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反民者 大公判記 - 金 性洙 篇

이강기 2015. 9. 11. 11:42
反民者 大公判記 - 金 性洙 篇    
 
『反民者 大公判記』
 金性洙 篇

(檢察官 金雄鎭)
罪名 反民法 第4條 2, 7, 10, 11 項 違反


[犯罪事實]


피고인은 단기 4254년 3월 일본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4255년부터 4272년까지 사이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위시하여 중앙상공주식회사, 만주국 봉천 소재 남만방직주식회사의 소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조선인 회사 급 일본인 회사 약 15개 회사의 중역으로 피임되어 조선방직 등 실업계에 상당한 권위와 존재를 보유한 자로서, 4265년에 경기도 관선 도평의원에 피선되었고 4272년에 만주국 명예 총영사로 피임되었고, 4273년에 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로 피임되었고, 4273년에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전쟁완수에 적극적 협력을 시키기 위하여 소위 임전보국단이라는 것이 결성되자 동 단 간부로 피선되었고, 4275년 초경에 조선인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적극 협력시키기 위하여 조직 결성된 국민총력연맹의 후생부장으로 피임되었고, 동년 말경에 조선의 장래 유익한 지식인 청년학도를 여지없이 말살시키기 위한 일본의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제정한 소위 학도지원병제도를 실시함에 있어서 그 제도의 정신과 취지를 고의로 호도 선전하여 순진한 청년학도의 심리를 혼돈 시키어 지원병으로 지원하도록 하기 위한 학병제도 유설사 동경파견단에 참가하여 동경 소재 명치대학 강당에 참집한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에게 학병제도 정신함양 강연을 한 것이다.


3千萬圓 富豪 金性洙 公判


금년 쉰 네 살 된 김연수(金?洙)는 전라북도(全北) 출신이다. 재벌(財閥) 김연수는 일제시 조선 사람으로서 만주(滿洲) 명예총영사로 임명된 후 일제에 대한 충성으로 연고를 맺어 일황(日皇)으로부터 견포수장(絹褒綬章)이라는 훈장까지 탄 황국신민이었다고 한다.
법정에 나선 김(金)의 얼굴에는 그의 까다로운 이름자(字)와 같이 까다로운 흠점이 만면하였다.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 초만원. 상오 11시 51분에 이르러 공판은 시작되었다.
심상준(沈相駿) 검찰관의 공소사실에 의거하여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학력은?”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나왔습니다.”
라고 큰 벼슬이나 받으러 온 듯이 뻔뻔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재산은?”

“약 3천만 원이나 됩니다.”


“가족은?”
전의 태도와는 달리 대답에 당황한 듯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고 재판장은 웃는 얼굴로,


“조사관 조서에 의하면 가족이 전부 2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네. 그쯤 될 것입니다.”
대갑부인지라 아마 본가족 외에 많은 군식구가 달려있는 모양!


“종교(宗敎)는?”

“별로 없습니다.”
재판장은 조서를 덮어놓으면서 오늘은 이 정도의 심리로 끝마치겠노라는 선언으로 개정 4분 후에 폐정되었다.
너무 짧은 심문이었음인지 방청석은 싱겁다는 듯이 가지각색의 소리가 귀를 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