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많이 하고 잘하는 대통령"과 "훌륭한 대통령"
(2004년 12월)
김영삼 대통령 시절, 어쩌다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이나 즉흥연설을 TV로 보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도 조마조마하여 손에 땀이 다 나고 용이 쓰여 숨이 가빠지기까지 했다. 대통령이 마치 카메라나 마이크 공포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에 조리도 없을 뿐 아니라 어디로 튈지 불안해 보이고 또 말 한마디 뱉는 것이 엄청나게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기록해 놓는다면 도무지 일국의 대통령 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논리도 주제도 없는 엉망진창의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날짜 신문에는 논리 정연한 대통령 담화문(기자회견문)이 실려 나왔다
.
내가 김영삼 대통령을 특별히 지지했거나 사랑했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그와는 대통령과 일개 백성의 관계밖에 안 되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너무 말을 못하고 머뭇머뭇 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TV에 나와 말을 더듬거리거나 횡설수설할 때도 공연히 조마조마한 생각이 드는 법인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대통령임에랴. 내가 이 정도였으니 그 때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던 사람들은 아마도 대통령이 대중 앞에 설 때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그런 "조마조마하고 용 쓰이는" 경험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대통령이 너무 말을 잘 하기 때문에 공자가 했다는, "말을 잘 꾸미고 얼굴을 잘 꾸미는 사람 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말이 자꾸 생각날 정도였다. 그는 말에 자신이 있어서인지 TV 토론회 등을 자주 열며 곧잘 대중 앞에 나서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도 말을 많이 하고 잘 하는 것과 훌륭한 대통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일 것이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된 후 김영삼 대통령 때의 그 "조마조마하고 용 쓰이는" 경험을 꼭 한번 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중국 청화대학에서 강연하면서 원고에 없는 말을 부연할 때와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할 때였다. 혹시 실수나 하면 어쩔까 하고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말이 차츰 조리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현대사의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하는 학생의 질문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얼떨결에' "모택동"이라고 대답했을 때는 수 천리 밖에서 보고 있는 내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대통령의 소신 있는 대답이었다고 우길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당시의 정황을 화면으로 자세히 관찰해 보면 분명 "얼떨결의 대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처럼 말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말을 함부로 한다 하여 자주 퇴방을 맞는 것을 보면 다행히 김대중씨만큼 말을 잘 꾸미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마치 대통령은 당연히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라도 사로잡힌 것처럼 자꾸 말을 많이 하고 특히 요즘 들어서는 "모택동어록"같은 어록집이라도 낼 요량인지 국내외로 다니면서 "명언"들을 자주 남기고 있는데 이 짬에서 꼭 한 마디 하고싶다. "말을 많이 하고 잘 하는 것과 훌륭한 대통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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