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새로운 화이질서(華夷秩序)와 한국

이강기 2015. 9. 11. 11:18

새로운 화이질서(華夷秩序)와 한국

 

       - 스즈오끼 다까부미(鈴置高史) 니혼게이자이 편집위원


일본과 중국은「야스쿠니」참배문제로 생긴 양국 간의 균열을 수복(修復)하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여전히 강고한 반일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웬 일일까? 


수면 아래에서 변화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


나는 앞서의 칼럼「시작된 분열과 타협」(8월 18일)에서,「일본은 야스쿠니를 둘러싼 국내여론분열의 수복을 서두를 것이다」라고 썼다. 일본이 구체적으로「야스쿠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외국의 내정간섭은 배제하되 외국과의 마찰은 줄여야 한다.」라는 여론의 최대공약수를 반영한 행동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중국도 일본에 관계개선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중국 정부당국자 뿐 아니라 중국의 일본연구자들도 총 출동하여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여론이「반중(反中)」으로 집약되면 중국에게 득 될 것 없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에서다. 


이처럼 일.중 쌍방의 의도와 기대가 맞물려 일본에서 아베 신조 새 정권 탄생을 계기로 일.중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양국 간에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이 깊기 때문에 실질적인 안정을 찾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야스쿠니 참배문제로 일어난「소규모 전투」따위는 이번 기회에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변화를 무시하는 한국


한국은 왠지 이러한 변화에 둔감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들 수 있겠다. 하나는 한국인들의 주자학적, 관념론적 발상 때문이다. 


상당수 한국인들은 야스쿠니 비판을,「높은 도덕성을 자랑하는 한국인이 잘못된 역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나 일본을 꾸짖는다」는 도덕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일본과 중국 간에 싸우고 있는「야스쿠니」는, 아니, 외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본래 실리적 또는 현실적인 것이다.


중국은 처음부터「일본의 국내여론 분열을 이용하면, 고이즈미 정권을 고립시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공세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일본의 여론이 중국의 기대와는 반대로 경직돼 가고 반중(反中) 무드가 높아졌다. 고이즈미 고립화는커녕「반중」여론을 핵으로 하여 야스쿠니참배 지지가 높아지고 일본인을 더욱 단결시켜 갔다. 일본의 국내여론 분열을 이용할 수 없든가 또는 역효과라고 판단하면 중국은 당연히 전술을 바꿀 것이다. 


한편,「중국의 내정 간섭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본 사람들 중에도「중국과는 협력해야 할 현안도 많다」라고 인식하는 사람 역시 많이 있다. 예컨대 한반도 문제에서 그러하다. 북한이 붕괴된 후의 뒤처리 등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이해가 상당부분에서 일치한다. 이러한 발상은, 앞으로 북한문제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 외교의 큰 틀에서 일.중간에 상호 협력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도 작은 부분에서 미리 타협해 두는 것이 상호 이익이라는 이야기다. 


최근 일.중, 일.한 간의 일련의 움직임은 일종의 외교게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는데,「야스쿠니」문제를「정사(正邪)를 바로잡는 윤리적 행동」으로 보는 한국인들에게는 일본과의 안이한 타협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감정인 것 같다. 



중국에「접근하는」한국 


물론 한국에도 야스쿠니 비판으로 외교적 실리는 있다. 우선 역사 문제에서 일.중이 대립할 때 한국도 참견해 두지 않으면 “국가의 위신이 떨어진다.” 라는 판단이 항상 있어 왔다. 


예를 들어 2001년 교과서 문제로 일.중이 수면 아래에서 타협을 모색하고 있을 때, 한국정부는 몰래 일본정부에다 대고「중국 정도로 강경자세를 보이지 않았지 않느냐. 한국과도 대화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동맹국”인 한국의 체면을 깍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요청을 했다. 


그럼, 이번에는 왜 일본과의 협조자세가 전무한 것일까? 그것은 한.중 관계의 긴밀화, 좀 더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국의 중국에 대한 종속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야스쿠니 비판은, 종래의「한국도 논쟁에 참가한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일.중이 반목 했을 때는 “중국과 접촉한다”라는 자세를 표명한다」라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런 이상 당사자인 중국이 일본과 타협하기 전에 한국이 먼저 움직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일.중 관계수복 움직임을 보고서도 한국이 보지 않는 체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중국은 당초「일본의 국내분열을 이용하면 고이즈미 정권을 고립시켜 컨트롤 할 수 있다」라고 판단하여 공세로 나왔다. 하지만, 일본의 여론은 반대로 경화해, 반중 무드가 높아졌다. 고이즈미 고립화는커녕, 「반중」을 핵에 야스쿠니 지지가 증가해 일본인의 단결심을 높였다. 일본의 국내 대립을 이용할 수 없든가 혹은 역효과라고 판단하면, 당연히 중국은 전술을 바꿀 것이다. 



새로운 동아시아상(像)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동아시아의 화이질서관(華夷秩序觀)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세계의 중심에 있는 중국. 중국과 인접해 있는 그 우등생인 한국. 그 바깥  쪽에는 한국과 비교해 군사력은 강대할지도 모르지만 윤리적으로 뒤떨어지는 일본」―――. 최근의 여러 가지 움직임, 예컨대 경제적으로도 국제정치적으로도 초강대국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국. 장기침체로 인해 보통국가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일본. 그리고 「변함없이 윤리성이 부족한 일본의 총리」, 이런 구체적 사례들에 의해, 한국인들의 고전적인 세계관이 확실히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일본인들이 이 같은 세계관을 한국인들과 공유할지는 의문이다. 그런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한국의 외교정책은 향후도 일본과 계속 부딪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 화이질서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한국은 아직 일본인들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일.한(2005년 11월 7일)이라는 칼럼에서 “한국이 외교적인 축을 미국·일본으로부터 중국·북한으로 옮기고 있다”라고 쓴 바 있다. 이에 대해 몇몇 일본 독자들이「한국이 중국과는 다른, 민주주의라고 하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라고 의문을 제기해 왔다. 확실히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중국과 멀어질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한국에 대한 아름다운 오해」가 풀렸을 때, 일본이 한국을 보는 눈은 단번에 차가와지고 매정해지지 않을까 싶다.

(니혼게이자이, 20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