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들 | ||
(1) 최초의 기억
햇빛이 부셔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빨래를 탁탁 털어 당신 키보다 높이 걸려 있는 빨랫줄에 반쯤은 던져가며 널고 있었는데 그 하얀 빨래가 햇빛을 반사시켜 더욱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으나 어머니가 자꾸 몸을 구부렸다 폈다 했기 때문에 영 편치가 않았다. 햇볕이 강렬했던 기억이 나는 것으로 보아 따가운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 어느 여름날 아침나절이었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인 지 어머니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빨래 양 귀퉁이를 잡고 팍팍 힘을 주어 주름을 펴 는 동작에도 화가 잔뜩 베어 있었다. 입으로는 뭐라고 제법 큰 소리로 계속 중얼거리 고 계셨다. 그 중얼거림 속에도 강약이 들어있어 갑자기 톤이 높아질 때마다 등에 업 힌 내가 깜짝깜짝 놀리곤 했다. 나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몹시 괴 롭고 불안하여 어머니 등에서 얼른 내리고 싶었다. 극히 단편적인 이 우울한 기억이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몇 살 때였을까? 어릴 때 들 었던 어른들 얘기로는 다섯 살 때보다 세 살 때를 더 잘 기억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세 살 때의 기억일까?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아이들 엉석에 냉담한 편이었던 어머 니의 성격으로 보아 세 살이나 먹은 아이를 업었을 리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두 살? 아니면 한 살? 한 살이나 두 살 때 일도 기억할 수 있는 걸까? 어머니는 무엇 때 문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당신의 시어머니인 할머니 때문에? 아니면 업어달라고 보채 는 나 때문에? 어머니 생전에 몇 번 여쭤봤지만 기억을 하지 못하셨다. 결국 몇 살 때의 일이었는지 영영 알 수 없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2) 누이동생
6.25 사변 때 폭격으로 불타버린 옛 3간 두 줄 배기 초가집 큰 방. 누이동생 옥조(玉 祚)가 방바닥에 퍼질고 앉아 손바닥으로 숟가락을 쥐고 앞에 달랑 놓인 밥그릇에 담긴 밥을 어설프게 입에 퍼 넣고 있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방바닥에 흘리는 밥알 이 더 많았다. 내가 옆에서 거들어 준 것 같긴 한데 자세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밥 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빽빽 소리를 지른 것 같기도 하고, 딸그락 딸그락 부엌에서 밥을 짓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쪽문을 통해 무어라고 큰 소리로 옥조의 "잘못"을 일러 바친 것 같기도 하다. 명색이 오빠라고 나한테다 동생 잘 보라며 당부를 하신 것이 내 딴엔 제법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와 두 살 터울이라니까 누이동생은 한 두 살, 내가 서너 살 적 일이었던 것 같다. 누이동생에 대한 기억은 이게 전부다. 그 뒤 병으로 죽었다는 데 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내가 제법 커서 남동생이 또 하나 났으나 첫 칠일 안에 죽어 결국 내가 2 남2녀의 막내둥이가 되었다. 이 누이동생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목이 멘다. 그가 입에 퍼 넣던 밥은 아마도 어머니가 어른들에게 올리려고 밥 지을 때 보리쌀 맨 가운데 쌀 한 보시기 정도 동그랗게 얹어 놓은 것 약간을 떠서 간장에다 깨소금 뿌려 비벼 준 것 이었으리라. 그 시절엔 분유나 과자가 있을 턱이 없고 젖뗀 아이들에게도 밥이 고작이 었다. 나도 그런 밥을 많이 먹으며 자랐다.
(3) 10월 폭동사건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 옆집 정자(貞子)누나와 다른 한 아이와 함께 동리 앞 수수 밭 입구나무그늘에 가마니를 깔고 소꿉놀이를 해가며 새를 보고(쫓고) 있었다. 길다랗 게 늘어 선 수수 대궁이 사이로 새끼줄을 치고 군데군데 깡통 요령을 달아 놓았기 때 문에 한번씩 새끼줄을 흔들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정자누나가 나보다 세살 위여서 그 런지 소꿉놀이는 그가 일방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나와 또 한 아이(그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풀 뜯어 오라면 풀 뜯어 오고 돌멩이 주어 오라면 돌멩이를 주어와 소꿉놀이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빤히 건너다 보이는 동리 앞 뚝 너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몽둥이와 대창들을 여러 개 들고 무슨 힘찬 노래를 부르며 몰려왔다. 맨 앞쪽에 선 몇 사람은 길다랗게 글이 쓰인 배폭을 매단 대나무들 을 들고 있었다. 마치 상여가 나갈 때 여러 사람들이 들고 가는 깃발(만장) 같았다.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은 소꿉놀이를 하다말고 생전 처음 보는 이 이상한 풍 경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기억은 여기서 잠시 끊겼다가 마을 아래편에 있는 재종형님 댁 마당에서 되살아난다. 재종형수인 초계 아주머니가 마루에 걸터앉아 무릎을 쳐가며 대성통곡을 기타 세간사리가 마당에 널브러지고 흩어져 있는데, 그 사이로 박살난 장독대에서 흘 러나온 간장이 여기저기 흥건히 고여있었다. 간장냄새 된장냄새가 왼 집안에 가득했다. 뒷날 들었던 얘기지만 실제로는 그 날 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 건에 대한 내 기억은 오직 이 두 장면뿐이다. 10월 폭동사건이 1946년 10월에 일어났 다니까 42년생인 나로선 만 4살 때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어린 나이로 죽은 나와 한 터울 사이의 형은 여러 모로 부모님 마 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흔히 그 형 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아이가 귀엽기도 했고 하는 짓 도 그렇게 예뻤던 모양이다. 주로 내가 밉상을 보일 때 그런 말이 나왔기 때문에 죽은 형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은근히 심통이 나곤 했다. 어머니는 그 형이 죽게 된 것이 오로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 아파 하셨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던가, 방에서 어머니가 돌이 갓 지난 형을 데리 고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이제 막 한 발짝 씩 걸음을 떼기 시작하던 때라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염려할 것이 없다싶어 어머니는 아이를 방안에서 제 맘대로 는 소리가 들려 아이를 쳐다보니 어느새 아이가 방문을 잡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문짝 가리지 않고 빽 소리를 질러버렸고, 쪼옥 쪼옥 하며 찟기는 소리가 재미있어 창호지 찢는 놀이에 정신없이 빠져있던 아이는 갑자기 등뒤에서 나는 벼락치는 소리에 그만 까르르 울며 혼절해버렸다. 그 길로 불덩이처럼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였는데, 경기 라며 용하다는 경기 따는 노인을 찾아가 인중과 손가락 끝을 따기도 하고 아랫마을에 무 효력이 없었고 며칠 못 가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 싶으면 큰 아이 작은 아이 가릴 것 없이 직설적으로 야단 을 쳐버리는 어머니 성격을 생각하며 나는 형에게 야단치는 그 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형의 갑작스런 죽음에 크게 놀란 부모님은 나를 배자 이젠 조바심이 단단히 나셨던 모양이다. 점쟁이 말에 따라 낳자마자 강기리(광주리)에 담아 시렁에 잠깐 얹어놓는, 명(命)늘이기 의식을 치렀고(그에 따라 아명도 "강기"가 되었다), 10살 이전에는 절대 로 외갓집엘 가서는 안 된다 하여 어머니 등에 업혀 혹은 손잡고 외갓집을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아이가 되고 말았다. 아니, 그게 빌미가 되어 결국 한평생 외갓집 담벼락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막내였던 데다가 내가 막내였으니 금족령이 풀리고 난 10살 이후 외가에는 이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물론 큰외삼촌 내외분까지도 돌아가신 이후여서 어머 니로서도 친정 나들이가 뜸하시게 되었다. 어쩌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제사 때 가 시곤 했지만, 어머니도 이미 덩치가 커버린 나를 굳이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고 나도 별로 가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릴 때 외가 쪽 사람들과 정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구러 내가 객지로 나가게 되고 외갓집 사람들 역시 거의 객지로 나가게 되다보니 점점 외갓집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 것이다. 어른이 된 후 객지에 서 간혹 외사촌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저 반가운 척 인사만 할뿐 사촌들끼리의 애틋한 정은 결코 느낄 수 없었다. 부모님이 나의 외갓집 금족령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던지 내가 다섯 살 되던 해(나이 는 뒷날 들어 알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무슨 일로 친정나들이를 가시는 어머니를 따 라 가겠다며 동구 밖까지 울며불며 어머니 치마를 붙잡고 매달리는데 왼 집안 식구들 이 나서서 어르고 달래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실랑이가 길어지고 도무지 내 고집을 꺾 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형님(나보다 11살 위)이 가만히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이렇게 꼬이는 것이었다. "강기야, 지금 나랑 집에 가기만 하면 네가 원하던 팽이를 다섯 개 만들어 주고 떼기(딱지)도 한 아름 만들어 줄께. 그리고 XX도 해주고 XX도 만들어 줄께." 팽이와 떼기는 내 윗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것이 부러워 꽤 오래 전부터 형에게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 왔으나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며 "다음에 만들어 줄께 " 하며 미루어 오던 물건들이었다.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도 가만히 상황판단을 해 보니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외갓집 가기는 틀린 것 같고 이 참에 팽이 와 떼기를 한 아름 얻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나는 못이기는 척 형의 손에 끌려 집 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후 한식경이나 지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어머니 없이는 너무 쓸쓸해서 도무지 못 견딜 것 같았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디딜방아 찧는 것을 형 이 거들어드리고 있는 사이 살짝 사립문을 빠져 나와 어머니가 갔음직한 곳으로 울면 서 냅다 달렸다. 이웃 동리 앞을 거쳐 약 1Km나 가서 마침내 어머니를 따라붙었으나 곧 뒤따라 온 형님에게 다시 붙잡혀 집으로 끌려 왔다. 그토록 따라 가고싶어 하는 아 이를 웬만했으면 딸려 보낼 법도 했으련만 "10살 이전에 외가에 가서는 안 된다"는 점 쟁이의 말을 집안 어른들 누구도 극복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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