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글

러시아의 대지를 떠돌고 있는 북한 난민들

이강기 2015. 9. 15. 21:53

러시아의 대지를 떠돌고 있는 북한 난민들

 

(2001년 1월19일 - 에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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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일본 산께이신문에서 내고있는 月刊 "正論" 2월호에 실린 러시아의 인권운동가인 김마리아씨와 月刊 正論지 조사실 사에끼(佐伯浩明) 차장과의 인터뷰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김마리아씨의 약력을 보면, 그녀는 1930년 舊 만주 하이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르지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백계러시아군 세미요노프장군의 侍醫로 일했다. 일본인 초등학교에 다니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함경도 나진의 조선인 초등학교를 거쳐 나진 일본계 고등여학교에 진학했다. 오빠 두 사람은 와세다대학과 호세이대학을 다니다 학도병으로 출정했고 종전 후 한국으로 귀환했다. 김마리아씨는 해방 후 소련군 통역을 거쳐 6.25전쟁에 종군했다. 전쟁 후에는 러시아로 건너가 어업, 양재업, 방송국의 일본어번역, 일본인 가이드 등의 직업에 종사했으며 현재 러시아에서 북한난민구제 일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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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도록 빌고 있습니다. 일본의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북한인민들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힘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 러시아에서 극비리에 북한난민 지원활동을 해 온 김 마리아씨(70세)가 최근 일본시민단체 초청으로 일본에 와,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했는데, 지원활동과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얘기했다.

문: 마리아 여사는 러시아에서 북한난민돕기운동을 해왔던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번에 어떻게 일본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金: 이번이 5년만의 방문입니다. 동창생 등을 만나고,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북한난민돕기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고있는 [北朝鮮難民救援基金](東京.中平健吉代表)의 회합에 참석하고 강연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러시아에서 북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 깊이 느낀 것은, 그들이 몇 년간 고생을 하더라도 중국, 러시아를 경유, 그들의 고향이나 신천지로 가게 해 주는 것이 진실로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저 지옥과 같은 북한에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 같은 비참한 나라가 바로 이웃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싶습니다.


<> 처음부터 거짓의 역사로 덧칠해 굳어진 북한이란 나라에 의문을 느꼈다

문; 북한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金: 나는 모스크바 방송국을 사임하고 새로 개업한 어떤 호텔에서 일본인 여행객 가이드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국영화는 볼 수 없었고, 북한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가 북한을 해방했다는 영화였습니다. 나는 처녀 때 赤軍에 끌려가 통역 일을 보았고 한반도의 38선까지 간 적도 있는데, 김일성 부대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영화는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전혀 조작된 영화를 만들어 선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때 지금처럼 용기가 있었더라면, 무대에 올라가 [나는 당시 赤軍통역을 하고 있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전혀 엉터리다. 김일성 부대란 없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영화에 혐오감을 느끼며 절반도 보지 않고 영화관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사람들은 모두 赤軍이 해방해 준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 엉터리 영화를 만드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김일성의 북한이 매우 싫어졌고, 북한이라고 하는 나라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 북의 독재체제에 의문을 크게 갖고있다는 말씀이군요. 구체적으로 북한난민지원에 나서게 된 동기는?

金: 호텔 소속 가이드에서 개인 가이드로 바꿨던 1992년인가 1993년인가에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통역]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의 [북조선난민구원기금]을 만들었던 가또(加藤)씨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북한난민을 도와주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가또씨와 함께 일을 하게되었고, 통역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에도 같이 가곤 했습니다. 거기서 북한 김일성 정권타도를 목표로 하고 있는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동경에 머물며 동 단체의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朴甲東선생과도, 그리고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북한 망명자들과도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許眞선생은 저 유명한 [北朝鮮王朝成立秘史]를 써서 김일성의 숙청에 의한 공포정치를 고발했습니다. 나는 가또씨 밑에서 일하며 북한정권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하다가 자연적으로 난민 구조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문: 지금까지 직접 지원해 준 난민은 몇 사람이나 됩니까?

金: 처음에 야쿠즈쿠로 2명을 도피시켰습니다. 또한 하바로브스크로부터 모스크바로 보내준 일도 있습니다.

문: 그 두 사람은 삼림벌채노동자였습니까?

金: 그렇습니다. 당시 南範植선생이라고 하는 북한으로부터 망명해 온 전직 선전선동부 차관이 살아 계셨는데, 남선생이 [두 사람을 하바로브스크로부터 탈출시키지 않으면 그 곳에  노동자로 가장해 들어와 있는 북한 공안요원에게 체포될 우려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도피시켰습니다. 그것이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그 사람들로부터 소식이 없을까하고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 다음엔 북한에서 의사로 있다 탈출한 난민을 구조했습니다. 그가 숨어있던 집이 북한 공안경찰에게 포위되었기 때문에 여자로 분장시켜 도피시킨 적도 있습니다.

<> 잡혀 온 탈주자들을 도망 못 가게 발을 꺾어놓는 북한 당국

문: 삼림벌채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나 나쁩니까?

金: 이것은 전해들은 얘깁니다만, 하바로브스크州의 치그도민이라고 하는 곳에 삼림벌채장이 있습니다. 이곳을 사람들은 러시아 국내에 있는 '朝鮮國'이라고 했습니다. 사방이 널빤지로 둘러 처져 있고 군대기지도 아닌 곳에 보초가 서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노동자들도 누구 하나 외출할 수가 없습니다. 하바로브스크의 시민들과도 절대로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울타리 너머에 死刑臺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술렁거렸습니다. [여기에는 일반사람들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죄수들을 가둬놓은 교도소인 모양]이라며 문제를 삼아, 그 사형대를 없앤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벌채장 감시인들은 잡혀온 탈주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꺾어놓습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기브스를 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잔혹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문: 그것은 작업으로 입은 상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金: 아닙니다. 다리를 꺾어서는 북한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러시아 극동지역에 있는 북한 삼림벌채장에 관한 협정은 구소련으로부터 러시아로 연계되었다. 근로시간을 무시한 가혹한 중노동, 防寒대책 不備로 인한 동상이나 노동재해의 빈발, 징벌의 가혹성 등 채벌장에서 반복되고 있는 인권침해 사실에 벌채장을 폐쇄해야한다는 소리가 러시아 국내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1995년 2월의 협정내용 변경으로 노동자의 처우에 러시아법률이 적용되어 8시간 노동엄수, 파업권 인정, 여권의 각자소유 등을 인정하게되었다. 그러나 벌채노동자의 이동의 자유는 여전히 제한되었으며 제한지역을 이탈한 노동자들을 추적, 체포하는 권한이 북한 안전부원들에게 있다는 조항 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무튼 이런 변화로 인권침해의 온상이었던 벌채장내의 감옥이 정말 폐지된 것일까? 여전히 규칙위반자들은 처벌을 받기 위해 발에 자물쇠를 채워 북한으로 보내지고 있으며, 인권단체들은 귀국후의 그들에 대한 처우를 심히 우려하고 있다.)

문: 최근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金: 벌채노동자로서 하바로브스크주에 들어온 약 7,000명 가운데 4분의 1이나 5분의 1 가량은 감시인이나 공안원입니다. 그들 7,000명의 약 절반은 벌채장으로 갔고, 나머지는 도시로 갔습니다. 벌채장의 실상은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망자들에 대한 처벌에는 여러 종류의 학대가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도시에서는 건설, 운반등 어떻게든 돈이 되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그들은 가장 낮은 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고된 일을 그들이 합니다. 그래서 지금 그 곳에 러시아인 실업자가 많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은 노동자들이 받은 임금의 일부를 러시아 경찰에게 뇌물로 줍니다. 그렇게 하면 도시에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벌채장으로 안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나마 도시에서 일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바람에 뇌물을 먹는 고관들만 언제나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문: 한국영사가 불라디보스톡에서 테러로 살해된 일이 있는데, 지금도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金: 약 5년 전에 탈북자를 지원해 온 미국 국적의 한국인 목사부처도 살해되었습니다.

문: 북의 공작원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金: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북한인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경찰은 어리석게도 북한에서 온 공안당국자가 [그 사람을 조사해보겠으니 1, 2일 말미를 주시오.]라는 말에 넘겨주었는데, 그대로 데리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문: 어떻게 그렇게 제 맘대로 공작원들이 들락거리며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金: 그들은 벌채 노동자로 가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에 밖에서는 정확한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문: 1999년 5월 28일에 NHK가 보도한 것입니다. 러시아 지방경찰이 블라디보스톡 공항에서 체포된 탈북자 3명을 국경을 통해 북한경비대원에게 인도하려고 했는데, 처음 건너간 한 사람을 국경에서 인도 받자마자 사살해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러시아 지방경찰 당국은 나머지 두 사람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뉴스를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金: 러시아 방송 뉴스를 통해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러시아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공항에서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북한측과 인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한 사람씩 송환하게 되었는데, 처음 한 사람은,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강의 다리를 건너 국경선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북한 경비원들이 사살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측에서 기겁을 하고 [이러다간 나머지 한 사람도 죽이고 말 것 같다.]며 교도소에 수감시켰던 것입니다.


<> 러시아에 숨어살고 있는 북한 난민은 수백 명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에 숨어살고 있는 탈북자의 전체 숫자는 추적조사가 곤란하기 때문에 아직 추정치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과거 CIS 제국에 수백 명이 불안과 궁핍 속에서 지하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 인터네셔널]의 1996년도 인권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당국은 러시아, 중국 등지로부터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을 7년 이상의 勞動强化刑, 또는 사형에 처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동년 9월 9일에 발표한 동 단체의 [在러시아 북한난민보고서]에서는, 러시아에 있는 탈북자가 북한 공안원들의 추격을 받고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경찰의 이지매까지 받고있다고 보고했다.)

문: 1998년 11월에 러시아에서 체포된 북한 난민 일가 7명이 결국 중국으로 송환되었고 2000년 1월에 그들이 북한으로 송환된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보도되었고, 인권문제로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金: 연해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7명을 중국에 송환할 때 [절대로 북한에 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결국 북한으로 송환되고 말았습니다만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이 2000년 1월에 중국에 재망명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북조선난민구원기금]은 [그 사람을 북한에 강제송환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한 비인도적인 행위를 막아 주십시요.]라는 탄원서를 러시아 국회에 갖고 갔습니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전직 신문기자였던 보리스 레자니크씨가 그 당시 국회의원이 되어있어 면회했습니다. 그는 기자시대에 북한의 수많은 非道를 고발하는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사형대 문제도 그가 썼던 것입니다.

(한국의 인권단체인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은, 주한 러시아대사관을 통해 당시의 옐친 대통령과 크나제 대사에게 [탈북자를 북한에 송환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러시아당국으로부터의 회답은 지금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다. 한편, 동 단체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UNHCR>에 국경 사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러시아.북한 국경에 UNHCR 직원을 상주시키도록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있다.)

내가 모스크바에 간 목적은 그 뿐이 아니고, 북한에서 지독한 생활을 체험한 한 러시아인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북한이 1956년 귀국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에, 사할린에 있던 어떤 북한노동자 가족이 러시아 매춘부가 낳은 8살 된 사내아이를 입양하여 북한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아이는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북에서 몹시 심한 이지매를 당했는데 중학교를 나와 군대에 12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는 혼자 러시아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북한식으로 교육받은 탓인지 (養)부모에 대한 효성이 깊어 부모가 돌아갈 때까지 북한에 살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다 부모가 죽은 후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출국허가를 받았고, 러시아 대사관에 맡겨져 하바로브스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의 북한정부는 당시 결혼해 같이 살고있던 그의 가족인 자녀 2명과 처의 러시아 행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족을 러시아로 데려오는데 무려 8년이 걸렸습니다. 그런 非道한 정치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일가가 하바로브스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 일가를 지원했습니다. 내가 갔을 때 그들은 먹을 것도 충분치 않고 집도 없었습니다. 부인은 북한요리를 만들어 팔거나 야채장사를 하고 있었고, 그 자신은 구두수선을 하여 생활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난민위원회로부터 [집이 있긴 한데 다른 도시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곤란 해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가옥등록을 해주고 여러 가지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러시아어를 할 수 없어 주위사람들을 웃겼지만, 그가 북에서 보낸 40년 동안 얼마나 지독한 생활을 했는지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 일본처럼 러시아에도 있었던 "북한 귀국운동 귀환자들"의 비극

문: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조선인이 9만 3천명이나 북한을 조국으로 섬긴다며 건너갔었는데, 북한의 쇄국정책 때문에 아직도 자유롭게 일본나들이를 하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유사한 비극이 있었는지요?

金: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에서 (북한)귀국운동이 있었던 것처럼 러시아에서도 귀국운동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귀국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반도에서 사할린 등 극동지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전체적으로 약 5만 명 가량이었는데 약 절반이 북한으로 귀환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러시아인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인이나 자녀를 남겨두고 귀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북에 귀환한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의 귀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귀국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러시아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면 김일성의 그 같은 잔혹한 정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도 많이 귀국했습니다. [김일성대학에 입학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귀환했는데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북한은 그들을 모두 군대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문: 북한사람들을 진짜로 도와주는데는 물질적 지원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민주화를 실현시켜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가 되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한다는 생각도 합니다만....

金: 그런 의견에 대찬성입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러시아가 북한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협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현재의 불행의 뿌리는 구 소비에트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북한에 김일성을 보냈고, 자식인 김정일이 그것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도리와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스탈린조차도 차마 하지 못했던 짓입니다. 게다가 스탈린주의를 몇 배로 악화시켜 가장 잔혹한 나라로 만든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입니다.

문: 스탈린 시대보다 지금의 북한 쪽이 더 지독하다는 얘깁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金: 내가 앞서 말했던 망명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아무튼 체제에 대한 비판을 조금이라도 했다 하면 그는 벌써 정치범 수용소에 가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에 있던 한 여성이 자녀 3명과 함께 북한 독립 후 귀국운동 때 돌아와 원산에 집을 얻어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이웃 사람이 [나는 고국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 러시아에 그냥 눌러 살았어야 하는 건데] 하며 말했는데, 그 사람은 이튿날 재판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러시아여자는 3년을 기다리다 자녀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 부친은 白露軍 세미요노프장군 侍醫,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김마리아씨

문: 마리아씨가 북의 비참한 상황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배경에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金: 그렇습니다. 실은 나의 부친은 한국인이고, 모친은 백계 러시아인이었습니다. 부친은 우라지오 의과대학을 나와 세미요노프장군이라고 하는 일본군과 절친하게 지나고 있던 백계 러시아 장군 소속의 의사였습니다. 그 후 망명선인 구 만주의 하이랄의 언덕 위에 병원을 개업하였고 간호사였던 러시아여자(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세미요노프장군은 2만명인가 3만명의 백계 러시아인 장병들을 데리고 만주에 망명했습니다. 그 때 소비에트 신문은 [세미요노프장군은 화차 1량분의 금을 훔쳐갔다.]고 비난했는데, 그 금 덕분에 백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교회를 건설하고 학교도 세우는 등 하이랄에 러시아인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1930년 12월 12일, 하이랄에서 태어나 그곳의 일본인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1940년에 부친이 [나의 자녀 2명은 꼭 동양인이 되어야 한다.]고, 6명의 형제에게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아직 일본 식민지시대였을 때 함경도 나진(羅津)에서 자라며 공부했습니다. 조선인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조선어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진에 있는 일본인 고등여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 열 여섯 살 때 종전을 맞았습니다. 그 때의 동급생 3명과 이번에 효고현에서 재회했습니다.

그러나 종전 후,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소련군 통역이 되어 군복을 입고 기계화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전진해 갔습니다. 소련군의 앞쪽에서 미군이 들어온다고 했는데, 38선 근방에 있는, [4개의 골짜기]라고 하는 의미의 四谷이라는 곳에서 부대가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후 강원도의 赤軍사령부 정치부에 소속되어 강원도 일대에 전개하고 있는 赤軍을 돌아다니며 통역일을 보았는데, 1947년에 軍屬들 모두에게 패스포드가 지급되었는데 나는 조선인 패스포드를 받았습니다. 북한 국적이었습니다.

문: 부친은 일본의 일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金: 부친은 일본인들과 매우 친했습니다. 하이랄은 조선병원도 일본병원도 러시아병원도 있는 큰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몽골인, 카타르인,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의 6개국 사람들이 그 곳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병원은 번성했습니다. 부친은 일에 열심이었고 밤중에도 왕진을 하여 돈을 모았으며 조선의 형제들에게 송금을 하곤 했습니다.

문: 일본인들이 거만하게 굴지 않았습니까?

金: 당시 나는 아직 열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다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좀 거만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국인들은 당시 목욕도 하지 않고 굉장히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쿠리는 100명, 200명씩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모두다 굉장히 싼 임금으로 일하고 결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여성이 도망을 가지 못하게 14세 때부터 발이 크지 못하도록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는 纏足(전족)을 시켰습니다. 여자들은 괴로워했으며, 결혼한 여성들은 아이들을 낳는 것 외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일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들어온 이후 그런 전족 관습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문: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답: 戰前, 오빠 두 사람은 학도지원병이었습니다. 東京의 와세다대학과 호세이대학에 다녔으며, 두 사람 모두 지원하여 중국의 중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6년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종형제가 나진에 살았고 그 친척들이 모두 유복했는데, 1947년에 원산경유로 한국으로 도피했습니다. 나도 권유를 받았지만, 赤軍 통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8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나는 다른 통역들과 함께 남았습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라곤 여자들뿐이었고 게다가 어업노동자들이 부족하여 대량모집을 통해 북한 노동자들을 수만 명 배로 실어갔습니다. 캄차카, 사할린 등에 파견되었는데, 나도 그때 배를 타고 러시아에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계약서를 갖고있습니다.

문: 일본이 조선인들을 극동(사할린)으로 강제 이주시킨 바가 있지 않습니까?

金:  소련의 모집선전으로 북한 노동자들이 극동으로 갔습니다. 1947, 48년, 49년의 3년간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돌아오고 싶은 사람들은 48년에도 49년에도 돌아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인 1956년이 되어 [일본에서도 조선인들이 북한으로 귀환해 왔는데, 러시아에 있는 조선 사람들도 귀환하라]는 명령이 있어, 조선인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도 많이 돌아갔는데, 설마 그 사람들이 앞으로 지옥 같은 곳에 살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갈 곳은 어머니의 나라 러시아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북한에 남지 않고 러시아 행을 택한 이유는?

金: 일본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북한에서는 [반동] 취급을 했습니다. 나는 김일성이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지식이나 학문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착실하게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눈엣가시였으며, 더욱이 나는 이른바 부자처녀였고 아버지는 친일파였습니다. 소비에트 혁명 후 그런 사람들이 소련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북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다고 남한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KGB, 소련군 통역으로서 협력했던 나는 필시 체포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갈 곳은 어머니의 나라 러시아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마리아씨의 형제들이 전부 남으로 간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金: 공산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혁명시대의 공산주의는 부자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모두 일본시대에 부유한 생활을 한데다가 기독교 목사도 있었는데, 종교를 믿고있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남으로 갔습니다. 나와 같은 연령으로 나진중학교에 다닌 종형제가 38선을 세 번이나 넘어와 나를 데려가려 했습니다만, 나는 48년에 어업노동자 모집선을 타고 러시아에 들어갔으며, 그후 마지막 고기를 싣고 가는 배로 니콜라이에프스크라고 하는 마을로 도망을 쳤습니다. 나는 KGB에 붙잡혀 북한행 선박으로 송환되게 되었지만, 기회를 보아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으며,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야쿠즈쿠에 자리를 잡은 후 동 시베리아에서 지나게 되었습니다.

문: 북한난민지원은 러시아에서 그 필요성이 증대돼 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金: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러시아 국민으로서 저 가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구하는 사업을 하고있는 일본인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 러시아인이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러시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각 가정이 어려워 자금원조는 하기 곤란하지만, 호소하는 일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할린출신의 조선인, 1937년에 타시켄트로 쫓겨난 조선인, 나와 같이 북한으로부터 파견되어 노동하기 위해 러시아에 왔던 조선인들뿐이라고는 해도 북한난민지원조직이 있었으면 합니다.

<> 북한인들의 자유를 되찾아주기 위해 힘을 빌려주십시오

문: 마리아씨는 기구한 역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살아왔습니다만, 러시아는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북한사람들도 빨리 자유를 찾아 행복을 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러시아와 한반도에 관해 생각한 것이 있습니까?

金: 나는, 소련시대의 지도자로는 후루시쵸프와 고르바쵸프 두 사람이 국민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사람들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후루시쵸프는 철의 장막을 걷고 소련국민들이 자유롭게 해외에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소련국민들은 [이 나라는 노동자들의 나라로 진보하고 있다.]고 말들을 했지만, 실은 서방 쪽이 훨씬 풍요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후루시쵸프 시대에 일본에 와서 집에 TV 세트가 있고 자동차가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후루시쵸프는 바깥세계를 가르치며 러시아가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시켜 기술을 서방측으로부터 들여오려고 했습니다.

고르바쵸프도 우리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인간은 아프면 [아프다], 괴로우면 [괴롭다]. 피로하면 [피로하다], 즐거우면 [즐겁다]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해야하며,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를 해야하고, 일하고싶은 사람은 일을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귀중한 것입니다. 공산당시대에는 공산당 간부의 자녀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졸업증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 자격증은 갖고 있는데도 형편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수술도 제대로 못하는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로잡았던 사람이 바로 고르바쵸프였습니다.  

그러나 엊그제 해방 55주년을 축하하는 북한의 퍼레이드를 보며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나라의 위정자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55년간,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해 왔습니까?]고 - . 남한은 눈부시게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 나라(북한)는 정치도 경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습니다. 성공한 것이라고는 근년에 일본이나 러시아 또는 한국에서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을 인질로 잡아 간 것뿐입니다. 북한 이외의 주변국 사람들은 모두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며,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비해 유독 북한인민들 만이 부들부들 떨며 [언제 자신이 체포돼 갈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고픔을 떨쳐버릴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듣고싶은 것을 듣고, 주위의 나라들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가 하루빨리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북한국민들이 자유를 되찾도록 힘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