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열정"과 깜냥
2000년 4월5일이었던가, 잠실 체육관에서 "천년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벌였던 나훈아 리사이틀을 MBC가 녹화 중계한 적이 있다. 평소에 그의 노래는 그런 대로 좋아했지만 투박하고 능글능글해 보이는 나훈아라는 인간 자체는 대하기가 싫어 다른 채널로 돌릴까 하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 별 기대도 안하고 그냥 MBC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초입부터 입이 짝 벌어지게 만들더니 내리 두어 시간 동안을 "황홀경"에 빠뜨려 처음 벌였던 입을 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닌가. 그날 얼마나 "감격"했던지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과 같은 "즉흥 나훈아송(頌)"이란 것을 지어 내가 자주 들리는 인터넷에 올렸다. 물론 네티즌들의 반응도 좋았다.
x x x
즉흥 나훈아송(頌) - 그의 "천년의 노래"를 듣고
당신이 그렇게 멋있는 줄은 정말 몰랐소.
노래야 잘 했지만, 투박한 사투리에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 제멋대로 늘어놓으며
젠체하는 천박한 딴따라 정도로 생각했지요.
옷로비 사건 아줌마들이 국회증언에서 "나훈아 쇼"에 가고 어쩌고 하는 소리를 했을 때에도
"몰상식한 X들, 명색이 장관부인들이란게 어디 갈 데가 없어 나훈아 쇼엘 다 가" 하며 비웃었지요.
그런데 오늘 당신의 "천년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쥐뿔도 아는 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얼마나 오만했던가를 깨달으며 자괴하였소.
당신은
임꺽정처럼, 장길산처럼, 돌아온 장고처럼,
나바론의 그레고리펙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크라크케이블처럼
내게 감격스럽게 다가왔소.
파격이 그렇게 멋있는 줄도 몰랐소.
60 다된 노인이 찢어진 청바지 입고, 구호물자같은 재킷을 걸치고
허연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에 산적같은 얼굴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투박한 사투리 그냥 쏘아대는 당신한테서
싱싱한 생명력을, 태고적 고구려 기상을 보았소.
비록 연기였을 망정 말이요.
서울음대 나온 조영남이 성악가가 되지 않고 딴따라가 되고,
서울법대 나온 최희준이 법률가가 되지 않고 대중가수가 된 걸
참 잘 했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소만
당신은 내놓을만한 학력도 번드르르한 언변도 없으면서도
청중을 마음대로 울리고 웃기는 천부의 재주를 가졌구려.
거짓으로 얼룩진 세상 정말 살맛 나지 않는 세상에
당신 같이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어 울리고 웃기는 사람 있기에
그나마 살맛이 나나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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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은 나의 이 "해괴한" 짓거리를 보고 "앗따, 그 나이에 참 어울린다. 이팔청춘이다." 하며 지나가는 말로 슬쩍 비꼬았다. 그냥 가법게 한 말이었지만 순간 나는 제법 큰 충격을 느꼇다. 아차! 그렇구나, 내 나이 지금 몇인가? 기껏 대중가수의 쇼 따위를 보고 감격하여 찬가나 지어 바칠 나이인가? 본디 취미가 천박하여 비록 그러한 것이 재미있고 "감격스러웠을"망정 그런 "하찮은 것"들은 그냥 속으로만 새기고 겉으로는 점잖은 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만 권위가 서고 깜냥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런 천박한 쇼 따위는 아예 보지도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공자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여 마흔이 되면 주위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천명을 안다(知天命)는 50을 훌쩍 넘어 이순(耳順)에 접어든 나이에 이 무슨 망발인가?
그런데도 나는 가슴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여늬 소녀들에게나 있을법한 이 "연예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그 열정을 속으로만 새기지 못하고 자꾸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지금도 여가만 나면 TV 연속극이나 가요 쇼 같은 것을 틀어 보며 옆에 젊은 종손들이나 질부들이 있건 말건 "저 계집애는 연기는 시원찮은데 얼굴이 반반해 한몫 본다", "저 녀석은 미성(美聲)이긴 한데 노래는 영 엉터리다", "저걸 방송극이라고 썼나. 등장하는 배우들은 일륜데 극작가가 들어서 영 버렸다." 하며 줄줄 평(評)을 해댄다. 오히려 지금 한창 재잘재잘 종알거려야 할 젊은것들은 옆에서 아무소리 안하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평소에 내가 말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묵하다는 소릴 듣는다. 그런데도 TV 앞에 앉으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무슨 정치나 역사나 시사 얘기라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배우가 이렇고 어느 가수가 저렇고 하는 연예 스토리까지도 거침없이 아는체 해댄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그래서 번역작업도 같이 하고 있는 박선생은 뉴스나 무슨 토론회 같은 것 외에는 집에서 거의 TV를 보지 않고 차라리 그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는 다고 듣고 있다. 아마도 그 분은 집에서도 연예 이야기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 분과 간혹 시내에서 차라도 한잔할라치면 정치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이르기까지 비판과 울분과 강개가 주르르 쏟아진다. 주로 진보적 시각에서다.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시국을 보는 눈이 나와 정반대인지라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 전개된다. 물론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다. 이야기가 썩 고답적이라 모르긴 해도 주위 사람들은 대화내용을 듣고 우리들을 무슨 퇴직 교수나 신문사 간부 나부랭이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밖에 나가서는 상대방 수준에 따라 갖은 염치 다 차리고 근엄한 척 위엄을 떨며 고담준론을 늘어놓고는 집에 돌아와선 탈렌트가 어떻고 가수가 어떻고 하는 것이 요즘 내 모양세다.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좀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집사람한테서 핀잔을 들을 만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의 일개 탈렌트(배용준)에게 "욘사마"라는 최고의 경칭을 부치며 따라다니는 수많은 일본의 30-40대 여성들을 보고, 나의 별난 취미도 그렇게 상식의 범위를 크게 일탈한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저 여자들도 제나름대로는 배울 만큼 배웠고, 그들 중에는 사회적 지위가 제법 높은 사람들도 있을텐데도 저런데...싶었다. 그러나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비겁하고 주제넘는 비교다싶다. 나는 그들보다도 20-30년이나 더 나이 먹은 영감탱이가 아닌가.
정말 언제쯤 나이 값을 하고 깜냥을 차리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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