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이젠 '세계문명'의 시대

이강기 2015. 9. 9. 10:26

이젠 '세계문명'의 시대

 

A님이 말씀하신 "한국은 미국의 51번째 주인가?"를 읽고 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좀 "엉뚱한" 소리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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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읽다가 문득 나 자신은 그럼 얼마나 "한국적인 것"을 애용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로 의식주를 살펴봤습니다. 우선 내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까 영락없이 서양식 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구며 집기를 훑어봐도 거의가 서양식이었습니다. TV며 컴퓨터며 냉장고며 전기밥통이며 전자오븐이며 시계며 변기며 욕조며가 모두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도 "우리 것"이 없나싶어 다시 방마다 다니면서 찾아보니 자개 박힌 장롱은 절반쯤만 "우리 것"이고(구조가 양식이니까), 그 외 옛날 도자기 몇 점, 동양화 몇 점, 작은 항아리 몇 개, 흰 주발 몇 개 정도였습니다. 단독주택에서 이사오면서 친척집에 주고 온, 옛날에 시골서 가지고 온 다딤이돌과 방망이, 그리고 큰 김치독과 장독이 새삼스레 "우리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나와 우리 식구들이 입고 있는 옷을 점검해 봤습니다. 나와 아내가 1년 가야 한 번 입을까 말까한 한복 한 벌씩을 제외하곤 전부 서양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생각해 봤습니다. 오랜 습관 탓인지 밥은 보통 저녁에 한끼 정도 먹고 아침은 빵과 우유, 점심은 중국음식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먹는데, 전체적으로 절반쯤 한식을 이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위에서 말한 의식주에 관한 것으로 대충 가름하고, 다음은 정신적인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의 절반 이상은 서양 것이었고 서양식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이며 미술이며 문학도 절반 이상은 서양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한국인이 쓴 현대시도 현대소설도 그 형식이 모두 서양식이고 더러는 내용조차 서양식이었고, 그리고 간혹 흥얼거리는 대중가요도 따지고 보면 우리 고유의 노래는 아니니까, 비록 그 내용이 순수한 한국 것이라도 절반 이상은 서양 것으로 봐서 그렇다는 얘깁니다. 병원도 한의는 별 신용하지 않으니까 그것 역시 서양식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TV의 우리 민요 프로를 좋아하고 오페라도 아이다나 라트라비아타 보다는 우리 고유의 창극이나 마당극이 더 재미있으니까, 그것은 우리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나의 의식주의 거의 90% 이상이 서양식이고, 나의 사고의 절반 이상을 서양 것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며 자동차며 냉장고며 TV 등이 국산품이라고 해서 그걸 문화적으로 우리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양음악이며 서양화며 서양식 소설이며 시를 한국 사람이 창작했다고 해서 100% 한국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도시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젊은 사람들의 경우는 도시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메이커"기자는 분명히 비판조로 위의 글을 쓴 것 같은데, 이렇게 따져보면 비판할 일도, 젊은이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습디다만, 그건 외국 관광객이나 연예물의 해외공연 때나 하는 얘기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어느 외국 잡지에서, 문화적 국수주의자들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들이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호되게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자기들도 외국문화에 크게 감염돼 있다는 것을 비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꼬르네이유 같은 회곡작가도 스페인의 내려오는 얘기를 프랑스 것인 양 표절을 하고, 루소의 사상도 따지고 보면 영국 철학가들의 것이라고 꼬집습디다. 최근 신문에 났습니다만, 국산영화를 보는 비율도 우리 나라가 선진외국 어느 나라보다 높은 걸 보면(40% 이상이라고 합디다), 프랑스도 우리의 경우보다 더 외국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저의 이러한 문화해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도 많으리라 봅니다. 특히 우리가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찬란한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더욱 그러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은 앞서 뉴스메이커의 글을 읽고 대단히 개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 역시 저의 경우처럼 아마 80-90% 이상은 현재 서양식 문물을 이용하고 절반 쯤은 서양식 사고를 하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은 분명 한국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해석하기 나름일 것 같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창의성이 강한 민족이 있고 모방성이 강한 민족이 있는 것 같습디다. 예컨대 4대 문명을 일으킨 슈메르인, 고대 이집트인, 인도인, 중국인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가 된 유태교를 일으킨 유태인들은 전자에 속한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인들은 아마도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합니다(물론 일본의 어느 역사가는 동양에서 창의성이 강한 민족으로 일본, 중국, 티벳, 인도인들을 꼽고 있었고, 서양의 어느 학자는 일본문화를 세계 9대 문명 중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독창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디다만). 아무튼,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전자에 속한다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문화란 본래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창의성이 강한 나라에서 모방성이 강한 나라로 흘러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질문화냐 고급문화냐 하는 문제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고급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저질문화도 곱살이 끼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아니겠습니까?

 

 

앞서 창의성이 강한 민족을 들었습니다만, 그건 태고 때 문명이나 종교를 일으킨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였고, 중세 이후부턴 기준이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루네상스를 일으킨 이태리인이나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인, 그리고 20세기말에 들어와 인터넷에 의한 지식혁명을 일으킨 미국인(여기엔 잡다한 인종이 들어가겠습니다만)들을 창의성이 강한 민족이나 국민으로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지금은 너나없이 국가간에 서로 문화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김치를 외국인(현지교포가 아닌)들이 수입해서 맛나게 먹는다면 이것도 음식문화수출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아직까지는 서구, 특히 미국문화가 압도적인 세력을 갖고 있으니까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것이 훨씬 많을 뿐이겠지요. 아무튼 서구문화(문명)는 이제 세계문화(어느 외국 잡지에서 universal culture라고 얘기합디다)가 되었고, 더욱 새로운 세계문화에 젊은이들이 좀 탐닉한다고 해서 그리고 세계문화의 본고장에 가서 따온 "외국박사"가 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비판적으로만 볼게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일본이 "국내박사""외국박사"보다 더 알아준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일본은 이미 메이지유신 때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한 문교장관도 갖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강기 드림

(20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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