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秘錄

이강기 2015. 9. 16. 10:15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秘錄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230만 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292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한을 합쳐 5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이 전쟁은 기이하게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다. 6·25 전쟁은 전쟁이란 형태를 통해 남북한에서 수많은 리더가 등장해 리더십을 발휘한 치열한 경연장이었다. 이들은 피와 땀과 한숨과 함성을 토해내며 생존 투쟁을 위한 거대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리더십이 결국 지금의 남북 문제를 만든 근본 원인이다. 또 이 리더십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정전체제 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일보를 내디딜 수 있다. 6·25 전쟁은 또 생각밖으로 치열한 기동전이었다. 소설 ‘삼국지’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었다. 50년 전 남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은 어떻게 싸웠는가.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hoon@donga.com

 


 

 

 

제1편 전쟁발발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임부택(林富澤·당시 31세)은 1950년 6월25일 춘천에 본부를 둔 육군 제6사단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인 그는 한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경찰예비대(1946년 1월15일 창설)의 창설 멤버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사병 군번 제1번인 110001번과 함께 중사 계급을 받고, 한국 육군의 모태가 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그러다 4개월 후인 1946년 5월1일 미 군정청이 조선경찰예비대훈련소(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육사의 전신)를 만들자 입교해 약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었다. 소위가 된 날부터 만 5년이 지난 1950년 6월25일에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중부 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는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은 29세의 홍안 청년 김종오(金鐘五) 대령. 김대령은 일본 중앙대를 다니다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5일 미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자 입교해 참위(지금의 소위)가 되었다. 김대령 휘하에는 7연대 외에도 2·19연대가 있었다. 함병선(咸炳善·당시 30세) 대령이 이끄는 2연대는 홍천에 본부를 두고 7연대 우측 전방을 방어하고, 민병권(閔炳權·당시 32세) 중령이 지휘하는 19연대는 예비대로 6사단 사령부와 함께 후방인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태풍 ‘엘시’


 

1950년에는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다. 농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비 소식을 기다리는데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이 와도 큰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서 규모가 작은 태풍 ‘엘시’가 발생해 서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던 농민들이 겨우겨우 모심기를 끝낸 그해 6월23일 오후 2시쯤,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춘천 일대에 모처럼 가랑비가 내렸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샘밭골은 당시는 38선 바로 남쪽이었다.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는 북한강에는 ‘모진교’라는 길이 약 250m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다리 북쪽인 화천군에는 함흥에 주둔하다 수일간 야간 행군 끝에 6월17일 이곳으로 이동해온 인민군 2사단(사단장 李靑松 소장·인민군 소장은 국군 준장과 같다)이 포진해 있었다. 인민군 2사단이 춘천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당시 이 다리 지역을 방어한 것은 박용덕 상사가 이끄는 7연대 수색대였다.

그러나 다리 북쪽 지역에 있는 38선 이남 지역이 너무 좁아 7연대 수색대는 다리 남쪽만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리 북쪽에는 인민군 초소가 생겨났으니, 사실상 모진교가 38선인 셈이었다. 당시에도 지뢰가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리 한복판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리고 원격장치로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게끔 별도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다.

가랑비를 맞는 모진교 아래 북한강에서 을씨년스럽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다리 북쪽에서 홀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는 인민군이 월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할 때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민군 초소로부터 전혀 총격을 받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흰옷은 한 노인이었다. “어! 저 영감이-!” 하며 7연대 수색대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터지고, 노인은 다리 한복판에서 꼬꾸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인은 장씨였고, 화천으로 출가한 딸 집에 살고 있었다. 장씨의 평생 소원이 38선 남쪽 춘천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청송 인민군 2사단장은 개전을 앞두고 사단 정치장교인 이시혁(李時赫)에게 “요충지인 모진교의 방어 상황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을 찾던 이시혁은 장노인을 찾아내, 설득 반 위협 반으로 “아들 집으로 가라”며 모진교로 내몬 것이다. 장씨의 죽음으로 인민군은 모진교에 폭파 시설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로부터 10여 시간 후인 6월23일 24시(6월24일 0시), 육군 본부는 6월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이 경계령은 5월1일 메이데이 시위와 2대 총선인 5·30선거, 그리고 6월7일 북한이 남북한 선거를 제의하고 6월10일에는 북쪽의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의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을 교환하자고 제의함에 따라 취해진 조처였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육본 장교들은 토요일인 6월24일 저녁부터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댄스 파티에 들어갔다.

 

댄스파티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전미 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에서 제외된다”고 밝힌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애치슨 선언은 6·25전쟁을 유발한 첫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47년 발족한 미 CIA 극동 책임자로 1981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비노출 요원으로 활동하던 하리마오박 (당시 31세·한국명 朴承德)씨는 미국이 고의로 6·25전쟁을 유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인 KLO부대와 미 극동공군의 첩보부대인 ASIS, 한국 육군의 일선 부대 그리고 미 CIA는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1195개 문건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워싱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23일 망설이는 채병덕 육군총참모장(蔡秉德·당시 29세)을 설득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댄스파티를 열게 한 이는 미군 고문단장 대리인 헨리(가명) 대령이었다”

하지만 6사단 7연대만은 모진교 사건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았다. 7연대는 이미 6월19일 귀순해온 인민군 2사단 포병연대의 박철호 전사에게서 “원산에 주둔하던 포병연대가 대규모 야외훈련을 한다며 1주일간 야간행군을 계속해 철원-김화를 거쳐 6월18일 밤 화천 남쪽 신포리 백사장에 도착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바 있었다. 7연대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큰 관심을 표시했지만, 육본 정보국의 미군 고문관(대위)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김대령의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한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인민군은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인민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인민군과 별도로 북한은 내무성(한국의 내무부에 해당)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지도 참조).

 

선제 타격전략


 

국군에는 4사단이 없지만 인민군에는 4사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군 사단은 연대를 시발로 생겨났다. 1연대가 1여단이 됐다가 1사단이 되는 식이다(그 후 각 연대는 계속 배속 사단이 변경돼, 1사단에 꼭 1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군이 연대로만 구성돼 있을 때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에 따라 군내 좌익 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대규모 숙군 작업이 펼쳐졌는데 유독 4연대(연대장은 6·25전쟁 당시 8사단장인 李成佳 대령)에 좌익이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은 4연대 예하 대대를 모태로 창설한 14연대(연대장 박승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49년 5월 4여단(여단장 金白一 대령) 예하 8연대에서 표무원(表武源) 강태무(姜太武) 소령이 자기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그렇지 않아도 4자는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켜 개운치 않은데다 자꾸 좌익 관련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24~34~40 등 4자가 든 부대 명칭은 아예 쓰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국군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빨갱이’가 싫어서 4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10과 18도 욕설을 연상시켜 사용하지 않는 숫자가 되었다.

이른바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인민군의 전쟁 개시 작전계획은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국군 17연대를 공격하고, 6사단과 1사단은 국군 1사단을, 4사단과 3사단은 국군 7사단을, 2사단과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국군 8사단을 밀어붙인다는 것이었다.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3배 이상 강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2 대 1로 우세한 상황에 국군을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1950년 2월부터 인민군 각 사단은 북한 중앙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전쟁 소모물자를 대량 확보해놓았다. 더구나 국군은 1대도 없는 전차를 무려 242대, 한국 공군은 연락기 10대뿐인 데 비해 인민군 공군은 211대의 각종 공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 타격만 하면 공자와 방자 비율에 관계없이 이긴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지금처럼 미군에 작전권을 넘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인민군의 이러한 부대 배치에 대비해 지금의 합참본부와 같은 구실을 한 육군본부는 ‘육본작전계획 제38호’를 작성해 인민군의 선제타격전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육본작전계획 38호는 인민군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6월23일 밤 12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6월25일 새벽4시


 

장교구락부 댄스파티에서 술을 마신 채병덕 총참모장 일행이 명동의 카바레로 나가 2차를 즐기고 귀가한 것은 6월25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 무렵 춘천 일대에는 7년 대한에 단비 오듯 ‘쫙쫙’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 속에 두 눈을 부릅뜨고 손목시계를 노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인민군 2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대령에 해당)였다. 폭우가 걷히는 기세를 보인 정각 4시, 이학구 총좌는 김광협 중장에게 지시받은 대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짧게 외쳤다. “폭풍!”

그 순간 화천 일대에 포진한 인민군 포병연대 소속 122㎜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국군 7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영삼(鄭永三) 중위는 포성에 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그 어떤 지휘관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터. 상급 부대에 보고한 후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이 바람에 국군 각 중대는 진지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이 고장나 상급부대와 연락이 두절되는 부대도 늘어났다.

전통적인 지상전은 먼저 화력을 퍼부은 후 기동부대를 앞세워 돌파하고, 이어 보병부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순서로 진행된다. 날이 밝자 국군 부대가 고립된 틈을 타 SU76 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2사단이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T34 전차가 아니라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인민군은 모진교가 T34 전차 무게를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진교에 설치된 폭발물 때문에 전차가 파괴될까 두려워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이다.

임부택 중령은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건너기 전에 모진교를 폭파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하 중대가 인민군의 포격으로 고립돼 있을 뿐, 아직 전부대가 후방 방어선으로 후퇴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다리를 조기에 폭파하면 차후 국군의 진격 작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이런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진교를 건너온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삽시간에 소양강까지 진격해버렸기 때문이다.

 

불 뿜는 자주포


 

당시 국군 병사들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할 줄 몰랐다. 그래서 SU76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하고,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인민군 전차 공포증’이 시작된 것이다. 치열한 전투의지는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7연대 대(對)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沈溢) 소위가 그런 경우다. 적 기갑부대의 진격을 막는 것이 주임무인 심소위 소대는 57㎜ 대전차포를 쏘아 SU76 자주포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자주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포 사격을 하며 전진해왔다.

이러한 기세에 눌려 심소위 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숨어서 적 자주포가 더 가까이(30m 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57㎜ 대전차포를 쏘았다. 선두로 달려오던 SU76 자주포는 대전차포를 맞더니 ‘끼룩 끼룩’ 하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2번 자주포도 기동을 멈췄다. 그 사이 심소위를 비롯한 특공대가 두 대의 자주포에 뛰어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져넣었다.

화염병 투척은 의외로 효과가 높았다. 화염병의 불꽃은 SU76 자주포 안에 있던 포탄 추진제를 점화시켜 삽시간에 자주포를 폭발시켰다. 이 일은 아마 대한민국 역사(일제 시대는 제외된다)에서 최초로 화염병이 등장한 사건일 것이다. 심소위 특공대의 쾌거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적 전차를 잡았다”는 오보(誤報)로 전달됐는데, 이 오보가 전차 공포증에 시달리던 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민군 2사단은 임부택 중령의 국군 6사단 7연대가 지키는 춘천으로 진입하고, 12사단은 홍천에 본부를 둔 함병선 대령의 국군 6사단 2연대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7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6사단의 결사항전은 눈부셨다. 이로써 인민군 2사단은 38선에 근접한 춘천을 전쟁 시작 3일(6월27일)만에 겨우 점령했다. 이 공격에서 인민군 2사단은 40%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SU76 자주포 7문과 45㎜ 대전차포 2문이 파괴되는 피해를 보았다.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김일성(金日成 6·25 당시 38세)은 중국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활동하며 중대장급 지휘자로 성장했다. 이 부대는 그 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된다. 1941년부터 일본군이 공산 유격대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극동지역에 포진한 소련 극동군으로 하여금 소련 땅으로 도주해온 중국 공산군들을 모아 ‘88특별저격여단’(여단장은 중국인 周保中)을 편성케 했다. 이때 김일성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의 제7대대장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중공군과 소련군에 몸담고 있던 조선인 장병들을 두루 알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 전투


 

훗날 김일성은 춘천 전투에서 진격이 늦어진 것이 6·25 전쟁 전체를 망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김일성은 그와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2군단장 김광협 중장과, 소련군 출신인 2사단장 이청송 소장, 그리고 12사단장 최춘국(崔春國) 소장을 전격 교체해버렸다.

이러는 사이 38선에 배치된 여타 국군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백선엽(白善燁·당시 30세)은 당시 대령 계급장을 달고 1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육군의 ‘선봉’ 사단인 1사단은 황해도 청단에서 경기도 개성을 거쳐 적성에 이르는 90㎞ 전선을 커버한다. 1사단 예하에는 개성에 본부를 둔 12연대(연대장 全盛鎬 대령)와 문산에 본부를 둔 13연대(연대장 金益烈 대령)가 전방에 나가 있고, 11연대(연대장 崔慶祿 대령)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수색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백선엽 대령은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가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이때 이미 1사단 병력은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절반 정도가 토요일인 6월24일부터 외출·외박을 나가 있었다. 25일 오전 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백대령은 파주초등학교 앞산에 올라 전황을 관측했다. 파주초등학교 전방에는 임진강이 있고 12연대는 이 강 북쪽인 개성 일대에서 싸웠다.

개성 지역으로 돌진해 들어온 것은 인민군 105전차여단 소속 206기계화연대고, 그 뒤로는 중국 공산군에서 이미 사단장 대우를 받던 방호산(方虎山)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이 따라오고 있었다. 문산에 위치한 13연대 쪽으로는 역시 105전차여단 소속의 203전차연대를 선두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최광(崔光)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1사단이 진격해 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진강을 등진 ‘배수진’ 형태로 인민군과 싸운 것은 개성의 12연대였다. 문산 쪽의 13연대는 큰 강이 없어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치닫지 않을 것이다. 백대령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색에 위치한 11연대가 외출·외박 나간 병사를 모아 임진강변에 방어선을 칠 때까지, 12연대로 하여금 버티게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문산에 있는 13연대는 인민군 1사단이 우회하지 못하게 결사 항전해야 한다.

당시 임진강에는 유일한 다리인 임진강 철교가 걸려 있었다. 지금 임진각 앞에 가면 시커멓게 교각만 남은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강 철교로 12연대를 빼냄과 동시에 철교를 폭파하고 11연대 병력으로 임진강변에서 방어선을 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백대령은 임진강 철교에 폭파시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자 사단 공병대장 장치은(張治殷) 소령이 달려와 “폭파 준비가 다 됐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일행과 함께 스리쿼터를 타고 임진강 철교를 건너왔다. 12연대 병사들은 대부분 철교를 건넌 것 같았다. 잠시 후 전방에 나가 있는 척후대로부터 “인민군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백대령은 짧게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굉음은 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사색이 된 장소령이 달려와 “도화선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폭파에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공병대가 도화선을 재점검할 틈도 없이 임진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군이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인민군 전차는 이 다리로 진격해오지 않았다. 인민군은 당연히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할 것으로 계산하고 전차를 13연대가 방어하는 문산 쪽으로 돌린 것이다.

13연대의 57㎜ 대전차포는 인민군 T34전차를 세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개전 첫날부터 ‘부나비’처럼 수류탄을 지고 인민군 전차로 뛰어올랐으나, 전차는 파괴되지 않았다. 13연대의 분전으로 6월26일 저녁에야 인민군 1사단은 문산을 장악할 수 있었다. 부슬비가 뿌리는 이날 저녁 국군 1사단은 현재의 파주시 금촌동과 조리면에 있는 작은 하천 봉일천(奉日川)을 잇는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TNT특공대


 

무서운 투혼은 종종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개전 첫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라는 치욕적인 실수를 범한 1사단 공병대 부대대장 김영석(金永錫) 소령이 21명의 지원자와 함께 백대령 앞에 나타났다. 김소령 일행는 “특공대 전원이 유서를 작성했다”며 “죽음을 맹세코 야간 기습하는 적 전차를 격멸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가운데 넣고 TNT로 묶은 ‘묶음’을 들고 뛰어나갔다.

수류탄의 안전핀만 뽑으면 TNT가 폭발할 테니 육신과 함께 적 전차를 폭파하겠다는 투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 인민군 전차는 기동하지 않았다. 특공대는 인민군 척후병만 저격하고 날이 밝자 소화기 10여 점을 노획해 귀대했다. 다음날(6월27일) 저녁 백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서를 받았다. 하지만 백대령의 마음은 후퇴로 기울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은 다음날(6월28일) 새벽 3시였다. 이어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1사단으로 전해졌다. 인민군 6사단이 기차를 타고 파괴되지 않은 임진강 철교를 통해 남하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사람은 단 하루만 못 자고 단 하루만 굶어도 파김치가 된다. 벌써 1사단 병사들은 3일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사단 포병대장 노재현(盧載鉉·1979년 12·12사건 때 국방장관) 소령은 “포탄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백대령은 육본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퇴로가 막혔으니 사단 지휘부는 행주산성 부근에서 뗏목을 타고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 백대령은 인민군 방어를 위해 남아 후순위 도강자(渡江者)가 된 장병들에게는 “알아서 도강해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시흥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겪은 가장 길고 긴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제2편 서울 함락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는 개성-문산 축선(국도 1호선)이지만, 이곳에는 임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있다. 하지만 38선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길은 큰 강이 없는데다, 동두천 축선(국도 3호선)과 포천 축선(국도 43호선) 두 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육본은 인민군 주공(主攻)이 의정부 축선에 투입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육본은 ‘작전명령 38호’에서 ‘동두천과 포천에서 적을 막다 여의치 않으면 동두천과 포천 축선이 합쳐지는 의정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려 놓았다. 이곳 방어는 전방 사단장 중 유일한 장성인 유재흥(劉載興·당시 29세) 준장이 이끄는 7사단이 맡았는데, 7사단 예하에는 한국군 최선봉이자 최정예인 1연대(동두천)를 필두로 3연대(예비)와 9연대(포천)가 배속돼 있었다. 그만큼 7사단이 육군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런데 전쟁은, 육본의 부대 이동 명령에 따라 7사단이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李鍾贊 대령) 예하로 보내놓고, 온양에 있는 2사단 25연대가 배속돼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터졌다. 당시 7사단도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상당수의 장병을 외출·외박 보낸 상태였다. 7사단 사(師團史)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로 기록될 ‘서울 함락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월25일 새벽 4시 국군 7사단 1연대 지역에 인민군이 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5시30분이 되자 인민군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 소속 전차 40대가 동두천 축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이권무(李權武)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4사단이 따라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국군 9연대가 포진한 포천 축선으로는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가 진격해오고, 그 뒤로 이영호(李英鎬)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3사단이 진격해왔다.

이때 인민군이 구사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점양면(一點兩面) 전술’과 ‘양익포위(兩翼包圍) 전술’이다. 일점양면 전술은 인민군 1개 연대가 정면에 있는 국군 1개 연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사이, 다른 연대는 인접 도로로 우회해 같은 시간에 국군 연대 옆구리로 ‘훅’을 날리는 연대 단위 전술이다.

양익포위 전술은 2개 사단이 협동해서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 인민군 6·1사단이 국군 1사단을, 인민군 3·4사단이 국군 7사단을 포위해 각각 섬멸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군 2·12사단이 국군 6사단을 공격해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것이 양익포위 전술이다. 이러한 포위전술 덕분에 개전 첫날 인민군은 동두천과 포천을 각각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취침 중인데…”


 

이날 술에 취해 잠든 채병덕 총참모장을 깨운 것은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었다. 새벽 5시20분쯤 임중령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총참모장 관사로 전화를 걸자, 전속부관인 나(羅)모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총참모장 각하를 대주시오.” “지금 취침중이신데 급한 일입니까?” “그렇소. 우리 7연대 전방에 포탄이 낙하하고, 인민군이 대거 남침중이오.” 이 전화는 나중위가 거세게 혀끝을 차는 소리를 끝으로 잡음을 내다 끊어지고 말았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채병덕 총참모장이 110㎏의 거구(巨軀)를 흔들며 의정부에 있는 7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것은 이날 새벽이었다. 인민군의 전면 남침임을 확인한 채총참모장은 수도경비사로 배속한 3연대를 다시 7사단으로 재배속시켜, 포천 방면을 방어하는 9연대를 지원케 했다. 육본의 배속 변경 명령에 따라 서울에 와 있던 2사단 예하 5연대와 수경사 예하 18연대도 7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날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2사단장 이형근(李亨根·당시 30세) 준장이 대전에서 서울 육본으로 올라왔다. 이때 매우 당황한 채총참모장이 이준장을 보고 “잘 왔소. 곧 의정부로 가서 반격을 해주시오”라고 청했다. 채총참모장은 경황이 없는 듯 광주에 있는 5사단(사단장 李應俊 소장·당시 60세)과 대구의 3사단(사단장 劉升烈 대령·당시 60세)에 대해서도 총출동 명령을 내렸다. 외출·외박을 간 병력이 모이는 대로 달아오른 전장에 투입하는 것을 ‘축차(逐次)투입’이라고 하는데, 축차투입은 ‘선두를 따라 계속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들쥐 떼’와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군사학에서 첫번째 금기 사항으로 꼽힌다.

채총참모장의 지시가 축차투입이라고 판단한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날이 저무는데 적정과 지형도 모르는 후방 부대를 축차투입해서는 안 된다. 후방에서 올라오는 3개 사단은 영등포에 집결시켜 한강 방어선을 펼치고 이어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범석·김홍일·이응준·김석원 등 50∼60대 원로 장군들도 후방에 새로 방어선을 만들자는 이준장 의견에 동의했으나, 채총참모장은 “대통령 명령이다. 2사단은 당장 의정부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형근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사영어학교 동기로 이준장은 대한민국 군번 제1번인 10001번이고, 채총참모장은 10002번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인데 채총참모장은 49기, 이준장은 56기였다.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이준장은 대위, 채총참모장은 소좌였다. 채총참모장은 일본군에서 후배인 이준장이 한국군에서 선임 군번을 받은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따라서 채총참모장은 먼저 진급했음에도 사사건건 이준장과 부딪쳤다. 6·25전쟁 개전 첫날 두 사람의 다툼도 거의 싸움으로 변질되다시피 했다.

 

축차투입


 

채총참모장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며 성을 낸 데다가, ‘계급 끝발’에 이준장은 밀려 의정부 7사단으로 갔다. 이때 7사단 9연대를 지원하러 달려간 7사단 3연대의 연대장은 이준장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었다. 유재흥 7사단장은 이준장을 붙잡고 “동생을 봐서라도 역습해달라”고 부탁했다. 군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준장은 흔들렸다. 동생을 생각한 그가 축차투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2사단 예하 부대를 축차투입해버린 것이다.

채총참모장의 일관된 주장은 “역습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6월26일) 7사단은 동두천으로 진격하고, 2사단은 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7사단은 순조로이 동두천을 탈환했다. 단지 몇 시간 만에 승리를 얻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마치 국군이 북진에 성공한 것’으로 과장 보도되었다. 이날 방송은 “국군의 총반격으로 인민군은 퇴각하고 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포천으로 진격한 2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인민군 3사단에 밀려,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2사단이 대오도 없이 흩어져 의정부로 도주해오자 인민군 3사단의 선두가 2사단 꼬리를 물고 6월26일 저녁 의정부로 진입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동두천까지 진격한 국군 7사단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일부는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삼송리 쪽으로 후퇴해버렸다. 도미노처럼 2사단의 붕괴가 7사단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인민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여단은 의정부를 장악했다. 전쟁은 결코 감정 싸움이 아닌데, 여기서 국군은 또 한 번 만용을 부렸다. 청주에 주둔하다 급히 창동으로 올라온 2사단 25연대에 날이 밝자(6월27일) 의정부 탈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인데, 또다시 축차 투입을 범한 것이다. 이미 집단으로 ‘전차 공포증’에 감염된 국군 병사들은 맥없이 무너져, 미아리고개 쪽으로 철수했다. 미아리고개마저 무너지면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육군에서 보병-포병-기갑-공병 등 전투에 투입되는 병과를 전투병과라 하고, 병참이나 경리-병기처럼 비전투병과는 지원병과라고 한다. 전투병과 장병들이 연이은 패전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자, 육본은 지원병과 장병을 미아리고개로 총출동시켰다. 그리하여 3000여 병력이 모이자, 고개 좌측에 포진한 부대는 5사단 이응준 소장이, 고개 우측에 모인 부대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생도 1기로 불리는 육사 10기 교육생도와 일부 패잔병은 육사교장 이준식(李俊植) 소장 지휘하에 불암산 일대로 배치시키고 경찰대대까지 출동시켰다.

 

지휘부의 서울포기


 

이렇게 국군 패잔병들이 최후 결전을 준비하기 훨씬 전인 이날(6월27일) 새벽 2시 이승만(李承晩·당시 75세) 대통령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떠나버렸다. 한 시간 후 열린 심야의 비상국무회의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는 정말로 식언(食言)이었던 것이다. 1950년만 해도 상당수 국민은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그가 조선 왕조와 같은 전주 이씨라는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난에 처해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몽진(蒙塵)’, 수도를 옮기는 것은 ‘천도(遷都)’라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몽진과 천도를 한국인들은 대명천지인 20세기 중반에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6월28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더라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결의하고 이를 서울 시민에게 공포했다. 이 발표는 훗날 “점심은 평양에서”란 방송과 더불어 국민을 기만한 정부의 대명사로 꼽히게 된다.

한편 신성모 국방장관의 결정과는 별도로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날 오전 인민군이 창동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방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만용을 부리는 사람일수록 겁이 많은 법일까? 이날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인 최창식(崔昌植) 대령을 불러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 2시간 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후 3시쯤 최창식 공병감이 “한강 다리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고 보고하자,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동시켜라”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동을 앞두고 육본은 상당량의 비밀 문서를 소각했다. 박정희(朴正熙·당시 33세)는 남로당원을 하다 여순반란 사건 후 군내에서 대규모 숙군 작업을 벌일 때 검거되었다(계급은 소령). 당시 군법대로라면 박정희는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박정희를 좋게 보고 있던 국방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구명운동을 벌여 퇴역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 후 박정희는 문관으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다 전쟁을 맞았다.

당시 육본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군내 좌익사범에 대한 방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시흥으로 육본을 옮기면서 이를 태워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는 좌익 족쇄에서 자유로워지고, 곧 현역 소령으로 복귀함으로써 장차 5·16을 거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기회를 잡는다. 전쟁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다.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할 당시 안두희(安斗熙)는 육군 중위였다. 6·25전쟁 때 안두희는 육군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육본은 안두희를 석방하고 중위로 재임관했다. 이처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시에는 한 순간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인민군의 미아리 우회


 

육본이 시흥으로 막 철수한 이날 저녁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미 극동군 사령부로부터 6·25선에 전방지휘연락단을 설치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로 인해 날이 어두워진 후 채총참모장은 다시 육본을 서울 용산으로 복귀시켰다. 맥아더 원수의 통보는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에도 ‘미군 참전’으로 과장 전파돼 국군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이날 밤 미아리고개에서는 동네 부녀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국군에 제공하는 등 열띤 분위기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6월27일 자정을 넘기고 28일 새벽 2시가 되자 인민군은 국군이 포진한 미아리고개를 피해 전차 2대를 홍릉 방향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뜻밖의 방향에서 적 전차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시민들은 겁을 먹고 당황해했다. 이미 패배에 익숙해진,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 병사들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오판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겁쟁이’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둘러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무너진 것은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이때 인도교 위를 걷고 있던 민간인과 군인, 차량들도 교각과 함께 한강으로 떨어졌다. 아비규환. 한강다리 폭파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아리고개에 포진해 있던 국군 병사와 서울 시민들을 패닉(panic) 상태로 몰아 넣었다.

이날 국군 공병대는 인도교와 철교는 폭파했으나 두 다리 사이에 있던 단선철교 폭파에는 실패했다. 공병대가 단선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재차 폭약을 장전하는데 멀리서 인민군 포격이 날아왔다. 이때 인민군 포격은 매우 엉성했는데도 ‘겁을 먹은’ 공병대는 재폭파를 포기하고 강남으로 철수했다.

 

한강인도교 폭파


 

인민군 주력이 서울 시내에 진입한 것은 6월28일 오후 3시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강 다리 폭파는 6∼8시간 정도 연기했어야 한다. 그 6시간 동안 아군 3개 사단이 장비와 함께 더 도강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병력이다. 장비야 공장에서 재생산하고 급하면 외국에서 도입할 수도 있지만, 병력은 한번 죽으면 20여 년이 지나야 재생산된다. 때문에 적의 공세가 거셀수록 병력을 안전하게 빼내 훗날의 반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채총참모장은 이를 외면한 것이다.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서울에 남게 된 국군은 군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지켜야 하는 무리가 되었다. 이 무리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주로 한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 한강을 도하했다) 밥을 얻어먹으며 남쪽으로 내려간 자기 부대를 찾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중대 규모의 국군 결사대가 자생적으로 구성돼, 남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과 최후 결전을 벌이다 전원 사살되었다.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은 별자리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농군 출신의 장병들이었다.

한강 다리 폭파는 다른 국군 부대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춘천 사수”를 외치던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이 소식을 듣고 이날 저녁 6시쯤 춘천시민에게는 “피난하라”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춘천의 소양교를 폭파하고 원주로 후퇴했다. 봉일천 일대에서 인민군 6사단과 1사단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백선엽 대령의 1사단도 사수를 포기하고 한강을 건넜다.

한편 동해안에 포진한 이성가(李成佳·당시 28세) 대령의 국군 8사단은 전창덕(全昌德)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5사단으로부터 수륙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즉 인민군 5사단은 2개 연대를 정면으로 침투시켜 국군 8사단을 압박하고 동시에 1개 연대를 태백산맥 쪽으로 우회침투시켰다. 또 게릴라부대인 766부대와 549부대를 함정에 태워 동해안 곳곳에 상륙시켜 동해안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인민군은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서부전선에서 일점양면 전술과 양익포위 전술을 구사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 바람에 8사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릉-대관령-평창을 거쳐 제천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8사단 병력은 흩어지지 않았다. 6·25전쟁을 통해 끝까지 사단 편제가 유지된 것은 1·6·8사단뿐이다.

사실 섬이나 다름없는 옹진반도에는 백선엽 1사단장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당시 27세)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17연대가 포진해 있었다. 17연대는 연대급 부대인데도 사단 작전 규모(당시에는 80∼90㎞)와 맞먹는 64㎞의 전선을 담당했다. 때문에 ‘육본 작전명령 38호’는 ‘전쟁이 일어나면 17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다 해상으로 철수한다’로 돼 있었다. 17연대는 북한 내무성 산하 제3경비여단과 인민군 6사단 예하 14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춘천 6사단의 후퇴


 

백인엽 대령은 개전 초기에는 인민군의 공세를 의례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다가 곧 전면 남침임을 알아챘다. 이에 따라 그는 1개 대대로 적 공격을 차단하며 2개 대대를 철수시키는 전형적인 철수작전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17연대는 편제를 유지한 채 6월26일 해군 LST를 타고 인천으로 철수해 이후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6·25전쟁 초기에 맛본 패전 공포는 오랜 세월 한국을 지배했다. 이후 한미연합군은 서울·의정부 북방 도로 곳곳에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고 ‘알파’ ‘부라보’ ‘찰리’ 등으로 불리는 인민군 방어선을 계획했다. 기동부대의 진격을 막는데는 기동부대를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서울 함락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이후 한국 육군은 의정부 축선 일대에 기동부대 주력을 배치하고, 문산 축선에 일부 배치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한국 육군의 부대 배치까지 규정해버린 것이다.

지금 서울 창동-상계동 일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수락산과 도봉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공터로 둔 것은, 유사시 이곳을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 결전터로 삼기 위해서였다. 수락산과 도봉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이곳에 후방 사단을 집결시켰다가 수락산과 도봉산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아 의정부를 장악하고 몰려오는 인민군을 궤멸하겠다는 것이 유사시 한국군을 통합 지휘할 미 8군의 방어계획이었다.

한강 다리 폭파가 끼친 영향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때 서울 강남을 집중 개발하고, 한강에 수십 개의 다리를 건설했다. 인민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2층 다리인 잠수교를 건설하고,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한강 하저를 관통하는 지하철(5호선)을 건설하게 되었다.

처절한 싸움 끝에는 논공행상이 따르는 법이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 기분이 좋아진 김일성은 105전차여단을 105전차사단으로 승격했다. 이어 선두로 서울에 들어온 3사단~4사단~105전차사단에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 3개 사단과 역시 서울에 들어온 6사단에 대해 ‘근위(近衛)’라는 칭호를 내렸다. 3·4사단과 105전차사단은 ‘근위 서울 3사단’ ‘근위 서울 4사단’ ‘근위 서울 105전차사단’이 되고, 6사단은 ‘근위 6사단’이 된 것이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다 전쟁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정일권(丁一權·당시 33세)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 총참모장’으로 임명하고, 채병덕 소장을 국방예비군 총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가장 충격적인 조치는 한강다리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처형이다. 노회한 이대통령은 한강다리 폭파가 정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분위기가 반전된 직후 9월21일 비밀리에 최대령을 처형케 했다.

최대령은 채소장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죽고, 명령을 내린 채소장은 목숨을 구한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채소장은 부산 제4지구 계엄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최대령이 처형되기 전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때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다. 이대통령이 외면한 상벌을 역사가 대신 집행한 것이다.

 

 

제3편 미군 참전과 참패

 

당시 한국군에는 한 가족이 함께 장교가 된 경우가 많았다. 백선엽 1사단장(대령)과 백인엽 17연대장(대령)이 형제간이고, 유승렬 3사단장(대령)은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유재흥 7사단장(준장)의 아버지였다. 이상근 7사단 3연대장(대령)의 형인 이형근 2사단장(준장)은 이응준 5사단장(소장)의 사위였다. 그러나 1950대의 ‘장년’ 장교단은 요직에 있지 못했다. 한국군의 주력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참 대위나 신참 소령에 해당하는 나이의 30세 전후의 젊은 장성들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런 구도는 큰 불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생국일수록 감정 통제가 가능한 50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있어야 젊은이들간의 경쟁과 혈기방장함, 그리고 공포를 제어할 수 있다. 당시 한국군에도 광복군이나 중국 국부군(국민당군), 일본군에서 고급 지휘관을 지낸 장년층이 있었다. ‘선수 교체.’ 서울이 함락되자 노련한 장년층이 축 처진 ‘젊은 어깨’들을 대신해 최전선에 나왔다.

6월28일 새벽 수원으로 쫓겨온 육본은 시흥보병학교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어 중국 국부군에서 중장(2성 장군)을 지낸 김홍일(金弘壹·당시 51세) 소장을 사령관에 임명해 패잔병 수습에 나섰다. 먼저 영등포 일대에 패전한 수도경비사 병력이 몰려오자 타 부대 패잔병을 모아 ‘혼성 수도사단’을, 노량진 쪽에 7사단 패잔병이 도착하자 같은 방법으로 ‘혼성 7사단’을 편성했다.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 대좌(대령)를 지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군 안팎에서 존경받던 예비역 김석원(金錫源) 준장이 분연히 일어나 혼성 수도사단을 이끌겠다고 하자 장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김 예비역 준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처럼 ‘봉기’한 것이었다. 그 후 김준장은 7월7일 벌어진 충북 진천 전투에서 직접 권총을 뽑아들고 포탄이 떨어지는 최일선에서 “김석원이 여기 있다. 후퇴하면 쏜다”라고 독전하여 장병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국군 전력은 축차 투입 실패로 30%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편제를 유지하고 한강을 건너온 것은 시흥전투사 예비대로 편입된 1사단뿐이었다. 이러한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어쩐 일인지 7월1일까지 만 3일간 포만 쏘고 진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 쪽은 인민군 2·1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후 서남진해 수원을 점령해야 하는데, 국군 6사단의 분전으로 춘천 진입이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인민군 2·12사단이 수원 쪽으로 진격해 올 때를 기다리느라 바로 한강을 건너지 않고 3일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김석원 장군의 분투


 

그러나 북한 쪽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하는 북한 제2자연과학원 기자로 활동하다 귀순한 김길선씨는 “195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최용건 민족보위상을 비롯한 인민군 지도부는 전쟁 준비를 하느라 거의 자지 못했다. 국군이 겪은 전쟁은 불과 4일에 불과하지만, 인민군 병사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부대 이동 등으로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이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너무 쉽게 점령되자, 최용건 등 전쟁 지도부는 긴장이 풀려 술을 마시고 3일 밤낮을 자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나이가 많은 최용건을 ‘형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울을 점령한 부대가 남진하지 않자, 후방에 있는 김일성은 “왜 진격을 하지 않느냐”며 속을 태웠다. 6·25전쟁이 끝난 후 최용건은 병사했는데, 이후 김일성은 “최용건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다”는 내용의 교시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전쟁 초기 공교롭게도 남북한 군 지도부는 모두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다.

6월30일 미명(未明) 인민군 3사단 특공대 30명이 목선을 타고 흑석동 강변에 도착해 국군 혼성7사단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7월1일 새벽에는 인민군 4사단이 여의도로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혼성 수도사단이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7월3일 새벽 인민군은 끊어지지 않은 단선 철교를 통해 혼성 7사단이 있는 노량진으로 단 4대의 전차를 내려보냈다. 이 4대가 어마어마한 공포를 몰고와 영등포에 포진한 혼성 수도사단도 겁을 먹고 퇴각해, 드디어 한강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후인 7월5일 정일권 총참모장은 1군단을 만들고 김홍일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했다. 1군단에는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1사단(白善燁 대령) 2사단(李翰林 대령)을 배치했다. 이때 2사단장이던 이형근 준장은 장인인 이응준 소장이 신설된 전남관구 사령관을 맡자, 자진해서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어 7월15일에는 김백일(金白一) 준장이 이끄는 2군단을 편성하고 6사단(金鐘五 대령)과 8사단(李成佳 대령)을 지휘케 했다. 3사단과 17연대는 육본 직할부대로 편성했다.

이로써 국군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5사단과 7사단이 사라졌다. 이러한 사단 해체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반복된다. 이런 체제 정비로 국군 1군단은 인민군 1군단, 국군 2군단은 인민군 2군단과 대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도하에 인민군과 싸우면서 소백산맥 방어선까지 계속 밀려 갔다. 7월2일 국군 8사단에서는 인민군의 야습을 받자 혼비백산해 도주한 소대의 소대장을 연대장이 “지휘 능력이 형편없다”며 현장에서 즉결처분(총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한국군도 악이 받치기 시작한 것이다.

 

불쾌한 작은 전쟁


 

미국 지식인들은 이러한 6·25전쟁을 ‘불쾌한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 애치슨 선언대로 꼭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데도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했으니 미국의 자존심상 이를 막아야 하는 귀찮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남한의 전략적·지정학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으나, 북한군이 잠자는 사자(미국)의 코털을 건드렸으니(남침했으니), 귀찮지만 일어나서 싸우러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인의 이러한 정서는 꽤 오래 된 것이다. 광복 직후 하지 중장 지휘하에 한국에 온 미 24군단 장병들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 농부들이 논과 밭에 인분을 뿌려 악취를 풍기게 하는 것도 이들을 괴롭혔다. 하지 중장은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을 가리켜 “왜놈과 같은 품종의 고양이들”이라고 지칭하며 적개심을 표현했다. 하지 중장은 다른 곳으로 전출하기 위해 맥아더 원수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미군을 6·25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붙들어맨 사람은 미국인들이 ‘불 같은 성미를 가진 능수능란한 인물’로 평가해온 만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 몸소 도쿄 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관이 “총사령관께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자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는데 당장 깨우라”고 호통을 쳤다.

6월29일 오전 10시쯤 학수고대하던 맥아더 원수가 만 70세의 노구를 끌고 수원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이대통령 일행이 영접을 나갔는데, 맥아더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4대의 인민군 야크기가 나타나 폭격을 했다. 그 바람에 70대의 이승만과 맥아더는 모자를 움켜쥐고 근처 논두렁으로 달려가 몸을 숨겨야 했다. 방문 인사치고는 아주 호된 인사를 받은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만 38세의 ‘애송이’ 김일성이 그의 운명까지도 바꿔 놓을 호적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만 70세의 맥아더가 어째서 퇴역하지 않고 극동군을 지휘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미 상원이 육군의 마셜·맥아더·아이젠하워·아놀드, 해군의 킹·니미츠·리히·핼시 대장을 원수로 승진시킨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이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하자 미국 의회는 1947년, 8명의 원수는 자신이 요청하지 않는 한 정년에 관계없이 퇴역하지 않아도 되며, 퇴역하지 않는 한 원수 계급장은 종신토록 달 수 있도록 결의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는 사상 최대의 감군(減軍) 바람이 몰아쳤다. 400만 병력이 100만으로 주는 등 군 예산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7명의 원수는 자신에게 투입되는 예산이 적지 않음을 알고 차례로 전역을 신청했다. 그러나 ‘오만한’ 맥아더만은 퇴역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참모장이나 합참의장보다 더 높은 계급을 달고 극동군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지금도 그렇지만 미군은 통합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태평양과 유럽 극동 등 세계 곳곳에 육해공군 부대를 배치하고 이 부대를 통합 지휘하는 통합군 사령부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사령부 중 하나가 극동군 사령부고, 맥아더 원수는 이 사령부의 총사령관이었다. 극동군 밑에는 육해공군이 있는데, 주력은 육군(8군)이었다. 해공군 부대는 기동성이 좋으므로 다른 곳에서 운영하다 필요시 극동군에 배속시킨다.

이날 한강 남쪽에서 남북한 군 사이의 포격전을 살펴본 맥아더는 ‘인민군 기갑부대 때문에 미 해공군의 지원만으로는 인민군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극동군 산하 미 5공군(일본 주둔)과 극동군으로 배속된 미 7함대는 이미 6월26일부터 참전했다. 이날 미 5공군의 F86 세이버 전투기는 문산 지역으로 출격했는데, 국군과 인민군을 구별하지 못해 국군 1사단을 공격하기도 했다.

6월30일 미 합참이 건의를 수용하자, 맥아더 원수는 8군의 워커 중장에게 6·25 참전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에 본부를 두고 있던 8군은 4개 사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최정예인 7사단은 홋카이도(北海道)에 배치해 소련군 공격에 대비하고, 일본 본토에는 1기병·24·25사단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워커 중장이 군 예비대인 24사단에 출동 명령을 내리자 24사단장 딘 소장이 미스 중령 지휘하에 21연대 소속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한국에 파견했다.

오산에 배치된 ‘스미스 특수임무대’가 인민군 전차를 향해 최초로 미군 포탄을 발사한 것은 7월5일 오전 8시16분이었다. 그러나 인민군 107전차연대 소속의 그 어떤 전차도 멈춰서지 않았다. 그때서야 미군은 왜 국군이 T34전차 공포증에 걸렸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차부대 뒤로는 인민군 4사단 예하 16·18연대가 달려왔다. 인민군 전차와 보병이 함께 진격하는 ‘보전(步戰) 협동작전’과 예의 ‘일점양면전술’을 펼치자 일부 미군 병사들은 철모와 워커를 벗어 던지고 도주해버렸다.

이 전투에 참여한 미군은 540명이었는데 이중 150명이 전사하고 31명이 실종되었다. 반면 인민군 4사단은 42명이 전사했고, 107연대의 전차 4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역시 미군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대 주력은 대오를 갖춰 안성으로 후퇴한 것이다. 한국군은 포위 공격을 받으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부대 자체가 없어져버렸으나, 미군은 부대를 유지하며 철수했다.

이때 미군은 2차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이 아니었다. 일본 여성을 첩으로 두고, 집에는 일본인 하인을 둔 ‘배부른’ 점령군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이국 땅에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때문에 입대한 애송이들이었다. 광복 직후 미 24사단은 7사단과 함께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군단 소속 군정 부대로 한국에 상륙했었다. 이때 아놀드 7사단장이 먼저 군정장관이 되고, 이어 딘 소장이 군정장관이 됐다. 이러한 인연을 갖고 딘 소장은 스미스 부대 패배 소식을 들으며 애송이들을 이끌고 주한 미지상군사령관 자격으로 한국으로 달려왔다.

 

피란민 공포증


 

7월7일 유엔은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정하고 다음날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3사단은 경부축선, 4사단은 공주 방면, 2사단은 대전 쪽, 6사단은 군산을 거쳐 전주로 진격했다. 이어 1군단 예비대인 13사단과 2군단 예비대인 15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고, 후방에는 7·8·9사단을 새로 편성해 총 사단 수를 13개로 늘렸다. 이렇게 인민군이 공세를 강화하자 남한 사회에서는 피란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원칙적으로는 군인들이 하는 것이어서 민간인들은 크게 동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복 직후부터 좌·우익간 갈등이 첨예했던 한국에서는 인민군이 남침하자 움츠려 있던 좌익들이 일어났다. 이들이 우익 인사를 공격하자 불안해진 주민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어군쪽에서 보면 이러한 피란행렬은 작전에 큰 장애가 됐다. 반면 인민군 쪽에서는 아주 좋은 침투 기회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흰옷만 입는 백의민족이었다. 인민군은 특공대에서 흰옷을 입히고, 봇짐 속에는 무기를 넣어 남하하는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집어넣었다. 어떤 인민군 병사는 치마를 입고 여자로 위장한 후 아이를 안은 보따리 속에 수류탄을 넣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특공대가 미군과 국군 후미에 나타나 총을 쏘면, 국군과 미군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황급히 철수하곤 했다. 미군들은 서서히 피란민 공포증에 걸리기 시작했다.

7월11일쯤 미 24사단 본대가 조치원에 포진하자 워커 8군사령관이 딘 24사단장에게 “7월20일까지 대전지역을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7월12일 미 24사단은 금강교를 폭파하고 일단의 부대들로 금강 방어선을 쳤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후방에 두었다가 방어망이 뚫리는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투입한다는 ‘기동방어 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금강에 도착한 인민군 4사단은 미 24사단 34연대가 포진한 강 건너편을 향해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는 기만 전술이었다. 미군이 포사격에만 신경쓰는 사이 인민군 16연대가 다른 곳에서 작은 보트 두 척을 이용해 금강을 건너버렸다.

깜짝 놀란 딘 소장은 예비부대를 긴급히 투입했는데, 이 예비대마저 인민군 매복에 걸려 궤멸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 24사단은 대전 갑천 방어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전투에서는 미 남북전쟁 때부터 활약했던 맬로이 대령이 지휘하는 19연대가 주력 부대로 나서게 되었다. 인민군 3사단 미 19연대 정면으로 돌진하고, 4사단은 유성 쪽으로 우회해 동시에 19연대를 포위 공격했다. 이름하여 일점양면전술. 여기서 전통의 19연대는 사실상 와해되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7월20일 견디다 못한 딘 24사단장은 ‘후퇴’를 명령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딘 소장이 사라져버렸다. 대전 시내에 끝까지 남아 시가전을 지휘하던 그는 인민군이 이미 대전 후방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전병에게 “논산 쪽으로 돌아서 남하하라”고 지시했는데, 한국 지리에 어두운 운전병이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오된 딘 소장은 실종 36일째 되는 날 전북 진안군에서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에 생포되었다.

이로써 이미 근위사단 칭호를 받은 방호산은 다시 한번 영웅 칭호를 받아, 이중 영웅이 되었다. 미군 장성이 적군에게 포로가 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혼마(本間) 중장의 일본군 14군이 필리핀을 공격하자 미 극동지상군을 이끌던 맥아더 대장은 견디지 못하고 필리핀을 탈출했다. 이때 웨인라이트 중장이 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지상군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하다 일본군에 생포되었다.

웨인라이트 중장은 1945년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한 뒤 석방되었다. 1945년 9월2일 연합군이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重光葵)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을 때, 웨인라이트는 맥아더 뒤에서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매서운 눈초리로 시게미쓰를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딘 소장에게는 이러한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1953년 ‘무승부’로 휴전이 체결된 후 비로소 석방된 그는 바짝 여윈 몸을 이끌고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작전권 이양


 

금강·대전 전투를 통해 미 24사단은 30%의 병력이 희생되고 후임 사단장에 처치 소장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희생은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권을 이양한다는 서한(letter)을 보낸 것과 더불어 미국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한국에서 싸우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국군 작전군 이양에 대해서는 ‘생사가 급하다고 마누라를 팔아먹은 것’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99년 코소보 내전 때 유고 세르비아계가 코소보에 있는 알바니아계 주민을 공격하자 불안해진 알바니아는 작전권을 NATO군에게 긴급 이양했다. 변변한 군대조차 없는 알바니아로서는 작전권을 이양해 NATO군으로 하여금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 당시로는 유일한 생존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전권 이양은 더 이상 방어 수단이 없을 때 팔아먹을 수 있는 ‘마지막 재산권’이다. 작전권 이양 때문에 미군은 무려 5만4000여 명의 병사를 한국전선에 바치게 된다.

미 24사단이 궤멸하는 사이 25사단(사단장 킨 소장)이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유명한 패튼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게이 소장이 이끄는 1기병사단은 부산항이 너무 붐비는 관계로 포항 해안으로 행정상륙해 들어왔다. 이로써 일본에는 미 7사단만 남게 돼 맥아더 원수는 일본 방어가 위태롭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맥아더 원수는 평화헌법을 만들어 일본의 군대 보유를 금지했다. 그런데 미군 출동으로 일본 방어가 어려워지자 편법을 동원했다.

일본 점령 직후 맥아더 원수는 한국에서처럼 경찰예비대를 창설해 치안 임무를 맡겼다. 맥아더는 이 경찰예비대의 전력을 강화해 일본을 방어케 했다. 경찰예비대가 발전해 보안대가 되고 보안대가 다시 자위대가 되면서, 일본은 재무장했다. 반제항일(反帝抗日)을 기치로 건 북한군의 남침으로 그들이 말하는 ‘제국주의자’ 미국이 참전하고, ‘타도 대상’인 일본이 재무장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전 함락 후인 7월22일 국군은 수도·8사단으로 1군단(군단장 김백일준장)을 편성해 동부전선을 맡게 하고, 1·6사단으로 2군단(군단장 유재흥준장)을 편성해 중부전선을, 그리고 3사단은 동해안 방어를 전담케 했다. 이로써 1·2군단은 동서부 작전 지역을 맞바꾸었고, 2사단도 사라져 한국 육군은 5개 사단만 남게 되었다.

미 24사단과 교체해서 소백산맥 방어전에 투입된 미 1기병사단과 25사단은 인민군에 대한 공포감이 워낙 컸다. 이들은 도저히 남북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게릴라로 변모하는 흰옷 입은 사람이 무서웠다. 그래서 1기병사단은 대전 이남인 영동 등지에서 남하하는 피란민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에 몰아넣고 감시했다.

 

노근리 쌍굴다리의 비극


 

6·25전쟁 발발 다음날 발진한 미 5공군은 문산의 국군 1사단을 오폭했다. 개전 초기 F86세이버는 숱한 곳에서 오폭사고를 일으켰는데, 노근리 쌍굴 다리에 대해서도 오폭했다. 노근리의 1기병사단은 ‘요시카와’라는 일본인을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일본어가 통했다. 일본인을 통한 의사전달 과정에 생긴 오해, 세이버 전투기의 오폭 등으로 7월26, 27일 사이 노근리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마저 연이어 패배하자 다급해진 맥아더는 연속해서 SOS를 쳤다. 워싱턴은 110억 달러의 추가 예산을 통과시키고, 92개 주방위군 부대, 4개 사단, 그리고 전체 해병대와 해군 예비역에 대해 소집령을 내렸다. 미국은 2차대전 종전 5년 만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본에 있는 미군 병참부대들은 전쟁 물자를 초특급으로 부산으로 수송하기 위해 ‘레드 볼 작전’에 돌입했다.

도쿄와 요코하마-사세보항를 잇는 육로와 사세보항에서 부산항을 잇는 해로를 70시간 안에 주파한다는 것이 이 작전의 요체였다. 이 긴급 수송작전이 패전 일본 경제를 살리는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미군 눈에는 이러한 부산이, 미군이 적진에 확보한 교두보로 보였는지 부산항을 ‘부산 교두보’로 불렀다.

유럽을 무대로 한 2차대전 초기 독일군에 쫓긴 영불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의 던커크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영국으로 대거 피신했다. 그 탓에 프랑스 전역이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미국 언론은 서서히 ‘부산항이 제2의 던커크가 되지 않을까’란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50년 7월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제4편 낙동강 방어전

 

맥아더 원수로부터 미군은 물론이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작전권을 위임받은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별명은 ‘불도그’다. 워커는 유럽을 무대로 한 2차대전 때 패튼 중장이 지휘한 3군 예하 20군단장으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전쟁 지휘관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불도그는 반짝반짝 윤을 낸 ‘알 철모’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워커가 “버릇이 없다”며 싫어했다. 그만큼 워커는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알철모가 작전명령 제1호를 내리면서 붙인 일갈(一喝)이 ‘죽느냐 사느냐(stand or die)’였다. 그만큼 전황은 다급해졌다.

워커는 영덕에서 마산에 이르는 낙동강에 방어선(이른바 워커 라인)을 치기로 했다. 이때 워커가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었다(미 24사단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편제가 유지되었다). 이 8개 사단이 미 본토에서 증원 군이 올 때까지 평균 30㎞씩 도합 240㎞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했다. 방어 부대는 남쪽에서부터 미 25·24·1기병사단, 이어 군군 1군단((1·6사단)-2군단(수도·8사단)-마지막으로 동해안에 국군 3사단 순으로 배치되었다.

워커 중장은 이 방어선을 X선으로 명명하고 이 선이 뚫릴 경우에는 포항에서 왜관·마산을 잇는 Y선에 다시 방어선을 치기로 했다. 이때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슨 준장은 Y선이 돌파되면 마산-밀양·울산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미군을 일본으로 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 마산-밀양-울산 선은 ‘데이비슨 라인’으로 명명됐고, 미군끼리만 알고 한국군에는 절대 비밀로 하였다.

8월에 들어서자 인민군은 8·15광복절 전에 ‘해방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총공세에 나섰다. 인민군은 개전 초기 7개 사단을 남진시키다 뒤에 군단 예비대인 2개 사단을 더 투입했다. 그리고 3개 사단을 신설해 투입하고, 마지막에는 평양에 있던 총 예비대인 10사단까지 도합 13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김책 대장이 이끄는 전선 사령부는 수안보에 설치되고, 인민군 1군단은 주로 미군과 싸워야 하는 김천에, 2군단은 국군 정면인 안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13대 8의 처절한 낙동강 전투가 시작되었다.

 

데이비슨 라인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인민군의 일점양면전술, 양익포위전술, 정규전과 비정규전 배합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방어지역이 줄어들다 보니 한-미 8개 사단이 촘촘히 배치돼 도하작전을 위한 기만 포격이나 몰래 침투할 곳이 적어져버린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보급로가 길어진 인민군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실전을 통해 전술을 익힌 국군은 악에 받쳐 날로 용감해져 가고 있었다. 낙동강변에 서식하는 ‘지랄 같은’ 모기는 국군과 인민군 미군 모두를 물어뜯고 있었다. 인민군으로서는 정면돌파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도 낙동강은 얕았다. 상류에는 걸어서 도강할 곳이 많았다. 인민군은 공격부대를 개전 때처럼 4방향으로 나눠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동쪽에서부터 살펴본다면 ①포항을 향한 동해안 공격 ②경부 축선을 따라 대구 쪽으로 공격(주공) ③밀양 방면을 향한 공격 ④제일 남쪽인 마산 쪽으로 공격 순이 된다.

이에 대해 7월29일 워커 중장은 미 25사단을 방문해 “여기서는 절대로 던커그나 바탄(필리핀에서 웨인라이트 중장이 생포된 섬)이 재연될 수 없다.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명령했다. 훗날 사수(死守)훈령으로 명명된 이 지독한 훈령이 공포에 처한 미군을 긴장시켰다. 8월3일 미 1기병사단이 피란민이 몰려드는 왜관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을 신호로 미군은 낙동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다.

미군은 국군 각 부대에 3.5인치 로켓을 제공했는데 이 로켓이 T34전차를 관통했다. 드디어 전차 공포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국군은 괘도용으로 쓰는 ‘대한민국 전도’로 작전해왔다. 그런데 미군은 산과 골짜기가 분명히 표시된 5만분의 1 지도를 제공했다. 이러한 물자 공급이 국군의 방어 능력을 현저히 향상시켰다. 기절할 것 같은 더위와 지독한 모기, 그리고 숨박히는 긴장 속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민군의 4개 방향 공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②번 대구 쪽 공격이었다. 이 방향 공격을 위해 인민군은 1군단 주력 부대인 1·3·105전차사단과 8·10·13·15사단을 투입했다. 이곳에는 국군 1·6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지휘관 중에는 운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싸움은 잘하는데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명장은 운이 좋은 사람 중에서 나온다. 1905년 러일전쟁 때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수장하고 발틱함대 사령관 로베스트빈스키 제독까지 생포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운좋은 지휘관의 대표다.

도고 제독은 둔한 사람인데도 운이 좋아 대장까지 진급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지휘부는 누구를 연합함대 사령관에 앉힐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는데, 이때 후방 병참부대 사령관인 도고를 ‘무능한 것 같아도 운이 좋은 사람’이란 이유로 선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완전 격파와 이어 발틱함대 완전 수장이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


 

그 무렵 막 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1사단장과 김종오 6사단장도 비교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두 지휘관은 개전 때부터 잘 싸우더니 훗날 ‘다부동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에서도 방어전 성공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때 1사단은 평양 점령 1착 부대가 되고, 6사단은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대구를 향한 인민군의 공세가 거세 일시적으로 Y선까지 뚫리자 워커 8군사령관은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27연대를 투입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선두에 섰던 1사단이 특히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15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부동 전투는 그동안 뚫리기만 하던 대규모 방어전에서 처음으로 밀리지 않고 전선을 지켜낸 싸움으로 기록된다.

그러는 사이 갓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대 임시1여단이 인민군 4사단을 막고, 미 25사단장 킨 소장이 이끄는 ‘킨 타스트 포스’가 인민군 6사단을 막아냈다. 5사단을 주축으로 한 인민군이 포항으로 밀려들자 백인엽 대령의 국군 17연대는 전차와 보병 대대로 편성된 ‘브래들리 타스크 포스’를 지원 부대로 받아 악착같이 막아냈다. 곳곳에서 방어전은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워커 중장이 펼친 방어전술은 딘소장이 대전에서 실패한 ‘기동 방어’였다. 워커 사령관은 미 27연대 등을 후방으로 빼놓았다가 위험한 곳이 있으면 즉시 투입해 불을 끄는 특급 ‘소방수’ 부대로 활용해 대성공을 거뒀다.

민족과 국가는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하는 과정에 발전한다.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고 피압박 상태로 떨어지면 전멸하지만 응전하게 되면 지혜와 용기가 생겨 발전 속도가 빨라진다. 인민군 남침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다 죽어가던 국군은 미군의 참전으로 응전의 기회를 어렵게 마련했다. 이로써 인민군의 전력은 상당 부분 소진돼 공수를 교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이기고 싶었다면 이전까지의 전략·전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꿨어야 한다. 인민군은 총공세에 앞서 일본 사세보항과 부산 항을 잇는 미군의 초고속 병참 항로를 차단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해군은 미 해군 7함대에 밀려 제해권을 완전히 내주고 있었다.

이렇게 제해권을 빼앗겼을 때 유용한 무기가 잠수함이다. 지금까지도 잠수함은 아무리 구식일지라도 일단 잠수하면 탐지해 낼 수가 없다. 북한 해군이 이러한 잠수함을 동원해 ‘레드 볼’ 작전에 참여한 미국 수송선 몇 척을 격침했다면, 단번에 미군은 데이비슨 라인으로 철수했을 것이다.

이 쓰라린 교훈 때문에 그후 북한은 잠수함(정) 확보에 열을 올려 현재도 9대 1의 비율로 한국 해군보다 많은 잠수함(정)을 보유하고 있다.

인민군이 해병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것도 큰 불행이었다. 개전 초기 동해안에서 인민군은 5사단을 침공할 때 특공대를 해안으로 상륙시켜 국군 8사단을 고립시켰다. 한·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몰렸을 때 인민군은 해병대나 특공대를 과감히 동해안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만들었어야 한다. 김일성이 돌격상륙작전을 감행하는 해병대가 유사시 전황을 어떻게 뒤바꿔버리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인천상륙작전).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인민군으로서는 큰 패착이었다. 이때의 기억 때문에 북한은 공군력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경제 붕괴로 인해 지금은 사실상 포기했다. 반면 한국 공군은 6·25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 공군은 연락기와 훈련기뿐인 한국 공군에 프로펠러기인 F51 무스탕 10대를 넘겨주었다. 한국 공군에 F51 조종술을 가르친 이는 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헤스 대령이었다. 원래 직업이 목사인 헤스 대령은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후송해 극진히 돌본 독특한 사람이었다.

 

맥아더의 반격


 

낙동강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사이 미 본토에서 2사단이 오고, 홍콩에서는 영국군 27여단이 들어왔다. 인디언 마크를 한 2사단은 이때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유엔군의 전력 증강은 인민군에 큰 부담이었다. 다부동 전투를 통해 국군 1사단은 미군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때 워커 사령관은 미 24사단과 1기병사단으로 편성된 미 1군단(군단장 밀번 소장)에 국군 1사단을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그때까지 제각각 싸우던 한·미군이 연합작전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

낙동강 방어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처음 생각은 7월22일 한국에 온 1기병사단을 포항이 아니라 인천으로 돌격상륙시킬 생각이었다(블루 하트 작전). 그러나 7월20일 미 24사단이 대전에서 궤멸되자 인천 돌격상륙을 포기하고 포항으로 행정 상륙시켰다.

이어 그는 미 본토에서 온 2사단과 1해병여단을 인천으로 돌격 상륙시킨다는 ‘크로마이드 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가 다급해 이것 또한 포기했다. 그런데 낙동강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맥아더 원수는 이제 ‘우리가 공격할 차례’라고 판단했다.

 

 

 

[6ㆍ25 50주년 특별연재]
'잊혀진 전쟁'그 결정적 순간들의 秘錄

 

 

 

중공군 참전 경고한 주은래
자만에 빠진 도쿄의 맥아더

 

 

 

미국 통합참모본부가 인천상륙작전을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맥아더 원수는 이 작전을 기적적으로 성공시켰다. 이때 한국 해병대는 중앙청 국기 게양대가 아니라 돔 창문으로 태극기를 먼저 내걸었다. 서울을 탈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을 불러 38선을 돌파하라고 기합을 준다. 그러는 사이 이미 국군 3사단 예하 부대는 38선을 넘어버렸다. 국군 1사단은 미군부대에 지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진격해 미군 부대보다 먼저 평양에 닿는다. 한편 맥아더는 원산상륙작전이라는 새로운 상륙작전을 감행했는데, 이 작전은 인민군이 부설한 기뢰로 인해 완전 실패하고 '요요작전'이라는 비아냥까지 받는다. 이 기뢰를 제거하는 작전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해정 부대가 비밀리에 참전했다. 38선 돌파 이후 UN군은 작전 지휘권이 세 개로 쪼개져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도쿄에 주로 머물며 UN군을 분할 통치한다. 그런 가운데 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어디로 숨었는지 인민군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삭풍은 병사들의 얇은 옷 속을 매섭게 파고들기 시작하는데….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hoon@donga.com

 

 

 

 

 


 

 

 

 

 

제3편 38선 돌파와 평양 함락

 

    백일(당시 34세) 1군단장은 정일권 총참모장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5기 동창생인데, 그의 원이름은 김찬규(金燦圭)다.만주군 대위를 하다 광복을 맞아 평양에 들어온 그는 김일성의 초청을 받았다. 이때 김일성이 "나와 같이 인민군을 하자.미군놈들을 몰아내고 미군에게 붙어먹는 민족 반역자를 싹슬이해야 통일이 된다.이승만, 김구,김성수는 전부 나쁜 놈이다"라며 권총을 뽑아 김찬규를 위협 했다.

이렇게 3일을 시달린 그는 평양을 빠져 나와 38선을 넘었는데, 그날 우러러본 하늘이 너무 맑고 밝아서 '온 세상이 붉은 색(공산주의)으로 물든다 해도 나만은 희게 버티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백일(白一)' 고쳤다.수도 환도식이 열린 다음날(9월30일) 에하 두개 사단(수도-3)을 38선에 도달시킨 그는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38선에 도달했다.각하께서 북진명령만 내 리시면 당장에 38선을 걷어차고 밀고 올라가겠다!"

9월29일 환도식에서 이대통령은 맥아더에게 "38선 돌파"를 설파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우리 목표는 인민군 기본 전력의 섬멸이다. 38선 이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군사상의 추적권은 승 자의 당연한 권리다"라고 박자를 맞췄다.그러나 "이틀 여유를 달라. 10월1일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하겠다.김일성은 당연히 버틸 테니까, 그것을 빌미로 북진하도록 하겠다.이는 워싱턴과도 합 의한 사안이다"라고 설명했다.이때 이대통령이 한 대꾸가 걸작이다. "알겠다. 그런데 사기충천한 현지 부대가 무슨 실수를 저질러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다음날(9월30일) 이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 이하 전 육본 참모를 집무실로 불렀다.이날다라 이대통령의 목소리는 매우 카랑카랑했다. "정 총참모장! 우리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에 도달했 는데 어째서 북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38선 때문인가? 정 총참모장! 당신은 미국 쪽인가, 한국 쪽인가?" 정 총참모장이 엉거주춤하게 "38선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불 같은 성질의 이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였다."38선이 어찌됐다는 게야? 철조망이라도 있다는게야? 장벽이라도 있다는 게야? 건너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게야?"

정총참모장이 '찍'소리도 못하자, 이대통령이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 대령을 향했다."인사국장! 당신은 38선 넘어도 된다고 생각하는게야, 안된다고 생각하는 게야?"황대령이 명쾌히 대꾸했다. "각하의 명령이면 언제든지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른 참모들도 똑같이 대답했다.이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정일권 총참모장을 돌아보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38선을 돌파하라"


 

정총참모장은 "저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UN군과 지휘관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는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이대통령은 속 시원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맥아더 장군에게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따라서 되찾아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입네다.지휘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이 아닙네다.그러 한즉 대한민국 군인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입네다."이어 붓을 듯 이 대통령은 일필휘지로 이렇게 썼다.'大韓民國 國軍은 三八線을 넘어 卽時 北進하라.一九五O年 九月三十日 大統領 李承晩'

이날 맥아더 원수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시각 정 총참모장은 강릉에 주둔해 있는 1군단으로 날아가 김백일군단장을 만났다.두 사람은 사적으로는 친구다.국군의 심정을 잘아는 정일권이 먼저 물었다."아직도(38선을 돌파하지 않고) 대기중인가?...워커를 설득해야 해.그쪽은 그쪽대로 사정이 복잡해."

김백일이 지도를 꺼내놓고 말했다."인구리(양양군 현북면)에서 38선 너무 800m 북쪽에 기사문리가 있어.여기서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오거든. 이렇게 하면 어떻까.기사문리에서 날아오는 적 포탄 때문에 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다.그런데도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총 한방 못 쏘고 당하고만 있다.장병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38선을 넘어 직사포를 쏴대는 적진을 박살내야 한다. 38선 너머 1개 중대를 보내 까부수는 즉시 돌아온다.이렇게 보고해 보자고."

 

북진 개시!


 

정일권이 즉시 찬성해 워커에게 전화를 걸었다.워커는 "그렇다면 함포나 공군기로 때리자"고 대꾸했다.정일권은 얼른 "적 포대는 동굴로 돼 있다.보병이 아니고는 곤란하다"라고 둘러쳤다.워커 사령관은 "그러면 내일(10월1일) 작전을 개시하되 작전이 끝나면 즉시 부대로 복귀시키라"고 한 후, 제너럴 정 다른 의도는 없겠지요?"라고 물었다."물론입니다." 미군들은 이대통령의 북진명령을 모 를 터이니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두 사람이 주문진의 3사단 사령부로 가자 이종찬 준장이 "23연대장 김종순(金淙舜) 대령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돌파명령을 재촉한다.잠시 후 두 사람은 인구리의 23연대를 찾았다.연대장 김 대령은 "병사들이 38선 팻말을 걷어차고 밟아 뭉개고 있다.군화가 다 닳을 지경이다.38선이 뭐냐며 총질을 해대는 병사도 있다.이러다간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며 자랑 반 위협 반의 보고를 했 다.이때 김대령 앞으로 "수도사단 1연대가 38선에 도달했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 즉시 김대령은 '총참모장 각하. 수도사단 1연대가 먼저 38선을 돌파하면 저는 연대원 앞에서 배를 갈라야 합니다.맥아더의 명령이라해서 선봉을 빼앗겼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더니 그 즉시 무전병을 불러 예하 대대를 호출했다."금강산, 금강산.여기는 백두산이다.대대장 바궈라!"잠시 후 김대령은 "여기 총참모장 각하가 와 계시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직접 보고 드려라!"하고 말했다.이어 그는 정 총참모장에게 수화기를 건네며 "3대대장 허형순(許亨淳)소령입니다.직접보고를 받으시지요"고 말했다.

수화기를 타고 오는 허소령의 목소리는 아주 당당했다."저희는 38선 북쪽 12km인 양양 뒷산에 있습니다.병력은 1개 중대입니다." 정총참모장은 속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중하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이때가 10월1일 오전 11시30분부로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그러자 김백일 군단장이 김종순 대령에게, "23연대는 현위치에서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하 라.제3사단장을 대신하여 제1군단장 김백일!"이라고 소리쳤다.

이로써 3사단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되었다.1950년 12월 3사단은 국군으로서는 가장 북쪽인 혜산진까지 진격한 예하 26연대를 수도사단으로 보내고 수도사단에 속해 있던 18연대(일명 백골부 대)를 배속받는다.1962년 정우주 사단장(준장) 때 3사단은 ' 부대 별칭' 공모를 했는데, 부대원들은 압도적인 다수로 18연대의 별명인 '백골'을 추천했다.이에 따라 3사단은 '백골사단'이 되고, 18연대 는 진짜 백골이라 하여 '진(眞)백골', 서북청년단 출신이 절대 다수였던 18연대 1대대는 '진진백골' 부대가 되었다.

 

국군의 날


 

인구리와 기사문리 사이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광정천이라는 조그만 하천이 있다. 이 하천 위에는 다리가 걸려있는데, 이날 3사단이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했다고 하여 이 다리는 '돌파교'가 되 었다. 돌파교 근처에는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동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 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들어갔다.그 후 국방부는 이날을 기려 국군의 날을 10월1일로 정했다.

북진 명령을 내린 정 총참모장은 미군이 호되게 항의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 말이 없더니, 10월2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겸 UN군 사령부에서 "UN군은 10월3일 0시부로 38선 이북의 북한지역에서의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그리고 닷새 후 UN은 찬성 47, 반대 5, 기권 8로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군 1군단의 단독 북진은 추인받게 되었 다.

경북축선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던 미 1군단이 10월5일 대전 충남도청에서 북진을 위한 사단장 회의를 열었다.미 1군단에 배속된 백선엽 국군 1사단장도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그가 받아든 명령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 1기병사단이 미 1군단의 주공으로 경의국도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한다.영연방 27여단은 군단 에비로 미 1기병사단의 뒤를 따른다.한국군 1사단은 경의축선의 좌측인 개성-해 주-안악으로 진격하며 작적을 소탕한다.'

1894년청일전쟁 때 섭지초(葉志超)가 이끄는 청나라군이 평양성에 포진하고 한성 진격을 준비했다.그러자 일본군은 3사단과 5사단으로 1군을 편성하고 야마가타 아리모토를 사령관에 임명해 평양 진격 을 명령했다. 이때 야마가타는 "대단한 난전(難戰)에 처하더라도 적에게 사로잡히지 말고 깨끗이 죽음을 선택해 일본 남아의 기상을 보여라!"고 연설했다.이 연설은 그 후 일본군의 '항복 거절' 전통 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일본군의 평양 공격 선봉대는 5사단이었다.5사단은 평양 우측으로 접근해 평양성 현무문을 점령함으로써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섭지초는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백사단장의 고향은 이러한 전투가 벌 어진 평양이다. 그는 미 1군단의 진격로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격한 것과 흡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밀번 1군단장에 면담을 요청해 국군 1사단도 평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밀번 1군단장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한국군에는 차량이 많은가. 미군사단은 수백대의 차량을 갖고 있다.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사단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백사단장 은"내 고향은 평양이고, 나는 청일전쟁사를 잘 알고 있다.비록 차량은 적지만 한국은 산이 험해 오히려 도보 진격이 빠를 수도 있다. 국군 1사단을 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강청했다.물그러미 바라보던 밀번 군단장은 "그러면 국군 1사단과 미 24사단의 진격로를 교체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미 1군단의 진격로가 확정됐는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미 10군단 예하 미 육군 7사단이 부산으로 내려가고,미 해병 1사단은 인천으로 이동한 것이다.맥아더 원수가 미10군단을 빼내 다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인천으로 보내고 육군 7사단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집결케 한 것이다.

당시 한강 다리는 모두 파괴돼 고무 보트로 연결한 배다리 두 개뿐이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미 10군단이 한강 남쪽으로 넘어오고, 다른쪽에서는 미 1군단이 한강 북쪽으로 넘어가니 자연 시간이 지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필리핀 부대를 선두로 나머지 12개국(미국군과 영국군 부대는 벌써 와 있었다) 부대가 차레로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오고 가고, 오고 가고'승전의 기쁨은 잠시이고, 혼란스 러운 가운데 대규모 부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맥아더의 이러한 조치는 10군단 지휘권을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서울로 총반격을 펴 북상할 때만 해도 워커사령관은 10군단이 당연히 자기 통제하에 들어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성격이 급한 워커는 맥아더를 맹비난했다.

물론 맥아더의 카리스마 때문에 면전이 아닌 자기 부하들 앞에서... 이 바람에 알몬드 10군단장도 워커를 싫어하기 시작했다.도쿄에 있는 맥아더원수는 워커에게 모든 것을 맡겨 한국전 승리의 공이 워커에게 몽땅 돌아가는 것을 꺼려 이른바 '분할 지배(divided and rule)'를 한 것은 아닐까?

 

불꽃 튀는 북진 경쟁


 

10월6일 6-7-8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2군단이 38선을 넘어 평강-철원-김화를 점령했다.국군에서도 공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10월18일 밤 임부택 대령의 6사단 7연대는 강원도-함경남도와 붙어 있는 평안남도 양덕군 양덕읍을 점령했다.그런데 거의 동시에 황해도 신평군쪽에서 고근홍(高根弘) 대령이 이끄는 8사단 10연대가 들어왔다.그 즉시 두 연대장은 서로 "양덕을 선점했다"며 말다툼에 들 어갔다.동해안에서는 수도사단과 3사단이 경쟁하듯, 중부전선에서는 6사단과 8사단이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연대가 다툰 것은 유재훙 2단장이 "양덕을 먼저 점령한 부대에게 도로 사용 우선권을 준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도로를 먼저 사용하게 되면 그만큼 북진 속도가 빨라진다.당시 두 사단은 정일권 총 참모장에게서 비밀리에 양덕을 거쳐 평양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도로 사용 우선권을 놓고 다툴 수박에 없었다. 이미 10월10일 26연대가 서로 원산을 선점했다고 다툰 적이 있었다.

10월7일 미 1기병사단 수색대가 38선을 넘고 11일에는 미 1군단 예하 국군 1사단이 38선을 넘었다.하지만 미 1군단의 진격은 동부나 중부전선에 비해 현저히 늦었다.퇴각하는 인민군이 도로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기 때문이다.

11일밤 더딘 진격속도를 고민하는 백선엽 1사단장이 밀번 1군단장을찾아가 전차 지원을 요청하자, 밀번 군단장은 30여 분을 생각하더니 전차 1개 중대(10대)를 보내주었다.이때부터 백 사단장은 공 병과 보병, 전차, 포병이 한 덩어리가 돼 진격하는 이른바 '패튼 전법'을구사했다.2차 세게대전 때 유럽 전장에서 패튼 3군 사령관은 이러한 제병과 합동작전으로 쾌속 진군했다.

전차가 배속되자 국군 1사단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병사들은 "우리는 전진한다"면서 "전진, 전진!"이라는 구호가 굳어져 1사단은 '전진부대'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전진부대는 먼저 전차로 돌파하고, 이 돌파선을 중심으로 멈춰서서 좌우 면을 포위 공격한 다음 다시 전차를 돌진시키는 '분진협격(分進浹擊)'전술을 구사했다. 이따금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부대를 세울 뿐 전진 사단은 쾌속으로 진군했다.

이렇게 되자 미 1기병사단 우측에 있는 5기병연대와 국군 1사단 선봉대인 12연대 가속도 경쟁을 하는 모양이 되었다.국군 1사단은 파죽지세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10월 17일 평안남도 중화군에 집 입했다. 이때부터 국군 1사단은 잔적 소탕은 아예 포기하고 평양 선착에 몰두했다.10월18일 밤 평양 외곽 15km지점인 지동리에 도착한 백사단장은 15연대(연대장 조재미 중령)로 하여금 서북쪽으로 우회해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협격하라고 지시했다.

남은 이는 11연대장 김동빈 대령과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이었다.그때까지 주공은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12연대였다.육사 1기 동기인 두 사람은 경쟁 심리가 작동해 서로 주공을 차지해야 한다며 신 경전을 펼쳤다. 이때 사단장이 위엄을 놓치면 작전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백사단장은 눈을 딱 감고 "12연대는 구공으로 전차와 협동해 오늘밤 안에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고, 11연대는 미림 비행장과 평양비행장을 거쳐 능라도 상류인 주암산 및에서 대동강을 도하하라"고 지시했다.

10월19일 날이 밝자 '모스키토'라 불리는 정찰기가 나타나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상공을 오가며 쌍방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미 1기병사단도 중화를 통과하고 있었다.지동리부터 평양까지는 허허 벌판인데 문제는 지뢰였다.국군 1사단 12연대가 지뢰를 하나하나 제거하며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하기로 한 대동교 입구의 선교리 로터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쯤이었다.그 순간 "꽝"하는 폭음과 함 께 대동교가 무너져 내렸다.

개전 첫날 국군 1사단은 임진강 철교 폭파에 실패했는데 인민군은 정확한 시기에 대동교를 폭파한 것이다.그러는 사이 국군 1사단에 배속된 미군 전차병들이 "Welcome 1st Cav.Division-from 1st ROK Division Park'(환영! 미 제1기병사단-한국군 1사단 백선엽)라는 피켓을 만들었다.

40분이 지나자 미 1기병사단 선두와 함께 밀번 1군단장, 게이 1기병사단장 그리고 트루먼 미 대통령의 특사인 로 소장이 도착했다.이로써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한 것이 확인되었다.어느 틈엔가외신 종군기자들이 나타나 플래시를 터뜨렸다.한`미 장병들은 얼사 안고 춤을 추었다.

 

국군사단의 평양선착


 

이 시각 서북쪽으로 우회한 1사단 15연대가 수심이 낮은 곳을 택해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을 접수하고, 이어 평양 중심부(당시는 일본식으로 '本평양'으로 불렀다)에 도착했다.12연대에 평양 선착을 내준 11연대는 수심이 얕아 '도섭장(渡涉場)이라 불리는 지점을 택해 대동강을 건넜다.이러한 지점 선정은 백사단장이 평양 곳곳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하지만 미군은 공병부대가 부교를 설 치한 다음에야 강을 건넜다.

국군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평양 시내로 막 들어갈 때쯤 평양 서쪽에서 일단의 부대가 몰려왔다.그 바람에 크게 긴장했는데, 뜻밖에도 7사단 8연대(연대장 김용주 대령)로 밝혀졌다.백사단장이 김 대령을 찾아 "왜 남의 작전 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느냐"고 야단치자,김대령은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진로를 바꿔 평양으로 진격했다'고 대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국군 부대를 먼저 평양에 선착시키라고 지시했다.그래서 정 총참모장은 국군 부대로만 편성된 2군단에 평양 공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평안남도 양덕에서 6사단 7연대와 8사단 10연대가 우격다짐을 하게된 것도 그래서였다.그러나 두 사단이 싸움을 벌임에 따라 6사단과 8사단은 북쪽으로 진로를 바꾸게 하고 대신 7사단에 평양 진격임무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백선엽 사단장은 아주 중요한 일을 간과하고 말았다.10월20일 포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2사단 소속 장교들이 평양에 들어와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발견한 모든 문서를 도쿄에 있는 미극 동군 본부로 보냈다.이 문서 중에는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4사단장 이 권무소장 앞으로 보낸 '선제타격' 계획도 들어있었다. 이로써 미군은 6·25가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 거를 확보했다.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문서 수집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10월21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시민대회를 열고 국군 1사단을 표창했다.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도 평양 돌입 선봉대인 미 1기병사단 5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사열 도중 맥아더는 갑자기 "96일 전 포항으로 상륙할 때 있었던 병사가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그러자 200명의 병사 중에서 단 5명이 앞으로 나왔는데, 그중 3명은 부상병이었다.

 

제4편 황량한 청천강 전선

 

    아더 원수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에게 강원도 원산 상륙작전을 명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이에 따라 스트러블제독은 제7연합기동함대를 편성해 청진 이남의 모든 북한 해안을 봉쇄했다. 하지만 병력 이동과 장비를 싣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맥아더는 10월15일로 잡은 원산상륙 D데이를 20일로 연기했다. 맥아더의 구상은 원산상륙이 이뤄지면 10군단을 평양으로 진격시켜 8군과 함께 평양을 함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등장했다.인천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인민군이 급히 30여 명의 소련 기술자를 불러들어 원산 앞바다에 기뢰를 부설했던것.때문에 원산 앞바다로 접근하던 미 해군 함정 3척이 대파되었다.

기뢰를 제거하는 것을 소해(掃海)작전이라고 한다.그리하여 10일부터 사상 최대의 소해작전이 시작되었다.이 작전에는 미 해군 소해정 10척, 일본 해상보안청 소해정 21척, 한국 소해정 1척 등 모두 32척이 투입되었다. 원산 앞바다 소해 작전에 일본 해상보안청이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오쿠보 타게오 일본 해상 보안청 장관에게 소해작전 참여를 요청한 이는 미극동해군 참모부장 바크 소장이 었다.이에 대해 요시다 총리는 "소해작전에 참여하되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그래 서 다무라 대령을 지휘관으로 제1-2-3-10대 소속 소해정 21척이 원산으로 이동했다.이중 제1대는 이미 UN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협력한 적이 있고, 제2대는 군산 소해작전을 지원한 바 있었다.

10월17일 원산 앞바다에서 제 2대 소속 소해정 1척이 기뢰와 접촉해 침몰하며 1명이 죽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그러자 제2대 지휘관인 노세쇼고 중령이 "미군의 작전명령에 반대한다"며 제2대 소속 소해정 3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가, 곧바로 책임을 지겠다면 사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1978년까지 일본에서는 비밀에 부쳐졌다.맥아더가 초안을 잡아준 일본 헌법(일명 평화헌법)은 '일본군은 해외 출동은 물론이고 외국군과의 공동 작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 다.따라서 일본 해상보안청 부대의 한국전 참여는 일본 헌법 위반이 아닐 수 없다.

10월19일 미 해병1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해작전이 끝나지 않아 이 함정들은 12시간 동안은 북쪽으로, 나머지 12시간 동안은 다시 남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이 시 간 보내기가 얼마나 지루했던지 미 해병 대 병사들은 "우리가 요요작전을 하러 왔다"고 자조했다. 요요는 실에 묶인 공을 던지면, 그 공이 실의 탈력성 때문에 되돌아오는 놀이 기구다.

 

맥아더의 오판


 

그러나 10월10일 이미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을 점령했고, 19일에는 미 1군단이 평양을 점령해버렸다. 요요작전 1주일 만인 10월26일 미 해병1사단은 아주 안전하게 원산 해안에 행정상륙했다. 더웃기는 것은 미 육군 7사단이었다.7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은 북한 앞바다에 기뢰가 부설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앞바다에 10일 동안 떠 있었다.그리고 함경남도 이원 앞바다로 올라가 29일 7 사단 병력을 행정상륙시켰다.

평양이 8군에 점령되자 맥아더는 작전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맥아더는10월17일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지금은 양강도 헤산)으로 진격케 하고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가 있는 함경남 도 장진군 쪽으로 진격케 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로써 UN군의 전체 통솔이 매우 이상해졌다.서부 전역에서는 미 8군이, 동부전역에서는 미 10군단이 독자 작전권을 갖고 진격하는 가운데, 10월1일 38선 돌파 이후 국군은 정일권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진격하는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이것은 UN군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정말로 맥아더 원수가 한국전을 총지휘하고 싶었다면 그는 도쿄가 아닌 한국으로 옮겨와서 지휘했어야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도쿄는 한국에서 너무 멀어, 전쟁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없다.원 거리에서 UN군 각 부대를 분할함으로써 자신의 지휘권을 공고히 한 맥아더의 행동은, 임진왜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시킨다.

당시 도요토미는 도쿄 근처에 있는 하카다에 머물며, 조선으로 출병한일본군을 원격 조정했다.조선으로 출병한 일1본군은 한양성을 함락한 뒤 2개군으로 재편됐다.그묘 1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했고, 또 하나의 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끌고 두만강 중류인 함경(북)도 회령까지 진격해 선조의 두 아들을 생포했다.도요토미는 이렇게 두 장수를 경쟁시킴으로써 자기의 권위를 확인했는데,그 틈을 뚫고 명나라군이 참전해 왜군을 밀어붙였다.358년 전의 역사 교훈을 맥아더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UN군이 38선을넘어섰을 때부터 서방 언론은 베이징을 주목했다.국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1일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한 지 꼭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이날 중국 외상 저우언 라이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받는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0월3일 밤 저우언라이는 다시 파니카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 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온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이다"고 말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케 했다.

 

무제한 북진 명령


 

9월27일 미국 통합참모본부는 맥아더 원수에게 '귀하의 작전목표는 북한군을 격멸하는데 있음.이 목표를 달성하기 이해 38선 북쪽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인가함.단 소련이나 중공이 대부대를 북한 에 투입했거나 군사적으로 위협을 표한 사실이 없을 때로 한정함.만주와 소련영토에 대해서는 일체 군사작전을 금지함.소련군이 개입해올 경우 수세를 취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 것.중공군이 개 입해올 경우에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린 바 있었다.(9·27 훈령).

그러나 미국은 UN에서 '통한(統韓)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중국의 경고를 무시했다.오히려 중공군이 참전할 경우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의 폭을 넓 혀주었다.10월15일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트루먼 미 대통령은 괌섬 동쪽의 웨이크섬으로 날아와 맥아더 원수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트루먼이 '중국이나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을 묻자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주에는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있는데 그 가운데 압록강 연변에 배치된 것은 10만~12만5000명이다.따라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더라도 그 병력은 고작 5만~6만일 것이다.중공군은 공군이 없지만 우리는 한국에 기지를 둔 공군이 있다.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평양에 내려오기도 전에 전부 궤멸될 것이다."

이 회담후 맥아더는 UN군의 북진 한계선을 없애버렸다.10월2일 그가 내린 작전명령 2호에서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해안의 평북 정주에서 동해안의 함남 흥남까지(이른바 청천강)만 진격하도 록했다.그런데 10월17일 작전명령 4호를 내려 평북 선천에서 함국 학성군(지금은 김책군)까지 진격하도록 했다(맥아더 라인).

그런데 10월24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반공주의자인 맥아더는 중공을 사탄으로 보고 자신에 차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그런데 맥아더의 카리스마에 눌려 있던 미 통합참모본부는 "우리는 귀하가 그러한 명령을 내린데는 틀림없이 어떤 정당한 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하 지만 그러한 조치는 우리도 다소 관심이 있으니 우리에게도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아주 공손한 질문 형태의 조치로 이를 추인했다.

 

국군 6사단 7연대


 

이로써 미통합참모본부가 내린 9`27 훈령은 휴짓조각이 되었다.그러자 참전한 미군들 사이에서는 "12월24일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는 고국에서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퍼져갔다.이러한 무제한 북진 명령의 선봉에 선 것은 임부택 대령이 이끈는 국군 6사단 7연대였다.

10월18일 평남 양덕을 점령하고 성천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던 6사단은 미 1군단이 평양을 점령하자 방향을 바꿔 평남 순천-개천을 거쳐 평북 희천(지금은 자강도 희천군)으로 진격했다.

10월24일 김종오 6사단장은 임부대 7연대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국경도시 초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이때부터 7연대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차량을 타고 초고속으로 진격했다.진격 속도가 너 무 빨라 당시 평북(지금은 자강도) 강계 쪽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앞지르기도 했다.

초산에서는 오일용(吳日龍)이 이끄는 인민군 8사단이 패잔병으로 부대를 꾸려 일시 저항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10월26일 드디어 7연대는 한·만국경지역인 초산군을 점령했다.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km였다.임대령은 1대대장 김용배(金龍培) 소령에게 "국경까지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1대대가 30여 분을 더 진격하자 인민군 패잔병들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왔지만 일거에 제압되었다.그 직후 중토동 마을 고개에 올라선 1대대원들은 수풍댐 때문에 거대한 호수가 된 압록강을 발견했 다. "야! 압록강이다" 병사들이 어울려 고함치는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임부택 대령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압록강


 

잠시 후 1대대 1중대 수색소대가 신도장이라는 마을 앞 강변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꽂았다. 이때가 정확히 1950년 10월16일 오후 2시15분이었다.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압록 강변에 도달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이대용(李大鎔) 대위였다.압록강변 수색에 나선 이대위는 만주 통천구로 이어진 뗏목다리 위로 인민군이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57mm 대전차포를 쏴 뗏목다리 를 끊어버렸다.

이대용대위는 그 후 준장으로 전역해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가 된다.주월공사시절 한국군과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1975년). 이때 이대용 공사는 마지막까지 사이공에 남 아있다가 월맹군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7연대 본대가 압록강에 도달했다.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이 임대령에게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라"고 지시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온 것도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1 중대였다.이때 누군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채우는 국군 병사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러는 사이 미 10군단 예하 미 해병1사단은 장전호에 접근했고,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에 도착해 사단에 부여된 작전을 거의 완수해 놓았다.국군 3사단은 함북 길주를 지나 함수-백암-보 천보를 거쳐 백두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국군 수도사단은 청진을 장악한 후 나진-무산을 지나 회령-온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선에는 인민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어쩌다 발견되는 인민군들도 잠시 저항하다 황급히 도주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모든 인민군들에게 평북 강계로 모이라는 지시 를 내려놓고 있었다.인민군들을 강계를 향해 황급히 모여드는데 국군과 UN군은 강계를 무시하고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데만 진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가 잡히기 시작했다.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지는데 전선 분위기는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이러한 전선분위기를 도쿄에 있는 맥아더 원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승전보에 빠져 중국의 계속되는 경고를 '공갈포'로 무시하고 있었다.

다시 맥아더 이야기로 돌아가자.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패배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으로 이어진다(1951년 4월9일). 1차 세계대전에서는 최고의 전투영웅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연합군 총사령관, 그리고 6·25 전쟁에서는 기상천외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종신 원수의 해임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맥아더는 종신 원수이기 때문에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그해 4월19일 그는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장문의 고별연설을 발표했는데 말미에 이런 대복이 들어 있었다.

"전세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한국인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투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자고 한다.그들이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은'(미국은) 태평양을 포기 하지 말라'였다.(중략)

나는 20세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꿈과 희망을 갖고 군에 입대했다. (줄약)그 후로 세상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 꿈과 희망은 사라졌지만,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군가 후렴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죽지 않는다.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나는 이 군가처럼 나의 군 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고 한다.신이 주신 의무를 끝까지 다하려고 한 노 병으로서..."

그 후 노병은 미국 무기회사인 레밍턴사 회장을 지내다 1964년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이러한 맥아더를 존경한 사람이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李秉喆)회장이었 다.

이회장은 맥아더가 타계한 후 '그의 덕분에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졌으니 맥아더 부인을 한국에 한 번 모시자'고 생각하고 이동복(李東馥) 삼성항공 사장과 함께 진 맥아더 여사를 만났다.이 회장의 초 청 제의를 받은 맥아더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전역 후 장군과 나는 아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었다.그런데 그 많은 일본인들이 장군을 알아보지 못했다.장군이 일본 발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그런 데도 장군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자 장군은 매우 섭섭하셨는지, '우리는 두 번 다시 아시아를 찾지 말자(We shall never return to Asia)'고 말했다.그리고 그 말대로 장군은 두 번 다시 아시아를 찾지 않았다.

장군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우리는(we) 두 번 다시 아시아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바꿔 놓지 않고 타계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장군이 한 말을 어길 수 있겠는가. 나를 초청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장군의 말을 지키고 싶다."

아시아는 맥아더에게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그러한 아시아에 대해 맥아더는 초연하게 대처하려고 했다.그러한 남편을 따라 진 맥아더 여사도 끝내 한국을 찾지 않고 지난 1월22일 타계했 다.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려고 했던 맥아더에 어울리는 삶을 산 부인이었다. (신동아 2000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