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

고향이야기

이강기 2015. 9. 16. 09:14
고향이야기    
 

조사연님이 합천 이야기를 꺼내니 갑자기 고향생각이 간절해진다. 내 고향이

바로 그 아래 에 있는 의령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반세기가 가

까워 오고 고향에서 생활한 기간이 겨우 10년 남짓한 어린 시절에 불과하건만,

요즘도 꿈만 꾸면 거의 90% 이상이 고향을 배경으로 한다. 물렛골, 가락등,

불당곡, 서당골, 도덕골... 어느 골, 어느 산등성이 하나 눈에 선하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 생활이 4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항상 낯설기만 한 것과 비교

하면 참으로 신기하다. 수구초심이란 옛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싶어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 "기강"을 기점으로 양편으로 강을 끼고 역삼각형

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의령이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누가 지방으로

이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두 강이 합쳐지는 역삼각형 땅은 반드시 피하라"고

내 꼭 당부하고 싶다. 양쪽으로 강이 흘러 한 지점에서 합쳐지게 되면 유속역

학상(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강물이 안쪽으로 휘어져 흘러가기 때문에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의 흙을 모두 건너편으로 옮겨버린다. 실제로 고향에 가서 낙

동강과 남강 쪽 양안을 다녀 보면 의령 쪽은 바위 절벽만 연속일 뿐 어느 한 곳

평야가 제대로 발달된 곳이 없다. 반대로 남강 건너편인 함안 쪽과 낙동강 건너

편인 창녕 쪽은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내지로 들어가 봐도 협소하긴 마찬가지다. 산이란 산은 모두 메뚜기 이마처럼 가

팔라 그 흔한 과수나무 하나 제대로 꽂을 곳이 별로 없고 들이란 들은 그 사이로

흐르는 개천 빼고 나면 별로 남을 곳이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산이라도 높았

으면 물이라도 흔하고 경치라도 좋으련만, 자굴산 하나 빼고는 모두 어중간한 높

이어서 잡목이나 자라게 그냥 내버려 둘 뿐 별로 쓸모가 없다. 앞산과 뒷산의 거

리가 하도 가까워 우스개 소리로 "앞 뒷산에 간떼이(긴 대나무 막대기) 걸쳐 빨

래 널어도 되겠다"는 곳이 많다. 6.25 때 미군기들이 연락부지로 날아와 폭격을

해대는 바람에 성한 마을이 거의 없었는데, 의령에는 폭격한번 받아 보지 않은

마을이 꽤 많이  있었다. 날아오는 비행기들이 주로 무스탕이나 그라망 급강하

폭격기들이었는데, 도무지 산 능선들이 가로막아 내려꽂을 엄두가 나지 않는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다.

이러한 산골이다 보니 가구당 전답이 많을 리가 없다. 여자아이가 자라서 시집

갈 때까지 쌀 두 되박 먹기가 힘들다는 마을들도 숱하게 많았다. 몽리면적이 좁

아 경제성이 없어서인지 그 흔한 저수지도 별로 없고 주로 천수답이었는데, 옛날

에 흉년이 들면 영락없이 기근이 들고도 남을 자연환경이다. 웅덩이 물을 퍼 올

려야 할텐데 냇물을 못 건너 건너편에 있는 논을 말린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

다.

강이 양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 자주 사단이 벌어지곤

했다. 6.25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시대에도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터가 곧장

되곤 했던 것 같고, 임란 때도 왜군들이 부산에서 전략물자를 싣고 낙동강 남강

을 거처 진주 쪽으로 가기 위해 올라오다가 바로 의령의 기강과 정암에서 곽재우

의 의병군에게 크게 혼이 나곤 했던 모양이다. 고향 마을에서 산 하나 넘으면

곽재우가 북을 쳐 의병군을 소집했다는 세간마을과 북을 매단 나무가 있다. 초등

학교 땐 기강 쪽에 있는 곽재우 사당에 군수와 교육장이 제사 모시려 온다 하여

전교생이 가서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어릴 때 어른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로는 의령에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이었다.

자연환경이 척박하여 살기가 어렵다 보니 일찌감치 객지로 나간 사람들이 많아

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싸했다. 바로 뒷산 너머 이웃 동네인 두곡

에선 이극로가 났고, 북쪽 산너머 세간에서 조금 떨어진 설뫼라는 곳에서는 안

호상과 안희재가 났다. 그리고 앞산 너머 정곡(중교)이라는 곳에서는 이병철이

났다. 옛날 의령 읍에 이XX라는 만석꾼이 있었고, 그 분이 주동이 돼 의령에서

제일 머리 좋은 사람 둘을 뽑아 외국유학을 보냈는데 그 분들이 바로 이극로와

안호상이라고 했다. 특히 이극로는 같은 집안이기도 하여 어른들이 꽤 큰 소리

로 자랑께나 했겠는데, 불행히도 그분이 6.25 이전에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아이들에게 소곤소곤 들려주곤 했다. 6.25때 내려온 인민군
들한테서 그분이 초대 문화상인가 무임소상인가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좋아들

하던 어른들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나무하러 가서 지게를 때려 부셔버리고는

마산으로 도망 가 어떤 초등학교 소사로 있으면서 창 너머로 공부를 했다는 일

화도 듣곤 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끝에 <이극로 할아버지는.....> 하며 후
렴으로 듣는 얘기였다.    


1년에 한 번 가기도 힘든 고향이건만 왜 고향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말이 많아
지는지 모르겠다. 또 객쩍은 소리 했나보다.

(2004.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