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글

일본통치에 대한 순응과 이탈

이강기 2015. 9. 15. 21:42

(친일파 청산이란 다분히 네거티브한 거센 정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는 한편으로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를 차분하게 다시 조명해 보자는 포지티브한 움직임이 일부에서 일고 있는 요즘, 외국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비교적 냉정하게 다룬 글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1999년에 번역하여 2000년 초에 책으로 나온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제 4장 "전체주의적 식민정책"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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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치에 대한 순응과 이탈

 

 

 

  일본의 조선통치(1910-45)는 다른 식민지사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조선은 대만, 만주와 함께 그 당시 비 서구국가에 의해 지배된 유일한 식민지다. 식민지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종족상으로 상당히 유사했으며 지리적으로도 가까웠다. 문화, 정치, 역사상의 경험은 달랐지만 다른 대부분의 식민지와 그들의 주인들처럼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35년간으로 다른 많은 식민지의 경우처럼 짧았으나 그러나 유별나게 혹독한 것이었다. 조선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치안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군들에 의해 철통같이 옥죄었고, 그 억압 수법은 식민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어느 곳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지독했다.
  일본의 조선통치는 과단성이 있던 반면 철저하게 전제적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장기간에 걸쳐 척식국(拓殖局)이 관리하고 척식국은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총리대신의 감독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유일한 일본의 식민지였다. 첫 9년간 조선을 통치한 총독들은 형식적으로는 총리대신이 임명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육군원수이며 군의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공작이 추천한 사람들로서 그의 비호와 지시를 받았다. 야마가타는 자신과 같은 죠슈 군벌(長州閥) 출신의 고급장교들이 총독이 되도록 힘을 썼다.(1) 총독은 행정적으로 거의 전권을 휘둘렀으며 식민지 지배가 끝날 때까지 직접 천황에게 상주했다. 대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법은 정령(政令), (총독)부령(府令), 총독의 명령이나 포고에 의해 행해졌으며 거의 자동적으로 총리대신을 통해 천황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돼 있었다. 총독의 입법권능은 의회의 그것과 대등한 것이다.
  입법권은 조선내부에 의회가 없기 때문에 선거로 뽑히지 않은 관리에 의해 전제적으로 행사되었으며, 그리고 1919년까지는 일본 제국의회에 대한 책임마저 지지 않고 통치했는데, 이것이 과연 제국헌법에 부합되는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일본인들마저 의아해 했다. 1918년 이후의 일본에서의 정당내각 출현과 1919년 조선독립운동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천황직속의 총독제도는 폐지되고 총독은 형식적으로 제국의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조선통치에 관해 제국의회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었다. 법률상으로는 1919년부터 문관을 총독에 임명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실제로는 최후까지 문관총독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총독이 군인, 그것도 거의가 현역군인이었다. 1942년 11월에 조선통치가 내무성 관할로 이관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총독이 일개 내무대신의 휘하에 종속될 수는 없었으며 끝내 내각 총리대신과 거의 동격으로 일관했다.
  식민지 통치자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질적으로 한결같았다. 예컨대 가혹하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헌법상으로나 혹은 인민에 의해서나 억제력이 전혀 없는 관료적 행정이었는데, 일본인들은 행정능률이 높은 것만을 내세우며 그들의 횡포를 정당화했다. 일본의 조선 통치자세는 두 가지 일본 전통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가장 위대한 행정관이었던 고토 심페이(後藤新平. 대만 총독을 지낸 사람으로 일본에선 그의 총독 재직시 탁월한 행정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옮긴이)에 의해 대만에서 확립된 전통이다. 고토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문관출신의 메이지시대 지도자인데, 식민지의 정무를 일본 본토의 행정 또는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철저히 분리시켰다. 그는 이 분리를 본국정부가 "현지사정"에 관한 지식이나 견해에 어둡다는 이유로 정당화했다. 지방의 사정을 일본인들보다도 현지출신 행정관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다는 논리였다. 
  또 하나의 조선통치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은 일본의 조선정책에 관해 야마가타 공작의 "강경노선"이 승리했다는 점이다. 그의 입김이 미치는 가쯔라(桂太郞, 야마가타와 같은 죠슈출신) 내각(1901-06, 1908-11, 1912-13) 시대의 강경노선은, 형식적으로 조선을 독립시켜 "온정적으로" 통치하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시도를 결정적으로 와해시켜버렸다.(2) 야마가타와 가쯔라의 생각은, 독립된 조선은 일본과 극동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며, 조선의 경제적 행정적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강력한 지도가 필요하고, 또 궁극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시키는 것만이 사회정책적 목표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자들을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굴복시키고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 일본의 급진 개혁적 사상가 - 옮긴이) 이론의 명백한 계승이다. 조선의 정치적 발전 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노선에서 조선은 당연히 정치의 싹이 돋아날 여지가 없는 행정국가의 전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국민이나 신문도 1901년 이후 사실상 한결같이 이 노선을 지지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일본의 조선통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을 보여주는 것이다.(3) 이런 정책은 1930년대의 무력에 의한 새로운 영토확장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일본과는 이질적인 조선문화의 말살, 고유한 언어인 조선어의 폐지, 고유한 민족인 한민족의 절멸정책으로 발전했다. 근대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정책에 비춰보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만큼 과격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자랑스런 전통과 긴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인민을 포용하고 있는 조선에 대해 채택된 이런 정책은 당연히 조선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굴욕감과 분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자살행위와 같은 폭력적 반항을 결행하지 못한 조선인들은 이런 "일본화"에 광분하는 독재정치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인 노력도 해 보았지만 어느 나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정으로 조선인들의 주장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은 전횡적인 독재정치를 최초로 경험한 유일한 극동민족이다. 만주인들은 청조(淸朝)시대에 중국의 황제독재에 대한 조선의 복종을 유교교리상의 군신관계로 치환(置換)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그러한 방법을 용납할 만큼의 튼튼한 유교적 기반이 없었다.(4) 조선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좀더 많은 길이 있었기 때문에 과두집단에 의한 독재정치를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에 의해 약화된, 대간과 유교신봉자들이 간언(諫言)하는 모든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종래의 과두지배적 중앙집권주의가 외국의 관료적 중앙집권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동시에 최대한 신중하게 새로운 정보전달 채널이 옛 것을 대체했다. 신문은 탄압을 받았다. 1919년까지 어떠한 종류의 조선어신문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 후 겨우 발간하게된 3개의 조선어신문도 엄격한 검열을 받았다. 과거에 거대한 양반계급만의 도락이었다가 근래에 급속히 계급의 제약이 풀린 정치활동은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일상 생활 면에서 일반의 평범한 시민들은 확실성과 안정성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감, 통한, 좌절감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한때 양반들의 특권으로 여겼던 유동적인 정치와 끝없는 토론은 사라지고 그 대신 무력과 현대적 통신망에 의존한 능률적이고 확고한 목적을 가진 관료주의적 정치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되었다. 일본 관료들은 조선을 물이 한 방울도 새지 않는 거대한 물통처럼 통치했다. 중앙권력에 대한 무력감이 더욱 강렬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정신을 빼앗겨, 권력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권력에 접근하여 출세하려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어느 쪽도 규모가 작지 않았다. 어느 쪽도 각각 다른 생각들을 갖고 있었으며, 식민지정부는 거대한 권력을 갖고 모든 부문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독재적인 권력정치는 조선과 대만의 또 하나의 독특한 식민지적 요소 때문에 더욱 혹독해지고 확대됐다. 바로 엄청난 수의 일본인 지배계급이 그 곳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은 조선 땅에 장기간에 걸쳐 정주한 적이 없다.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초두의 일이다. 그들 대부분은 규슈출신의 가난한 사람들로서 돈을 벌기 위해 왔다. 그들은 주로 가게를 열었는데 그것이 1890년대 지방도시로 확대되었고 1905년까지는 "전국적인 판매망"을 가지게 되었다.(5) 일본의 통치권 확립과 이주장려로 일본의 "식민자들"이 계속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1882년에 3천 622명이던 것이 1905년에는 4만 2천 460명이 되었고, 1910년에는 17만 1천 543명, 1918년엔 33만 6천 812명, 그리고 1940년엔 무려 70만 8천 488명(인구의 약 3.2%)에 이르렀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일본인들은 그들이 쫓아낸 양반(향반 제외)들의 수를 웃돌았다. 1937년에 이 일본인 이민의 최대집단은 이민의 41.4%를 점하는 공무원들이었으며(조선인 공무원은 주민의 겨우 2.9%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모두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식으로 관청이라는 곳은 추종자들이나 아첨꾼들로 북적대기 마련인데 이제는 면(面)단위 이상의 관청에서 조선인들이 거의 사라졌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일본인 공무원들은 깊숙한 사무실에서 냉정하고 엄격하며 용서 없는 행정을 폈다. 1938년에는 조선에 있는 일본인 주민의 거의 16.6%가 공업에 종사하고, 23.4%가 상업에 종사했다. 이에 반해 조선인들은 인구의 2.6%가 공업에, 6.5%가 상업에 종사하고, 한편 75.5%가 농업에 종사했다.(6) 1944년의 조선인 취업인구 가운데 남자의 95%, 여자의 99%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이 부문별 숫자를 나열하는 것 보다 당시의 사정을 보다 더 잘 말해준다. 조선인들은 11.5%밖에 도시에 살지 못한데 반해 일본 주민들의 약 71%가 도시에 살았다.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경제수준 아래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격차는 일본의 영토확장과 전쟁이 확대되면서 시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증대되어 일본인들을 한층 더 풍요한 엘리트로 만들었다. 조선인들 역시 1941년부터 젊은 일본인 매니저 급들이 징병으로 자리를 비움에 따라 더 책임이 크고 보수가 많은 직위로 오를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비율은 아주 적은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정부기구확대와 경제적 근대화라는 상승물결을 손가락을 빨고 바라보고 있을 뿐, 거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 엘리트들이 쌓은 두꺼운 벽에 저지돼 정부에 참여하는 것도 경제근대화에 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것은 세계 식민정책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인데, 굳이 말한다면 프랑스의 튀니지 지배에서나 그 비슷한 예를 볼 수 있다.
  만약 일본인들의 동화(同化)정책이 좀더 현실적인 것이었다면 조선인들과의 거리가 훨씬 좁아졌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에 대해서 충분히 가졌던 인식, 즉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속한 여러 조직이나 집단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체 그들의 정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깐깐하고 배타적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생활했으며 조선인들과 협조하며 사는 일본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7) 조선인 멸시는 그들의 단체기풍에서도 보였다. 이런 차별을 거부한 극소수의 일본인들은 자기들 그룹에서 따돌림을 받았으며 때로는 수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1924년까지 겨우 360쌍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결혼을 했을 뿐인데, 이것은 문화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소수그룹인 미국인과 한국인들이 1964년과 1965년에 행한 결혼 건수보다 적은 숫자이다.
  조선인들이 광범위하게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인들의 감정이나 태도에 관해 일본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이해를 못하고 동정하지 않은 것은 이런 사실상의 민족차별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인들은 내심 적의를 가졌지만, 그런데도 자신에게 필요한 이익을 얻거나 출세를 하기 위해 식민지적 복종의 본성을 보였다. 조선인들의 고충은 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불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일본인들의 벽이 점점 더 두꺼워지고 배타적으로 됨에 따라 조선인들은 정치로부터 점점 더 단절되고 고립됐다. 권위주의적일 뿐 아니라 치밀한 감시와 광범위한 억압을 통해 일본인들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더욱 강화 됐다. 그것은 조선인들에게 절망적인 분위기를 안겨주었다. 일본에 대해 가장 열심히 협력한 사람들까지도 첫 10년간의 식민통치에 대해 볼멘 소리를 했다.(8)
  경제적 착취가 진행됨에 따라 일반 조선인들과, 일본인 및 일본에 협력하는 조선인 유력자들 사이의 거리와 단절이 더욱 확대됐다. 토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에 적절한 토지등록제도가 없고 조선의 토지소유제도의 불명확성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1911년부터 1918년 사이에 거의 완벽한 토지대장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조선인 농민들은 의무적으로 등록해야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부정확하게 등록해 토지를 잃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타인 명의로 등록돼 있는 양반의 토지처럼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다수의 토지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가 일본인 지주나 조선인 지주들에게 양도했다. 토지소유권의 확립, 조선 쌀의 수입 필요성, 시대상황의 안정, 자본주의의 성장, 관개 및 기타 요소들이 지주들에 대한 지대(地代)를 높이는 결과가 돼 결국 지주들의 소유지를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농지를 소유하지 않은 조선 농민의 비율이 1918년의 37.7%에서 1932년에는 53.8%로 늘었다. 1938년에는 농민 가운데 19%만이 자작농이며, 25.3%가 차지(借地) 또는 반 자작농이고, 소작농은 55.7%나 됐다. 1942년에는 약 4%의 "지주"가 전체 논(水田)의 40.2%를 소유했다(9).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농민 프롤레타리아가 점점 더 늘어갔다. 이런 사실은, 한편으로는 큰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토지를 잃은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을 일본이나 만주로 몰아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 없는 사람들의 증가, 농촌의 학교 건설, 통신과 교통시설의 확대, 교환경제의 발달 등으로 농민들의 자급자족적이고 고립적인 경제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농민들이 손실을 입고 게다가 그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권력기구로부터 소외돼 있었기 때문에 점차로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식민지 지배는 또한 일반 서민들을 이전의 조선 지배계급으로부터 이반시켰다. 옛 지배자들은 본래 꽤 배타적이던가 무능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기대를 받지 못했고,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수가 더욱 심한 악평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1910년까지의 친일내각 때 조선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 합방 때 왕실과 관련이 있거나 1904-10년(일진회 활동시기)까지의 대한제국 내각의 구성원이던 76명은 일본 작위(爵位)와 1만 5천 달러에서 7만 5천 달러 가량의 하사금 제의를 받고서 대부분 이를 수락, 새 정부(총독부)에 대한 충성심을 표했다. 다만 이 가운데 8명은 일본이 내린 작위를 당장 반납했고 다른 5명은 1919-20년의 독립운동 시기에 반납하거나 잃어버렸다.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데 필요한 물질적 기초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수락을 거부한 사람들은 거의가 몰락했다. 또한 '이왕가(李王家)'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상류계급과 그 파벌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뽑은 3천 645명의 구 관리들에게 은급(恩給)을 내리고 퇴직시켰다.(10) 지도계급을 침식해 붕괴시켜간 과정은 이미 우리들이 보아온 것처럼 노련하고 긴 그리고 단계적인 것이다. 비록 그들 중 대부분은 당연히 그러한 은급을 받아들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위신 때문에 망설였다. 이젠 궁중도 상위층 양반들도 더 이상 지도계급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일본인들로부터 작위를 받았든지 거절했든지 간에 이들 모든 "지도계급 사람들" 중 다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해 성공했거나 독립운동 혹은 전후의 한국정계에서 지도자로 부상한 사람들의 이름을 단 몇 명이라도 찾아내기가 힘들다.(11) 적어도 1919년 이후 조선은 영향력을 가진 지도계급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법 이론과 그 적용은 억압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조선인들을 정치로부터 떼어놓아 단절을 심화시켰다. 조선 고유의 법률을 대신해 일본인 전문가들이 편찬한 훨씬 포괄적이고 복잡한 법체계가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다. 그것은 유럽 특히 독일법을 모방한 것이다. 이 법체계 도입 때 조선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은 거의 소수 사례 밖에 인정되지 않았다. 조선의 법률이 부분적으로 계승된 것도 있지만, 그것도 거의가 조선 말기에 일본인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외에 조선의 법률은 총독에 의해 또는 도쿄에서 조선에 만 적용하기 위해 제정된 칙령이나 법령으로 성립됐다.
  조선시대의 법률은 거의 완전히 외국법 즉 중국의 법률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외국색이 강렬했지만, 수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인들이 법전을 쓰고 다듬고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 마을에까지 유교문화가 확산되면서 이 외래적 색채가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선법률은 조선인들이 가정이나 시골에서 접하는 윤리제도와 일치하게 되었다. 그것은 군수가 기타 업무와 함께 관장하였으며, 법률 전문가는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2, 3 명의 중인출신 서기들이었다. 재판 때 지방관리들의 "지혜"는 많은 민화(民話)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일본식 법률제도는 조선민중들과 그런 관계를 가지지 못했고, 일상생활의 어떠한 부문과도 관련이 없으며, 통치자와 경찰만이 유용하게 이용하는 제도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1912년의 데라우찌(寺內正毅)총독 암살미수사건, 1919년의 독립운동, 1918년의 토지조사 때는 물론 일본인들의 이익이 조선인들의 이익과 상반될 때는 언제나 고문제도가 원용됐다. 피치자와의 합의나 개인을 위한 재판제도라고 하는 개념은 멀리 아득한 곳에 있었다.
  사법제도의 확대와 전문화는 사법의 엄격성, 그것의 전능한 힘의 과시, 그리고 또한 법으로부터의 인간성 상실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과거에는 느슨하고 간헐적이던 법률체계와의 접촉이 이젠 크게 증대하고 조선은 명령에 의해 통치됐다. 조선인들은 관헌의 도움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자의적인 관헌들의 권력행사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근대적인 치장을 한 이런 과정이 조선인들을 근대제도 자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법률이나 행정결정에 대한 존중이 일반 백성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으며, 지방의 유교 엘리트들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강력하게 주입된 복종과 법 준수 관념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존중되지 않은 이국의 법률은, 조선 엘리트들의 지위가 계급적으로 붕괴되고 정치적 존경을 잃어버린 데서 연유한, 규준(規準)과 환경의 상실로 생긴 장벽 때문에 제대로 수행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많은 조선인들은 법망을 몰래 빠져나가던가 법을 위반하는 것을 자랑하거나 칭찬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정치범이 징역형을 선고받는 것은 훈장을 수여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일반 범죄인들마저 자신들의 복역사실을 정치적인 것으로 각색했다. 훌륭한 예절과 선행으로 오랫동안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을 들어왔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 절도, 밀수, 아편밀매, 부정 등 범죄를 생활수단으로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사랑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조선인 사회는 법에 대한 불복종으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일본인)에게 보복했다. 옛날에는 잠그지 않았던 대문이나 현관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부잣집 담벼락 위에는 유리조각들이 촘촘히 박히게 되었다. 담벼락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고립도 더욱 깊어갔다.
  또한 담벼락이 높아질수록 억압수단도 강화돼 갔다. 법률에 의한 취채(取締)는 일본 통치 초기부터 시작돼 계속 그 도를 높였다. 청.일, 러.일의 양 전쟁으로 진주했던 일본군들은 1905년 이후 계속 수도의 경찰을 헌병대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07년 이후에는 일본 내무성이 경찰을 통해 각종 집회를 해산시키거나 규제하는 완전한 권한을 행사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침략에 반대하는 산발적 저항이나 지방의 반란에 대해 일본은 헌병대를 증강시켜 대처했다. 데라우찌 총독은 교활하게 "야만인들을 통제하는데는 경찰보다도 헌병대가 제격"이리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도 치안관계 뿐 아니라 학교등록, 인가, 기부권유, 첩보수집 등으로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인원규모를 늘렸다. 1906년에는 678명의 일본인 경찰 "고문"과 1천 39명의 조선인 경찰관이 있었는데, 1911년에는 6천 222명(그 반수가 조선인)으로 증가됐고, 1919년에는 약 1만 4천명에 달했다. 1919년 8월, 3.1 독립운동 유발로 인한 국내적 국제적 압력 때문에 헌병대가 폐지되었지만, 헌병 대부분이 경찰관으로 옷을 갈아입는데 불과하다. 경찰전화를 비치한 소도시나 마을 주재소들 사이에 설치한 통신망이 사실상 1950년 한국전쟁 후 까지도 지방의 통신을 전담했다. 1922년까지 경찰관 수가 2만 771명으로 증가했다. 중일전쟁은 경찰력의 증가를 크게 촉진시켰으며, 1941년에는 전투경찰을 포함하여 약 6만 명으로 늘어나 조선인 400명에 1명 꼴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년간 그들은 정치, 교육, 종교, 도덕, 보건, 사회복지 부문의 주된 통제기관이었으며, 인구통계에서 수뢰사건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전국 방방곡곡에까지 미쳤고 일상생활까지 엄격하게 통제될 정도로 전제적이었는데, 이 보다 훨씬 느슨했던 조선시대의 지배와 현저한 대조를 보였다.
  경찰에 의한 지배효과는 문화적인 요인들에 의해 더욱 심화됐다. 일본에서는 하급무사들을 경찰관에 등용했기 때문에 경찰관들이 어느 정도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에서 종래 경찰기능은 하층계급이 수행했는데, 이젠 조선인들이 야만국이라고 천시했던 나라에서 온 땅딸막한 "원숭이 인간"들이 맡게 된 것이다. 더욱이 당시 경찰업무에 종사하던 수천 명의 조선인들은 하층계급 출신들이며 상당수가 조선 북부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광신적인 일본 앞잡이들이었고, 계급적 증오라고도 할만한 정열을 가지고 동포들을 탄압했는데, 식민지 통치자인 일본인 상사들에게 그들의 업무처리를 충분히 신뢰해도 좋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대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것 이상으로 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이들 조선인 경찰관들 중 일부에게 경찰이 되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며, 당시 동학당이나 일진회 등의 행태에서 보이듯이 야망을 가진 하층계급 사람들이 목표도 없이 헤매다가 의지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러나 일반 조선인들에겐 경찰은 식민지적 관료제의 억압을 대표하는 기관이며,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의 정치참가를 허락하지 않는 권력기관이었다. 법과 사회질서 및 경찰은 일제의 폭정을 지탱하는 지주로서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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