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하며 놀았나 - 50년대 초 농촌풍경(1)
6.25 사변 전까지는 아직도 일본풍이 많이 남아 있어서 아이들 놀이도 일본식이 많았다. 남자아이들은 주로 "진돌이", "하찌돌이", "오니고꼬", 자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 등의 놀이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 놀이와 "빵치기" "오자미(콩주머니) 던지기", 공기놀이 등을 하며 놀았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도 6.25사변 이전에는 "긴시 간다간다 우리 오빠는 전쟁에 나가서 이겨주세요..."나 혹은 "우찌야 데데노 시찌지아오...."로 시작되는 일본 군가 나부랭이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사변 후에야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고향 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등의 우리 노래로 바뀌었다.
"오니고꼬"라는 것은 술래잡기 놀이인데 아이들 여럿이 삥 둘러 서 주먹을 서로 맞대고는 한 아이가 "오니 고꼬 수루모노 욧대 오이데 아도까라 구루 모노 이라나이요(술래잡기 할 사람들 이리 오세요, 늦게 오는 사람은 필요 없어요 - 어릴 때 배운 발음에 근거하여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지 모르겠다)"라는 단박자의 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주먹 하나씩을 짚어 나가다가 맨 마지막 "요"자에 걸린 주먹의 아이가 술래가 되어 술래 아닌 아이들을 잡으려 다니는 놀이다. 주로 달밤에 동리 앞마당에서 자주 하던 놀이였다. 그런데 노래 박자와 손가락 짚는 것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박자를 조정하여 평소에 얄밉게 굴던 아이를 술래로 만들곤 했다. 마치 아이들 둘이서 서로 다리를 엇갈리게 펴놓고는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앵도만도 두만도..."하는 노래를 부르며 일부러 상대방 다리를 술래로 만드는 것과 같은 식이다. 땅따먹기는 매우 정적(靜的)인 놀이였다. 마당에 큰 원을 그려놓고 두 아이가 동전 같은 납작한 돌멩이를 퉁겨서 경쟁적으로 집을 확장해 가는 놀이다.
"하찌돌이"는 운동장에 "ㄹ" 자나 "S" 자형의 큰 선을 그어 양쪽 진지를 만들어 놓고는 편을 갈라 서로 상대방 진지로 쳐들어가 빼앗는, 다분히 일본 군국주의 냄새가 풍기던 전쟁놀이였다. 각 팀은 아이들 개성에 따라 수비조와 공격조로 나뉘는데 완력이 세고 악착같은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주로 각 조의 선두에 섰다. 선을 밟던가 일본씨름인 "스모"처럼 선 밖으로 밀려나가면 "전사"하게 되고 따라서 병력 수가 줄어들게 된다. "진돌이"는 주로 달밤에 동구 밖 마당에서 하던 놀이었다. 마당 양끝에 큰 돌멩이를 하나씩 놓고 그것을 진지로 하여 한 아이씩 뛰어 나가 상대편에서 뛰어 나온 아이를 터치하여 잡아내는 놀이이다.
이런 놀이들은 6.25사변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유행했었다. 달리 무얼 갖고 놀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있는 운동기구라야 철봉 두어 개가 고작이고 공차기를 하고싶어도 공이란 게 좀 유복한 집 아이가 사온 아이 주먹만한 고무공이 전부여서 공을 찬다는 게 땅이나 돌멩이를 차는 바람에 발가락을 크게 다치곤 하던 시절이다. 가죽으로 만든 축구공은 어쩌다 열리곤 했던 마을대항 축구대회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다. 동리마당에서는 주로 새끼줄을 감아 만든 짚볼로 공차기를 했었다.
사변 후 한 때 총탄탄피 따먹기 놀이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주로 인민군들이 버리고 간 소련제 AK 소총 실탄 탄피들을 사용했는데 마치 구슬치기하듯 땅바닥에 삼각형을 그려 그 안에 각자의 탄피를 가지런히 놓고는 약 1.5m 떨어진 지점에 그어놓은 선에 서서 "오야"를 던져 탄피를 삼각형 선 밖으로 퉁겨내는 놀이이다. "오야"는 약 15-20mm 구경의 소련제 기관총 탄환을 이용했다(간혹 미군 비행기에서 발사된 미제 기관총 탄환도 있었다). "오야"가 제법 묵직한 것이기 때문에 탄피들은 항상 쭈그러져 있었다. "오야" 탄환에 장약이 들어 있고 충격을 받거나 불에 넣으면 폭발하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놀이었지만, 그 땐 그런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 탄환들을 물기 있는 흙에다 싹싹 문질러 반짝반짝 광을 내기도 했다.
아이들은 탄약수집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간혹 "운수 대통한" 아이들은 신작로 "공굴"(콘크리트 홈통) 같은 데서 AK 소총이나 따발총 탄약들을 곽 체로 찾아내곤 했다. 탄약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분해하여 총알은 화롯불에 녹여 납을 빼내 땅바닥에 파놓은 거푸집에 부어 장난감(작은 비행기등)을 만들었고, 화약은 각종 화약놀이에 사용했다. 화약을 뾰족한 쇠구멍에다 넣고 고무줄을 맨 굵은 철사로 충격을 가하면 꽝하는 소리를 내며 터졌는데 이 놀이 때문에 어른들한테서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납을 빼낸 총탄은 앞머리 뾰족한 곳에 가는 구명을 뚫고 잉크에 담근 솜을 넣은 탄피에 다시 끼워 철필로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탄약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 방의 설합이란 설합에는 실탄이나 탄피들로 가득했다.
점점 탄약이 귀해져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자 멀리 다른 마을로 탄약수집 원정을 가기도 했다. 51년 3월초쯤으로 기억하는데, 꼬맹이들 너 댓이 마치 훗날의 "개구리 소년들"처럼 작당을 하여 "탄약 수집차" 태산같은 재를 넘어 홍의장군 유적이 있는 세간까지 간 적이 있다. 미군비행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돼버린 세간 앞 개천가의 인민군 탄약더미 터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모래밭을 파기만 하면 폭격에도 미쳐 터지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탄약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바람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우리들을 팔짝 팔짝 뛰도록 기쁘게 했던 것은 우리 마을에선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중기관총 탄환들을 다수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모두 주머니마다 가득가득 넣고 가져간 보자기에도 싸고 하여 세상을 다 얻은 기분으로 씩씩하게 돌아왔다. 불발탄들이 여기저기 묻혀 있어 마치 지뢰밭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위험한 짓을 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체, 그리고 집에 돌아와 꾸지람을 바가지로 듣고 한 아이는 집에서 발가벗겨 쫓겨나기까지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체...... (이 글은 2004년 초 모교인 지정초등학교 홈페이지 올렸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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