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개벽
제4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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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4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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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24-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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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湖西雜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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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靑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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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기행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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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夫鄕乎·死腐鄕乎-忠南의
七名物-南餠·北麵-以食爲天乎-爲官難의 忠南實情-爲人設官-南國無佳人-公州乎空州乎-能文能語의 金知事-入學試驗의 禁物인 開闢-山歌村笛亦難聞-大和忠魂과
槿域毅魄-白晝에 잠고대-滿城槿花爲誰春-섬中 有女顔如玉-南國山川多雁影-彩雲橋上鶴徘徊-偉人志士同一丘
인사의 말
나는 작년
봄부터 朝鮮文化 基本調査의 임무를 띄고 南으로 慶尙南北道와 東으로 江原道 각군을 답사하얏다. 따러서 道號에 관한 기사도 만이 썻섯다. 그 기사
중에는 물론 남의 호평도 썻겟지만 악평을 만이 썻다는 비난을 지방 형제에게 간접으로 다소 들엇다. 그런데 금년에도 또 계속적으로 신년 벽두에
忠南 일대의 답사를 始하야 2월 말에 겨우 畢하고 이제 기사를 쓰게 되얏다. 때는 벌서 陽春 3월이나 颯颯한 東風이 아즉까지 치워서 어른 붓이
자유로 돌지를 못하고 또는 나의 버릇이 그러한지 지방의 사정이 나로 하야금 그러케 맹기는지는 알 수 업스나 여전히 악평만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엇지 악평만 하기를 조와 하리오. 사실를 사실대로 쓰자닛가 자연 악평이 되는 것이다. 試思하라. 兄弟-여 금일 우리 朝鮮에 잇서서 무엇을
그다지 자랑하며 무엇을 그다지 칭찬할 것이 잇는가. 總督府와 가티 각군의 孝子 烈女를 조사하야 褒揚한다 하야도 만족할 것 안이며 군청 도청에서
자기 성적 자랑하기 위하야 과장의 보고하덧시 어느 지방이 엇지 발전되얏다고 선전하야도 만족할 것이 안이여 賣骨鬼의 족보장이나 吸金奴의 紳士寶鑑*
모양으로 無用無實의 문벌을 자랑하야도 또한 만족할 것이 안이다.<131> 다뭇 우리는 서로 鞭撻하고 서로 警省식히는 수 박게는 업다.
독약이 口에는 苦하나 病에는 利롭고 忠言이 耳를 逆하나 行에는 利롭다. 우리가 이 점을 깁히 서로 양해하면 오해도 업고 비난도 업슬 것이다.
최후에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답사한 시일이 벌서 遲遠하야 기사 중에 혹 과거담가튼 구절이 업지 안이하나 이것도 역시 事勢의 固然이라고만
알아주면 萬萬 감사할 뿐이다.
士夫鄕이냐 死腐鄕이냐
忠南은 朝鮮의 士夫鄕이다. 자래로 名人達士가 배출하고 따러서
문화가 또한 발전되얏섯다. 百濟 古都를 지낼 때에 누가 그 700년 간의 찬란한 문화를 추억치 안이하며 連山鐵釜와 恩津彌勒을 볼 때에 누가 그
彫刻의 장대한 것을 놀나지 안이하며 公州의 麻谷, 扶餘의 無量, 天安의 成佛 등 寺刹를 차질 때에 누가 감히 그 건축의 宏嚴한 것을 贊揚치 안이
하랴. 忠武公의 칼빗이 아즉까지 산하를 움직이고 古筠 선생의 革命血이 길이 청년의 뇌 속에 흐른다. 成忠, 興首의 直臣과 階伯, 黑齒常之, 崔瑩 장군의 義勇과 高興, 李穡, 李詹, 李達의 문학과 向德의 孝와 都彌夫人, 智異山女의 烈과 靜菴, 沙溪, 愼獨齋孤靑의 도덕이 다 忠南에서 산출하얏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忠南은 참 士夫鄕이다.
그러나 근래에 至하야는 運이 盡하얏는지 碧海桑田의 感이 不無하다. 문명의 餘弊는 사치로 流하고 膏沃한 토지는 惰怠를 馴致하며 온화한 기후는
遊逸를 조성하얏다. 또 兩班 세력의 강대한 결과는 계급적 관념이 鞏固하고 빈부의 차별이 懸殊하고 남녀의 대우가 불평등하게 되얏다. 現 시대에
부적합하고 대모순되는 일은 忠南 사람이 모도 도맛터 한다. 다시 말하면 忠南 사람은 遊逸, 惰怠, 虛榮, 妄尊, 奢侈, 浮薄, 外飾의 性이
具有하다. 그럼으로 여간 재산가는 자기 집 안방에 安臥하야 世無我關이라 하고 좀 활동한다는 사람은 仁川米豆取引所나 京城現物取引場에 가서
일확천금에 不勞自得하랴다가 전래의 재산을 톡톡 틀고 그럿치 안이 하면 회사의 중역이나 道評議員을 獵得하기 위하야 東拓 又는 殖銀에 土地를 잡혀
쓰고 만다. 또 無産者 중 보통의 사람은 京城, 仁川 등 도회지로 출몰하면서 땅 興成群 노릇을 한다. 일기나 좀 땃듯한 때에 京城 塔洞公園이나
仁川 萬國公園에 가보면 긴 담뱃대에 갓 쓴 鄕村兩班이 4,5人식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안저서 「허허, 웨그랴, 그래깐, 암마」 하고 숙덕숙덕하는
사람은 不問可知 忠淸道人이다. 그들은 자래로 남의 재산을 빼서 먹기는 하얏슬지라도 남을 주어보지는<132> 못한 까닭으로 여간해서는
사회 사업이나 무엇에 동정치 안는다. 또 아즉까지도 兩班의 생각이 胸中에 충만한 고로 다른 사회나 인물을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안는다. 이것이
모다 금일의 忠南이 他道에 낙오된 所以다. 古人은 忠淸道 사람을 淸風明月에 비하얏지만은 나는 細風殘月에 비하고 십다. 산하는 의구하나(山도
禿山) 前日士夫鄕이 於今에 安在哉오.
忠南七多
忠南에는 일곱 가지 만은 것이 잇스니 曰 米穀, 禿山, 乞人,
村도부단니는 支那人, 自轉車 탄 상투장이, 振興會 門牌, 청년의 술장사 妾이다. 물론 忠南은 平野가 만코 토지가 비옥하야 자래 三南의 穀鄕으로
屈指하는 곳이닛가 米穀이 만으러니와 禿山이야말로 忠南의 명물이다. 唐津, 瑞山, 洪城, 靑陽 등지 몃 郡을 제하고는 산이 모도 뼈만 남고, 沙汰
天地다. 특히 天安, 牙山, 大田 등지는 연료가 업서서 풀뿌리, 禾粟의 글겅까지 채취한다. 그럼으로 산은 해마다 버서지고, 토지는 점점
황폐한다. 또 乞人 만은 것도 可驚할 일이다. 시장이나 촌락을 물론하고 乞人의 떼가 삼삼오오식 짝을 지여 돌아 단니며 金錢, 米穀,을 청구하고
밥도 어더먹는다. 其中에 江景市場은 乞人의 집합지다. 하루 아츰에 밥을 어더러 오는 자가 일가에 평균 7,8 人이다. 그들은 대개 불구자도
안이오. 사지가 성하고 멀정한 사람이다. 其中에는 3,40의 장정도 잇고 이팔방년의 처녀도 잇고 8,9세 내지 12,3세의 소년도 잇다. 특히
可怪한 것은 의복도 상당이 입고 은반지, 은비내를 가진 여자의 乞人이다. 그들은 乞人이라 하는 것보다 遊食之民이라 하는 것이 올타. 江原道나
西北道와 가티 自作自給하는 지방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업는 일이다. 이것은<133> 자래 忠南人의 遊逸安惰하고 不勞自食하던 악습에서
나온 것이다. 其次에 支那人의 상업상 세력은 또 경시치 못할 것이다. 何地方을 물론하고 여간한 도시에는 支那人의 상점이 獨權을 점하고 촌에는
唐木, 廣木 물감 등 物을 가지고도 부단니는 자가 퍽 만어서 朝鮮人으로는 도저히 상업상 爭衡을 못한다. 鄭鑑錄에 魚羊亡於古月이라더니 忠南은 참
支那人에게 상업상 정복을 당하얏다. 그리고 탄탄한 대로에 자전거 탄 상토장이가 왓다갓다 하는 것도 볼 만 하거니와 도청 명령 하에 발기된
振興會(그 목적은 不問可知)의 문패도 京城의 소위 국유지에 백힌 總督府 말둑 수만이나 하다. 또 기괴한 것은 상당 신분과 명예가 잇다는 청년의
술장사 쳡 둔 것이다. 어듸던지 우리 朝鮮 사람이 蓄妾을 하는 弊習이 잇지만은 대개는 하이카라적으로 蓄妾을 하는데 忠南 사람은 영업적으로 蓄妾을
한다. 학교 교원, 청년회 간부로서도 酒商하는 妾을 두고 그 집에서 숙식하고 객과 대작한다. 또 酒商 女子이닛가 물론 타인 남자와 비밀 관계도
만이 잇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不顧體面 不顧廉恥하고 泰然自若한다. 이것이 不生産的으로 卜妾하야 두는 것보다는 찰아리 나흘는지 알 수 업스나
일은 안이다.
南餠北麵
黃平兩西나 關東關西을 가면 四時 물론하고 국수에 퇴를 낸다. 음식점에도 모도 국수요. 별식도
국수요, 연회에도 국수다. 국수 빼놋코서는 별로 먹을 것이 업다 하야도 可하다. 그러나 忠南은 국수의 구경도 할 수가 업고 그 대신에 떡국이다.
별식도 떡국 술안주도 떡국 음식점도 대개 떡국집이다. 이것은 물론 南鮮은 산악이 만코 기후가 한랭하야 蕎麥이 다산하고 南鮮은 평야가 만코 기후가
온화하야 미곡이 多産하는 까닭이다.
以食爲天乎
忠南의 농가는 먹다가 판이 난다. 한참 농사 시기에는 하루에
8,9차식을 먹는다. 조반, 아츰견누리, 점심, 저녁견누리, 석반은 물론이고 其 새에 또 샛밥, 샛술이 몃 번 식이다. 그래도 일하는 농군만
먹으면 오히려 관계치 안치만은 한 집에서 일을 한다 하면 일하는 사람의 전 가족이 다 모혀들어 의례이 먹는다. 이것은 역시 전일 兩班의 집에서
나온 弊風이다. 즉 兩班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지 안코 官史 단니면서 부업으로 하얏다. 다시 말하면 농업을 생산적으로 하지 안이하고 오락적으로
하얏다.<134> 농군을 먹이는 것도 일을 잘 하라고 먹이는 것이 안이오. 畜生과 가티 잘 먹는 구경을 하고 또 어느 兩班님의 집에서
잘 먹인다는 칭송을 듯기 위하야 먹인 것이다. 이것이 兩班과 兩班 사이에 한 경쟁이 되야 금일에 일대 弊俗을 成한 것이다. 물론 民은
以食爲天이라 하지만은 忠南에서 此 弊習을 몬저 개량치 안이하면 農事 改良이니 무엇이니 하야도 農經濟는 困難을 면치 못할
것이다.
立場 困難한 忠南의 郡守
어느 지방이던지 군수 노릇하기가 그다지 쉽다구는 할 수 업지만은 특히 忠南은 군수
노릇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한다. 본래에 兩班의 세력이 강대하닛가 兩班을 배척하고는 군행정을 잘 할 수 업고 兩班을 좀 친근히 하면 의례히 청구가
만타. 면장도 식혀다구 직원, 학무위원도 식혀다구 심지어 면협의원 급사, 서기까지도 식혀달나구 청탁한다. 듯자하니 될 수 업고 안 들으면 불평을
품는다 한다. 이것은 忠南 某 군수의 실지 경험담인데 忠南 사정에 한 참고거리.
爲人設郡
忠南은 지방이 협소하지만은
자래로 郡이 썩 만엇다. 3郡 或 4郡을 합병한 금일에도 면적상으로 보면 他道보다 비교적 군이 만타(元 37郡으로 今爲14郡) 그러면 何故로
忠南은 특별이 군이 多하얏는가. 이것도 역시 전일에 세력 만은 兩班이 자기네의 편리를 위하야 군을 多設케 한 것이다. 즉 수령이란 벼슬은 욕심이
나지만은 王都와 거리가 稍遠한 지방은 가기가 실음으로 王都 각가운 忠淸道에다 수령 자리를 확장하기 위하야 郡을 다수히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참 爲人設官이오. 구시대에 소위 兩班이란 자가 국권을 擅弄하던 好標本이다.
南國無佳人
南男北女란 말은 누구던지 다
하지만은 꼭 忠南에 적절한 말이다. 忠南의 男子는 兩班 계급이던지 평민 계급이던지 유산자던지 무산자던지 대개 얼골이 허멀숙하게 잘 생겻스나
女子의 인물은 별로 볼 것이 업다. 물론 내외의 풍이 심한 까닭으로 상당한 가정의 女子는 잘 볼 수가 업고 보통 중류 이하 계급의 女子 즉
생활상 困難으로 육체미가 잘 발달도 못 되고 의복도 잘 못 입고 화장도 잘 못하는 女子 뿐 외출을 하는 고로 그러하다고 말할 수도 잇다. 그러나
중류 이하 계급의 女子는 반듯시 미인이 업다는 理由가 어듸 잇슬냐. 西北이나 江原道의 平昌, 旌善을 보면 중류 이하 계급의 인물이 도로혀 미인이
만타. 그것은 육체적 勞?을 하고 자유의 생활을 하는 고로 천연의 미가 발달되는 소이다. 하여간 忠南은 미인이 업다. 자래 忠南의 臨?이라 하는
泰安과 洪城의 廣川瓮岩浦와 公州의 大通橋(今 公州橋)등지에도 今에는 폭풍우를 經한 春山과 가티 一枝名花를 볼 수가 업고
寂寂寥寥하다.<135>
나는 무엇을 가지고 선전하란 말인가
慶尙道나 江原道에 가서 其 地方의 형제를 대할
때에 나는 그이들에게 이번 기회에 지방 사정을 가급적 잘 소개하고 선전할 터이니 기사 재료를 공급하야 달나고 하면 그이들은 반듯시 말하기를 우리
지방은 아모 것도 업서서 도리혀 북그럽다 하고 또 공격을 만이 하야달나 하며 자기의 힘 잇는대로, 자기의 아는 데까지 재료를 만이 공급하야
준다. 그러나 忠南은 전연 반대이다. 만나는 마당에 자기네가 몬저 우리 지방을 잘 소개하야 주시오 한다. 우리 청년회, 우리 학교, 우리 무엇
심지어 哀慶相助會, 普通學校學父兄會까지 잘 선전하야 달나고 한다. 그러되 결국 사실을 기록하야 달나면 차일피일하고 안이하야
주며 작구 독촉하면 후일에 본사로 직접 송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다 무슨 허위며 外飾이냐. 그래 나는 아모 것도 업는 백지를 가지고 선전하고
소개하란 말이냐. 아이구 답답아.
公州乎아 空州乎아
公州는 忠南의 도청소재지오. 富力으로 말하야도 全道에 몃재
안이가는 雄州다. 그러나 민간의 사업은 아모 것도 볼 것이 업다. 몃 개 부호들의 고리대금업하는 數種의 회사, 조합 외에 일반 공익적 사업은 참
업다. 純朝鮮人의 경영으로는 小學校 한아도 업다. 완전한 강습소도 업다. 靑年修養會인가 무엇이 잇서도 역시 유명무실이다. 간부는 명예간부이니까 그러한지 집에서 白鷗詞만 부르고
잇스며 회관은 밤낫 보와야 사람의 影子도 볼 수 업고 집보다 더 큰 문패만 덕 부터서 바람과 눈하고 싸운다.(요새이는 婦人夜學을 하지만) 참
한심도 하고 기가 막힌다. 其中에 특히 발전된 것은 화류계와 감옥이다. 料理집으로는 무슨 館 무슨 屋하는 것이 엉성 듬읏하야(기생잇는 料理집
5호, 색주가 料理屋 38호) 밤낫으로 새장구 소리가 鳳凰山(道廳後山)을 들들 울이고 또 시장 부근에는 出役하는 囚徒가 5,60명식 떼를 지여
누구를 위하는지 피땀을 흘니며, 영치기 영차 하고 돌아다인다. 아모던지 錦江을 건너서 산성 모통이로 들어오다가 첫번에 宏大한 감옥이 州口에 잇고
囚徒들이 滿山遍野하야 작업하는 것을 보면 놀납고도 이상한 감상이 잇슬 것이다. 감옥이 公州의 간판인가, 광고인가, 模範場인가. 엇지하야 구태여
公州의 초입문에다 설치하얏나. 물론 거긔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잇슬 것이다. 그러나 사회도덕으로 하던지 도회 미관으로 하던지
아동의<136> 교육으로 하던지 감옥을 현지에 두는 것은 당국의 부적당한 일이다. 찰아리 도청과 위치를 박구엇스면 시가의 발전도 낫고
또 鳳凰山 꼭댁이에서 죄수를 간수하기도 편리할 것이다. 하여간 公州는 화류계와 감옥이 제일 발전되얏다.
開闢은 入學試驗에 大禁物
작년 3월이다. 公州師範學校에서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엇던 학생 한 아이 시험 답안에 日本을 內地도 쓰지 안이하고 日本이라 썻다고
소위 교원이라는 자가 그 학생을 叱之辱之한 후 또 책보를 수색하다가 開闢 한 권이 잇는 것을 발견하고는 『此漢이 원래 不逞者』라 하고 즉시
퇴장을 명하얏다 한다. 日本을 日本이라 한 것이 무슨 과실이 되며 상당한 법령에 의하야 발행한 開闢을 강독하는 것이 무슨 欠節이 되는가. 此等
몰상식의 무리가 소위 師範學校의 교원으로 잇스니 朝鮮의 교육이 얼마나 한심한 것을 가히 추측할 것이다. 금년 입학시험에는 또 엇지 되얏는지 알
수 업거니와 이후에는 학생 모집 광고를 할 때에 맛치 年齡은 몃 살 이상, 禁錮 이상 刑에 처치 안이한 事 등을 列記하는 것과 가티 미리 開闢을
購讀치 안이하는 자, 日本을 內地라 하는 자 등 주의을 첨부하는 것이 조켓다.
此後更不用文字日語如何
忠南 道知事
金寬鉉 군의 문자 잘 쓰는 것은 세인이 다 아는 바이다. 인민에게 납세 잘 하라고 권고할 때에는
「인민이 납세를 잘 안이 하면 斯文亂賊이 된다」 하고 桑苗木을 분배할 때에는 論語에 孔子가 말슴하시기를 五畝之宅에 樹之以桑이라 하얏스니 인민도
뽕나무를 잘 심어야 된다」고 하는 등 今文無古文無의 절도할 말이 만탼다. 그는 다만 문자만 잘 쓸 뿐 안이라 또 日本말도 퍽 유창하게 잘한다.
다른 사람이야 잘 듯던지 못 듯던지 생각나는 대로 소리 나오는 대로 한다. 금번에 나를 대하야서도 자기가 日本말 잘하는 자랑인지 나를 시험하랴고
그러는지 알 수 업스나<137> 첫 인사가 「아나다개벽기자데스네」(의미인즉 貴公 開闢社デス子인듯)라 하고 또 이여서
「개벽기도잇다라항이가히로이데스네,
상고이라이가라이마마데노이로이로노고도자나이데스가」(開闢ト云ッタラ範圍가廣イデスネ上古以來カラ今?ノ色色ノ事ヂャナイデスカ) 하더니 또 廣口를 開하고
「시가시와닥시노도와마다면세이가짓시사렌노데조사가무스가시데스」(シカシ私ノ道ハ面制ガ末ダ實施サレンノデ調査ガ六ケ敷イデス)라고 要領不得의 新式 日本말을
한다. 그런 日本말은 참 「진통」 사람으로는 알 수가 업고 세계에 「막집」을 하야도 엇기 어러울 것이다. (진통은 普通, 막집은 募集이니 이
말도 初出於金氏 故로 仍用) 물론 金氏는 학자님 자손이오. 日本말 덕분에 금일에 지사까지 되얏스닛가 不可不論語孟子의 문자도 써야 하겟고 日本말도
해야되겟지만 이후는 그러케 남용을 하지 말엇스면 엇더할지.
이름이 조와서 秋月인가
나는 忠南 지방을 별로 단녀보지
못한 까닭에 여러 가지가 다 생소하얏다. 심지어 여관까지라도 남에게 물어야만 가게 되얏다. 瑞山에서 洪城으로 갈 때에도 엇던 사람에게 洪城은
어느 여관이 제일 조흐냐고 물엇더니 그는 李秋月의 집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차에 나려서 洪城 사람에게 또 물으니 그도 역시
李秋月의 집을 가르친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秋月이는 이름 一一기니와 여관도 참 잘 하는가 부다
하고 언제나 친한 사람인듯시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서 차저가니 급기야 조고마한 초가에 옥내가 별로 깩긋지도 못하고 주인 秋月이라는 女子는
반나마다 늙고도 빡빡 얽은 데다가 검기도 어지간 하다. 게다가 금니는 해박어서 말을 할 적마다 반작반작 하는 것이 닷쳐 우박 마진 재덤이에다
죽어가는 깝북이 볼이 반작거리는 것도 갓고 썩은 대추나무 등걸에 개똥 불이 비치는 것 갓다. 나는 처음부터 정이 뚝 떠러젓다. 그러나
不以貌取旅館이라 하고 빈 방이 잇는냐고 물엇더니 秋月婆는 풋돈양이나 잡은 까닭에 뱃대가 넘모 벗고 또 내가 아모 行具도 가지지 안이 하고
흙투성이 구두에 숫달 금음날 들어스니까 무슨 殊常之人거나 그럿치 안으면 노자가 떠러저서 名日의 공떡국이나 신세지러 온 사람으로 알는엇지 불친절한
어조로 名日 밋이 되야 손님을 안이 들인다구 한다. 나는 슬금어니 감정이 나서 새로 배운 忠南의 느린 어투로 『그러면 구만두어...어듸 가면
여관업게깐』 하고 뒤통수를 툭툭 치고 나오다가 연필를 끄내서 陶靖節의 秋月揚明輝란 글구를 고치여 秋月佯名輝라고 대문 박 벽에다 써부치고 왓다.
허허 우숩다. 이 세상에 허명을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자가 엇지 이 秋月이 뿐이리오만은 참 괴심하다.
山歌村笛亦難聞
唐人 白香山은 江州司馬로 잇슬 떄에 「豈無山歌與村笛嘔?啞?不忍聞」이라고 탄식하얏다. 그러나 나는 忠南 일대를 여행하는 중에
山歌村笛도 들어보지 못하얏다. 忠南은 참 寂寞鄕이다. 음악도 업고 극장도 업다. 예술이 발달되지 못한 우리 朝鮮에서 어느 곳이던지 다
일반이겟지만 그래도 黃平兩西에는 守心歌가 잇고 全羅慶尙道에는<138> 六字拍이와 伽倻琴이 잇고 江原道에는 아리랑 타령이 잇서
樵童牧?라도 곳곳마다 노래를 한다. 그런테 忠南은 그것도 업다. 瑞山 泰安은 원래 歌鄕이니 律鄕이니 하야 속담에 瑞山가서 시조하는 척 말고
泰安가서 잡가하는 척 말나는 말까지 잇지만은 이것도 과거의 역사담이오 지금은 별로 업다. 冬節인 까닭에 蛙鼓鶯歌도 드를 수 업고 물 건너
고양이떼가 여간 重要地는 모도 유린하는 까닭에 닭의 소리도 들이지 안는다. 아-忠南의 형제는 무슨 취미로 살며 무슨 희망으로 사는가. 올타 논이
만으니까 이밥 자미에나 살가. 논도 6할 이상은 외인의 손에 다 들어갓스니 이밥인들 엇지 잘 먹으며, 제 논이 잇다 하야도 산에 나무가 업스니
생쌀만 먹고 사나 생각하면 속만 답답하다.
大和忠魂과 槿域毅魄
洪城의 南山公園에는 놉히가 수십 척이나 되는 소위
哀悼碑가 송림 중에 웃둑이 섯다. 그 비는 丙午年 閔宗植 義兵에게 죽은 韓日 양국의 警官을 褒賞紀念하기 위하야 세운 것이다. 그 비의 글시는 당시
천하명필 李完用이가 쓰고 비명은 萬古文章 金允植이가 지엿다. 비명 중에는 「大和忠魂槿域毅魄」의 구가 번듯이 뵈고 其外에도 별별 가관의
구절이 다 잇다. 참 日韓合邦에 大勳功이 잇는 문장명필의 高名도 이 비와 가티 기념될 것이다. 그러나 의병이라고 자국을 위하야 이러낫다가 폭도로
몰녀 참살을 당한 수백 동포의 원혼은 何面目으로 상대하는지 지하에 在한 雲養故人에게 一問코자 한다.
白晝에 잠고대
忠南에서 土倭의 별명을 듯는 군수가 누구냐 하면 노상행인이라도 다 天安郡守 尹*求 君을 가르칠 것이다. 尹君은 언제부터 고리
알들한 大和人이 되얏는지 자기는 물론이고 가족까지라도 朝鮮 옷은 절대로 입지 안케 하고 日本 옷만 입게 하며 자녀들도 日本 말만 하게 한다.
그리고 日本人이 무슨 사업을 한다 하면 埋頭沒身하고 극력 원조하나 朝鮮人 사업에는 추호도 동정치 안이 한다. 또 인민에 대하야는 言必稱近來人心이
악화되야 官尊民卑를 모른다고 痛論한다. 이것이 白晝에 안저서 무슨 잠고대인가. 그래도 직무상에는 퍽 충실한 사람이다. 전일 세무관리로 잇슬
시대에 자기의 從兄까지 납세 안이 한다고 때리고 밧엇고 卽今도 官物이면 신중이 알어 邑誌가튼 것도 남을 잘 빌녀주지도 안코 郡勢一班은 인쇄비
들갑아 맹기지도 안엇다. 참 君은 금세에 난득할 良太守다.<139>
彩雲橋上鶴徘徊
忠南 지방에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던지 다 속이 답답할 것이다. 상토장이 兩班을 보와도 속이 답답, 빨간 산을 보와도 속이 답답 얼골 못 생긴 女子를 보와도 속이 답답
달팽이 껍질 가튼 왜소한 가옥을 보와도 속이 답답 千呼萬喚하야도 대답 잘 안이 하고 심부름 식허도 느리게 하는 여관집 뽀이를 보와도 한 시간에
4,5 차식 고장 생기는 자동차를 타도 다 속이 답답하다. 그러나 한 가지 상쾌한 것이 잇다. 그것은 즉 唐津平野의 鶴구경이다. 이 鶴은 朝鮮의
명물인 동시에 唐津의 특산이다. 그 종류도 만커니와 수도 또한 만타 아모리 塵世俗客이라도 彩雲橋에 倚하야 그 부근에 수 30의 羽衣客이 공중으로
翩?하며 ?然長鳥하는 것을 보면 자연이 兩腋에 仙風이 부러서 三淸世界로 入하는 듯 할 것이다. 軍國主義고, 帝國主義고 최신의 社會主義,
共産主義까지도, 다 흉중에서 소멸되고 淸淨高潔한 초인간적 관념이 생긴다. 자래로 鶴을 指하야 仙鶴이니 羽衣道士니 한 것도 역시 緣由가 잇는
것이다. 이제 唐津의 鶴은 또한 당국에서 특히 보호하야 일반의 포획을 엄금한다. 그러나 年前에 齋藤總督은 忠南을 巡遊할 時에 이 唐津의 鶴을
구경하고 기념적으로 某 여관에 鶴見館이라 題額도 하고(現存) 또 一隻의 鶴을 生擒하야 가저간다 한다. 總督의 세력은 참 위대하다. 保護鳥까지도
잡아갓다. 그 鶴은 於今平安否아.
嗚呼偉人志士同一丘
牙山郡 溫陽里 北方으로 약 2리 반을 가면 陰峯面 山亭里가 잇고
其 洞里 國壽峯下 小丘中腹에는 거대한 一墓가 잇스니 이는 萬古 偉人 李忠武公의 幽宅이오. 또 同郡 邑內 西隅에는 小丘陵이 잇스니 其 中腹은
甲申革命黨 수령으로 千古의 遺恨을 抱하고 만리 고역인 上海阜頭에서 不歸客이 된 金玉均 선생의 葬地다. 兩公이 비록 시대가 상이하고 처지가 상이하고 행사가 상이하고 성패가
상이하고 死場이 상이하고 세인의 이해가 상이하나 피차에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야 身을 희생에 供하기는 일반이다. 今에 偉人과 志士가 동일히
牙山 지하에서 永眠하게 된 것은 또한 一奇緣이다. 만일 兩公의 英靈이 금일까지 尙在하야 故國事를 생각한다 하면 비록 泉臺下에서라도 엇지 안연이
目을 瞑하리오. 그의 칼은 반듯시 움즉이고 그의 피는 반듯시 뛰리라 嗚呼哀哉. 附記 李忠武公의 廟도 또한 溫泉里 北方 1리 許峙面 白岩里에 잇스니 其廟下에 公의 자손이 世居하야 당시
유물 戎刀, 屛風, 劍帶, 手墨 등을 보관하고 又 金玉均墓는 日本靑山墓地 及 本鄕駒?眞淨寺 2개소가 有한데 此 牙山邑 墓는 養嗣子 金英鎭氏가 此地 郡守로 在할 時에 金氏 夫人의 시체와 金氏의 遺髮을 매장한
것이다.<140>
立春時節雨紛紛
洪城郡은 여러 번 亂離를 격근 곳이다. 宣朝時에 李夢鶴의 亂도 격고
甲午東學亂도 격고 丙午義兵亂도 격것다. 그럼으로 그곳의 인민들은 驚弓之鳥 모양으로 항상 不安之心을 품어서 조곰만 하야도 疑懼와 恐怖가 만타.
然中에 공교이 李夢鶴의 亂은 丙申年, 東學亂은 甲午年, 義兵亂은 丙午年인 고로 丙年이나 甲年을 당하면 특히
不安之心이 더 만타. 금년은 마침 甲子年인데다가 정월 2일부터 때 안인 비가 연 3일을 계속하야 막 쏘다지고 개천물이 다 漲溢한 까닭에 미신
만은 故老들은 立春時節에(陰 正月 1日 立春) 大雨가 오는 것은 난리의 징조라고 서로 말하야 인심을 동요케 한다. 난리 만이 격고, 미신 만은
지방에서 容成無怪한 일이다만은 난리는 난리오 비는 비지 비가 난리에 하등 관계가 잇는가. 그네들로 하야금 天文學은 구만 두고 千字만 잘 읽어서
「雲騰致雨」의 의미만 이해하야도 이러한 미신은 업슬 것이다.
滿城槿花爲誰春
無窮花는 朝鮮의 國花다. 세계 희유의
식물이다. 자래로 朝鮮을 槿域이니 槿園이니 하는 것도 이 無窮花가 잇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중한 국화를 애호할 줄을 알지 못하야 별로
재배치 안이 함으로 극히 희소하게 되얏다. 도회지의 공원이나 유력가의 정원에 幾株式식 或 有할 뿐이오. 심지어 엇던 지방에서는 無窮花 이름도 잘
모르게 되얏다. 그런데 洪城은 특히 無窮花가 만이 잇다. 울타리도 하고 정원도 꿈이고 길가에도 잇고 밧둑에도 잇다. 貧家에나 富家에나 官家에나
民家에도 다 잇다. 幾千年間을 산간벽지에 처녀와 가티 잇서 無名無色하던 櫻花가<141> 槿花八域을 침입하야 片時春光을 자랑하는 이때에
獨히 洪城에 槿花가 만이 잇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이제 洪城의 중요 시가지는 모도 日本 사람의 수중에 귀하얏다. 朝陽門 外(東門)의 즐비한
2층집과 비옥한 토지는 모도 某次郞 某兵衛의 소유다. 이 無窮花는 주인의 박귄 것도 알지 못하고 儼然이 호로 서서 暴風寒雪과 싸우며 春光를
기다린다. 나는 이 無窮花 나무를 대할 적에 감개가 또한 무궁하얏다.
섬中 有女顔如玉
唐津 군청에서는 농가의 부업을
장려하기 위하야 음력 세모에 특히 繩?品評會를 개최하얏다. 현장에는 ?織 機械를 놋코 엇던 농촌 총각 한 아이 모범적으로 치는데 참 선수엿다.
얼골은 둥글넙적하고 머리 꼬리는 짤너서 젹고리 동정과 싸울만 한데 향촌의 특색인 붉은 당긔를 멋잇게 척 따느리고 안저서 쿵덕쿵덕 장단을 마처
친다. 그 총각은 13세부터 가만이 치는 법을 배워서 今 18세 약 5년간을 계속해 친고로 퍽 練熟하야 1일 보통 20枚(現價 약 3圓)는
無慮히 친다 한다. 그것만 하야도 保妻子는 넉넉하다 하야 其 부근의 사람들은 빈한함을 불구하고 사우를 삼으랴고 자청한 사람이 만타 한다. 참
사람은 아모 일이던지 잘 하고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전일에는 書中有女顔如玉이라더니 금일에는 섬中에도
有女顔如玉이다.
南國山川多?影
京城 이북의 사람으로서 음력 12월이나 정월에 기럭이의 구경을 하랴면 열대의 사람으로
어름 구경하기보다도 더 어러울 것이다. 따러서 深冬期에 詩에나 노래에다가 기럭이를 쓴다 하면 물론 쳘도 안이오 格도 안일 것이다. 그러나 忠南은
기후가 온화하고 평야와 해안이 만은 까닭인지 冬節에도 기럭이가 만타. 산에도 잇고, 들에도 잇고, 해변에도 잇고 공중에도 잇다. 특히
天朗氣淸하고 夜靜月白한 時에 수천의 群?이 隊를 作하야 이 세계는 자기의 낙원으로 思하는 것 가티 自來自去하며 ?號하는 것은 참 볼만도 하거니와
天涯萬里에 孤寄한 客과 孤燭香閨에 相思하는 人으로 하야금 한 번 그의 소리를 들으면 자연이 斷腸의 淚를 禁치 못할 것이다. 忠南은 과연
?國이다. 朴楚亭 詩에 南國山川多?影의 句는 실로 此 忠南에 적절한
詩이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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