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日帝)가 이 땅에 들어와 철도 놓고 길 뚫고 하면서 한국인들로부터 전혀 엉뚱한 오해를 산 것이
있다. 이른바 백두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정기(精氣)를 차단하여 한반도에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고 한국인들을 열등민족으로 만들려고 산의 지맥을 다
끊어 놓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바로 그것이다. 풍수지리설을 믿지 않는 일본인들로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산악국가인 한국에서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려면 터널을 뚫고 산맥을 절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달구지 하나 제대로 다닐 만한 길도 변변히 없는 나라에, 비록
자기들이 필요해서이긴 하나, 비싼 댓가를 치뤄가며 길 닦고 철도 놓아주어 기껏 반응이 이 모양이었으니 그들로선 기가 찼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국토를 측량하기 위해 중요 산봉우리에 철정(鐵釘)을 박아 삼각대를 세우고 가파른 바위정상에 오르는 등산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정
울타리를 만들어 놓으니, 이 또한 민족정기를 꺾기 위해 명산의 혈맥마다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며 야단법석이 났었다. 민심이 뒤숭숭해지고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적개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한국의 항일 지도자나 지식인들은 그것이 민족정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민족감정을 자극할 좋은 기회다 싶어 모른 체 시치미를 떼거나 오히려 슬슬 부추기기까지 했다. 뒤늦게 김영삼정부 시절에도 "역사
바로세우기"를 한다며 새삼스레 이 문제를 끄집어 내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적이 있었다. 공연한 정치놀음이었다.
고향의 신작로가
정확히 언제 건설됐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걸 뚫을 때도 벼라 별 이유들을 들이대는 지방 유지들의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싶다. 80년대
확장과 포장 공사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지만 아마도 주로 조상님들 산소 곁을 지나느니 못 지나느니 하는 묏자리용 풍수지리의 문제가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분명 그에 얽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도 모를 에피소드들이 숱하게 많았을 것인데 그걸 기록해 놓을 필요성을 느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정말 유감이다. 고향역사의 훌륭한 자료가 되었을 터인데.
신작로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1923년인가 지정에 초등학교를 세우기로 결정이 났을 때 일본인들은 처음에 그 장소를 현재의 우샛터 마을과 아래 샛터 마을
사이(우샛터 마을 뒷산 서남편)로 정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자리는 길지(吉地) 같다. 서남향에 뒤로는 북풍을 막아주는 산이 있고
앞이 확 틔었으며, 겨울이면 하루 종일 따뜻한 햇볕이 내리비치는 양지쪽이다. 맞은 편 신작로에서 바라보면 동리 앞 인공숲과 어우러져 경치가 제법
괜찮은 장소다. 아마도 봉곡 골짜기에서 학교 터로서는 제일 그럴듯한 장소가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의 눈이 그걸 놓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우샛터 마을은 비록 한학이었지만 글께나 하고 말께나 하는 완고한 어른들이 수두룩했을 때였다. 동리에 서당이 있고 아이들이 모두
소학과 명심보감을 달달 외며 "아무 불편 없이 학문을 하고 있는" 마당에 날날이 같은 신학(新學)을 하겠다며 학교를 짓겠다니 이놈들이 아예
동리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하며 사생결단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그러한 일로 민심을 잃기 싫었던 일본인들이 손을 들고 지금의 장소로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딱히 풍수지리설과는 관계가 없는 얘기지만, 동리 옆에 더욱이 이방인인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식학교를 짓는다는 것은
무언지 부정탈 것 같고 고유한 풍속을 해칠 것 같고 그리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런 얘기를 듣고
학교설립에 반대한 옛 어른들(그 무렵 이미 다들 돌아가셨지만)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학교가 동리 바로 곁에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지금의 초등학교 터는 사방 난달이고 바람맞이여서 학교가 들어 설만한 자리가 아니다.
굴러오는 복을 걷어 차버린 이와 비슷한 얘기로 충남 공주의 경우가 있다. 일본인들이 경부선을 건설할 때 처음에 공주를 경유키로
설계가 돼 있었다. 당시(1901년 착공-1904년 완공)만 해도 공주는 나라에서 중히 여기는 주(州)자 돌림의 어엿한 성읍(城邑)도시였지만
대전은 허허벌판이었다. 그러나 공주 주민들이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대전으로 낙착이 됐다. 철마가 지신(地神)을 노엽게 만든다는
풍수지리설과 철로를 따라 들어오는 신식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이 바람에 공주는 쪼그라들고 대전이 번성해 갔다.
1896년 전국을 8도에서 13개도로 개편할 때 공주가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였으나 1936년엔 그마저 대전에 빼앗겼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옛 양반네들의 고루한 사고가 일을 얼마나 그르쳤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라 할 것이다. 하기야 공주의 경우엔 최근에 그 근방이 새
수도가 된다고 하니 그 때 철도건설을 반대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생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최근에도
풍수지리설로 인해 길 뚫고 철도 놓는 일이 크게 저촉을 받은 일이 있다. 경부고속철도의 부산 진입지점인 천성산 금정산 터널공사와, 서울 외곽
순환도로의 의정부 구간인 사폐산 터널공사가 승려들의 결사반대로 몇 년간 지연되고 공사비만 수 천억 원이 증가된 것이 그것이다. 천성산에는
내원사가 있고 금정산에는 범어사가 있다. 그리고 사폐산이 있는 북한산일대에도 도선사 등 절이 많다. 이유는 환경파괴를 내세웠으나(그래서
환경단체들도 가담했다) 실인즉 사찰 근방의 산밑에 터널을 뚫어 기차나 자동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것이 풍수지리설에 절어 있는 사람들에겐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통령이 나서서 조계종 간부들을 설득한 끝에 공사가 재개되긴 했으나 그 바람에 시간과 돈을 얼마나 허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