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과연 어떤 세기였던가?(9)
일본의 고도성장
- 글: 나까무라 다까후사(中村隆英)
- (1925년생, 東洋英和女學院대학교수, 동경대
명예교수, 역사통계를 이용한 昭和경제사분석의 제 1인자)
┌──────────────────────────────────┐ │20세기 초엽에 일본은
이미 인프라가 정비되어 산업화를 끝내고 있었다. │ │1920년대 이후에는 중화학공업체제도 확립한다. 戰後 일본의 고도성장
│ │은, 戰前과 戰時중에 준비되고 있었다.
│ └──────────────────────────────────┘
<> 전통의 大海에 떠 있는 근대산업의
"배" 20세기 원년인 1901년은 일본 연호로 치면 메이지 34년이다. 청일전쟁후 여러 기 업들이 탄생하여 산업화가 진행되고
설비투자도 증가해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있었 다. 20세기 전반기의 마지막 해인 1950년(昭和 25년)은, 패전과 함께 붕괴된
경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부흥한다. 이른바 고도성장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 이다. 20세기 일본경제의 하일라이트는 물론
세기 후반부다. 그러나 그 전반부에 이미 후반부 고도성장의 씨앗이 준비되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준비됐을까? 그런 시각 에서
일본경제의 20세기 전반부를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영국은 예외로 친다 하더래도, 일본은 구미제국에 비해 50년이나 늦은
1880년대부 터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 초입연도에는 이미 간선 철도가 놓여지고 은행이나 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製絲와 綿紡공업, 에너지원으로서의 탄광업도 활성화되고 있었다. 금본위제도도 청일전쟁 배상금을 기금으로하여 1897 년에
확립돼 있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은 아직도 요원했으며 중공업제품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 다. 노일전쟁 당시의 주력함 14척은
모두 영국을 위시한 구미제국에서 수입한 것 이었다. 이 무렵 산업활동인구의 60% 이상이 농민이었다. 비농업인구의 대부분도 직물,
식 품등 전통적인 소비재나 수출잡화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재래산업 취업자들이 었다. 농민 1인당 소득은 비 농립업의 60%
정도였으며, 다이쇼(大正) 중기(1920년 대 전후) 까지는 그 비율이 변하지 않았지만, 착실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근대식
산업은 높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었지만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비율 은 채 10%도 되지 않았다. 전통의 대해에 근대산업이라는 배가
흔들리고 있는 셈 이었다. 1914년에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큰 변환기를 맞게 된다. 1차 대전으로 인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입품절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기업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대전후의 중화학제품 수입재개로 몰락의 길을
걸 었지만, 용하게 살아남은 기업들이 일본 중화학공업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불황이 계속된 1920년대 말에도 철강, 기계등의
분야에서는 고급제품은 수입에 의존했지 만 통상제품은 아쉬운대로 국산으로 대체되었다. 1차대전 전에 건설하기 시작한 대규모 수력발전과
장거리 송전사업이 본격화하여 산업구조를 크게 변화시킨 것도 20년대의 일이었다. 직물업이나 제재업등의 재래 산업은 전동기를 도입한
중소기업으로 탈바꿈했다. 電爐공업, 전기화학공업등, 전 력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산업이 잇달아 출현했다.
<> 30년대에는
중공업도 개화
1929년부터 3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경제는 金解禁정책과 세계 대공황이라는 2중 의 타격을 받아 소위 昭和공황이라는
침체기를 맞았다. 生絲와 쌀을 위시한 농산 물가격의 하락 때문에 농촌의 곤경이 특히 심했고, 1차대전 후까지 상공업과 나란 히 신장돼
왔던 농촌소득이 크게 감소됐다. 대기업 - 중소기업 - 영세기업 - 농촌 이라는 소득서열이 생겨 이른바 "2중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공황탈출 후인 1930년대는, 20년대 이래 발전해 왔던 중화학공업의 개화시기였다. 면제품, 인견제품의 수출과 군수산업수요의
급증, 이른바 "滿州國"에 대한 투자등 에 힘입어 중화학공업의 생산이 급증했다. 日本産業, 日本窯業, 昭和비료등의 신 흥재벌이
일어났으며, 1935년에는 日産자동차, 豊田자동직기제작소(도요타자동차 전신)가 승용차를 생산했으며, 中島비행기(현재의 富士중공업)과
三菱중공업은 군 용기의 양산에 들어갔다. 금본위 이탈후의 엔저로 수출의 증가와 수입품의 가격등 귀현상이 일어나 국내산업발전을
촉진시켰다. 역사서술에는 "만약"이라는 禁句가 있지만, 만약 태평양전쟁에 의한 파괴가 없었 더라면, 고도성장은 10년 빨리 실현되었을
지도 모른다. 1936년의 2.26사건 이후, 군부의 정치지배가 노골화됐다. 국력의 한계를 무시한 군비확장이 시작되고 37년에는
중일전쟁에 돌입했다. 그 때까지의 순조로운 경제 발전이 전쟁 때문에 좌절되었다. 일본은 면방업도 중공업도 수입원재료에 의존하였고,
그것을 가공하여 수출해왔 다. 그러던 것이 "준 전시"체제라는 군부의 기합소리와 함께 수입이 증가하여 무 역수지가 큰 적자로
돌아섰으며, 37년 여름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수입을 직접 통제하고 소비재생산을 억제하여 군수산업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빠지 고 있었다. 국가총동원법으로 대표되는 통제법이 잇달아 나오고, 구체적인 통제는 행정명령으 로 시행되었다. 소비의 제한과
금지, 비밀거래의 처벌, 공정가격과 배급제, 병기 생산을 위한 설비투자등 모든 것이 명령 하나로 실시되었다. 사실상 이 때는
자유 경제는 커녕, 소련형의 중앙집권형 계획경제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 점령정책이 전시체제 타파
상품부족이
심각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그대로 태평양전쟁으로 연결된 것은, 남방 의 석유등 자원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사람과 재화 전체를
전쟁에 투입 하여, 300만명의 인명을 잃고 대.중도시 거의가 재로 변하여 국부의 4분의 1을 상 실해가며 전력투구하다가
항복했다. 전쟁은 거대한 손실을 안겨줬지만, 전후의 부흥과 성장의 종자는 전전과 전시에 발아하여 전후 정책을 비료로 순조롭게
자라났다. 우선 수력발전이나 중화학공업 의 설비와 인재의 대부분이 살아 남아 있었다. 군수공장에서 성립된 하청제도는 전후의 자동차,
기계공업으로 인계되었다. 전쟁말기에 성립된 군수회사지정금융기관제도는, 전후 구 재벌계 이외의 日本興業 은행, 第一勸業은행,
富士은행(芙蓉), 三和은행의 각 그룹등, 그 후 기업계열의 원류가 되었다. 전시중에 노동조합을 해산시키고 만든 産業報國會는, 기업별
노동 조합을 만드는 모체가 되었다. 점령기의 민주화정책도 전후 경제의 중요한 지주가 되었다. 공직에서 쪽겨난 많은 인재들이
기업경영자로 변신하여 적극적인 경영을 펼치게 되었다. 재벌해체.집중 배재정책은 재계의 서열을 타파하여 경쟁을 촉진시켰다. 농지개혁결과
가난했던 소작농들은 여유있는 자작농으로 변했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기업에 대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동조건의 개선을
실현했다. 전 같으면 도무지 실행할 수 없는 개혁이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해 실현되고 전 후 성장의 기초가 된 것이다. 전시시대
이래의 통제도 근본적으로 철폐되었다. 1949년, 데트로이트 은행장으로 있다가 트루먼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일본 맥아더 사령부로
부임한 죠셉 돗즈는, 인플레를 퇴치하여 재정균형을 이루고 고전적인 자유경제를 재건하기 위 해 크게 진력했다. $1=360엔의
환률을 설정하여 세계로부터 격리돼 있던 일본경제를 국제경쟁 속으로 끌어 들였다. 전시이래의 공정가격제나 보조금제도는 폐지됐다. 돗즈의
과감한 개 혁으로 일본경제는 자유경제의 원칙을 회복했다. 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일본경제에는 활기가 되살아났다. 미군의 "特需"로
50년 부터 55년에 걸쳐 생산활동도, 생활수준도 1930년대 중반의 전전 최고수준을 회복 하고 이어서 고도성장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니혼게이자이, 97.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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