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

신작로

이강기 2015. 9. 16. 09:11




신작로    

 



어릴 때 "신랑방" 같은 데서 자주 듣던 젓가락 장단 노래 중에 "신작로 복판엔 하이야

가 노올고요, 하이야 복판엔 신랑신부가 노온다"라는 가사가 있다. 물론 노랫말 족보

에도 없는, 아마도 문재(文才)께나 있는 어떤 사람이 가락에 맞춰 임기응변으로 지어

낸 가사일 것이다. 역시 같은 가락에 이와 비슷한 것으로, "뒷집의 XX는 순사칼을 차

는데, 우리 집 저 문둥이는 정지칼도 못 차네"라는 것도 있다. 땅딸막한 일본순사가

거의 제 키 만한 긴칼(샤벨)을 차고 거들먹거리던 시절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

로를 질주하는 대절승용차(하이야), 그리고 그 속의 신랑 신부........분명 일제(日帝

) 개화기를 상상하고도 남을 풍경이다. 

신작로는 일제시대의 산물이다. 그들이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철도

놓고 길 뚫고 했는데 그 때 이 신작로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제시대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세대이면서도 이 신작로라는 말만 나오면 어릴 때의 달콤

한, 때로는 씁쓰름한 추억에 잠기곤 한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번듯한 도로가 되었지

만 그 시절 우리 고향 마을 앞 신작로는 여름 가뭄에 털털거리는 트럭이라도 한 대 지

나갈라치면 구름처럼 일어난 먼지가 앞산 산 중턱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곤 했다. 볼

품없이 서 있는 미루나무 가로수와 주변의 농작물들은 비올 때를 제외하곤 늘 뽀얀 먼

지를 둘러쓰고 있기가 일수여서 그 시절 남루하기 짝이 없던 농촌에 을씨년스런 풍경

하나를 더 보태었다.

우리 마을은 골짜기에서도 신작로와 마을과의 거리가 대체로 먼 곳에 속하는데도 자동

차나 달구지가 지나가면 그 소음이 안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방해할 정도였는데, 도

로와 더 가까운 마을들은 소음공해가 한층 더 심했을 것이다. 골짜기가 좁고 앞 뒷산

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보니 서로 울림이 되어 소리가 실제보다 더 크게 들렸던 것

같다. 특히 바퀴에 철편을 씌운 달구지의 소음이 엄청 심했다. 철편이 자갈에 부딪치

는 마찰음이 왼 골짜기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자동차는 빨리 지나쳐버리니까 좀 시

끄러워도 괜찮은 편인데, 달구지는 동리 앞 약 200여 미터를 소걸음으로 굴러가며 귀

청 아픈 소리를 내니까 때로는 꽤 신경질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앗따

대게 시끄럽다!" 하며 불평하는 사람 없었다. 마치 풀벌레 소리 마냥 모든 걸 자연의

한 단편으로 받아들였다. 윗마을에 사시는 "왈로" 아저씨의 달구지는 간혹 저녁 으스

럼 녘에도 지나다니곤 했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자갈 부딪치는 소리만 듣고도 "왈

로 아저씨가 무딩기 밭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지금 귀가하는 길이구나"하고 짐작들

만 했지 시끄러우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칠원서 세간까지 연결된 이 신작로는 진주서 합천으로 빠지는 국도와 마산서 대구로

가는 국도 사이를 잇는 사잇길에 불과한 지방도 혹은 면도(面道)여서 꽤 오랫동안 괄

시를 받았다. 양 국도가 일찌감치 포장이 됐는데도 이 신작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겨우 80년대 넘어와서야 포장공사가 시작됐다. 포장되기 전에는 도로의 보수도 주민들

의 부역에 의존했다. 일정한 구역을 정해 1년에 한 두 차례씩 자갈을 덧씌워야 했고,

통나무를 걸쳐서 만든 다리 두개는 장마에 떠내려 가버리기라도 하면 순 주민들의 힘

으로 통 채로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한 집에 장정 한 사람씩 강제로 차출되

는데 누구는 빠졌느니 어쨌느니 하며 이웃간 인심을 사납게 만들었다. 국도변에 사는

사람들과 지방도나 면도(面道)변 사람들 간에 이렇게 차별이 있었으니 후자들로선 정

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강(南江)가 마을인 송도에 뱃다리가 생기기 전 까지는 한 달에 한 두 차례 읍에서

공무로 나오는 차량과 1년에 한 두 번쯤 활동사진 내지 무슨 악극단 차량 밖에 오는

것이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 때는 간혹 후보차량이 신작로에 정차하여 성능 나쁜 대형

스피커를 마을 쪽으로 돌려놓고는 볼륨을 최대한 높여 온 동리가 떠나가도록 왕왕거리

며 연설을 해대곤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연히 사람들 마음만 스산

하게 만들었다. 스피커 소리에는 새 문명에 동경을 일으키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게 숨

어 있었다. 활동사진이나 악극단 사람들이 선전벽보를 붙이기 위해 마을에 나타날 때

면 온 동리 아이들이 검둥개 돗따라 다니듯 졸졸 따라 다녔다. 

50년대 중반 송도에 뱃다리가 놓여 자동차가 건너다닐 수 있게 되면서부터 고향의 신

작로는 마산이나 부산을 오가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전에는 진주가 생활권의 중심

 도시여서 가령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문제도 주로 진주사범학교나 농림학교를 염두에

두곤 했었는데, 이젠 마산과 부산으로 대체 되었다. 마산서 신반이나 합천으로 오가는

정기 버스가 생기고 나중엔 부산까지 가는 버스도 생기게 되었다. 이 무렵,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농사에 매달려 있던 고향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산의 공장이나 군부

대 내지 부두에서 막일을 하기 위해 떠나갔으나 거의 열이면 열 다 실패하고 되돌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를 드나들면서 묻혀 오는 새 문명 냄새는 대단했다. 도시의

거죽만 맴돌다가 온 것이 분명할 터인데도 참말 반 허풍 반으로 엮어대는 그들의 호기

어린 경험담은 아직 도시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마음을 몹시

설레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들이 배워온 새 유행가는 단번에 마을의 인기차트 1순위

노래가 되었다. "등대불 깜빡이는 부산항 바다 멀리....."라는 가사의 노래도 그 시

절에 꽤나 유행하던 노래였다.     


(200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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