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反民者罪狀記 - 變節한 歷史家 六堂 崔南善의 自列書

이강기 2015. 9. 11. 11:41
反民者罪狀記 - 變節한 歷史家 六堂 崔南善의 自列書    
 
反民者罪狀記』
變節한 歷史家 六堂 崔南善의 自列書

李光洙가 체포되던 3월8일 六堂 崔南善도 牛耳洞 自家에서 特委特警隊에게 체포되었다.
이날 아침 特警隊가 문을 두드리며 드러서자 《歷史辭典》의 원고를 주섬거리며 앉기를 권하고 =최남선==은 두터운 솜옷을 갈아 입은 후 채우는 고랑에 손을 내민 후 집을 나섰다. 崔南善은 朝鮮新文化運動의 開拓者로 또는 역사가로 燦然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 앞에 머리를 숙인 후 中樞院參議가 되었고 朝鮮史編修官이 되어 所謂 內鮮一體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려고 애를 쓰며 붓대를 놀리었고 滿洲建國大學의 교수가 되었고 전쟁말기에는 學兵을 强要動員시키고자 李光洙와 함께 東京에 가서 그 곳 우리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學兵을 나가라고 악을 쓰는 賣族行爲를 敢行하였다.
六堂 崔南善은 일찍이 己未獨立 宣言文을 起草하였고 당시 동경유학생으로 삼일운동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六堂 崔南善이 中途에 反民族行爲를 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단죄를 받게된 것으로 고랑을 차고 特委調査官 앞에 李光洙류의 변명이 아닌 自責의 自列書를 써 내놓고 麻浦형무소에서 處斷을 기다리고 있으니 獨立宣言文을 써내어 일제를 놀라게 한 그 손으로 오늘날 民族反逆行爲者로서의 自列書를 민족 앞에 써서 내놓게된 六堂 崔南善의 心境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정신적으로 이 땅을 파는데 활동하였으니 그가 建國大學으로부터 30만원을 받고 팔려갈 때 六堂을 항상 아끼던 爲堂 鄭寅普 先生은 5錢어치 술을 받아 가지고 최의 집 대문 앞에 부어놓고
“이제 우리 崔南善은 죽고야 말았다”
고 大聲痛哭을 하였다고 한다.


自列書
民族의 一員으로서 反民族의 指目을 받음은 終世에 씻기 어려운 大恥辱이다. 내 이제 그 指彈을 받고 또 거기 理由가 없지 아니하니 마땅히 恐懼이 省하기에 겨를치 못하려든 다시 무슨 口舌을 놀려 감히 文過飾非의 罪를 거듭하랴. 解放 以來로 衆謗이 하늘을 찌르고 構誣가 半에 지나되 이를 忍受하고 決코 탄하지 아니함은 진실로 어떠한 때라도 맛는 것이 自悔自責의 誠意를 나타내는 一端이 될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國法의 糾明을 만나서 事實의 眞相을 밝히려 하시는 上意를 거스르지 못 할 자리가 되니 진실로 들기 어려운 一筆을 들기는 하되 망연히 措辭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왕 이때 犯過受汚의 始末을 條列하여 審理上의 一助나 되기를 期하며 힘써 論說과 釋明을 避하려 한다.
나의 생활이 약간 社會的 交涉을 가지기는 12, 3세의 文筆 장난에 始하지마는 그때로부터 3. 1운동을 지내고 新聞事業에 浮沈하기까지에는 이 論題에 關係될 사실이 없다. 문제는 世間의 이르는 바 變節로부터 始하며 變節의 장은 朝鮮編修委員의 受任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方向轉換을 하였는가. 이에 對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定한 學硏事業이 絶對絶命의 危機에 빠지고 그 俸祿과 및 그리로서 얻는 學究上 便益을 必要로 하였었다는 以外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而來 십 수년간에 걸쳐 博物館設備委員 古蹟寶物, 天然紀念物 保存委員, 歷史敎科書 編訂委員 등을 受囑하여 文化事業의 進行을 參觀하여 왔는데 이 길이라고 반드시 平順하지 아니하여 歷史敎科書 같은 것은 弟一回 會合에서 意見衝突이 되어 卽時 脫退도 하고 朝鮮史編修같은 것은 最後까지 參涉하여 《朝鮮史》 37卷의 완성과 幾多史料의 保存施設을 보기도 하였다. 이 朝鮮史는 다만 古來의 資料를 募集排次할 것이오, 아무 創意와 學說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만치 그 내용에 今日 反民族行爲追究의 對象이 될 것은 一件一行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朝鮮史編修가 끝남애, 그 任職者들이 이리저리 區處되는 중에 대개는 어느틈에 中樞院參議라는 職啣이 돌아 왔다. 그런지 1년 餘에 中樞院 대문에도 投足한 일이 없고 所謂 滿洲 國立建國大學 敎授의 招聘을 받아서 감에 中樞院參議는 自然 解消되었다. 滿洲大學으로 갈 當初에는 印度에서는 =‘깐듸’== 露國에서 =‘트로츠키’== 中國에서는 ‘胡適’을 民族 代表敎授로 데려온다 하는 가운데, 나는 朝鮮民族의 代表로 가는 셈 이었지마는 朝鮮의 日本官吏는 民族代表란 것이 싫다 하여 百方으로 이를 妨害하고 일본의 關東軍은 그럴수록 代表의 資格이 된다 하여 더욱 잡아 끌어가는 형편이었다.
저희들 사이의 理想派와 現實派의 갈등은 建國大學의 最初定策을 歸虛하게 하였지마는 나는 그대로 留任하여서 조선학생의 訓導와 滿蒙文化史의 講座 其他를 擔當하고서 組彊의 踏査와 民族?爭의 實際를 구경하는 興味를 갖었었다. 建國大學의 조선학생을 어떻게 訓導하였는가는 當時의 建大學生에게 알아봄이 公平한 길일 것이다.
所謂 大東亞戰爭의 勃發에 神經이 날카로워진 일본인은 나를 建國大學으로부터 驅逐하였다. 故土에 돌아온 뒤의 궁액한 情勢는 나를 都會로부터 鄕村으로 내어 몰았다. 인제는 靜修內觀의 機를 얻는가 하였더니 移事에 짐을 運搬하는 途中에서 붇들려서 所謂 學兵勸誘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公開講演을 나서지 않든 내가 一般의 축축하는 문제로써 멀리까지 나감에는 自作之빈얼에서 나온 一動機가 있었다. 처음 學兵問題가 일어났을 때 나는 獨自의 觀點에서 조선청년이 多數히 나가기를 期待하는 意를 가지고 이것을 言約한 일이 있더니 이것이 일본인의 可居할 奇貨가 되어서 그럴진대 東京行을 하라는 强迫을 받게 된 것이었다. 當時 나의 勸誘論者는 此次의 戰爭은 世界歷史의 약속으로 일어난 것이매 結局에는 全 世界, 全 民族이 여기 參加하는 것이요 다만 행복한 국민은 順綠으로 參加하되, 不福한 민족은 逆綠으로 參加함이 또한 無可奈何한 일임을 前提로 하여, 우리는 이 기회를 가지고 理想과 情熱과 力量을 가진 學生靑年層이 組織, 戰鬪, 社會中核體 結成에 대한 能力取爲性을 養成하여 臨迫해오는 新運命에 對備하자 함에 있었다.
이것은 公開 非公開를 통해서 累千學生과 對論한것임에 내가 이런 말을 아니했다고도 못하는 동시에 들은 이 듣지 않았다 할 리 없으며, 그 詳細한 것은 또한 그런 이의 입을 빌었으면 한다. 太平洋戰爭은 豫期보담 일직 끝나고 우리의 所期는 죽도 밥도 다되지 않고 말았으매 남은 것은 나의 時勢에 暗愚함이오, 학생청년들에게 無養無愛하였음이오, 또 反民指彈의 一條添加뿐으로 되었다. 이에 대한 責任은 가장 痛切하게 느끼지 않지 못하는 바이다.
이상의 밖에 나에게 叢集하는 一罪白은 國祖 檀君을 속여 드디어 일본인의 所謂 內鮮一體論에 補强材料를 주었다 함이다. 上來의 몇낫 項曰은 일이다만, 一身의 名節에 관계 될 뿐임에 그 動機經過 乃至 事實實態에 설사 陣辯할 말이 있을지라도 나는 대개 忍?하고 만다. 그러나 이 國祖問題는 그것이 國民精神의 根本에 抵觸되는 만큼 一言의 辯破를 答曰치 못할 것이 있는가 한다. 대저 반세기에 걸치는, 나의 一貫한 苦行이 國史硏究 國民文化發揚에 있었음은 아마 一般의 承認을 받을 것이요, 또 硏究의 중심이 輕妄한 學徒의 손에 抹消撥閣되려한 國祖檀君의 學理的 復活과 및 그를 中核으로한 國民精神의 천명에 있었음은 줄잡아도 내 學究過程을 보고 아시는 분이 否認치 아니할 바이다. 설사 용루 淺識이 재법한 成果를 거두지는 못하였었다는 점만은 필시 大方의 公認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不可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國祖硏究에 대한 實蹟도 眞義가 一般으로 얼마나 認識되었을까 하고 實際에는 내가 檀君을 일본의 祖神에 結托하려 했다는 말이 꽤 流行하는 程度밖에 되지 아니함으로 보면 學說中 普及의 어려움과 및 그 大衆評價의 어떻게 虛無孟浪함에 다시금 浩嘆을 禁치 못할 것이다.
學理論을 여기 煩提함은 물론 옳지 않커니와 이제 다만 俗流說이 무엇에 根據되고 또 그것이 어떻게 曲解인 것을 揷摘하건데 내가 往年에 《不咸文化論》이란 것을 發表하여 東洋의 문화는 南北兩系에 區分되고 그 北區외 문화는 檀君의 古道를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요, 이 檀君文化는 실로 人類 全文化의 重要한 一部를 形成하는 것을 주장한 일이 있다. 그 중에는 자연히 일본도 檀君中心 文化의 一翼임을 言及하였었다. 이는 물론 學問的見解지마는 一邊으로 일본에 대한 精神上 長期戰에 對備하자는 意圖도 包含한 것이었다. 이 一論을 歪曲하여 나를 惡評하는 자가 있고 이것이 轉轉하야 所謂 ‘內鮮一體’의 主張者라는 奸言을 流布하는 徒輩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論說의 內容은 누구든지 바로 읽어보면 알 바로서 실로 檀君文化로써 일본은 勿論이오 全人類 文化의 一半을 包攝하자 한 당돌한 提案에 不外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당시의 韓日關係를 長時間 繼續할 것으로 보고 약간 不純한 經路를 밟고서라도 國祖信仰을 우리의 精神的 支柱로 確立하기를 企圖하여 이러면 될까 저러면 될까한 끝에 檀君神殿을 白岳山上에 宏大히 建設하여 所謂 朝鮮神宮을 壓倒할 策을 만든 일이 있었다. 이것을 일본인에게 開說할때에 일본의 神道原理로 보아도 조선의 國土主神을 모르는 체 할 수 없음을 理由로 하는 것이 당시 나의 主要한 論理였다. 오늘에 와서 보면 이것이 심히 危殆한 行程이라 할 것이지마는 이렇게라도 하여서 國祖檀君을 우리 膽拜感念源泉으로 번듯하게 信仰할 수 있는 機會를 만들었으면? 한 것이 당시 나의 觀念이었었다. 이 計劃은 相當히 희망이 있다가 마침 實現되지 못하고 결과로 얻은 바는 일본의 神社內容을 한 번 周視한 것 뿐이었다. 이 사실은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되, 실로 당시의 내가 苦心하면서 저지른 罪過이었다.
나를 內鮮一體論者로 橫言하려는 이에 이유 삼을 것이 이 兩端에 있겠지마는 前者는 심한 曲解니까 더 말할 것 없고 後者는 見解如何로써 是非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是거나 非거나 그것이 ‘內鮮一體’를 위한 행동 아닌 것 만은 나의 良心으로 宣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서 實際的 惡影響을 社會人心에 傳及한 것이었다고 보면, 나는 그 責任을 廻避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反民該當의 條件은 대강 以上과 같은 듯 하나 남이 보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罪目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 太平洋戰爭 末期에 나의 名字를 盜用한 僞造談話와 乃至 마음대로 變造改作한 新聞原稿 講演筆記의 중에 또 어떠한 것이 있을지 모르되 이러한 것에 대한 責任까지는 내가 질 수 없으며 또 설사 그러한 것들이라도 내가 當時에 機會있는 대로 强調하기를 마지 아니 한 ‘解放의 時代’, ‘希望의 接近’이라는 兩大眼目을 끝까지 掩蔽하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혹 戰爭末期의 某種團體 參加같은 것을 宣傳하는 이가 있으되 平生에 文化團體에 列名하기도 싫어함을 아는 이는 아는 바이며 다시 云謂할 것 없는 일이다. 나의 半生行程을 돌아볼 때 토막 토막이 失敗죄다 暗愚함에서 온 것을 얼른 謝過한다.
祖國의 歷史와 文化를 혼자 맡은 것처럼 걱정하여서 身分名譽의 어떻게 됨을 觀念하지 않고 그때 그때의 가능한 이것 저것을 하겠다고 날뛴 것이 이미 世間一流의 聰明한 사람들의 몸을 사리고 가만히만 있음에 比하여 確實히 暗愚 그것이었다. 前後 50년에 온갓 環境의 制約을 무릅쓰고서 祖國의 歷史와 文化 하나를 目標로 邁進할 뿐이고 그 路程이 가시덤불이거나 구정물이거나를 辨別할 줄 모른 것이 暗愚가 아니면 무엇이냐. 그만하면 일본이 敗倒하고 祖國이 ○復하여 志士仁人學者 能力者가 저절로 水湧山出하게 될 것을 예견치 못하고서 童心으로부터 壯血 壯血로부터 자白髮까지를 一貫하여 아무 것을 犧牲하여서라도 이 일은 내가 해야 한다고 固執하여 나온 暗愚相은 제가 생각하여도 우스우매 남이 보기에야 오죽 민망할 것이냐. 그 險難한 隘路를 겨우 뚫고 나오니까 거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 反逆의 影像을 그려내는 大明鏡일 줄을 暗愚한 내가 어찌 念到하였을까?
나는 분명히 一平生 一條路를 一心으로 邁進한 것을 自信하는 자이다. 중간에 艱辣한 環境 柔弱한 性格의 內外原因이 서로 合倂하여서 내 衣裳에 흙을 바르고 내 行履에 올가미를 씌웠을 지라도 이는 그때 그때의 外的 變貌일 따름이오 결코 心與行의 變轉變換은 아니었다. 이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以上의 强辯스러운 말을 더하지 않거니와 다만 朝鮮史編修委員 中樞院參議 建國大學敎授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벌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實際는 언제고 終始一貫하게 民族精神의 檢討 祖國歷史의 建設 그것 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天日이 저기있는 아래 敢然히 明言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그러나 또 나는 분명히 朝鮮大衆이 나에게 期待하는 點 곧 어떠한 境遇에서고 淸高한 志操와 剛熱한 氣魄을 지켜서 凜乎한 義士의 型範이 되어 달라는 常識的 期待에 違反하였다. 내가 變節한 대목 곧 往年에 身邊의 逼迫한 事情이 志操냐 學書이냐의 兩者中 其一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大衆은 나에게 志操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學業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大衆의 나에 대한 憤怒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나의 暗愚가 저의 걷고 싶은 길을 걸어서 修史委員 以下의 많은 汚點을 몸에 찍었다. 그런데 그것이 今日反民法 抵觸의 條件임이 明白한 바 이 법의 處斷을 받기에 무슨 卑怯한체를 할 것이냐. 도리어 峻嚴한 受刑 하나에 저의 責任의 輕減을 期함이 當然할 것이다.
反民法이 물론 그 법 그것으로도 尊重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威力가진 법이기 때문에 이를 무서워함이 아니다. 이 법의 뒤에 國民大衆이 있음을 알며 그네의 批判과 要求가 이 법을 통하여 表現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법에 그 法文 以上의 絶大한 權威를 感念하는 자이다. 까마득하던 祖國의 光復이 뜻밖에 얼른 實現하여 이제 民族正氣의 號令이 굉굉히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 앞에 肅然히 正襟치 않을 것이냐. 하물며 몸에 所犯이 있어 悚然히 撫膺白縮할 자야 오직 공손히 이 법의 處斷에 모든 것을 맏기고 그가 叱鞭楚를 甘受함으로써 조금만치라도 國民大衆에 대한 恐懼참謝의 衷情表示를 삼는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삼가 前後過戾를 自列하여 嚴正한 裁斷을 기다린다.
4282년 2월 12일
麻浦刑務所拘置中에서 崔南善
反民族行爲 特別調査委員長 前


崔南善의 經歷
庚寅 3월 8일 漢城南部 上梨洞에서 生 금년 60세
생후 13세까지 한문공부
光武 8년 일본유학 약 3년간 도서관 출입 中間 23개월 早稻田大學 地理歷史科在學中退
光武 10년으로부터 出版業開始 《新文?》으로써 新書籍編輯刊行 《朝鮮光文會》로써 古書蒐集刊行 及 國學硏究進行 此間 數次 被逮
己未年 3. 1운동에 提携 전후 34個月 在獄
釋放後 《東明》 《時代日報》 其他 新聞雜誌 關係 社會的 環境과 經濟事情이 다 盡頭에 서다
不記年 朝鮮史編修委員의 囑托에 應하여 爾來 諸種 文化面의 委員에 列名
朝鮮史編修事業 完了後 中樞院參議 被任
居末歲에 滿洲國立建國大學 敎授로 被聘 前後 4년간 在任
歸來後 牛耳洞 退伏 此間에 學兵勸誘演說을 위하여 東京에 갔던 일이 있다
解放 前後로부터 國史編纂에 精進 方今 《國史大辭典》 印行에 着手 전체 약 2000항의 一割까지 達하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