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金玉均氏의 最後 - 尹致昊

이강기 2015. 9. 15. 22:05
 
 
잡지명 삼천리 제8권 제11호
호수 제8권 제11호
발행년월일 1936-11-01
기사제목 金玉均氏의 最後
필자 尹致昊
기사형태 회고·수기

내가 一世의 선구자 金玉均氏를 마지막으로 맛나 보이기는 氏가 千載의 遺恨을 품고 洪鍾宇의 손에 넘어지든 바로 전날이엿슴니다. 곳도 上海요 집도 그가 최후를 마지하든 東和洋行이며 또한 방도 바로 氏가 짐을 푼 침실이 없음니다.
그때 나는 어린 망명객의 몸으로 그곳 米國 租界안에 있는 中西學院에서 敎鞭을 잡고 있엇슴니다. 하로는 氏가 上海로 건너온다는 편지를 받엇슴니다. 그래 날자를 꼽아 氏가 도착되든 날에 불이야 불이야 학교시간을 마치고 東和洋行으로 차저 갔음니다. 내가 바로 東和洋行으로 드러서려 할 때에 큰 갔쓰고 자주빛 두루막이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생긴 장대한 사람 하나가 나가기에 異常하구나 하고 뒤에 金玉均氏와 물엇더니 그자가 바로 氏에게 六穴砲를 노흔 洪鍾宇였다고 합듸다. 氏는 그때 알고도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무슨 일로 洪鍾宇와 동행하느냐고 무르니까 그는 얼골에 조곰도 의혹의 기색을 보히지 않고<70>태연히 「아모 관계없는데 다만 내가 上海로 가겠다니까 나도 上海 구경도 할겸하야 上海로 가겠노라」하고 日本서부터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듸다.
그때 氏의 말을 듯건대 금번 행차는 天津에 있는 李鴻章을 맛나는 외에 또한 中國의 중요인물를 맛나 정치상으로 무었인가 기도하는 바 있노라 하면서 여러 사람의 소개장을 가지고 있엇스며 특히 日本의 中國公使館에 있는 李鴻章氏 아들의 소개장도 가지고 있엇습듸다. 그 날에 과거 여러 해 동안 氏가 거러온 그 曲? 많은 생애... 혹은 北海道의 風雪에 혹은 小笠原의 물결치는 海霧 숙에 몹시 지치고 지친 容色을 하고 있음을 볼 때 나는 일종 애처러운 感慨에 가삼이 아품을 깨달엇슴니다. 그 이튼날 나는 여전히 中西學院에 가서 敎授하고 있너라니까 어떤 사람이 급히 달녀와서 金玉均氏의 편지를 전합데다. 내용은 기어히 맛날 일이 있으니 오후에 좀 와 달나고 함이였슴니다. 나는 시간이 끗나는대로 곳 차저 가겠다고 使喚에게 이야기하야 보내였슴니다. 실상 그때에 上海는 지금과도 달나 氏를 차즐만한 동포도 없거니와 또한 氏가 차저가서 胸襟를 터러노코 謀事를 할만한 이도 없엇슴니다. 그날 마지막 시간을 보고 이슬지음에 또 한사람이 급히 기별을 가지고 왔음니다. 「金玉均氏가 지금 바로 암살을 당하였다고」 나는 敎鞭을 집어던지고 蒼慌히 東和洋行으로 달녀갔음니다. 아하... 그때는 이미 때가 느젓슴니다. 金玉均氏는 탄환에 마저 벹드에 누은채로 이미 絶命된 후이였음니다.<71>
그때 시체를 붓잡고 우는 日本청년 花田君이 있엇슴니다. 그는 金氏를 몹시 숭배하야 日本서도 늘 따러단이는 청년이였음니다. 나는 엇지된 일이냐고 그 청년에게 물으니 「자기와 함께 선생이 방에 게실 때 洪鍾宇가 드러와 안저 별 말없이 있다가 차를 한잔 달나기에 차를 가지려 자기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히에 洪은 권총으로 선생을 노은 후 곳 中國兵營으로 도망하여 버리였다고」 합니다. 나는 우득허니 서섯나이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 너무나 놀나운 사변에 무슨 생각할 여유가 있겠슴니까.
어제밤 이 집 이 방 바로 이 자리에서 豪放하고 膽大하고 그리고도 그 외교에 능한 그를 대하든 것이 겨우 하로 밤을 지내자 氏와 나는 벌서 幽冥를 달니하게 되였음니다. 이것을 인생의 無常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緩漫하고 그저 았가운 이의 죽엄이라고 불너 버리기에는 피눈물 나는 사실이외다. 나는 울면서 학교로 도라와서 았가 그의게서 온 편지를 다시 휴지통에서 끄내어 가지고 그의 최후의 絶筆인 편지를 읽으면서 내 사지가 점점 木石가치 구더지는 것을 느끼였음니다.
그가 간지 벌서 30有餘年前. 이제는 무덤속에 들어있을 살과 뼈도 모다 자최없이 사라저슬 금일까지 자못 유감되는 것은 그가 그렇듯이 일즉 이 세상을 떠나지 않어섯든들 우리 사회에 좀 더 큰 자최를 남겨 노아슬 것을. 그의 품은 큰 포부와 그의 능숙한 외교적 실현을 보지못하고 그를 九天에 보낸 것이 무었보다 원통합니다. 내가 그와 사괴고 서로 굳게 믿어오기는 甲申政變 이전부터 이였스며 그가 비범한 재조를 가진 정치적 큰 인물임을 깨달은 바이지만 오늘에 일으러서는 한층 더 절실히 느껴짐니다.
그때 우리 朝鮮 사회는 아직 현대식 雄辯이나 演說論法을<72>
가지지 못한지라 그가 數萬 大衆을 앞에 노코 大氣?을 토하여 만인을 울니고 뛰게 할 기회를 갔지 못하여스니 그의 현대식 연설은 드를 배 없서스나 數人의 동지들과 席을 갔치하야 그의 말삼을 듯기는 여러 번이였는데 그는 언제나 熱있고도 죠리있게 말삼하야 一席을 무한히 感興식히였든 것입니다.
그가 日本 망명시대에 伊藤博文과 같은 大政客들과 論戰할 때마다 그 대정치가들 가삼을 서늘케 하엿든 것은 이 세상이 잘 아는 바이니 그의 豪膽하고 非凡한 논술이 었떠하였다는 것은 그로써 알 수 있을 것입니다.<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