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도조 히데키 손녀 도조 유코 인터뷰기

이강기 2015. 9. 11. 15:58
도조 히데키 손녀 도조 유코 인터뷰기    
 
“야스쿠니 조선 영령에 감사한다”

일본을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
“할아버지 잘못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한 것”

 

 

한겨레21 길윤형

 

도조 유코(67·東條由布子)는 상냥한 할머니 같은 인상이었다. 밝은 미소를 띠고 <한겨레21> 취재진을 맞는 그의 표정 속에서 날마다 과격한 발언을 일삼는 ‘A급 전범’의 손녀라는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1년 10월18일 일본의 40번째 총리로 취임해 일본을 태평양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일본 강경 우파의 대변자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려온 도조 유코는 지난 5월 참의원 출마 의사를 밝힌 뒤 한·중·일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7월29일 치러지는 일본 참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의 선거 캠프가 꾸려진 도쿄 지요다구 히라카와초의 한 건물 1층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7월3일 오후 3시였다.
 


기억 속의 조부는 상냥하고 성실한 군인

도조 유코가 태어난 것은 일본이 아직 태평양전쟁의 참화에 빠지기 전인 쇼와 14년(1939) 경성(지금의 서울)이었다. 그 무렵 그의 할아버지는 육군성 차관이었고, 아버지는 당대 세계 최대 비료공장인 흥남질소비료 공장을 경영했던 ‘일본질소’의 직원이었다.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 됐지만 일본질소는 해방 전후 한반도 최고급 호텔로 이름을 날리던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터)까지 경영하던 일본 굴지의 대재벌이었다. “그때 압록강에서 수력발전댐(지금의 수풍댐)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부친은 그 일 때문에 경성으로 발령받아 근무했다고 들었습니다.” 유코의 부친은 1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이름해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는 총리로 취임했다. 그 무렵 어린 유코는 두 살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고관대작 집의 귀여운 ‘따님’이었을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주 가끔 저녁을 같이 먹은 기억은 있어요. 같이 살던 집 마당이 넓어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할아버지가 운동회 같은 것을 열기도 했죠. 사진에는 내 모습도 있는데,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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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자리에 오른 도조 히데키는 1941년 12월8일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과 동아시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는 총리 자리에 올라 내각을 구성하면서 내무대신과 육군성 대신 자리를 겸임해버렸다. 비밀경찰과 헌병을 동시에 통솔해 전쟁 수행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가 총리가 돼 일으킨 전쟁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은 물자 통제를 받았고, 혹독한 강제 공출에 시달렸으며, 남자들은 노무자나 병사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했다. 여자들은 위안부란 이름으로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됐다.

물론, 조선인들만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들도 그리고 전쟁의 총책임자를 가장으로 둔 도조 가문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에 유코의 어머니 사치코는 오빠 히데카쓰를 줄곧 총리 관저로 데려가곤 했다. 도조 히데키는 바쁜 시간을 쪼개 장손을 무릎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코의 기억 속에 조부는 상냥하고 성실했던 군인으로 남아 있다. 인품만을 놓고 본다면, 그의 기억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을 다룬 책 <마지막 황제>를 썼던 프랑스인 에드워드 베르는 1989년 펴낸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에서 “만주국의 일본군 고위 간부들이 모두 부자가 됐을 때도 도조는 여전히 가난했고, 박봉의 일부를 떼어 어려운 처지에 있던 예비역 동료들을 도우기도 했다”고 적었다.
 


△ 7월4일, 평일 한낮이라 그런지 야스쿠니신사 배전 앞은 한가했다. 배전은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한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다.

‘도조’라는 이름, 고난의 삶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은 단기전으로 승부를 가려 유리한 조건으로 미국과 협상을 맺는다는 작전이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전면전의 기세로 남태평양의 섬들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달아날 곳을 찾지 못한 일본군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옥쇄’(玉碎)했다. 도조 내각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흉흉한 암살 계획도 떠돌아다녔다. 도조 히데키의 큰아들 도조 히데타카는 아내와 어린 사남매를 데리고 지금의 시즈오카현 스루가만에서 가까운 작은 어촌 마을 니시우라로 몸을 피했다. 유코의 위로 오빠 히데카쓰가 있었고, 아래로 두 동생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부친 히데타카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시즈오카현 이토시로 숨어들었다.

유코의 삶에 닥친 첫 충격은 할아버지의 자살 기도 소식이었다. 1945년 9월11일 도쿄의 자택에 머무르던 도조 히테키는 전범 용의자를 체포하러 온 미군 헌병 중령 폴 크라우스의 방문을 받는다. 도조 히데키는 “살아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라”는 ‘전진훈’(戰陳訓)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는 미제 콜트 32구경 권총으로 심장을 쐈지만, 총탄은 심장을 피해나가 목숨을 건졌다. 미군들은 피를 쏟아내는 도조의 몸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옮겼다. 나중에 교수대에서 목을 매달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황이 가진 평화에 대한 의지에 반해 행동한 적이 있냐”는 국제전범재판소 수석 검찰관 조지프 키난의 질문을 받고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얼마 뒤 자신의 증언을 번복해야 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도쿄 전범재판’의 각본에 어긋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의 압력에 못 이겨 증언을 바꿨고, 그래서 히로히토를 전후 책임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도조 히테키는 유죄가 인정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1948년 12월23일 아침, 평소 좋아하던 담배 한 대를 피운 뒤 도쿄 스가모 형무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도조 유코는 “할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평생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전후 일본 사회는 전쟁을 일으켜 2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도조’라는 이름을 증오했다. 쇼와 26년(1951)의 일이다. 다섯 살 아래 남동생 다카유키가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남동생은 울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 학생의 할아버지는 도둑보다 더 나쁜 일을 했다”고 가르쳤다. 남동생은 “왜 할아버지가 도둑보다 나쁘냐”고 어머니에게 울며 물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매우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이후 유코는 “그 할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살자, 도조라는 이름에 걸린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도조’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코의 여동생은 길거리에서 구타당해 피투성이인 채로 집에 돌아왔고, 오빠는 학교에 다닐 수 없어 집에 개인교사를 둬야 했다. 삶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코의 여섯 가족은 다다미가 6장 깔린 방 한 칸에서 함께 생활해야 했다. 너무 가난해 비가 와도 우산을 사기 힘들었다. 도조 유코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정 형편 탓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제일생명보험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도쿄 히비야에 있던 제일생명 본사 건물은 그의 할아버지를 죽인 일본점령군사령부(GHQ)가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그런 가십들이 당시 잡지의 구석 페이지를 장식하곤 했다. 유코의 부친은 48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고, 이후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박물관 류슈칸에서는 태평양전쟁 때 사용됐던 여러 전쟁 무기들을 만날 수 있다. 진주만 폭격의 주인공 제로센의 모습.

일본 우경화 바람 타고 등장

어린 시절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유코는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직장 생활 6년 만에 입시 공부를 해 메이지학원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도조 유코의 본명은 도조 요시에(淑枝)인데, 요시에는 갈라진다는 의미인 ‘가지’라는 뜻이 있어 결혼하기 전에 도조 유코로 바꿨다. 결혼하면서 그의 이름은 다시 이와나미 유코로 바뀌었다. 네 아이를 낳은 뒤 유코는 고쿠시칸대학 교육학과 2학년에 편입해 1988년에 졸업했다. 마흔여덟 살에 받은 졸업장이었다.

평범한 할머니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이와나미 유코’가 일본 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일본 우경화의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가 도조 유코로 이름을 바꿔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8년이다. 그해 5월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라이드: 운명의 시간>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그 영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에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마음속에 묻어둔 할아버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쟁을 경험했던,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인식하던 세대는 줄어들었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이 지난 전쟁을 찬양하는 ‘전쟁론’ 같은 만화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야스쿠니신사는 그의 할아버지가 저질렀던 일들을 정당화했고, 그 영혼을 일본을 위해 숨진 호국영령으로 기꺼이 모셔줬다. 도조 유코는 “태평양전쟁이라는 표현보다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잘못한 일이라면 (백인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전쟁에 패한 일이겠죠. 저는 여전히 일본인이 백인들의 침략에 용감히 맞서 싸웠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성노예의 존재를 부인했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좀더 당당한 모습으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7월29일, 그는 당선될 것인가

“정확히 해둬야 할 게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쇼와 28년(1953) 이후 전범이란 말이 없습니다. 당시 일본 국회에서는 전범이라는 말을 다 ‘법무사’라는 말로 바꾸자고 결의했거든요. 할아버지같이 법무사가 된 사람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국내 문제입니다.” 그는 “야스쿠니신사를 문제 삼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 국립묘지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며 “일-한조약에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이 있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야스쿠니신사에서 도조 히데키의 억울한 죽음이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도조 유코는 믿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을 찾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벌이고 있는 오키나와 민중조각가 긴조 미노루는 “대화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도조 유코는 “한국인들은 일-한합병이라는 민족적 슬픔이 있었지만, 그런 슬픔을 극복하고 일본 군인으로서 열심히 싸워주었다”며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민족의 슬픔을 넘어서 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했던 조선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일본인들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의 상식 속에서 일본인으로 싸우다 죽은 한국인들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그들을 합사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차별’이 되며, 아버지의 영혼을 돌려달라는 유족들의 주장은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주장’이 되고 만다. 그의 말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겠지만, 그 진심이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유족들에게 견디기 힘든 분노와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다는 인식은 찾기 힘들었다.

7월29일 치러지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도조 유코의 당락 여부가 일본 정치의 판도를 흔드는 주요 뉴스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당락 여부는 앞으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의 속도와 흐름을 점쳐보는 풍향계는 될 수 있다. 그는 “내가 도조이기 때문에 선거에 출마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사회가 이렇게 국력을 해치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영국의 대처 총리는 지난 포클랜드전쟁(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놓고 벌인 전쟁)에서 ‘철의 여인’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여왕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한 우리 유니온잭(영국 국기)들은 어디라도 싸우러 간다’고 말했어요.” 도조 유코는 “그런 독립국가의 강함이 좋아 선거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일본 국민들은 요즘 그런 강함에 굶주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치 현장에 나가 일본의 그런 강함을 보여주고 싶어요.” 도조 유코의 진심은 아시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무엇인가 꽉 막힌 듯 답답한 느낌을 떨치기 힘든 인터뷰였다.<한겨레21, 07.07.19>
 

 

일본 군부가 길러낸 최고의 엘리트

확전을 주장하며 총리에 오른 도조 히데키, 그가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파국을 향해 질주하던 군국주의 일본 군부가 길러낸 최고 엘리트였다. 1884년 일본 도쿄에서 육군 중장이던 도조 히데노리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 15살 되던 1899년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해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밟아나갔다. 어릴 때부터 융통성은 없지만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을 가진 노력파였다고 한다.

190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보병 장교로 초임 장교 생활을 보내던 그는 일본 군대 엘리트에게만 입학이 허락된 일본 육군대학에 1911년 입학했다. 졸업과 동시에 군위보병 제3연대 중대장으로 임관했다. 이후 승승장구의 출세길을 달려 관동군 헌병사령관(1935), 관동군 참모장(1937), 육군차관(1938) 등을 역임했다. 1940년 제2기 고노에 내각의 육군대신이 된 뒤 중일전쟁 확전을 주장했고, 미국과의 유화론을 주장하는 고노에 총리에게 “어떤 압력에라도 굴복하면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다음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41년 제3기 고노에 내각이 퇴진한 뒤 10월20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며 내무·육군대신을 겸임했다.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라’는 ‘전진훈’을 시달한 것도 육군대신 시절의 그다.

일본은 악화일로를 치닫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벌이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941년 12월1일 어전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됐다. 1941년 12월8일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의 막이 올랐다. 개전 이후 독재정치를 강화한 그는 충실한 전쟁의 집행 책임자가 된다. 1943년 군수성을 설치해 직접 군수성 장관이 됐고, 문부·상공 장관까지 겸임했다.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했으며,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의 독재는 언론 탄압으로도 이어져 도조의 정책을 비판한 <아사히신문>은 발행이 금지됐으며, 사설을 쓴 신문기자는 할복 자살하는 지경에까지 내몰리게 된다. 마리아나에서의 대패와 사이판 함락으로 전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국내의 비판 의견을 이기지 못하고 1944년 7월18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종전 뒤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히로히토 천황을 대신해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돼 1948년 11월12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해 12월23일 이제는 공원 터로 바뀐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