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民者罪狀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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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道의 賣文家 春園
李光洙(香山光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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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節의 名手 春園 李光洙(香山光郞)의 나의 告白》은 大體 누구더러 읽으라고 쓴 것이냐!
이것은 處世에 賢明하고 권력안에 念佛을 곳잘 외우는 筆者 李光洙가 가장 잘 알 것이다. 同視同根 皇道精神 皇道文化 이것은
8. 15 전에 春園 李光洙가 香山光郞으로 歸化하여 그 약한 몸을 무릅쓰고 親日賣族行爲를 하는데 들고 나온 看板이고 鐵石같은
信條였다. 春園은 죽었느냐! 李光洙는 어디로 亡命하였느냐! 8. 15 전 香山光郞이 청춘을 다시 즐기는 듯 머리를 박박
깎아버리고 所謂 國民服입고 皇道精神을 입고 皇道精神을 떠들며 돌아다닐 시절에 “설마 春園 李光洙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지금 감옥에 있든지
숨어있던지 그렇겠지”하고 善良하고도 純眞한 시골인사들로부터 애타는 문안편지가 주소 없는 곳으로 날아오는등 걱정 근심이 그래도 若干 있었으니!
그러나 슬프다 春園 李光洙는 벌써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죽지도 않고 香山光郞으로 옷을 갈아 입고 草露같은 인생에 한 번 멋있게 살다
가겠다는 생각에서 그의 形言못할 民族反逆의 言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上海에서 돌아 오지 않았거나! 차라리 붓대를 꺾어
버리었거나! 차라리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죽었거나! 차라리 保釋으로 醫專病院에 입원했을 때 죽었거나! 차라리 朝鮮日報 副社長을
그만두고 금강산으로 가서 휴양한다고 할 때 깊숙이 들어가 ‘중’이 되었거나! 아 이랬더라면 春園 李光洙는 朝鮮新文學의 開拓者로 또는 문단의
대 선배로 또는 民族主義者로 영원히 살 사람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一身의 安逸과 榮華를 위하여 民族을 背叛하여 自殺行爲를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부터 春園이니 李光洙니 하는 이름은 抹殺되었으며 李光洙 스스로가 香山光郞으로 이름을 뜯어 고쳤으니 “인생은 無常하다” “空手來
空手去 모두가 한조각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고 念佛을 외우는 李光洙로선 그까짓 지난날의 文名과 業績쯤은 또는 民族을 파는것쯤은 아침밥
먹기다. 그래서 李光洙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활활 털어 버리고 일본놈이 되려는 첫 출발로 香山光郞으로 이름도 아주 시원스레 고쳐 버리고 佛道에서
皇道로 거뜬하게 옮겨 앉아 피리를 유창하게 불기 시작하였다. 피리를 점점 익숙하게 倭놈들도 感興에 손벽을 치게끔 불게 되어지는 판에 皇道도
無心하게 판국이 갈리어 日章旗 대신 太極旗가 李光洙 눈앞에 휘날리면서부터 李光洙는 또한 재빨리 香山光郞을 자기집 다락에 모셔둔 가미다나(神柵)에
얹어놓고 神機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후 “내가 옛날 春園 李光洙요” “春園이요, 無情, 開拓者를 쓴-” 하고 다시 한번
行勢를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8. 15 전 香山光郞에게 짓밟히고 속아와 분노에 타던 이 땅 사람들은 오늘날 李光洙에게 속을 리 없고 속을
자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가 목에 念珠를 걸고 ‘諸行無常’을 외치며 소설을 쓴다고 해서 동정할 자 아무도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皇道의
광신자 香山光郞은 일본땅 황인신궁으로 가지 않고 ‘春園’이라는 號를 끄집어내어 가면을 쓰고 삼천리 강산이니 檀君子孫이니 하고 憂國志士然
愛國文學者然 하려다가 이번에 反民文學家의 거두로서 우리 ‘特委’손에 체포되어 神宮대신 刑務所監房으로 들어갔다. 李光洙가 60이 가깝도록
떠들어온 소위 自己反省이라는 어구를 僞善者 李光洙 자신은 과연 어느 만큼 實踐化하여 보았는가! 그는 自己反省대신 賣族行爲를 하였고 참회 대신
가증한 변명으로서 대행하여 왔으니香山光郞의 화신 春園 李光洙로선 지당한 일임에 새삼스러이 놀랠 것은 없으되 이런 僞善者의 亂舞를 망연히
바라다보고만 있는 이 땅의 체면이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民族正氣를 세우려는 反民法이 공포되고 首級反民者로써 老物 李光洙가 斷罪臺에
올라앉게 된 것은 그의 親日功績과 황국필승과 황민화운동을 위하여 애태우든 그의 健康狀態를 診斷키 위하여도 응당 있어야 할 일이다. 特警隊가
집으로 잡으러 가자, “자수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비겁한 탓인가 봅니다. 가기 전에 책이나 정리해 놓아야 겠으니 좀 기다려
달라” 고 李光洙는 부처님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이 표정도 오늘날엔 벌서 때가 늦은 것을 그도 잘알고 있으리라. “책은 집안 사람에게
맏기고 가자” 고 特警隊가 일으켜 세우자, “몸이 약하니 주사 한대를 놓아 드려야 겠다” 고 부인 許씨가 페니시린을 팔뚝에
놓자, 李光洙는 떨리는 몸으로 맞은 후, 刑務所로 앞서 들어와 있는 그의 동지인 친일거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西大門 刑務所에
李光洙는 일찍이 修養同志會事件으로 또는 安島山事件의 여파로 들어 왔었다. 그 당시 李光洙의 감옥행은 민족을 위한 일이었으나 오늘날 감옥행은
일제의 彈壓이 두려워 민족을 팔고 民族精神을 皇道化시키려던 反逆의 罪相을 안고 들어 갔으니, 다소 불경을 읽어온 李光洙 ‘無常’을 외우기
感慨無量 할 것이다. 取調光景 1949년 2월 9일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허리를 묶인 春園
李光洙는 특위取調室에 끌려나왔다. 《罪와 罰》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을 李光洙! 회색 솜 두루마기를 입고 핼쓱한 얼굴로 新聞寫眞班의
總攻擊을 받으며 茫然히 앉아 눈을 꿈벅거리는 그의 心中엔 무엇이 생각 키었을 것인가! 1. 上海時代의 李光洙 2. 無情 開拓者를
쓰든 時節의 春園 이것이 아니면 1. 文人報國會 時節의 香山光郞 2. 學兵强要의 붓대를 들던 때의 香山光郞 3.
皇民化는 言語와 生活樣式부터 고치는 데 있다고 떠들던 때의 香山光郞 이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일찍이 金九 先生이 解放後
還國時에 “李光洙 崔南善이 아직도 살아 있다지 죽일 놈 내 눈앞에서 이놈을" 하고 痛憤한 것은 이광수의 才操를 사랑함이요 島山先生을
모시고 上海에 亡命해 있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의 變節行爲를 누구보다도 서러워 하고 憤하게 여기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해외에 亡命한 志士들이
이토록 분개할진대 하물며 국내에서 咫尺에 두고 香山光郞의 狂舞를 본 우리들이랴! 더 무어라 形言하리! 靑天白日아래 李光洙는 용수를 쓰고
손에 고랑을 차고 調査官 앞에 앉아 있다 “이름은?” “李光洙요" “또" “春園 이라는 號가 있습니다" “또
없습니다" “香山光郞은 누구인가?" “日帝때 잠시 붙인 이름이지 李光洙가 틀림 없습니다" “日帝때 무슨 일을
하였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告白書를 쓸까 합니다" “쓰는건 別途에 붙이고 대답을 하라" “내가 親日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親日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 것 이외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뜻은 무엇인가. 감옥이 무서워선가.
그렇지 않으면 편하게 살아 보고자 反逆行爲를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너무 할말이 많아서 말로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할말이
많다는 것은 저지른 죄가 많아서 일일이 고백하기 어렵다는 뜻인 모양인데" “………" “皇道精神이니 皇道宣揚이니 하고 戰爭末期에 외치고
다니었는데 지금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學兵을 强要코자 總督 小磯의 命을 받아 李聖根, 金秊洙, 崔南善 등과 함께 東京에 간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가서 무엇을 말하고 돌아 왔는가?" “朝鮮을 위해 나가달라고 말하였습니다" 告白書의
內容 調査官앞에 所謂 8. 15 전까지의 自己行爲를 써 내놓았는데 修養同志會事件 以後 臨戰報國團 그리고 學兵强要次 東京까지 가게된
動機 等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12월 8일 大東亞戰爭이 일어나자 나는 朝鮮民族이 大危機에 있음을 느끼고 一部人士라도 일본에 協力하는 태도를
보여줌이 民族의 目前에 臨迫한 危機를 모면할 길이라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境遇에 희생이 되기를 스스로 결심하였다" 고
말하였고, “當時 政務總監 遠藤이 朝鮮人態度에 대 不滿을 가지고 있어 나는 생각다 못해 楊州에 은퇴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고
解放卽前을 말하였고, “東京까지 가서 學兵을 强要케 된 것은 學兵을 나가지 않으면 學兵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나가라고 권하였다" “잘하였다고 보는가?" “當時 小磯의 態度로나 情勢로 보아서나 學兵을 나가는 게 유리할 것 같아 말하였고 皇民化의
길만이 朝鮮民族이 살아나갈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同祖同根論도 사실 떠들어 댔는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 모든 것을 자기는 民族의 危機를 克服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며 學徒들의
고생을 덜기 위하여 東京까지 가서 애를 썼으며 가미다나니 皇民化니 모두가 民族을 平安히 살게 하기 위하여 약한 몸을 무릅 쓰고 애를 썼는데
反民行爲란 무슨 소리며 이게 사람대접이냐고 하는 듯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民族을 팔아 自己一身의 安樂을 누린 것을 民族을 위해
親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 可憎한 發惡을 보라! 民族을 위하여 해외로 亡命 또는 국내에서 지하와 감옥에서 생명을 바친 解放鬪士들을
嘲笑하고도 남음이 있는 李光洙의 말을 들어 보라! 붓대를 들고 싶거든 일본으로 건너가 香山光郞의 이름으로 들데 어찌 解放된 이 땅에서
마땅히 붓대를 꺾지 않고 어찌 감히 李光洙의 이름으로 ‘告白’이니 ‘돌벼개’니 하고 옛날의 文名 春園을 再湯하려고 드는 것인가! 용수를
한손에 쥐고 않아 告白書를 쓰겠다고 붓대를 들은 李光洙, 解放後 秋毫의 反省과 懺悔함이 없이 ‘나는 獨立國의 自由民’ 이라고 그의
親日同志 金東煥의 잡지 《三千里》에서 첫소리를 질렀고 계속하여 《꿈》 《스므살고개》 《돌벼개》라는 책을 내어, 愛國文學者然 세상을 속이려
하였고 《나의告白》 《親日의辯》을 써내어 “내가 親日한 것은 부득이 民族을 위해 한 것이라" 고 당당히 자기의 죄악을 巧妙히
辯明하려고 대드는 李光洙. ‘諸行無常’을 곧잘 외우며 철없이 《告白》의 속편을 쓰고 있는 皇道의 狂信者, 辯明에 능숙한 배우 香山光郞,
민족의 이름으로 斷罪받을 그는 앞으로 우리 앞에 무엇을 吐하여 또 웃기게 할 것인가! “아버지는 肺病으로 중태니 보석하여 달라" 고
嘆願하러온 어린 아들 앞에서 ??이 눈만 꿈벅거리는 春園 李光洙! “다만 재판을 기다릴 뿐이다" 고 고백서에 써 논
李光洙! 方今 다행하게도 肺病으로 보석이 되어 드러누운 李光洙! 그의 말대로 우리도 그의 재판을 기다려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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