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인종
30여년 전 생전 처음 중남미 땅을 밟았을 때였다. 에콰돌의 과야킬에 잠시 들렸더니 제법 큰 수입도매상을 하고 있는 거래선 사장이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다. 사장은 딸 둘을 데리고 나왔다. 둘 다 미인이긴 했으나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다는 언니는 가무잡잡한 인디오였고 미국계 석유회사에 비서로 근무한다는 동생은 완전 백인이었다. 둘의 얼굴이 닮은 것으로 보아 친자매간임이 분명했다. 그 사장이 백인 외모를 하고 있었으니까 부인이 인디오이거나 아니면 친가나 외가 쪽 선대에 인디오 피가 섞였거나 했을 것이다. 혼혈정책을 장려한(강압했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의 잔인한 식민정책에 대한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 결과를 직접 목격하니 새삼 놀라웠다. 중남미에선 인종차별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덜하다는 소릴 들었다. 백인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자녀들이 무슨 색깔을 하고 태어날 지 모르는 입장에서 인디오나 흑인을 얼굴이 검다 해서 차별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브라질 같은 데선 백인과 흑인이 뒤섞여 나오는 일도 흔하다 했다. 문득 세계 모든 지역이 결국은 중남미처럼 흑백황이 뒤섞인 혼혈인종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세계 모든 인종이 계속 혼혈이 돼 온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자기들 색깔끼리의 혼혈이 아니라 다른 색깔끼리의 혼혈이다. 예컨대 우리의 경우도 북방계와 남방계 그리고 중국계 사이의 혼혈이 지속돼 왔지만 황인종끼리의 혼혈이었으니 이질감이 없었다. 혼혈에 이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백인과 흑인이 들어와 피를 섞기 시작하고 부터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던 얘기로는 흑인종과 백인종이 우성이고 황인종은 열성이어서 황인종이 흑인종이나 백인종과 결합할 때에는 전자 쪽을 많이 닮아 간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터키인과 항가리의 마자르인, 그리고 핀란드의 핀인의 경우를 들었다. 이들 종족은 모두 우랄 알타이어계로 옛적 어느 때는 분명 우리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과는 반대쪽으로 가는 바람에 백인들과 점점 혼혈이 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결 희고 코높고 눈 큰 것 좋아하는 사람들 귀가 번쩍 뜨일 이야기다. 그냥 떠돌아다니는 얘기여서 긴가 민가 하지만, 분명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앞으로 수 천년, 아니 수 백년 후가 되면 지구상의 모든 인종이 모두 비슷비슷해져 인종차별 따위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처럼 들릴 세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새로운 세계인종의 탄생이다. (2004.12) 이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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