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도 나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하루에도 한 두 번쯤은 이 말을 입에 올릴 것이다. 동리 앞산 이름이기 때문이다. 앞산에 약간 얕은 골이 세 개 있는데 제일 위쪽 것을 "윗 벵기미", 중앙을 "가운데 벵기미" 아래 쪽 것을 "작은 벵기미"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그 앞산을 왜 벵기미라 부르는지, 벵기미의 뜻이 무언지 50줄이 넘을 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어릴 땐 주변에 한학을 하고 고향 땅의 내력에 밝은 어른들도 많았으니까 꼭 알려고 했으면 그 어른들에게 물어 알 수도 있었으련만 캐물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뜻도 모른 체 "벵기미"라 부르며 지나왔던 것이다. 어릴 땐 "벵기미"라 하면 자꾸 "비행기"가 연상되곤 했다. 경상도 사람들 어법의 특징인 "줄여 부르기"를 하면 "비행기"가 "베엥기"가 되고 "베엥기"가 다시 "벵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벵기미"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다. 나이 먹어 갈수록 새삼스레 고향과 어린 시절 생각이 새록새록 나던 차에 어느 날 무슨 책에서 "굼"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이 "굼"이란 말은 "골(谷)"보다는 얕은 산골짜기나 들판 일부가 넓다랗게 움푹 들어간 곳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른바 "샛굼" "윗굼" "아랫굼" "굼실(室)" 할 때의 그 "굼"이다. 웬만한 국어사전에는 나와있지도 않지만 경상도에선 흔히 쓰는 토박이 말이며 엄연한 표준어다. 이 "굼"에 대한 의미를 곰곰이 새기다가 갑자기 "나란할 병(竝)"자(字)가 생각났고, 그리고 고향의 그 "벵기미" 생각이 난 것이다. 즉 "벵기미"는 바로 "병(竝)굼"을 의미했던 것이다. 처음 우리 마을에 들어와 살던 조상들이 앞산의 세 골짜기를 "XX골(谷)"로 이름 짓기에는 골짜기가 너무 얕아 "굼"이라 했는데, 그 굼이 나란히 세 개가 있으니 나란할 병(竝)자를 붙여 "병(竝)굼"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발음하기 어려운 "병굼"이 "벵구미"가 되고 어느새 "벵기미"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니 앞산을 "병굼"이라 이름지었던 조상님들의 학식과 지혜에 새삼 머리가 숙여졌다.
요즘은 전국이 거의 일일 생활권이 되고 텔레비젼 아나운서의 표준어 발음을 아침저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덕택에 표준 서울말이 그렇게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35년여 전만 해도 지방사람들이 서울 와서 제일 먼저 곤란을 느끼는 게 표준말과 사투리의 차이점이었다. 특히 투박한 경상도 억양에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토박이 단어를 섞어가며 떠들면 상대방은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않고 먼저 웃음보부터 터뜨리곤 했다. "가가 가가가?(그 애 성이 가가<賈哥>냐?)" 하는 우스개 소리도 자주 듣곤 했다. 억양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단어인데 어릴 때부터 사투리로 배운 단어의 표준어가 얼른 생각이 안 날 때가 흔히 있는 것이다. 예컨대 "수군포"를 "삽"이라 하고 "소시레이"를 "쇠스랑"으로, "챙이"를 "키"로 하는 정도야 쉬운데, "당새기(왕골로 만든 함)" "두꾸마리(짚으로 만든 큰 그릇)" "따뱅이" "훌칭이(쟁기보다 작은 밭가는 농기구)" "등지게(여름에 남자들이 쉽게 걸치는 윗도리)" 등으로 넘어가면 이건 속수무책이다. 풀이나 꽃의 이름까지 들먹이면 더욱 가관이 된다. 지금도 사투리로는 알면서도 표준어로는 모르는 말들이 부지기수다. "땡깔"이 표준어로 "꽈리"이며 "깔래밭기"가 "공기놀이"라는 것도 수년 전에야 알았다.
고향의 지명들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벵기미"라는 말은 겨우 알아냈는데, 예컨대 "복아리 골짜기" "한니불 재" "거름강" "배방지 재" 등의 실제 뜻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60년을 살아오면서도 진정한 뜻도 모르면서 입에 올리는 말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20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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