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치 - 노무현 정권 입체 大분석
- 2007-02-25 20:40:54/신동아
[특별 기고] |
송호근 교수의 노무현 정권 입체 大분석 |
단절·배제·이념과잉으로 몰락한 운동정치, 거리정치, 저항정치… 남은 1년은 ‘조정자’가 이끄는 실용개혁정치로! |
|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knsong@snu.ac.kr |
실망하고 분노하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아직 길은 있다. ‘실용개혁정치’는 이념적으로는 중도파이고, 좌와 우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기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운영 방식을 선택적으로 흡수·결합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장된 시장적 폭력과 불평등을 수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
|
|
▼ 〈1부〉 상황 : 이제 우리가 눈물의 계곡으로 간다
정해(丁亥)년을 맞은 국민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언제 치솟을지 모를 집값이 그렇고, 금리와 물가가 그렇고, 장기 침체에 빠진 듯한 경제, 힘든 취업과 직장 불안, 점차 어려워질 노후 준비, 여기에 대선(大選)까지 겹쳐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정도다. 대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요동치게 할 굵직굵직한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또 한 차례 격돌을 예고하고 있기에 2007년 정국은 국민이 감당할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는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해 각 부문 간에 격렬한 이해충돌을 촉발할 전망이고, 올봄 춘투(春鬪)에서는 비정규직 보호법안 철폐가 다시 거론될 것이다.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다시 언급한 것처럼 집값과의 일전이 치러질 것이다. 혹시 6자회담이 그즈음 결렬되면 평양에서 핵실험이 또 한 차례 강행될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한나라당은 일정대로 경선 시작을 알릴 것이고, 열린우리당은 분당(分黨)과 합당(合黨)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당분간 분당파와 힘겨루기를 할 것이고, 우리당 내 친노파와 반노파 간 균열이 커지면서 잔존과 이탈의 드라마가 펼쳐질 예정이다. 경제는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쉽지 않다. 일반인은 한국이 지난해 3260억달러라는 미증유의 수출실적을 달성하고도 서민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런 업적을 달성하고도 그저 덤덤해할 뿐인 한국인을 두고 외신에서 ‘결코 만족을 모르는 국민’이라고 비꼰 것은 사정을 잘 몰라서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가 국내 투자와 소비로 풀린다면 서민이 실감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돈은 대부분 재벌 대기업들 수중에 묶여 급증하는 미래의 시장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유일한 경제정책은 재벌 규제
재벌 대기업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자금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재벌 대기업들은 선진국 유수기업의 끊임없는 혁신과 인도, 중국의 맹추격 사이에 끼여 나름의 생존전략을 고심 중이다. 여유 없기는 치솟는 땅값과 임금, 물류비용 상승 등으로 허덕이는 여느 중소기업과 다를 바 없다. 재벌 대기업의 구조조정, 예를 들어 지배구조 개선, 출자총액 제한 등이 기업경쟁력을 배양하는 최고의 지름길이라며 노무현 정권이 초기부터 밀어붙인 유일한 경제정책이다. 이론적으로는 설득력과 명분을 갖춘 이 주장이 왜 서민경제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는지를 따져보지 않은 채, 정책 선회의 필요성을 제언하는 업계와 학계의 권고를 보수세력의 정치적 음모로 몰아붙이는 정치적 경직성에 서민이 더 피곤해 하는 게 작금의 시장상황이다. |
말하자면 서민의 눈에는 ‘실패와 실정’으로 보이는 것을 정권은 ‘성공을 향해 가고 있는 어떤 것’으로 확신하는 괴리가 있다. 이 차이는 점점 더 허물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져 급기야 토론을 그토록 강조하는 정권에서 ‘소통의 단절’이, 참여를 강조하는 정권에서 ‘배제와 소외’가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이 ‘상황 악화’라는 표현도 정권 내부의 인식과는 너무 달라 오히려 정권실세들의 오기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보수신문의 왜곡이거나 음모적 레토릭이지 민심(民心)의 실체는 아니라는 확신, 혹시 서민이 그렇게 느낄지라도 잘못 계도된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옳고 그들이 따라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인식, 마치 그 옛날 운동권 시절 ‘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며 독재타도 행진에 나섰을 때의 비장한 정의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모습, 이것이 민심에 대한 현 정권의 태도이자 통치양식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운동권은 민중의 말과 마음을 배우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민중의 소리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그 눈물겨운 신념을 갖고 말이다.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하방(下放)운동이 그것 아니던가. 그런데 20년 후 하방에서 돌아온 그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현장에서 가다듬은 ‘그들의 이론’에, 하방에 청춘을 바친 ‘그들의 생애’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단절과 배제’의 한숨소리가 들리게 됐겠는가.
그래서 민심은 이탈했다. 10%를 겨우 넘기는 지지율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 초기의 지지자들이 더는 돌아볼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이탈한 그 배경이 더 문제다. 노 정권의 실세들은 이탈자들이 끝내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이미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그들은 뚜렷한 대안 세력과 인물이 부상하지 않는다면 일시적 방황 끝에 결국 귀환할 것이라는 느긋함, 그래서 초지일관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심은 심하게 흔들렸고,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극도로 불안하다. 이 불안감은 2007년에 닥쳐올 사건과 쟁점이 하나같이 치열한 공방전을 예고하고 있기에 그렇고, 해결능력이 바닥난 듯 보이는 현 정권이 오히려 이해충돌을 부추겨 한국사회를 결딴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억측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동안 쏟아낸 막말 수준으로 미뤄 결딴내지 않으리라고 확신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오히려 순조로운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면 정치적 모험을 위해서라도 결딴내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야당들이 이런 충격파에 제대로 견딜 수나 있을지 의문이고, 또는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먼저 내파(內破)될 수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당면한 현실이다. 이른바 ‘오기정치’ 또는 버티기 전략으로 선회한 노 대통령과 이탈한 민심 사이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신할 것인지를,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
지지율 떨어뜨리는 정책만 골라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의 완패로 끝났다. 완패도 그런 완패가 없었다. 서울과 수도권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를 야당이 장악했다. 총선과 대선이 아니라고 지방선거를 얕잡아볼 일은 아니다. 지방선거는 지방자치단체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행정의 기본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계기이자 중앙정부로서는 지배구조(governance)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현 정권이 완패했다. 이것으로 노무현 행정부의 지배력은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수행의 손발이 잘린 것이다. 물론 전국을 포괄적으로 관장하는 중앙정부의 행정조직과 실행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사건건 지방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고, 정치적 의미가 큰 정책은 지역 차원의 정치적 이해와 갈등을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배력의 약화 내지 전면 붕괴를 뜻한다. 국가정책으로 수행되는 굵직굵직한 국책사업 외에 집권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낼 지역 차원의 정책은 잘 이뤄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2006년 초기부터 선거가 실시된 5월말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가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낼 어떤 정책도 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니, 정책을 펴지 않았다기보다 지지율을 한층 떨어뜨리는 정책 메뉴만 골라서 집행했고, 그것도 ‘미움을 사는 방식’이었다.
노 대통령의 오른팔이라고 할 김병준 정책실장이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집값을 기어이 잡겠다는 노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는 검투사였다. ‘헌법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정책’을 내놓겠다는 말이 그때 처음 세간에 회자됐고, ‘세금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동시에 선을 보였다.
일차적 상대는 물론 집값 상승으로 상대적 이득을 보고 있던 서울의 강남지역민이었지만, 세금의 폭탄세례는 강남북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가해졌다. 마침 계절이 계절인지라 집값은 폭등일로에 있었는데, ‘세금폭탄’ 발언만으로 잡힐 집값이었다면 다른 것으로도 이미 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검투사는 계속 거친 말을 쏟아냈다. 강남과의 싸움에 한창 몰입할 때는 자신이 한 말에 도취해 모든 국민을 상대로 폭탄이 투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가 헌법처럼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겁을 줬던 부동산정책의 골자는 종부세와 재산세를 두어 배 올리고, 기준시가의 상향조정, 은행대출 억제를 법제화하는 것이었는데, 그 조치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강남아파트 가격은 또다시 오를 기세가 등등했다.
선거 앞두고 왜 그랬을까
여하튼 주택정책의 시비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국민을 상대로 다섯 달 동안 엄포를 놓았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 그랬을까. 상식 있는 정권이라면 선거를 앞두고 국민을 상대로 이런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택공급을 늘려 국민의 주택수요를 충족시키겠다, 복지정책을 이렇게 펴겠다, 경기부양책을 쓰겠다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선거용 정책 메뉴다. 선진국에서도 선거가 있는 해에 복지와 사회안전망 비용 및 선심성 정책비용이 급증하는 게 보통이다. 아무리 다급한 정권이라도 ‘세금’ 문제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다. 만일 건드린다면 세금감면이나 세율의 제한적 감축을 공언할 수 있을 뿐이다. 세금은 어느 정권에서나 가장 민감한 정책영역이기에 어리석은 정책입안자가 아니고는 세금인상안 발표는 절대 금물이다.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노 정권은 왜 그랬을까. 답은 몇 가지 중 하나다. 첫째, 지지율에 자신이 있다. 그래서 결코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는다. 둘째, 아예 지지율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정책일관성이 더욱 중요하다. 셋째, 선거 따위에는 관심 없다. 집권세력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최대 목표다. 그 답이 첫째라면, 현실인식이 매우 잘못됐다고 할 수 있고, 둘째라면, 정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는 얘기고, 셋째라면, 정치의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셋째가 가장 근접한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집권세력의 정체성 확립!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정체성 확립을 통해 완만한 지지율 상승을 꾀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 관심이 없는 정권이 있다면, 막나가는 정권임에 틀림없으므로 지지율 상승 내지 회복을 정체성 확립의 전리품으로 챙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정체성 확립이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지는 정치학적 분석의 대상이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정책 자체는 필요조건일 뿐이고, 그것이 충분조건이 되자면 일정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정체성 확립을 겨냥한 정책들이 엄청난 소란과 갈등과 부정적 성과만을 양산했던 집권 초기 2년의 경험이 아직 유권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을 환기해야 한다. 17대 국회가 개원한 2004년 6월부터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6년 5월까지 2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국민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터다. 이런 사실을 모두 감안하고도 세금폭탄이 답이었을까, 그 중차대한 지방선거 국면에서? 그렇다면 이 정권은 아주 초보적인 정치학적 상식마저 홀대하는 정권, 또는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권’이라는 진단이 가능하다.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치
2004년 개원국회에서 집권여당이 벌인 4개월간의 총력전을 보면 ‘정치학을 모른다’는 평가가 차라리 적절해 보인다. 4대 개혁입법안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진 법안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개정, 사학법안과 과거사청산법안에는 모두 구시대의 악습을 혁파하려는 역사적 비전과 열정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선지, 9월부터 4개월 동안 우리당 소속의 운동권 출신 초선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마치 30년을 기다려 이제야 때가 왔다는 듯이 말이다. |
초선의원들의 기세에 밀려 중진의원들은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총공세에서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51명 중 102명에 달하는 초선의원은 우리당의 다수집단인 만큼, 뭔가 진보정치의 정수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불행의 징후는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총력전으로 밀면 결국 바리케이드는 쓰러진다는 것을 운동권 출신의 초선의원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해왔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병은 도처에 있었다. 야당은 노련한 저격수를 징발해서 용의주도하게 대응했다. 보수단체들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이 맞대응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보수지식인들도 서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상황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다. 초선의원들이 방송과 여론매체에 나가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미움을 샀고, 역풍(逆風)이 솔솔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태는 위태로워졌다. 결과는 엄청난 상처만 남긴 총퇴각이었다.
그해 12월 이후 지리멸렬된 초선의원들은 각개전투 태세로 전환했지만 국정의 최전선에서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당의 전력(戰力)은 17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철저히 무력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국회의 규칙과 질서를 배우고, 현실정치가 무엇인지를 학습하는 과정에 있었을 뿐, 진보정치의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데로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운동정치인들이 정치학을 차분히 배울 겨를도 없이 거리정치와 저항정치를 먼저 습득한 탓이고, 또한 그것에 기대 현실정치를 판단한 결과다. 현실정치의 준거가 거리정치이자 저항정치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불거졌다. 현실정치는 거리정치와 냉혹하리만큼 다르다. 현실정치에는 규칙이 존재하고 관습이 있다. 행동양식을 관할하는 별도의 정치적 기제와 힘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곳에는 정당이 있다. 정당은 운동권의 소속집단과 다르다. 운동권은 이념적 친밀성으로 뭉친 비공식적, 자발적 결사체이므로 행동이 일사불란하고 정서적이다. 이해갈등이 상호이해, 정서, 경험의 공감대를 통해 해소된다.
그러나 정당은 다르다. 모든 것이 공식 차원에서 결정되고 집행된다. 결정 하나하나는 이해갈등을 수반하고, 그것은 공식 채널과 루트를 통해 해소된다. 물론 여기에도 물밑 작업이 중요할 수 있지만, 공중(公衆)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공중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는 조직의 모든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공중과 대면했고 운동권식 밀어붙이기를 감행했다. 공중이 있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 즉 ‘저항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정치학적으로 말하자면, 거부권(veto power)이 도처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가 현실정치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이다.
위험하고 무모한 종교와의 전쟁
거부권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보수시민단체, 퇴역군인단체를 위시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뭔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잠재 세력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더욱이 종교집단을 건드린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사학법 개정이 적용될 사학재단은 줄잡아 400여 개인데, 여기에는 민주화운동 시절의 동지이던 개신교와 천주교단체가 포함돼 있었다.
애초 운동권 정치인들은 400여 개에 불과한 종교사학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무지에서 나온 섣부른 판단이었다. 유럽의 국가들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가 종교와의 타협이었다. 천주교로부터 교육 권한을 양보받는 것, 중앙정부가 국가 주도로 대중교육을 실행하는 것 모두 근대국가의 필수 과제였는데, 역사적 성장과정이 길수록 국가와 종교의 주도권 다툼은 치열했고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대부분 근대국가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종교집단에 대한 정치적 양보를 전제로 한 승리였다. 그런데 공(公)교육의 정상화라는 근대적 명분을 위해 종교집단을 비리와 부정의 온상으로 낙인찍는 일만큼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같은 논리에서 거부권의 중심소재인 야당을 정당한 정치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은 것도 치명적인 실수다. 아마 이런 지적에 대해 집권정당으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언제 야당이 협력하려는 자세를 보였는가, 야당 스스로 협력정치의 틀을 깼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데 어떻게 타협과 절충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고충을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의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멋진 정책을 내놓아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균점해 방향을 틀 수 있는가. 한국의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부하고’ ‘부정하고’ ‘막는 것’뿐이다. 정치구조가 그것만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혹시 열린우리당이 재집권에 실패해 야당이 돼본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반대를 위한 반대라도 해야 하는 게 야당의 정치적 명분이다. 거부권이야말로 야당의 생명줄이자 정치적 존재이유다. 여당이 그런 야당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 자체가 정치력 부재(不在)를 드러내는 꼴이다. 정치력은 그런 그들을 국가운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건대, 우리당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을 유신독재의 잔재물로 간주했으며, 급기야는 대화 자체를 피해야 할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 취급하듯 했다. 민주당과는 견원지간이 됐기에 더 말할 나위 없다. 한나라당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열린우리당 의원을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본데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온한’ 혁명분자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뽑아놓은 것 자체는 유권자의 책임이지만, 사실 2004년 탄핵정국 총선에서 그런 사람들일 거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탄핵 역풍이 불 때, 그리하여 노무현, 김근태, 정동영계 사람들이라면 검열할 필요도 없이 선출해서 국회로 보낼 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는가. 그런데 기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고만고만한 지방유지들을 뽑아서 국회로 보냈다고 해서 사정이 확연히 달라졌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총선 이전에 ‘노무현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미미한 비주류 소수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세력이라고 할 것도 없이 대선 전부터 노무현 후보와 자주 접촉했고 저항운동과 민주화운동 경력을 갖고는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던 소수의 사람이 그들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자마자 소외돼 있으나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규합해 세를 넓히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탄핵정국이 정치적 기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자 대거 중앙정치 무대로 몰려나왔다. 이때 아무런 검열장치도 없었다. 그냥 ‘노무현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통과됐다. 그리고 백년정당을 만들자고 국민 앞에 굳게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돼 분당의 불가피성에 직면했다.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이 국회로 진출하는 과정에 이른바 현실정치의 무시, 거부권의 거부, 운동권적 행동양식에서 비롯된 ‘진보정치의 실패’가 예고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업적은 어느 정도 인정
백년 가는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게 2004년 5월31일이다. 총선 승리를 자축하는 청와대 모임에서 우리당 의원들과 노 대통령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산 자여 따르라’를 불렀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홀가분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진두지휘할 수 있는 정당이 다수당이 됐으니 그것만큼 감격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우리당 의원들은 입성(入城)의 감격을 노래했을 것이다. 초라한 재야생활에서 벗어나 화려한 중앙무대로 진출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오랫동안 꿈꾸던 혁명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로부터 2년6개월이 지난 시점에 우리당 지도부는 분당을 유일한 돌파구로 설정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 얼마나 빠른 변화인가. 관찰자가 보기에도 그러한데, 당사자들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2006년 12월 중순 어느 날, 필자는 우리당 비상대책위 저녁회의에 초대됐다. 무엇이 문제인지 솔직하게 진단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으므로, 필자는 시정(市井)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우리당의 이미지는 ‘성난 얼굴’ 그 자체이며, 국민을 편안하게 못해주었다는 것과, 실정(失政)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경직성, 시장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념적 오만함, 그리고 국민을 계몽대상으로 삼는 통치양식 등에 대해 얘기했다. 비대위 위원들은 진지하게 그 얘기를 들었다. 개중에는 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의원도 있었다. 그런데 참석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당의 정체성 유지 가능성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런 상황에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당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정의와 재정의를 반복해 어떤 가치로 수렴한다고 할 때 과연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지가 공통 관심사였다. 당의 내부자에게는 한층 복잡했을 이 문제가 외부자에게는 의외로 간단하게 비칠 수 있다. 이 문제를 단순명료하게 해부해보자.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남은 길은 무엇인가. 정권 재창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두 가지다. ‘개혁정책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와 ‘지지층의 확대/축소 여부’다(그림 참조).
|
단절·배제·이념과잉으로 몰락한 운동정치, 거리정치, 저항정치… 남은 1년은 ‘조정자’가 이끄는 실용개혁정치로! |
둘째, 집권여당의 정치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에 일어난 활발한 교호(交好)작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들 간에는 ‘기원의 유사성’과 ‘이념의 친화성’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1987년 이후 저항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인사가 선택한 활동영역이 시민단체와 정당이다. 이들의 공통 목표가 민주화운동 이념을 시민혁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던 만큼 쟁점정치(issue politics)에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으며, 정책노선과 방향도 유사했다. 역사인식과 가치의 공유가 민주화 이행기간을 거쳐 민주주의의 확립기에도 지속됐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 양자 간 상승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단체가 노 정권의 외곽과 내부에 광범위하게 포진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활발한 교호작용이 일어난 것인데, 정치권력에 대한 건강한 비판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본령에 비추면 ‘시민단체의 정치화 내지 정치적 포섭’으로 규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쟁점 만들기와 정책결정과정을 독점한 이들의 밀접한 교호작용의 결과가 곧 ‘지배력의 약화’다. 다시 말해 쟁점정치와 정책결정과정의 독점은, 이에 동의하지 않은 집단과 사회세력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지배구조는 정책결정의 제도화뿐 아니라 실행능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배제적 과잉대변’이 보수세력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실행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다.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거리시위가 자주 발생했고, 심지어 우호세력인 민노총과 여타 진보단체의 반발도 자주 감행됐다. 집권 초기 2년 동안 여의도는 각종 시위의 전시장이 됐으며, 이해의 충돌이 거리시위와 대규모 집회로 표출됐다. ‘영이 서지 않는다’는 집권세력의 불만은 이로부터 유래한다. 이분법적 참여와 선별적 정치화는 오히려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보수세력의 조직화가 급작스럽게 진전된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진보세력에 의한 쟁점정치의 독점이 보수세력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보수세력은 조직화를 가장 시급한 과제이자 대응전략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가기구의 과도한 탈권력화
국가는 통치 수단으로 물리적 억압기구를 관할한다. 권위주의 국가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고, 민주국가는 공익증진에 선용한다. 민주화로 이행하는 국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독재권력에 이바지했던 물리적 억압기구, 예를 들면 군대, 경찰, 검찰, 법원, 정보기관, 기타 사찰기관의 정치개입을 막고 본래의 업무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독재권력의 주춧돌이던 군대, 경찰, 정보기관의 권력빼기(탈권력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미 국가들이 그랬고, 우리가 그랬다. 군대는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하나회 숙정을 계기로 재병영화의 길을 착실히 걸어 현재는 민주군대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물론 군사문화의 청산과 군의 현대화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탈권력화의 요청에 빠른 속도로 응답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다. 이런 점은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여서, 국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해제당하고 국가안보와 직결된 정보수집과 대응책 마련에 역점을 두게끔 됐다. 고급정보를 활용해 인권 탄압이나 특정인 사찰을 일삼던 과거의 국정원이 아닌 것이다. 물리적 억압기구의 탈권력화는 이들의 기능과 역할을 시민의 공익증진에 기여하도록 만들고 민주사회의 명분에도 걸맞은 개혁조치임에 틀림없다. 노무현 정권은 탈권력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권과 구별된다. 그토록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국정원의 불법도청을 방치했던 김대중 정권과도 많이 다르다. 군대, 경찰, 검찰, 법원의 조직과 기능은 한층 더 민주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점은 노 정권의 업적으로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탈권력화가 과도하게 진전돼 원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국민적 우려다. 이런 우려는 특히 몇몇 과격한 시민단체의 거리시위와 맞닥뜨릴 때 자주 표명됐다. 2005년 12월 경찰과 농민시위대의 충돌과정에 농민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청장이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미군기지 이전대상지인 대추리마을 철거작업 때 일어난 반미단체 시위는 국가기구의 무력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사정이 어찌됐든, 미군부대 이전은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며 대추리마을 철거는 국방부 인준을 받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미군기지의 철수를 주장하는 반미단체들은 군대를 상대로 과격시위를 벌였으며, 호신용 방패를 든 군인들이 행동대의 무력시위에 밀려 논밭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공익 손상과 법치주의 훼손
과격시위가 한창일 때 대추리분교 지붕에는 이전과 철거를 반대하는 국회의원 몇 명이 올라앉아 있었다. ‘시민에게 맞는 군대’를 가진 나라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한국뿐이지 않을까 싶다. 독재정권 시절 군대가 저지른 야만적 행동을 면죄받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군대가 시민에게 밀리고 맞는 장면을 보면서 국가기구의 기능 저하 또는 ‘공적 권력의 실종’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다. 간첩 검거는 국정원의 고유 업무다. 그런데 국정원은 지난해 모처럼 간첩사건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해석을 지극히 경계했다. 본래의 기능인 간첩단 검거를 수행하면서 국정원장은 얼마나 부담을 느꼈는지 사표를 제출했고 곧 수리됐다. 탈권력화는 뜻은 좋지만, 그것이 정당한 권위 상실과 합법적 기능 실종으로 귀결돼서는 안 된다. 자칫 ‘공익의 손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독재시대에는 민주적 가치의 훼손이 문제였지만, 민주시대에는 법치주의 훼손이 문제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그 물리적 억압기구들이 본래의 기능을 착실히 수행할 만큼 정당한 권한이 부여됐는지다. 국정원은 안보에 필요한 고급정보를 얼마나 착실하게 수집, 분석하고 있으며, 국민의 안위(安慰)에 필요한 정보를 제때에 공급하고 있는가. 군대는 전쟁억제와 평화유지에 주도권을 행사할 만큼 용의주도하게 군사력 증강과 전략수립에 임하고 있는가. 경찰은 치안과 범죄예방에 어떤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행동양식을 도입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으로 탈권력화의 초점이 옮겨가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법을 집행하는 기구인 검찰과 법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법의 집행과 해석에서 검찰과 법원은 조직이기주의를 탈피했는가. 과연 법치주의를 지키는 최고기관들의 법 집행이 궁극적으로는 민복(民福)과 공익증진을 최선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적 계산과 조직간 힘의 불균형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최근 불거진 검찰과 법원의 대립양상은 공익증진이라는 명분에 비추면 아무래도 석연찮고 범죄행위의 해석과 집행에서 심각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견해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조직간 우위 다툼이나 경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경우 검찰과 법원의 자율성 존중이나 정치적 중립이라는 대의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즉각 조율책을 모색하는 것이 집권세력이나 통치권자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검찰, 법원의 자율성은 조직과 직업의 자율성이 아니라 공익증진이라는 더 중대한 원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그것을 관할하는 사람이 곧 통치권자다.
빈곤한 경제업적과 도덕적 시장경제
노무현 정권에서는 이런 기구들이 과도하게 탈권력화하거나, 조직자율성이라는 명분을 좇아 파편화했다는 인상을 짙게 남긴다. 통치권자의 임무는 이들의 행동양식을 국민복리와 공익증진이라는 명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자율성은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지, 기관들의 관습과 전통적 조직원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국가기관들의 상호분절은 어쩌면 대통령이 자임한 ‘권위 버리기’의 산물일 터인데, ‘권위 버리기’라는 민주적 명분이 국가기구의 ‘품격 저하’와 ‘공적 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업신여기기’로 나타났다는 점은 향후 또 다른 과제를 예고한다. 노무현 정권의 경제업적이 지극히 빈곤하다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집권실세들은 이 점을 부정한다. 경제성장률, 국민소득증가율, 투자율, 소비증가율 등을 들어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인데 보수언론들이 괜히 사실을 왜곡 과장해서 그렇게 인식됐다고 억울해한다. 통계치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간연구소와 국책연구소가 공통으로 지적하듯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노 정권이 성장 동력을 키우기 위해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적극적으로 한 것은 재벌기업에 대한 특단의 규제였고, 중소기업의 기업환경을 어렵게 만드는 임금 및 고용차별 금지에 관한 조치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실업이 늘고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와중에도 기업의 고용능력 증진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경제는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는데, ‘알아서 하라’는 것이 현 정권의 시장경제관을 집약하는 표현이다. 정부의 시장개입은 없다, 시장개입은 정경유착을 낳는다, 그래서 경기부양책도 없고, 환율방어도 없으며, 전략산업과 기업에 대한 특혜조치도 없다. 그 대신 기업구조조정은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정권 초기, 공정거래위원회에 힘을 실어 재벌기업들의 상호출자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전형적 경제정책으로 읽힐 정도였다.
|
기왕에 존재하는 규제가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작동하는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은 기업을 규제망에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재벌 대기업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에는 어느 정권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산업부문별로 펼쳐진 거미줄 같은 규제망을 좁히고 공장 신설에 적용되는 규제를 완화하는 조치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규제 완화와 인센티브 제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에서 정권의 행보는 매우 느렸으며 정교하기 짝이 없는 규제를 걷어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기업환경이 개선됐다고 인정하는 기업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반면 노동시장에는 상당한 개입의지를 표명했고 실제로 노동자 보호에 신경을 썼던 게 사실이다. 고용보호에 관한 부분적·제한적 업적이 있음에도 전체 취업자의 47%에 달하는 비정규직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노 정권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그대로 수용했음을 입증한다.
신자유주의 그대로 수용
생산시장에서의 방임적 자세, 노동시장에서의 제한적 개입, 그리고 경기부양책 거부, 금융시장 개입불가 등의 정책노선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한국경제의 침체국면을 연장시켰다. 더욱이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배양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게을리했다는 비난에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는 군색한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영미형 자본주의에 근접한 한국경제의 현실구조로 판단하면 라인형 자본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더욱이 경제구조상 선진국과는 다른 요소가 많다. 소규모 자영업자가 700만명에 이르고, 비정규직이 47%이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규모 분절, 수출대기업과 내수기업 간의 분절, 게다가 성차별이 겹쳐 있다. 특히 대부분의 대기업은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해 전국적 차원의 임금협약과 고용협약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격차와 차별 때문인지 노동자를 위시해 일반 국민은 매우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심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약간의 차별을 낳는 조치에 대해 즉각적인 반발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회적 협약 같은 선진적 해결책이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격차를 시정하려는 어떤 유형의 거시정책도 그 실행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낮은 단계의 사민주의’를 모델 삼아 경제정책의 방향을 틀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실용개혁정치의 경제관이다. 본격적인 사민주의를 추구하기에는 한국의 시장규모가 너무 크고, 인구가 많고, 협약과 타협의 경험이 일천해 부적합하다. 그러나 ‘낮은 수준’에서는 사민주의적 정책 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아무리 경제규모가 커졌다 할지라도 한국경제에 국가의 중심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필요하다는 것. 둘째, 한국민의 평등주의적 심성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경제성장 자체를 저해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그 기본틀은 비교적 간단하다.
▲매우 적극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을 각종 규제로부터 해방시킨다(자유시장경제). 재벌 대기업들에도 기업구조개선 및 출자총액에 관해 거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되 경영권 방어와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조건을 적극 허용한다. 단, 그 대가로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경우 법인세를 현행 38%에서 45% 수준으로 올린다. 그 세금은 사회협약을 통해 하층민과 비정규직의 생활안정 및 사회보장과 복지에 사용한다.
▲노동자는 작업장의 규칙을 준수하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생산성 동맹). 노동자와 종업원을 기업 규모별, 산업 규모별 대단위로 유형화해 임금, 고용협약을 맺되 양보교섭을 규범화한다. 양보교섭은 기업의 고용능력 유지와 향상을 위한 것으로서, 양보교섭의 대가로 사회보장, 사회서비스, 공공임대주택의 임대권을 공여한다.
▲양보교섭과 생산성 동맹이 실행되는 것을 전제로 중상층의 세금부담을 현행 25%에서 30% 수준으로 인상한다. 이 인상분은 전체 복지수준의 향상과 빈곤층과 차상위 빈곤층의 생활안정에 사용된다.
▲비정규직을 현재 47%에서 40% 수준으로 연차적으로 낮추고 시장유연성을 유지하되, 비정규직에게는 이중취업이 가능하도록 일자리 창출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사회보장 혜택(실업급여, 연금, 기타 사회서비스)을 제공한다.
▲국가는 경기조절과 성장정책을 통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며, 복지 분배가 협약 준수와 생산성 향상을 촉진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사민주의 국가는 이런 정책을 매우 강도 높게 추진했고,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지금도 그 기본틀이 유지되고 있다. 수요를 공급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공급)를 조직해서 기업(수요)의 요구에 맞추는 것, 기업에는 시장의 자유를 전적으로 허용하고, 그 대가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 그것이 노사협약을 유지하는 복지재원으로 활용된다는 것이 사민주의 원리다. 이미 영미형 자본주의가 정착된 한국의 경우 경쟁력이 높은 대기업 노조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므로 ‘낮은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경쟁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문부터 이런 상생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실용개혁정치가 지향하는 경제운영방식이다.
득보다 실 많은 자주외교
국제관계에 관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을 촉발하는 요인 가운데 가장 민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발점은 비교적 간단하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자주외교’를 외곬으로 몰고 나가는 것은 아직은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한국의 경제적 역량과 국제적 지위가 향상됐으므로 자주외교를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대내외적으로 과도하게 강조해 불필요한 견제를 받는 것이 어느 정도 득이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주눅들어 살아온 역사적 경험을 환기하면 자주외교는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기본전략을 거슬러서 남북화해와 통일이 당겨질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한다. 미국의 경우 9·11 테러 이후 제국주의적 색채가 한층 짙어졌고, 중국도 북한을 품에 안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내비치고 있다. 일본은 미국에 편승해 실리를 챙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한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통할 것인가.
대북관계에 관해서는 두 가지 담론이 대립한다. 보수진영을 대변하는 ‘선진화담론’과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평화담론’이다. 전자는 여전히 주적(主敵)개념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북한인권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반면, 후자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대북지원을 통해 북한의 내부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한다.
미국이 여기에 걸리는데, 전자는 미국을 전통적 우방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후자는 미국의 강경책이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강대국 논리를 강요하는 부시 정권의 일방적 외교가 남북의 평화공존을 해치고 북한을 핵실험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고 비판한다. 반미감정이 점차 반미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담론의 사상사적 뿌리와 역사적 기원을 밝히고 어떤 접점을 끌어내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실용개혁노선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밝히는 것으로 논의를 끝내려 한다. 먼저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한말 개화기와 일제의 침탈로부터 비롯됐다. 물론 그전에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민족주의 담론의 기원이겠지만, 여기선 근대적 형태의 민족주의가 한말의 혼란기에 형성된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런 만큼 그 대상은 일본의 제국주의다.
1920년대에 대두된 ‘민족모순’은 일제 강점하에서 짓밟히고 소멸되는 민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혁명, 계몽을 통한 근대화, 전략적 친일을 통한 힘의 배양 같은 방법이 모색됐다. 이런 모색들이 사회주의 및 개량주의와 각각 접합하면서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민족주의로 발전했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 남한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정치적 의미를 억제당하고, 다시 성장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아예 경제적 영역에서 그 개념이 제한되는 독특한 경로를 밟아야 했다. 1990년대까지도 한국 국민에게 민족주의가 우선 ‘경제적 민족주의’로 수용됐던 까닭이다.
권태준 교수는 최근의 역작 ‘한국 세기 뛰어넘기’에서 경제적 민족주의가 강세를 보인 이유를 일본 식민통치의 경험과 한민족의 한풀이로 해석한 바 있다. 어쨌거나 박정희는 경제성장 전략을 위해 경제적 민족주의를 정책적으로 강화했고, 민족주의가 반공이념의 테두리 내에서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허용했다.
핵실험 이후 거칠어진 극우단체
문제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이 아직 한국 국민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정치적 민족주의의 발로라는 점이다. 그동안 과도성장한 경제적 민족주의를 다소간 털어내고, 발육부진의 정치적 민족주의를 보강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친북이념이 경제적 민족주의를 내면화한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온한 이념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정치적 민족주의의 미성숙이 극단적 혐오감과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실용개혁노선은 이런 시대적 현실과 사실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민족주의의 담론을 촉발하고, 이것이 국제관계에서 어떤 현실적합성과 득실을 가져올 것인지를 따지는 것으로부터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말이다.
친북정책에 대해 우선 호불호를 표현하기보다 남한의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결핍된 면을 지적해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이념적 유연성이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 이후 극우단체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행동양식이 다소 거칠어진 것은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충분한 설득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친북노선의 정당성을 강요한 진보진영의 거친 행동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전통적 우방이던 미국을 어느 날 갑자기 적처럼 대한다고 할 때 불안해하지 않을 보수인사가 어디 있으랴. 그것은 미리 통지하지 않고 들이닥치는 집달리와 같이 충격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통일부 장관이 나타나 친북성향의 발언을 해대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 정권은 이런 행동을 자주 했고 국민을 자주 놀라게 만들었다.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은 실용개혁정치의 좋은 사례다. 반 장관이 다른 후보들보다 능력이 탁월하고 인물됨이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연때가 맞지 않고 외교역량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았다면 사무총장에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용이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국제관계의 역학과 틈새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자주외교가 자신의 신념일지라도 결코 공언하지 않은 채 자주외교에 합당한 실리를 취하는 것, 이것이 실용외교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앞으로 미국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그간의 우호적이지 못했던 태도를 어떻게 변명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외교는 실용외교가 아니다.
|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상황’ ‘오류’ ‘대안’으로 나눠 작금의 정치현실을 살펴봤으나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글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이 처한 좌표를 어느 정도는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다룬 주제들은 더 세밀한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다. 결론 형식으로 제시한 ‘대안’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 기회에 각론을 더 정교하게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
한국정치의 흐름이 좌절감을 안겨주지만,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길이 있기 때문이다. 실용개혁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시점에 와 있다고 확신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끝)
'옛 記事를 읽는 재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Roh refuses to go quietly into political wilderness - January 9 2007 Financial Times (0) | 2015.09.08 |
---|---|
현겨레 기자와 청와대 대변인 논쟁 글 모음 - 2007.01.24 한겨레 (0) | 2015.09.08 |
심층취재: 金大中의 초조한 생존투쟁 - 2006. 12 月刊朝鮮 (0) | 2015.09.08 |
盧대통령과 부끄러움의 정치학 - 2007. 06. 10, 경향신문 (0) | 2015.09.08 |
지난 10년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2007.11.08 문화일보 (0) | 2015.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