적이다. 열린우리당에는 이런 변신이 불가피해 보인다. 열린우리당 아니라 그 어떤 집권여당도 한국정치구조에서는 분당이 불가피한 최종 선택이다.

 

 

뭐든지 실패하면 여당 탓

 

분당이나 합당, 신당 창당은 야당보다는 여당이 변신의 방법으로 즐겨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실정의 책임이 곧바로 여당에 전가되기 때문인데, 만일 정책실패가 아니고 성공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구태여 분당할 필요가 있겠는가. 야당은 여당을 맹공하는 것만으로 반사이익을 챙길 수 있으므로 분당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따라서 대선을 앞두고 정책실패에 시달리는 여당은 반드시 분당되는 것이 한국정치의 일종의 법칙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김영삼 정권 때 환란(換亂)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김영삼 자신도 3당합당 이후 신한국당을 창당했고, 김대중은 위기에 닥칠 때마다 신당을 창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안 그랬는가. 자신의 정당을 만들려고 2003년 후반기에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깼고 급기야 다수당을 일궈냈다. 그러므로 정권 재창출에 관심이 없다면 구태여 분당은 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분당이 답이다.

열린우리당에는 분당을 유일한 돌파구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 못할 사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당과 청와대의 관계다. 국회와 대통령은 국민선출에 따른 정당한 두 개의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이중적 정당성(dual legitimacy)으로 불린다.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는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중대한 지렛대다.

그런데 여당과 야당 간의 협력은 거의 불가능했고, 심지어 견원지간이었음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러므로 노 정권에서 이중적 정당성이 그다지 정당하게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는? 이 또한 매우 ‘불편한 관계’ 내지 ‘일방적 관계’로 지속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열린우리당으로서는 할 말이 무척 많을 것이다. 정권 초기부터 당청(黨靑)관계는 단절됐다고 말이다. 단절이 문제가 아니라, 거의 일방적으로 통고받는 관계였다고 말이다. 우리당은 청와대의 정책을 인준하는 거수기였거나,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야 할 밴드왜건(대세편승) 정도였다. 대부분의 정책은 청와대에서 입안돼 여당에 통고됐으며, 중대한 정치적 결단도 청와대 작(作), 우리당 사후인준 형식이었다. 당은 통치를 받쳐줘야 할 정치적 동원부대였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노 대통령의 독단적 통치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당이 주도한 정책은 아마 2004년 후반기의 4대 개혁입법안 정도였을 것이다. 이때 청와대는 손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 시도가 실패하자 청와대는 신문법 하나를 선정해서 작업을 지속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집값 전쟁과 세금폭탄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택정책을 개발하고 입안했을 때 우리당과 긴밀하게 협조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책주도권이 청와대의 사회정책실에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당의 정책실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어쩌면 개입할 채널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당과의 연정(聯政) 제안은 또 어떤가. 아마도 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벙벙했을 것이다. 속셈을 따져볼 틈도 없이 연정의 명분과 정당성을 옹호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실패하자 책임이 우리당에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당은 청와대의 실정 책임을 온통 뒤집어써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4대 개혁입법안 실패로 군색한 처지에 몰린 터에 사전 논의도 없던 중요 현안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닌가.

 

 

脫정당화 공식에서 벗어난 대통령

 

지난 4년 동안 당청협조는 거의 없었고, 사후 책임만 존재했다. 청와대의 정책입안자들이 사회적 인정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일급 학자이거나 일급 관료라면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노 정권의 정책입안자들은 대부분 학계에서는 이류에 속하고(물론 일류도 있었다), 관계에서도 실력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 미숙함의 책임을 우리당이 짊어져야 하는가.

청와대에 대한 우리당의 불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누적한 정책실패와 지지율 급락이라는 악조건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한국정치의 전통적 방식인 탈(脫)정당화(illegitimation)를 허용해야 한다. 탈정당화란 집권여당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통치자의 실정을 맹비난하는 것,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쌓는 탈출방식을 일컫는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 이후 정권의 정당성 증진을 위해 대대로 활용된 한국정치의 특징이다. 노태우는 전두환을, 김영삼은 노태우를, 이회창은 김영삼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김대중은 김영삼과 이전의 모든 통치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존 정치와 선을 그음으로써 탈정당화를 시도했다).

유일하게 탈정당화를 하지 않은 대통령이 노무현이다.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으니 말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김대중 정권이 기초를 둔 지역정치를 맹비난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쌓는 방식을 허용한 그 포용력에 노무현 후보가 감탄한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노무현은 김영삼 대통령이 천거한 사람이지만, 정신적 지주는 김대중이었다. 따라서 김대중의 정치적 정당성을 비난할 수 없었다. 서민정치와 친북(親北)노선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의 정당성을 짓밟는 것 자체가 배신이자 이탈이다.

사정이 이러니 ‘탈정당성’이라는 개념은 노무현의 머릿속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계자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우리당을 분당하는 정치적 선택 자체를 허용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죽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논리인 듯싶다. 분당을 기획하는 우리당을 좌시할 수 없고 그대로 놔줄 수 없는 절실한 이유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그럴수록 우리당의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간다. 제발 놓아달라, 제발 당신의 실정(失政)으로부터 탈출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당의 애원이지만(물론 당내 계파 중 친노파는 아니다), 청와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정당은 내가 만든 것이고, 따라서 처분권도 나에게 있다는 식이다. 탄생 이유가 나에게 있듯이, 해체 이유도 나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우리당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올봄 최대의 정치 이벤트가 될 게 틀림없다. 대선 고지 점령보다 우리당 의원들의 생존을 위해 분당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그들의 생존 조건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같이 죽거나 같이 살자고. 지난 4년 동안 국민이 눈물의 계곡을 헤매었듯이 이제는 우리당과 청와대가 눈물의 계곡으로 가고 있다.

 

 

〈2부〉 오류 : 정체성이 무너진 이유

 

노 정권이 어떤 획기적이고 가시적인 업적을 내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라면, 집권세력의 ‘정체성이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체성이란 집권세력의 개혁목표가 국민에게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목표의 대중적 지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이 어떤 성과를 낳았는가(업적)로 가늠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지표로 보건대 집권세력이 보인 초기의 정체성은 매우 선명했으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희미해졌고, 최근에는 국민이 눈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정치학적으로 지배력의 약화현상이 발생했고, 그에 따라 정치권과 행정부의 영(令)이 서지 않게 됐다.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국민의 기대감이 아예 대선주자 쪽으로 옮겨가는 속도도 이와 비례한다. 지배력 약화와 정체성 붕괴를 초래한 요인 중 가장 중대한 것을 꼽으라면 특정 이념의 과잉대변(excess of representation), 국가기구의 탈권력화, 도덕주의적 시장경제관, 순진한 분배정치를 서슴없이 지적하겠다.

‘참여정부’는 말 그대로 정치참여의 문을 활짝 연 정부다. 민주주의의 조건 중 시민의 정치참여가 가장 우선적인 것이고, 참여확대는 체제의 정당성을 향상시킨다. 참여와 정당성은 민주주의의 초보적 단계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단계, 즉 체제의 책임성 차원으로 초점이 옮겨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참여하고, 누가 쟁점을 만들고,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가의 문제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이른바 ‘시민단체의 홍수’가 일어났다. 1990년대에 꾸준히 성장한 시민단체는 김대중 정권에서 참여의 기회를 넓혔고, 마침내 노무현 정권에서 정치참여의 중앙무대를 장악했다. 그것은 노무현 정권의 탄생배경과 직결된다. 민노총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노무현 후보에게서 기회의 창구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 정치 참여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는데, 노 정권은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同種교배’의 시민단체 양산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인 2003년 3월, 검찰인사와 관련해 검찰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전국 평검사들과 토론을 벌였다.

거꾸로 말하면, 노 정권은 시민단체를 동원해 기득권세력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기존의 정책결정과정에선 전문가그룹, 관료, 정치인이 주도적 역할을 행사했다면, 노 정권에서는 쟁점 만들기로부터 사회적 동의 확대, 정책 설계와 입안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시민단체가 포진했다. 행자부와 국가홍보처에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이 신설되고(이것은 김대중 정권에서 시작됐다) 확대됐다.

이로써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시민활동을 조직하는 시민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행정부가 지원하는 시민단체를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지 미심쩍어하는 질문도 일각에서 강하게 제기됐지만, 시민혁명이 시급하다는 전략적 명분에 가려 시민단체의 순수성에 관한 질문이 유보되기도 했다.

‘시민참여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이 명제에 비추면 ‘시민단체의 홍수’를 탓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더 권장하고 더 지원하고 더 격려해야 할 사업이다. 이론적으로도 시민참여는 사회적 자본을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로버트 퍼트남은 이탈리아 소도시의 지역발전을 비교하면서 시민참여가 활발한 지역이 근대화와 경제성장에서 월등 나았으며, 그것은 시민참여로 생성된 사회적 신뢰의 양에 비례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회적 자본은 개인들이 맺는 네크워크의 질과 양에 비례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간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맺어지는 사회는 상호신뢰가 쌓이기 때문에 거래비용을 낮추고 사회적 동의를 만들어내기가 용이하다. 보이지 않는 이런 자본을 창출하는 데에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시민단체의 활동과 정치참여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자본의 이론가인 퍼트남도, 제임스 콜만도 ‘참여의 이분법’과 그 위험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정책결정 과정을 장악했던 기존의 전문가 그룹과 특정 직능단체가 교체되고 그 자리에 시민단체가 들어섰는데, 주로 집권여당 및 청와대와 이념적 친화성을 가진 단체들이 선별됐다. 정부 부처가 운영하는 각종 위원회에 시민단체의 대표가 영입됐으며, 이들은 단체의 집단의사를 정권 차원의 정책사업으로 전환하고 시민의 호응을 얻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민주주의가 요원하던 시대에 그토록 원했던 시민단체의 정치 참여가 성취됐고, 그것도 매우 적극적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시민단체의 대표자와 활동가는 지금보다 더 확실하고 적극적인 개입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집권세력과의 이념적 친화성을 갖춘 단체를 선별적으로 개입시킨 ‘배제적 참여’였고, 정치권과 특정 시민단체간 발생한 이념의 ‘동종(同種)교배’였으며, 어떤 정책영역에서는 시민성의 우위를 내세워 직능단체의 대표성을 희석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특정 이념의 과잉대변

 

노 정권은 모든 사안과 모든 공적 쟁점을 ‘시민성(civility)’의 공간으로 옮겨 해결하고자 했는데, 바로 노 정권이 민주주의 촉진제로 유례없이 강조한 ‘토론’이다. 다시 말하건대 토론정치는 가장 발전한 선진적 민주주의 형태다. 그러나 이해, 설득, 양보 없는 토론,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특정 방향으로 결론을 맺는 토론은 민주주의의 옷을 걸치고자 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토론 참여자들이 대체적인 동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말아야 하는 ‘토론정치’는 지루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달하면, 그것은 성원들에게 도덕적 권위를 갖는다. 토론은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장치다. 그런데 토론에 참여한 상식을 갖춘 어떤 사람이 그것에 불복할 태세를 보인다면 동의도 도덕적 권위도 사라진다. 이른바 ‘민주독재’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노 정권에서 활성화된 시민단체의 정치참여는 ‘배타적 동의’를 만들어냈으며, 특정 이념의 과잉대변을 촉발했다. 이로부터 파생하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이를 질문 형식으로 제기해보자.

첫째, 시민단체를 대표해 참가한 위원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전달한 ‘집단의사’가 과연 시민단체 회원들의 동의에 바탕을 두었는가. 노 정권에서 맹위를 떨치는 참여연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정치권에서도 무시 못할 정도다. 그런데 참여연대의 정책은 회원들의 동의를 거쳤는가. 거쳤다 하더라도, 회원이 1만2000여 명에 지나지 않은 시민단체가 중대한 국가정책에 그만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여론의 독점’과 ‘영향력의 독점’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위배되는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전국 규모의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인 경실련, 환경연합, 여성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절·배제·이념과잉으로 몰락한 운동정치, 거리정치, 저항정치… 남은 1년은 ‘조정자’가 이끄는 실용개혁정치로!

 

 

 

둘째, 집권여당의 정치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에 일어난 활발한 교호(交好)작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들 간에는 ‘기원의 유사성’과 ‘이념의 친화성’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1987년 이후 저항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인사가 선택한 활동영역이 시민단체와 정당이다. 이들의 공통 목표가 민주화운동 이념을 시민혁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던 만큼 쟁점정치(issue politics)에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으며, 정책노선과 방향도 유사했다. 역사인식과 가치의 공유가 민주화 이행기간을 거쳐 민주주의의 확립기에도 지속됐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 양자 간 상승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단체가 노 정권의 외곽과 내부에 광범위하게 포진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활발한 교호작용이 일어난 것인데, 정치권력에 대한 건강한 비판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본령에 비추면 ‘시민단체의 정치화 내지 정치적 포섭’으로 규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쟁점 만들기와 정책결정과정을 독점한 이들의 밀접한 교호작용의 결과가 곧 ‘지배력의 약화’다. 다시 말해 쟁점정치와 정책결정과정의 독점은, 이에 동의하지 않은 집단과 사회세력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지배구조는 정책결정의 제도화뿐 아니라 실행능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배제적 과잉대변’이 보수세력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실행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다.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거리시위가 자주 발생했고, 심지어 우호세력인 민노총과 여타 진보단체의 반발도 자주 감행됐다. 집권 초기 2년 동안 여의도는 각종 시위의 전시장이 됐으며, 이해의 충돌이 거리시위와 대규모 집회로 표출됐다. ‘영이 서지 않는다’는 집권세력의 불만은 이로부터 유래한다.

이분법적 참여와 선별적 정치화는 오히려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보수세력의 조직화가 급작스럽게 진전된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진보세력에 의한 쟁점정치의 독점이 보수세력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보수세력은 조직화를 가장 시급한 과제이자 대응전략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가기구의 과도한 탈권력화

 

국가는 통치 수단으로 물리적 억압기구를 관할한다. 권위주의 국가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고, 민주국가는 공익증진에 선용한다. 민주화로 이행하는 국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독재권력에 이바지했던 물리적 억압기구, 예를 들면 군대, 경찰, 검찰, 법원, 정보기관, 기타 사찰기관의 정치개입을 막고 본래의 업무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독재권력의 주춧돌이던 군대, 경찰, 정보기관의 권력빼기(탈권력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미 국가들이 그랬고, 우리가 그랬다. 군대는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하나회 숙정을 계기로 재병영화의 길을 착실히 걸어 현재는 민주군대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물론 군사문화의 청산과 군의 현대화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탈권력화의 요청에 빠른 속도로 응답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다. 이런 점은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여서, 국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해제당하고 국가안보와 직결된 정보수집과 대응책 마련에 역점을 두게끔 됐다. 고급정보를 활용해 인권 탄압이나 특정인 사찰을 일삼던 과거의 국정원이 아닌 것이다.

물리적 억압기구의 탈권력화는 이들의 기능과 역할을 시민의 공익증진에 기여하도록 만들고 민주사회의 명분에도 걸맞은 개혁조치임에 틀림없다. 노무현 정권은 탈권력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권과 구별된다. 그토록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국정원의 불법도청을 방치했던 김대중 정권과도 많이 다르다. 군대, 경찰, 검찰, 법원의 조직과 기능은 한층 더 민주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점은 노 정권의 업적으로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탈권력화가 과도하게 진전돼 원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국민적 우려다. 이런 우려는 특히 몇몇 과격한 시민단체의 거리시위와 맞닥뜨릴 때 자주 표명됐다.

2005년 12월 경찰과 농민시위대의 충돌과정에 농민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청장이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미군기지 이전대상지인 대추리마을 철거작업 때 일어난 반미단체 시위는 국가기구의 무력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사정이 어찌됐든, 미군부대 이전은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며 대추리마을 철거는 국방부 인준을 받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미군기지의 철수를 주장하는 반미단체들은 군대를 상대로 과격시위를 벌였으며, 호신용 방패를 든 군인들이 행동대의 무력시위에 밀려 논밭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공익 손상과 법치주의 훼손

 

과격시위가 한창일 때 대추리분교 지붕에는 이전과 철거를 반대하는 국회의원 몇 명이 올라앉아 있었다. ‘시민에게 맞는 군대’를 가진 나라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한국뿐이지 않을까 싶다. 독재정권 시절 군대가 저지른 야만적 행동을 면죄받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군대가 시민에게 밀리고 맞는 장면을 보면서 국가기구의 기능 저하 또는 ‘공적 권력의 실종’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다. 간첩 검거는 국정원의 고유 업무다. 그런데 국정원은 지난해 모처럼 간첩사건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해석을 지극히 경계했다. 본래의 기능인 간첩단 검거를 수행하면서 국정원장은 얼마나 부담을 느꼈는지 사표를 제출했고 곧 수리됐다. 탈권력화는 뜻은 좋지만, 그것이 정당한 권위 상실과 합법적 기능 실종으로 귀결돼서는 안 된다. 자칫 ‘공익의 손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독재시대에는 민주적 가치의 훼손이 문제였지만, 민주시대에는 법치주의 훼손이 문제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그 물리적 억압기구들이 본래의 기능을 착실히 수행할 만큼 정당한 권한이 부여됐는지다. 국정원은 안보에 필요한 고급정보를 얼마나 착실하게 수집, 분석하고 있으며, 국민의 안위(安慰)에 필요한 정보를 제때에 공급하고 있는가. 군대는 전쟁억제와 평화유지에 주도권을 행사할 만큼 용의주도하게 군사력 증강과 전략수립에 임하고 있는가. 경찰은 치안과 범죄예방에 어떤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행동양식을 도입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으로 탈권력화의 초점이 옮겨가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법을 집행하는 기구인 검찰과 법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법의 집행과 해석에서 검찰과 법원은 조직이기주의를 탈피했는가. 과연 법치주의를 지키는 최고기관들의 법 집행이 궁극적으로는 민복(民福)과 공익증진을 최선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적 계산과 조직간 힘의 불균형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최근 불거진 검찰과 법원의 대립양상은 공익증진이라는 명분에 비추면 아무래도 석연찮고 범죄행위의 해석과 집행에서 심각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견해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조직간 우위 다툼이나 경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경우 검찰과 법원의 자율성 존중이나 정치적 중립이라는 대의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즉각 조율책을 모색하는 것이 집권세력이나 통치권자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검찰, 법원의 자율성은 조직과 직업의 자율성이 아니라 공익증진이라는 더 중대한 원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그것을 관할하는 사람이 곧 통치권자다.

 

 

빈곤한 경제업적과 도덕적 시장경제

 

노무현 정권에서는 이런 기구들이 과도하게 탈권력화하거나, 조직자율성이라는 명분을 좇아 파편화했다는 인상을 짙게 남긴다. 통치권자의 임무는 이들의 행동양식을 국민복리와 공익증진이라는 명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자율성은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지, 기관들의 관습과 전통적 조직원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국가기관들의 상호분절은 어쩌면 대통령이 자임한 ‘권위 버리기’의 산물일 터인데, ‘권위 버리기’라는 민주적 명분이 국가기구의 ‘품격 저하’와 ‘공적 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업신여기기’로 나타났다는 점은 향후 또 다른 과제를 예고한다.

노무현 정권의 경제업적이 지극히 빈곤하다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집권실세들은 이 점을 부정한다. 경제성장률, 국민소득증가율, 투자율, 소비증가율 등을 들어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인데 보수언론들이 괜히 사실을 왜곡 과장해서 그렇게 인식됐다고 억울해한다. 통계치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간연구소와 국책연구소가 공통으로 지적하듯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노 정권이 성장 동력을 키우기 위해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적극적으로 한 것은 재벌기업에 대한 특단의 규제였고, 중소기업의 기업환경을 어렵게 만드는 임금 및 고용차별 금지에 관한 조치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실업이 늘고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와중에도 기업의 고용능력 증진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경제는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는데, ‘알아서 하라’는 것이 현 정권의 시장경제관을 집약하는 표현이다. 정부의 시장개입은 없다, 시장개입은 정경유착을 낳는다, 그래서 경기부양책도 없고, 환율방어도 없으며, 전략산업과 기업에 대한 특혜조치도 없다. 그 대신 기업구조조정은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정권 초기, 공정거래위원회에 힘을 실어 재벌기업들의 상호출자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전형적 경제정책으로 읽힐 정도였다.

경제적 업적의 빈약함은 집권세력이 한국경제의 본질을 규정하는 태도와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집권세력을 위시해 업계와 학계에서 통용되는 ‘시장경제’ 개념 간에는 매우 중대한 단절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이들 각각이 사용하는 시장경제의 개념이 매우 다른 것이다. 집권세력은 수요와 공급이 자율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자유주의적 시장’ 개념을 가진 데 반해, 업계와 일부 학계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시장을 만들어가는 ‘국가조정적 시장’을 원한다.

이것은 한국경제의 본질을 달리 해석하는 데서 기인한다. 과도하게 단순화하면, 집권세력에게 시장경제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대척점에 놓인 것, 즉 국가개입이 최소화되고 시장 요인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시장을 의미한다. 집권세력이, 자유민주주의가 원론적으로 설정한 ‘자율시장’ 내지 ‘자유경쟁시장’을 모델로 삼은 것은 박정희식 국가주도 자본주의가 낳은 ‘부정적 측면’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목격했고(정경유착이나 독점재벌의 폐해), 그에 대해 과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집권세력은 도덕주의에 강하게 매료돼 ‘시장의 모든 행위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명제를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도덕적일 것을 명하는 집권세력의 눈에 주택가격의 이상급등과 투기성향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따라서 건설경기의 위축으로 일자리가 줄어들 위험을 각오하고 집값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도덕주의적 이상론’이라 할 이런 관념과 시장 인식에 따르면, 정치는 시장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확신이 선다. 아니면, 이겨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경제관리능력이 탁월한 선진국의 어떤 정권도 시장과의 전면전은 가능한 한 피해왔으며, 제한적 범위 내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여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장과의 전면전은 항상 승산이 작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보면 노 정권은 도덕주의로 무장하고 규범적으로 각오를 다져 시장과의 전쟁에서 더욱 과격한 개입행동을 보이는 정권이다. 집값과의 싸움이 정권에 상처를 안긴 이유, 그러고도 고용과 경기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이유 모두 도덕주의적 시장경제론에 숨어 있다.

그것이 단순히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라면 영미 자본주의처럼 기업과 자본에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권은 도덕주의적 성향 때문에 재벌 대기업의 시장독점, 경영권 승계, 작은 지분으로 행사하는 경영권 독점 등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편 도덕주의적 성향과 운동권적 성향은 ‘노동자 보호’를 또 하나의 과제로 설정한다. 그래서 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자본주의인가. 영미 자본주의도 아니고, 독일식 라인 자본주의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절충형이다. 그리고 노동정책은 사민주의를 지향한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덴마크 모델이 심도 있게 검토된 것은 이런 성향 때문인데, 그 결과 생산시장, 상품시장, 노동(고용)시장이 각각 다른 모델을 추구하는 엇갈림이 발생했다.

이런 엇갈림 또는 일관성 없는 정책조합으로 세계화의 압력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정책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공언하면 거짓말이다. 이런 정책으로 경제는 점차 나아질 거라고 단언하거나 곧 선진국형 경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환상이다.

결국 가시적인 성과가 없고 국민이 민생고를 호소하자, 정부가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 보호조치를 주도하게 됐다. 엄청난 국가재정이 소요되고 국민의 세금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다. 어쩌면 분배정치는 이런 모순을 봉합하는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다.

 

 

성과 없는 분배정치


(이 부분은 송호근·홍경준 공저 ‘복지국가의 태동’에서 발췌)

분배정치만큼 논란을 일으킨 개념도 없을 것이다. 분배와 평등!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얘기인가. 누가 이 정의로운 개념에 시비를 걸 수 있을 것인가. 개발독재시대를 생각하면 노무현 정권이 분배와 평등을, 균형개발을 국책으로 내건 것은 눈물겹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왜 잘 안 됐는가. 왜 그토록 원했던 정책이 국민의 실망을 낳고 중상층의 원한을 샀는가.

노무현 정권은 국정원리에 관한 한 패러다임적 전환을 이뤘다고 평가해야 옳다. ‘분배와 평등’은 노 정권이 추진해온 가장 강력한 정치적 슬로건이고, 복지제도는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국정이념에서 성취한 패러다임적 전환은 실질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념과 정책업적 간의 엄청난 격차는 결국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한다. 정권 후반기에 지지도가 급락한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왜 이 감격스러운 슬로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적은가. 답은 경기침체다.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경제지표들은 사실상 대기업의 호조와 중소기업의 침체, 정규직의 소득증가와 비정규직의 소득불안정, 상층과 하층 간 점증하는 소득격차의 평균치다. 장기간 지속되는 경기침체는 중상층의 심리적 관용의 수준을 낮췄고, 또 ‘분배와 평등’에 요구되는 부담 증가가 경기를 더욱 나쁘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이론적 근거를 확보한다.

청와대 정책입안자가 강조하듯 ‘분배와 성장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 분배를 통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세계 보편적 인식’은 경기가 좋은 때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분배를 통해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적어도 통치기간’에 입증하지 못했다면, 설상가상으로 거듭되는 정책부작용이 시민의 기대를 꺾어버렸다면, 정책사령탑의 그런 호소에 귀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다. 시민은 미래를 내다보기보다 현재의 생계에 더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한편 한국과 같이 복지확대에 대한 거부권이 광범위하게 퍼진 국가에서 정책혁신이 효과를 내려면 매우 강한 외적 충격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사태는 바로 그런 충격이었다. 갑작스럽게 급증한 실직자, 불어난 빈곤층, 소득급락에 대처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마침 외환위기 사태와 겹쳐 친(親)노동정권이 태어났고 서민을 위한 여러 가지 다양한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이 저항 없이 실행될 수 있었다. 거부권의 일시적 약화에 따라 ‘기회의 창구’가 열린 것이다. 그 기회의 창구는 경제위기가 가라앉음과 동시에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고, 일시적으로 약화됐던 거부권도 원래의 상태로 복원됐다.

노무현 정권이 분배와 평등을 국정원리로 내세워 분배 프로그램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했지만 별반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경제위기의 소멸과 거부권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다. 노 정권 내내 경기침체가 지속됐으므로 ‘경제위기의 소멸’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기침체와 경제위기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것이다. 경기침체는 복지의 확대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더욱이 복지반대론이 비교적 강한 한국사회에서 경기침체는 분배정책에 대한 중산층과 상층의 관용의 수준을 낮춘다. 중상층이 복지국가의 주요 납세자라고 보면,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분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부의 증세조치를 환영할 리가 없다.

 

 

앞서 나간 복지정책

 

같은 견지에서 이렇게 된 또 다른 구조적 원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복지제도의 성장과 확대를 결정하는 계기가 ‘국가’에 있다기보다 ‘기업과 생산체제’에서 비롯된다는 한국적 특성이다. 한국의 복지제도 성장과정에서 국가는 미래대응적(proactive)이 아니라 항상 반응적(counteractive) 역할에 머물렀다. 다시 말해 복지수요가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야 비로소 정책을 도입하는 국가의 뒤늦은 대응양식이 그것이다.

물론 서구의 복지제도 발전사에서도 국가의 반응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적·경제적 수요가 다른 방식으로 충족된 다음 최종 단계에서 국가복지가 도입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따라서 그 정책효과도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될 당시 최저임금제가 적용돼 임금혜택을 받은 임금노동자는 지극히 적었다. 그것은 사후 승인과 다름없었다. 고령화와 노인복지가 중대한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가족 및 친족들의 현금 지원이 고령층 소득의 80% 이상을 점한 현실을 봐도 국가의 반응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고용보험법이 미래대응적 조치로는 유일한데, 그 덕분에 외환위기 당시 노동시장정책과 실업정책을 적시에 실행할 수 있었다.

이 ‘반응적 조치’ 개념은 한국의 국가복지가 곧 ‘생산체제 변화의 함수’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생산체제의 구조변화가 낳는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국가복지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것이 국가의 주된 임무였다. 그것은 기업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있다. 특히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구조에서 구조조정은 항상 기업단위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국가가 추진하는 거시적 구조조정은 산업정책의 형태로 실행되는 데에 비해 그 구체적 충격은 기업단위로 발생한다.

그런데 각각의 대기업이 어떤 구조조정정책을 차용하는지에 따라 국가가 풀어야 할 쟁점과 정책대안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정리해고의 합법화와 같은 커다란 물꼬는 국가가 터주지만, 어느 정도의 인력, 어떤 위치에 있는 인력을 방출할 것인지는 기업-노조의 교섭체계와 결과에 따라 다르다. 대기업과 노조의 결정을 기다려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이런 경우 미래대응적 조치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역으로 반응적 조치가 대부분이다. 만일 기업 차원의 정치가 국가 차원의 정치로 원활히 전환되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면 미래대응적 조치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대를 가진 계급정당의 출현이다.

노무현 정권이 겪고 있는 저항과 거듭되는 실패는 복지정치의 기조를 반응적 조치로부터 미래대응적 조치로 무리하게 옮긴 탓이다. 그것은 집권세력의 이념성향에서 비롯됐는데, 복지정치의 현실적 제약에 무지했던 까닭에 이념만 늘어놓고 성과는 빈약한 결과를 낳았다.

비정규직의 활용에 기반을 둔 생산체제에 아직 이렇다 할 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닌 터에, 그런 만큼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획기적인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터에, 노동비용의 급증을 수반하는 복지정책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미래대응적 정책기조에 사용자와 납세자는 선뜻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비정규직보호법안과 같이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의욕적 정책을 사용자가 달갑게 받아들일 리 없다. 생산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아직은 그다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미래대응적 시도는 긍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힘들다. 이것이 분배와 평등을 앞세운 진보정권이 ‘새로운 복지정치’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이유다.

 

 

〈3부〉 대안: 실용개혁정치의 구상

 

2006년 5월14일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서 이전 예정지인 대추리로 진입하기 위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올해 대선은 진보정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민주화세력의 집권연장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대한 고비가 될 것이다. 지난 대선에 비하면, 민주화세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급락했고 반전의 여지가 별로 없어 정권 재창출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선거제가 유지되는 한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의 부침이 이런 식으로 반복될 터이고, 권력교체는 항상 인물 중심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정권교체기에 언제나 새로운 인물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대중심리와 제도적 허점은 정치발전을 위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정치 이벤트, 인물, 세몰이, 대형사건, 정치 기획 등으로 대권 주인공을 결정하는 이런 불확실한 게임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그리고 이념정치의 실험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불안한 게임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극단적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념정치는 각 정당의 정책대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추종자들이 정치제도 내부에서 충분히 검증받아 그들이 집권했을 때의 결과를 국민이 사전에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약하다. 선택 이후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는 제도는 정치적 불확실성만 키울 뿐이며, 나와 가족, 공동체와 기업의 운명을 그 불확실성의 공간에 던져 넣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3김시대가 마감되면서 그런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익 증진에 기여하는 기회주의

 

노무현 정권의 부침과 성패를 경험하면서 필자는 이른바 ‘실용개혁정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념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되면서 최근 각 후보 진영은 좌우 극단을 피하고 중간지대로 옮겨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른바 중도파를 기준으로 중도좌파, 중도우파로 자리매김하는 식이다. 또는 이념적 구분을 떠나 ‘화합’을 최대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정파도 있다. 정치발전의 관점에서 괜찮은 모습이다.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실용개혁정치’는 이념적으로는 중도파이고, 좌와 우를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기에 본질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띠지만,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운영 방식을 선택적으로 흡수, 결합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장된 시장적 폭력과 불평등을 수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전략적·이념적 유연성은 흔히 정치적 기회주의로 폄훼될 수 있지만, 정책적 설계가 국익과 공익 증진에 기여한다면 기꺼이 기회주의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그런 정치노선이다. 대안모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서 여러 가지 정치유형이 탐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단지 ‘구상 수준’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실용개혁정치’는 그중 유력한 한 가지 유형에 해당할 뿐이다.

한국 지성사에서 실용주의의 호소력은 매우 약했다. 그것은 이도저도 아닌 절충형이나 행동 없는 우유부단함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가 한번도 지배이념으로 각광 받은 적이 없는 이유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간난의 역사여서 항상 극단적 처방이 필요했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한말에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치열해 접점을 찾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제국침탈에 대한 극한투쟁이 요구됐다. 국내에 활동근거지를 두고 점진적 근대화와 계몽을 통해 국권(國權)을 회복하고자 했던 온건개혁파는 대부분 친일의 위험지대에 놓였고, 실제로 친일을 전략적으로 택하지 않을 수 없던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광복 후 친일반역도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광복 이후의 역사도 그러하다. 전쟁은 남한을 우파만의 국가로 만들었으며,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는 어떤 정치이념도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에서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우파 이념지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규모의 산업인력과 노동계급을 만들어낸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세력이 불온세력으로 간주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분단(分斷)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출구는 열었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이념적 금기를 깼고 한국정치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열린우리당은 정치적 레토릭과 정책노선으로 판단하건대 결코 좌파가 아니다. 좌파적이기를 지향하는 것에 불과하다(주사파로 보이는 일부 의원들을 제외하고). 한국의 지배적 정치이념이 보수적 위치에 있기에 열린우리당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진보정치’임에는 틀림없다.

 

 

최고의 이념은 국민복리 증진

 

2006년 12월6일 ‘한미 FTA 반대’ 시위대가 명동에서 경찰병력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의 정책노선이 국민에게 충격으로 느껴진 것은 정권교체와 함께 체제성격의 변화 거리가 그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었기 때문이다. 차기 정권이 다시 한나라당 쪽으로 간다면 역시 체제변화의 이동거리는 길어진다. 문제는 이런 지그재그식 정권교체에서 발생하는 변동의 속도와 무게를 늦추고 감량해줄 중간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중도’, 정책적으로는 ‘실용’이 그 중간지대에 위치한다.

민주주의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한국의 정치인은 민주적이라고 굳게 믿는 어떤 가치항목을 설정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습관이 있다. 반공·성장·화합은 보수진영이 금과옥조로 여겨온 가치관이고, 평등·참여·균형은 진보진영의 원칙이었다. 전자는 고정적인 반면, 후자는 실험적이다. 실험이 실패하자 전자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짙어진 것이 최근 기류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는 없는가. 여기서 ‘중도실용’ 내지 ‘실용개혁’의 정치적 위상을 찾을 수 있다. 중도실용의 특징은 ‘상황적합성’ ‘가변성’ ‘유연성’이다. 정치는 상황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배양하는 기예(技藝)다. 적응력이 없으면 경쟁력도 없다. 마치 시장변화에 항상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기업처럼, 정치체제도 맥락에 민감하고, 상황변화에 따라 변신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외부의 충격파를 소화할 수 있는 적응력이 정치발전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라면, 정치체제는 시대·상황·장소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상황변화를 탐지하고 대처할 능력이 ‘상황적합성’이고, 자신의 입지와 전략을 바꿀 의지와 대응력이 ‘가변성’이며,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능력이 ‘유연성’이다. 공익과 실익이 이런 변신의 기준이 된다.

실용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존 듀이가 설파한 대로라면 “정치이론가가 현재 진행되는 사회의 제반 현상 속에서 자신을 위치시켜 시민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하고, 그들이 덜 맹목적으로, 덜 우연적으로, 더 지적으로 높은 수준의 방안을 실행하도록 도움으로써 오류와 실수를 줄이고 성공의 혜택을 증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실용정치의 임무이자 이론이다.

이 제언 속에 정치인 자신의 어떤 이념이 들어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있다면, 공익과 실익, 다시 말해 국민의 복리증진이 최고의 가치이자 이념이다. 극단적 이념정치는 국민을 어떤 이론체계와 목적과 필연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이 ‘덜 지적인지’ ‘오류와 실수가 있는지’는 성찰하지 않은 채 이념적합성이 중시되는 것이다.

 

 

실학정신에서 배우자

 

존 듀이를 거론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도 실용주의의 지성적 자산이 풍부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론 중심의 이상주의 철학인 주자학에 대항해 실익 추구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강조한 실학사상이 그것이다.

실학파는 중화사상의 발원지인 중국보다도 더 중국적인 가치관을 지향한 주자학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실용정치의 원리를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세 가지 덕목으로 집약했다.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릴 때 실익을 도모하고, 실익은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사실에서 옳음을 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정치의 ‘이념’은 현실, 실익, 민복이다. 도덕정치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론적 관념론이라면, 실용정치는 수단이 목적에 기여하도록 만들어가는 현실철학이다.

필자는 유연성과 융통성 있는 이런 실용주의 정치가 국민소득 2만달러에 근접한 경제지대(economic zone)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정치철학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까지의 경제지대에서 한국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받았다. 민주화와 함께 개막된 1만달러의 경제지대에서 한국은 유보된 자유와 억제된 평등을 회복하려는 각종의 권리투쟁에 휘말렸고, 반북·친미의 고정틀을 깨려는 이념투쟁도 치열하게 겪었다.

아마도 민주화 이후에 ‘어떤 민주주의’인지를 모색하는 과정에 치르는 필연적 고통이겠지만, 이동거리가 매우 긴 형태의 변동은 항상 저항과 반발을 불러오고 따라서 지배력의 약화와 체제불안정에 시달릴 위험이 크다. 어찌 보면, 노무현 정권은 이른바 ‘1987년 체제’가 낳은 적자(嫡子)이자 장자(長子)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세계의 시장상황이 변했고, 국내 사회세력의 판도도 매우 달라진 시점에서 탄생했기에 ‘때늦은 개화와 때이른 낙화’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만달러에 다가서는 경제지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전복의 리더십’이 아니라 각종 권리투쟁과 이해충돌을 조정하고 수렴하는 ‘조정의 리더십’이다. 특정 부문과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이해 주창자(advocator)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문과 계급, 모든 사회세력 간 얽힌 문제를 풀고, 실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이전투구를 방지하는 조정자(coordinator)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의 역할은 복합적이다. 세력 간 알력과 갈등을 조정(調停·mediation)하고, 분쟁과 이해충돌을 조정(調整·adjustment)하고,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기준과 정책을 조정(調定·settlement)하는 것을 포괄한다.

 

 

내각책임제의 효율성

 

국민소득 2만달러를 지향하는 경제지대에서는 잃을 것과 취할 것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회·경제·문화 각 영역의 자율성이 커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2만달러에 근접한 이 시대에는 각 영역에서 선명하게 돌출되는 주장과 세력 간 이해충돌을 조정하고 접합할 실용주의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리더십을 그 어느 때보다 목말라한다.

이제는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제가 과연 효율적인지를 따져볼 때가 됐다. 대통령제가 내각책임제에 비해 실행력과 추진력에서 월등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지만, ‘리더십의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런데 한국처럼 괜찮은 정치인을 배양하는 공식적인 기제와 제도가 취약하고, 인기와 바람몰이에 능한 사람이 대통령에 등극할 위험이 큰 경우 이런 질문이 검토될 만하다.

추진력, 비전, 화합력을 갖춘 정치인이 계속 탄생한다면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5년 임기의 단임제는 여러 가지 낭비 요소와 갈등 요인을 안고 있다.

첫째, 당선 초기 최소한 몇 개월의 준비기간과 후기 1년의 교체기간을 인수와 교체 작업으로 보내야 한다. 어떤 정치세력이든 완전히 준비할 수는 없기 때문에 5년 임기 중 상당 기간을 준비에 바치거나 레임덕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통치력 부재는 아닐지라도 위기관리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기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장기적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얼마나 아쉽고 아까운 시간인가. 1987년 이후 민주화 20년 동안 적어도 5년 정도는 통치력 약화의 기간을 겪었을 것이다.

둘째, 대권 쟁취를 위해 오랫동안 정열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반면, 대권 쟁취 이후 뜻을 펼 수 있는 기간은 너무 짧다. 실수를 만회할 시간도 짧고, 성공을 향유할 시간도 짧다. 그러므로 이런 제도하에서는 대부분의 통치자가 조급해지고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대권을 둘러싸고 정치인과 정당의 이합집산이 숨가쁘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당의 비연속성, 임시성, 무정형성을 낳는다. 모든 정당이 정책정당이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 없게 하는 정치시장의 환경이 존재한다. 정치학자들은 그것을 정당정치의 후진성으로 자주 지적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뚜렷하지 않은 유권자의 정당정체성과 변화무쌍한 정당 선호도에서 기인한다. 유권자의 기호가 그렇게 변화무쌍한데, 그것에 맞추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넷째, 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이라도 인기와 바람몰이에 능한 사람을 당할 수 없다. 선진국에서도 대중인기도는 대선에서 매우 중요한 척도이지만 한국처럼 당락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선진국의 대중인기도는 후보의 정당 경력, 인물됨, 성장배경, 정책관과 세계관 등을 검증한 최종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선출 이후 새롭게 접하는 사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을 유권자가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이런 신기성이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요인이라면 바람직하겠으나, 그 여부는 우연에 맡길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1월9일 제안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은 시의적절하다. 오랜만에 진지하고도 옳은 얘기를 했다. 노 대통령도 앞에서 지적한 5년 단임제의 폐단을 심각하게 느낀 듯하다. 5년 단임제는 장기집권과 독재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 제도이며, 민주주의가 상당히 정착된 현재는 5년으로 제한된 임기가 책임 있는 국정수행을 어렵게 만든다는 대통령의 지적에 동의한다. 장기적 안목에서 일관성과 연속성을 갖고 정책을 펴나가기 난감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갔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내각책임제는 적어도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우려를 잠재우는 장점이 있다. 우선 총선과 대선을 지금처럼 자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지방선거, 총선, 대선에 더해 보궐선거까지 치러야 하는 한국의 선거제도는 과도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치발전이 이뤄진다면 다행이지만 발전의 질, 속도, 방향을 따져보면 낙관적이지 않다.

 

 

승자 독식의 폐해

 

총선을 통해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내각책임제에서는 정당활동이 가장 중요한 정치생명의 지표이자 정권교체의 루트다. 그러므로 정권교체를 앞두고 정당을 해체하거나 이합집산의 소동을 일으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인이 진로 선택을 고심할 필요도 없다. 정당에 충실한 것, 그 자체가 정치활동이고 정치생명이다. 정당의 지속성은 이렇게 보전된다.

총선에서 소수당으로 전락하더라도 정권에 참여할 채널이 없어지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정당 간 연합정권이 시행되는 국가가 여럿 있다. 다수당이 지지율 40%선을 넘지 못하는 국가가 그러하다. 필자는 한국이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고 본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에서 40%를 획득한 후보는 아무도 없었는데, 승자가 권력을 독식했고, 모든 것을 좌우했다. 아니, 모든 것을 좌우할 권한이 있는 듯이 행세했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은 5년 동안 숨을 죽여야 했으며, 그런 만큼 역전을 위한 일대 전면전을 벼르는 독한 싸움이 반복되는 게 한국의 대선 풍토다.

이런 독전(毒戰)을 5년마다 계속 치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승자 독식’의 원칙이 한국의 정치풍토를 독하게 만든다. 패자라도 참여의 기회가 부여된다면, 그렇게 치열하게 모든 것을 걸고 선거에 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당제(多黨制)가 확립돼야 한다. 적어도 4~5개의 정당이 존재해야 하며, 그 정당들은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지속성의 조건은 정당들과 사회적·정치적 균열구조와의 대응이다. 각 정당은 그것이 계급이든, 지역이든, 부문이든, 각 균열구조의 이해를 최대한 대변해야 한다. 대변인 노릇을 못하는 정당은 소멸되거나 합당 대상이 된다. 한국의 정치에서 가장 뚜렷한 균열구조가 지역·세대·이념이라면, 그것을 은폐와 극복의 대상이라고 삼지 말고 합법적 정당구조로 수렴하면 된다.

지역정치의 폐단을 강조해 이념정치로 전환할 것을 호소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 은폐이고 전근대적인 방식이다. 지역정당이 필요하다면 존재해야 하고, 이념정당이 세대적 지지를 받는다면 얼마든지 다수당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유권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보수당 집권에 진보당이 얼마간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런 경우 실용정치의 정신이 빛을 발한다. 토론정치가 힘을 받는 것도 이런 제도에서다. ‘타협과 절충’이 중시되지 않으면 연립내각의 존립근거가 사라지며, 이해충돌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는 승자 독식이 없다. 승자와 패자가 정당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책의 방향과 강도를 조절할 뿐이다.

대권을 향한 목숨 걸기도 없다. 대권 경쟁의 패배가 정계 은퇴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음 기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과 비전을 겸비한 정치인을 길러내는 데 얼마나 엄청난 비용이 드는지를 생각하면, 능력 있는 정치인이 은퇴를 각오하고 대선 후보군에 뛰어드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낭비적인 일인가. 한국의 유권자는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이런 낭비적, 소모적인 일에서 해방되고 싶다.

 

 

낮은 단계의 사민주의

 

한국의 경제성장을 ‘국가주도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가 투자자(investor), 경영자(entrepreneur), 조정자(coordinator)의 삼중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이런 유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남미의 경우에도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한국처럼 그렇게 전방위적이지는 않았다.

국가주도 자본주의시대가 막을 내린 이 시점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국가의 후퇴와 동시에 시장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에 따라 경제성장도 기업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국가개입이 최소화된 시장경제에서 기업 간 자율 경쟁이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된다. 이런 시각은 시장경쟁이 격화된 세계화시대에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가 영미형 자본주의(영국과 미국)와 라인형 자본주의(독일) 중 어느 것을 모델로 해야 하느냐의 질문에 부딪히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논자에 따라 선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기업구조는 외환위기 이후 영미 자본주의로 방향을 잡았고, 생산시장과 주식시장에서 영미 자본주의적 시장법칙이 지배적 유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장경쟁이 격화되고, 채용과 해고가 자유로워졌으며(적어도 법적으로는), 기업의 퇴출위험과 고용불안성이 커졌다.

영미형 자본주의는 ‘주식소유자 자본주의(share holder capitalism)’여서 단기 이윤을 좇는 주식시장의 원리에 의해 경영원칙과 목표가 좌우되는 경향이 짙고, 라인형 자본주의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 holder capitalism)’여서 기업의 위험요인이 경영자와 종업원 양쪽에 분산돼 상대적으로 기업경영이 안정되고 장기적 안목에서 이윤추구를 설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자들은 라인형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반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영학자들은 영미형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대별된다.

아무튼 현실은 지난 10년 동안 영미형에 근접했다. 생산시장이 이럴진대, 상품시장과 노동시장 역시 무한 경쟁에 노출돼 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신자유주의를 운영원리로 추종하는 국가에서처럼 심각해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시장영역별로 서로 엇갈리는 정책노선을 선택한 결과 성장도 이루지 못하고 분배업적도 빈약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는 것은 앞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다. 노 정권이 추구해온 경제정책은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생산과 투자활동을 모두 기업에 맡기는 일종의 방임정책이다.

 

 

기왕에 존재하는 규제가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작동하는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은 기업을 규제망에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재벌 대기업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에는 어느 정권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산업부문별로 펼쳐진 거미줄 같은 규제망을 좁히고 공장 신설에 적용되는 규제를 완화하는 조치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규제 완화와 인센티브 제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에서 정권의 행보는 매우 느렸으며 정교하기 짝이 없는 규제를 걷어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기업환경이 개선됐다고 인정하는 기업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반면 노동시장에는 상당한 개입의지를 표명했고 실제로 노동자 보호에 신경을 썼던 게 사실이다. 고용보호에 관한 부분적·제한적 업적이 있음에도 전체 취업자의 47%에 달하는 비정규직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노 정권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그대로 수용했음을 입증한다.

 

 

신자유주의 그대로 수용

 

생산시장에서의 방임적 자세, 노동시장에서의 제한적 개입, 그리고 경기부양책 거부, 금융시장 개입불가 등의 정책노선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한국경제의 침체국면을 연장시켰다. 더욱이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배양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게을리했다는 비난에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는 군색한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영미형 자본주의에 근접한 한국경제의 현실구조로 판단하면 라인형 자본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더욱이 경제구조상 선진국과는 다른 요소가 많다. 소규모 자영업자가 700만명에 이르고, 비정규직이 47%이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규모 분절, 수출대기업과 내수기업 간의 분절, 게다가 성차별이 겹쳐 있다. 특히 대부분의 대기업은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해 전국적 차원의 임금협약과 고용협약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격차와 차별 때문인지 노동자를 위시해 일반 국민은 매우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심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약간의 차별을 낳는 조치에 대해 즉각적인 반발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회적 협약 같은 선진적 해결책이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격차를 시정하려는 어떤 유형의 거시정책도 그 실행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낮은 단계의 사민주의’를 모델 삼아 경제정책의 방향을 틀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실용개혁정치의 경제관이다. 본격적인 사민주의를 추구하기에는 한국의 시장규모가 너무 크고, 인구가 많고, 협약과 타협의 경험이 일천해 부적합하다. 그러나 ‘낮은 수준’에서는 사민주의적 정책 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아무리 경제규모가 커졌다 할지라도 한국경제에 국가의 중심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필요하다는 것. 둘째, 한국민의 평등주의적 심성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경제성장 자체를 저해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그 기본틀은 비교적 간단하다.

▲매우 적극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을 각종 규제로부터 해방시킨다(자유시장경제). 재벌 대기업들에도 기업구조개선 및 출자총액에 관해 거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되 경영권 방어와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조건을 적극 허용한다. 단, 그 대가로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경우 법인세를 현행 38%에서 45% 수준으로 올린다. 그 세금은 사회협약을 통해 하층민과 비정규직의 생활안정 및 사회보장과 복지에 사용한다.

▲노동자는 작업장의 규칙을 준수하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생산성 동맹). 노동자와 종업원을 기업 규모별, 산업 규모별 대단위로 유형화해 임금, 고용협약을 맺되 양보교섭을 규범화한다. 양보교섭은 기업의 고용능력 유지와 향상을 위한 것으로서, 양보교섭의 대가로 사회보장, 사회서비스, 공공임대주택의 임대권을 공여한다.

▲양보교섭과 생산성 동맹이 실행되는 것을 전제로 중상층의 세금부담을 현행 25%에서 30% 수준으로 인상한다. 이 인상분은 전체 복지수준의 향상과 빈곤층과 차상위 빈곤층의 생활안정에 사용된다.

▲비정규직을 현재 47%에서 40% 수준으로 연차적으로 낮추고 시장유연성을 유지하되, 비정규직에게는 이중취업이 가능하도록 일자리 창출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사회보장 혜택(실업급여, 연금, 기타 사회서비스)을 제공한다.

▲국가는 경기조절과 성장정책을 통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며, 복지 분배가 협약 준수와 생산성 향상을 촉진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사민주의 국가는 이런 정책을 매우 강도 높게 추진했고,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지금도 그 기본틀이 유지되고 있다. 수요를 공급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공급)를 조직해서 기업(수요)의 요구에 맞추는 것, 기업에는 시장의 자유를 전적으로 허용하고, 그 대가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 그것이 노사협약을 유지하는 복지재원으로 활용된다는 것이 사민주의 원리다. 이미 영미형 자본주의가 정착된 한국의 경우 경쟁력이 높은 대기업 노조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므로 ‘낮은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경쟁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문부터 이런 상생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실용개혁정치가 지향하는 경제운영방식이다.

 

 

 

 

 

득보다 실 많은 자주외교

 

국제관계에 관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을 촉발하는 요인 가운데 가장 민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발점은 비교적 간단하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자주외교’를 외곬으로 몰고 나가는 것은 아직은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한국의 경제적 역량과 국제적 지위가 향상됐으므로 자주외교를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대내외적으로 과도하게 강조해 불필요한 견제를 받는 것이 어느 정도 득이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주눅들어 살아온 역사적 경험을 환기하면 자주외교는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기본전략을 거슬러서 남북화해와 통일이 당겨질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한다. 미국의 경우 9·11 테러 이후 제국주의적 색채가 한층 짙어졌고, 중국도 북한을 품에 안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내비치고 있다. 일본은 미국에 편승해 실리를 챙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한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통할 것인가.

대북관계에 관해서는 두 가지 담론이 대립한다. 보수진영을 대변하는 ‘선진화담론’과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평화담론’이다. 전자는 여전히 주적(主敵)개념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북한인권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반면, 후자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대북지원을 통해 북한의 내부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한다.

미국이 여기에 걸리는데, 전자는 미국을 전통적 우방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후자는 미국의 강경책이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강대국 논리를 강요하는 부시 정권의 일방적 외교가 남북의 평화공존을 해치고 북한을 핵실험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고 비판한다. 반미감정이 점차 반미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담론의 사상사적 뿌리와 역사적 기원을 밝히고 어떤 접점을 끌어내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실용개혁노선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밝히는 것으로 논의를 끝내려 한다. 먼저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한말 개화기와 일제의 침탈로부터 비롯됐다. 물론 그전에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민족주의 담론의 기원이겠지만, 여기선 근대적 형태의 민족주의가 한말의 혼란기에 형성된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런 만큼 그 대상은 일본의 제국주의다.

1920년대에 대두된 ‘민족모순’은 일제 강점하에서 짓밟히고 소멸되는 민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혁명, 계몽을 통한 근대화, 전략적 친일을 통한 힘의 배양 같은 방법이 모색됐다. 이런 모색들이 사회주의 및 개량주의와 각각 접합하면서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민족주의로 발전했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 남한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정치적 의미를 억제당하고, 다시 성장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아예 경제적 영역에서 그 개념이 제한되는 독특한 경로를 밟아야 했다. 1990년대까지도 한국 국민에게 민족주의가 우선 ‘경제적 민족주의’로 수용됐던 까닭이다.

권태준 교수는 최근의 역작 ‘한국 세기 뛰어넘기’에서 경제적 민족주의가 강세를 보인 이유를 일본 식민통치의 경험과 한민족의 한풀이로 해석한 바 있다. 어쨌거나 박정희는 경제성장 전략을 위해 경제적 민족주의를 정책적으로 강화했고, 민족주의가 반공이념의 테두리 내에서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허용했다.

 

 

핵실험 이후 거칠어진 극우단체

 

문제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이 아직 한국 국민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정치적 민족주의의 발로라는 점이다. 그동안 과도성장한 경제적 민족주의를 다소간 털어내고, 발육부진의 정치적 민족주의를 보강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친북이념이 경제적 민족주의를 내면화한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온한 이념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정치적 민족주의의 미성숙이 극단적 혐오감과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실용개혁노선은 이런 시대적 현실과 사실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민족주의의 담론을 촉발하고, 이것이 국제관계에서 어떤 현실적합성과 득실을 가져올 것인지를 따지는 것으로부터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말이다.

친북정책에 대해 우선 호불호를 표현하기보다 남한의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결핍된 면을 지적해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이념적 유연성이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 이후 극우단체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행동양식이 다소 거칠어진 것은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충분한 설득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친북노선의 정당성을 강요한 진보진영의 거친 행동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전통적 우방이던 미국을 어느 날 갑자기 적처럼 대한다고 할 때 불안해하지 않을 보수인사가 어디 있으랴. 그것은 미리 통지하지 않고 들이닥치는 집달리와 같이 충격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통일부 장관이 나타나 친북성향의 발언을 해대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 정권은 이런 행동을 자주 했고 국민을 자주 놀라게 만들었다.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은 실용개혁정치의 좋은 사례다. 반 장관이 다른 후보들보다 능력이 탁월하고 인물됨이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연때가 맞지 않고 외교역량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았다면 사무총장에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용이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국제관계의 역학과 틈새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자주외교가 자신의 신념일지라도 결코 공언하지 않은 채 자주외교에 합당한 실리를 취하는 것, 이것이 실용외교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앞으로 미국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그간의 우호적이지 못했던 태도를 어떻게 변명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외교는 실용외교가 아니다.

송호근
1956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미국 하버드대 박사(사회학)
現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대외협력본부장
저서: ‘시장과 이데올로기’ ‘열린 시장 닫힌 정치’ ‘정치 없는 정치시대’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상황’ ‘오류’ ‘대안’으로 나눠 작금의 정치현실을 살펴봤으나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글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이 처한 좌표를 어느 정도는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다룬 주제들은 더 세밀한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다. 결론 형식으로 제시한 ‘대안’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 기회에 각론을 더 정교하게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

한국정치의 흐름이 좌절감을 안겨주지만,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길이 있기 때문이다. 실용개혁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시점에 와 있다고 확신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