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아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

이강기 2015. 9. 9. 10:20

아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

(2000년 6월23일 - 김대중 대통령 방북 만찬실황방송을 보고)

비록 치밀한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진면목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TV를 통해 본 당신의 행동에 벌린 입 한참동안 다물지 못했소이다.

간혹 인민대회당 단상에 홀로 "근엄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혹은 서서 열정 없는 박수를 치든가, 마치 철없는 아이들처럼 홀짝 홀짝 뛰고 손벽을 치며 괴성을 질러대는 군중 앞에서 어울리지 않게 손을 흔들든가, 또는 현장지도를 한답시고 역시 "발광"을 하는 한 무더기의 인민이나 군대를 모아놓고 육성도 나오지 않은 체 손짓 몸짓을 부지런히 해대는 장면들만 보아오면서 - 아웅산 사건과 칼기 폭파를 주도하고 2, 300만의 인민들을 굶어죽게 했다는 "인간백정" 같이만 생각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 말처럼 "은둔에서 해방되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몸짓을 하며 바로 우리들 앞에 나타났으니 말이요.

그걸 보고 이곳 남녘의 성미 급한 사람들은 마치 통일이 다 된 양 감격하여 계속 흥분을 해댑디다만, 벌린 입 한번 다물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괜히 열 적은 생각이 듭디다 그려. 파격(破格)을 이용해 혜성처럼 나타나 관중의 얼을 확 빼 놓는 솜씨 - 그건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과거 파시스트나 공산 독재자들이 곧잘 써오던 이미 빛 바랜 수법이었는데도, 그걸 깜박 잊고 4천만 남한 인민들이 입을 헤헤 벌인 체 넋을 잃고 바라보며 감탄했으니, 당신의 연출솜씨가 보통이 넘는 것은 확실한 것 같소이다. 원, 세상에! "남조선 정부 당국자들"이 온 세계를 향해 잘 차려 놓은 잔칫상에 얼굴 내밀어 화해의 제스처만 몇 번 쓰면, 온 세계가 시끌벅적할 정도의 끝내주는 이미지 메이킹이 되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 세상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을 못했으니 말이요.

파격이란 말을 사람들은 흔히 긍정적인 용어로 곧잘 쓰고 있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만큼 위험수위가 높은 말도 없는 것 같소. 파격으로 한 약속을 파격적으로 지킬 수도 있지만 또한 파격적으로 뒤집을 수도 있는 것이 파격의 묘미가 아니겠소? 우리 대통령은 "선언문"에 서명할 적에 TV 앞에 앉은 사람들이 안쓰러워 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김.대.중."이라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하는데 반해, 당신은 마치 인기 스타가 길을 가다 몰려던 열광 팬들에게 싸인해 주듯 휙휙 서명을 해댑디다 그려. 물론 당신의 서명습관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도 있겠지만, 왠지 너무 성의 없어 보이는 것 같아 과연 저 서명이 계속 무게를 가질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소. 우리 대통령이 이번 기회에 통일에 대해 무언가를 꼭 이뤄 놓겠다는 지극정성으로 노구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사지"에 들어가 성심성의를 다하는 광경은 정말 감격스러운 것이었소만, 오히려 수많은 남녘사람들은 당신의 "파격"에 만 감격들을 했으니, 무어가 잘못돼도 한참 잘 못된 것 같구려.

광폭인덕(廣幅仁德)정치라고 해 샀기에 뭔가 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호탕하게 파티를 주도하는 것이 광폭이요, 인민들을 꼭두새벽부터 길거리에 강제로 내세워 링컨 콘티넨탈 리무진을 타고 가며 손 한번 흔들어 주는 것이 인덕이더구려. 그리고 또 보니까 당신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던데, 강성대국이 아니라 감성대국(感性大國)이라 해야겠더구려. 공항장면에서 얼핏보니 그 어마어마하게 비싼 차가 3대나 되고 또 들리는 말로는 북녘에는 벤즈승용차가 1만대나 된다고 하던데, 글쎄 몇백만이 굶어죽었다는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소? 또 당신들 말대로 60만 명의 평양시민들을, 휙 지나가는 당신과 남녘 지도자들에게 잠깐동안 붉은 가화를 흔들며 괴성을 질러대라고 꼬박 6시간을 길거리에 세워두었으니, 세상에 이성을 가진 지도자라면 이런 짓을 하였겠소? 더욱이 가관인 것은 남녘 지도자들 중에서도 "평양시민의 4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환영을 했다."며 감격해 하는 것이었소. 감성의 나라 북녘에 가더니 잠깐 이성이 마비된 모양이었소. 북녘의 엘리트들만 산다는 평양시민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 사는 불쌍한 인민들은 일러 무엇하겠소. 그들을 생각하니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려.

포도주를 열 잔이나 마셔대며 호탕한 언변으로 파티장의 기라성 같은 남북 지도자들을 주물렸다 폈다하는 당신을 보고 있노라니, 꼭 변사도 생일날 변사도가 지방 유지들을 모아놓고 으시대는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 같았소. 그리고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 촉루락시 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라는, 당신들이 걸핏하면 욕을 해대는 양반 봉건시대에나 어울릴 케케묵은 시 구절이 왜 자꾸 생각났던지 모르겠소.

그러나 저러나 앞으로 당신들같이 놀고먹으며 으시대는 사람들을 위해 남녘 사람들이 더욱 등골 빠지게 일하게 생겼으니, 개미와 베짱이 얘기도 아니고, 이거 정말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아 화닥지가 좀 나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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