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군이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삼팔선을 넘어 계속하여 북진을 하게 되자, 敵 후방에 투입되어 유격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창설됐던 우리 유격부대는, 그 임무를 수행할 필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0월 초에 우리 부대는 드디어 부산 구포를 떴다.
도보 행군으로 北上(북상)을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 다음과 같은 경로로 서울 청량리역까지 행군해 갔던 것 같다.
경주-영천-안동-영주-제천-원주-횡성-홍천-춘천-가평-청평-청량리. 행군 도중에 우리는 투항해 오는 敵의 패잔병들을 가끔씩
생포하곤 했지만, 우리 부대는 이들을 모두 우리 대원으로 편입시켰다. 우리 부대원들이 대부분 서북청년들이어서 그랬는지, 적병을 생포해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친절하게 대해 줬다. 또 그들도 동지로 받아주니 고맙게 생각하고 충실하게 복무했다. 속마음이야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 통일을
눈앞에 둔 마당에 그들이 적대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 가는 곳마다 인민군이 버리고 간 말들이
있어서, 저녁마다 말고기 국을 먹곤 했다. 대대장 한관흥 소령은 가끔씩 지프를 타고 나타났다가 중대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종의 지시를 내리고
사라지곤 했다. 참모장 최창남 소령은 별로 부대 업무에 관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부대원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행군 도중 충북 제천읍 한 국민학교에서 숙영할 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한 대원이 오발을 해서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트럭에 실려 서울 육군병원으로 후송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오발한 대원을 처벌하는 방법이 너무나도 야만적이었다. 돼지
묶듯이 손발을 모두 한데 묶고서는 길다란 밧줄로 천장 대들보에다 몇 시간인가를 매달아놓는 그런 처벌이었다. 당시 우리
한국군에는 인도주의라든가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이 전혀 존중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부대에서는 그랬었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인도주의를
들먹거리며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금 그때를 회상하기에 그런 것이지, 그 당시에는 나도 군대 생활이란 그저 그런 것인가보다 생각했었다.
아마 한 2주 정도를 행군해서 서울 청량리역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단 하룻밤도 안 묵고 우리 부대는 그 길로 다시 강원도
원주로 내려왔다. 원주 동쪽에 위치한 치악산을 경유하여 북상하는 인민군 잔당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는 일이 우리 부대의 작전 임무라 했다.
원주 시내의 한 네거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民家(민가)에 분산 배치되어, 소대별 또는 분대별로 숙소(내무반)를 정했다.
대원들은 별로 훈련도 받지 않고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며 며칠간을 지냈는데, 하루는 출동 명령이 내렸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소대별로 조반을 든
다음, 한길 옆 한 공터에 全(전) 부대원이 완전 무장을 하고 집합을 했다. 완전 무장이라고 해야 구포에서 지급받은 「아식
보총」(일명 따꿍총) 1정씩을 대부분의 대원들이 갖고 있었고, 따발총이 全 부대를 통틀어 4~5정, 체코製(제) 경기관총이 각 분대에 한 정식,
박격포가 각 중대마다 한 문 정도밖에는 없었다. 철모, 수통, 총검 같은 것은 우리 부대에 지급된 바 없었으나, 인민군
포로, 또는 인민군 시체에서 노획한 것을 갖고 다니는 대원이 더러 있었다. 탄띠도 정식으로 지급된 바 없었다. 그래도 대원들은 國産(국산),
미제, 북한제, 소련제 등 각양각색이지만 그것이나마 일부 갖고 있었다. 대부분은 실탄을 낱개로 40~50발씩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다만
군인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으니, 반합(개인용 식기)만큼은 美製(미제)로 각자에게 지급이 돼있었다. 우리들의 복장은
남루했다. 장교들은 그런 대로 美製 전투복에 전투모 및 전투화 등을 신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병들은 國産 군복에다 國産 모자를 쓰고 인민군이
한 창고에 보관한 채 버리고 도망간, 흰색 포목과 고무 바닥으로 조잡하게 제조된 농구화 비슷하게 생긴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때가 10월 하순경이어서 날씨가 쌀쌀 했지만 내복이나 양말 같은 것은 지급이 안돼, 소수의 재주 좋은 대원들만이 수단껏 「조달」해서 입었을
뿐이었다. 첫 實戰 그런 상태의 우리 유격부대 대원들은 얼핏 보기에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들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사기는 항상 충천하여 있었다. 그야말로 한번 實戰(실전)을 경험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출전을 한다 하니 모두가 신이 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드디어 부대가 출동을 시작했다. 원주 시가를 벗어나자 대열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1중대, 3중대, 5중대는 남쪽으로 갔고, 내가 소속된 2중대는 동쪽 방향에 위치한 치악산의 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치악산과
그 남쪽에 위치한 향로봉을 잇는 능선 위에 도달했다. 능선 위에서 일단 휴식을 하면서, 중대장이 각 소대장을 집합시켜 놓고
명령을 하달했다. 정보에 의하면 동쪽 계곡(우리가 올라온 계곡의 반대쪽) 아래에 있는 한 부락에 농가가 3~4호 있는데, 어젯밤에 다수의 인민군
패잔병들이 모여들어 밥을 해 먹고 잠을 잤다고 했다. 우리의 작전 목적은 그들을 기습 섬멸하되 가급적이면 많은 敵軍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중대본부와 제1, 제2소대는 계곡을 따라 급히 내려가 적들을 기습하기로 하고, 3소대는 계곡의 좌측(북쪽) 능선, 5소대는
우측(남쪽) 능선으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다가 1, 2 소대가 공격을 개시하면 적들이 도망칠 터이니, 그 도망가는 적들을 사살하는 한편 중대본부와
공격 소대들을 엄호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때 각 소대 연락병 두 명 중 한 명은 소대에 있고, 또 한 명은 중대본부에
파견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소대장 연락병 두 명중 한 명이었는데, 제5소대 연락병으로 중대 본부에 파견돼 있었으므로, 이런 작전 명령이
하달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첫번째 살인 3소대와 5소대가 좌우 능선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아갈 때쯤 해서, 중대본부와 공격 부대인 1소대와 2소대도 서서히 적들이 쉬고 있는 부락 입구까지 계곡을 따라 내려가 있었다.
먼동이 트고 날이 밝기 직전에 공격부대가 부락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열 중앙에 위치한 중대장이 권총을 쏘면 그 총소리를
신호로 돌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오발을 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이 총성이 중대장의 공격 명령으로 알고
일제히 돌진했다. 물론 혼비백산한 敵들이 우리가 내려가는 능선 저 아래에 흐르는 내를 향해 도망쳤으며 좌우 양쪽의 엄호 소대들은 도망치는 적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중대본부 소속 대원들과 함께 부락으로 돌진하여 한 농가 뒤에 쌓인 돌담에
붙었다. 아식 보총을 집 뒤로 난 작은 출입문에다 겨누고, 소리 질렀다. 『손들고 나왓! 손들고 나오면 살려준다! 니들은 이제 살았다! 손들고
나왓!』을 연거푸 반복했다.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십여명의 다른 대원들도 다만 적들을 생포하겠다는 일념으로 제 멋대로 비슷한 내용의 호령들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중대본부에 파견된 연락병이라는 신분은 완전히 망각한 채, 敵들이 손들고 나오도록 하는 데만
전력을 다해 애를 썼다. 이때, 우리가 구포에서 서울로 행군 도중에 생포한 前 인민군 특무장도 있었는데, 그도 체코식 경기관총을 집안으로
겨누고, 열변을 토했다, 『동무들 손들고 나오시오, 아까운 생명 버리지 말고…, 나는 인민군 백공이(102) 연대 특무장
○○○요, 이제 조국은 다 통일이 되었소, 빨리 나와서 고향 가기요!』 아마 2~3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손들고
나오는 敵兵(적병)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소리쳤다. 『안 되겠다! 수류탄 투척 준비…! 안 나오면 던진다…!』
그때까지 우리 부대에는 수류탄이 지급된 바 없었으므로, 우리 대원 중에는 아무도 수류탄을 휴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러자 뒷문의
창호지가 찢어지면서 격자 사이로 손가락이 몇 개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 문이 열리면서 한 敵兵이 뒤로 거꾸러지며 나왔다. 또 한 명이 그 뒤를
따라 기어 나왔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들고 저 앞으로 돌아 나갓!』을 연발하며 그들을 집 옆으로 돌아 집 앞 사립문을
통해 나가라고 했다. 적병이 하나씩, 하나씩 손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집 앞 사립문 쪽으로 향했다. 손을 들고
사립문으로 나온 敵兵들이 순순히 우리 대원들의 지시에 따라 집 왼편에 있는 공터로 모이고 있는데, 내 앞에서 「앞에 총」을 하고, 투항하는
敵兵들을 안내하고 있는 우리 대원 한 명에게 손을 들고 나오던 敵兵 한 놈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총을 뺏으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달려가서 내 총의 총구를 그의 머리 옆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놔! 못 놔?』
그러나 그는 우리 대원의 총대를 맞붙들고 실랑이를 계속했다. 나는 내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敵兵은 앞으로 쓰러져
땅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뒤통수가 깨져 날아간 뒷머리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났다. 허연 골이 보였다. 육곳간에서 가끔 보던 소골을 연상케 했다.
아니, 방금 끓여서 밥상에 올려놓은 순두부 찌개 같기도 했다. 나는 이때에 너무나 上氣(상기)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 성격이 그다지도 냉혹했었는지, 그의 꼴이 끔찍하거나 가엾게 여겨지거나 하는 따위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길로 사립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敵兵들은 다
나왔는데, 다만 인민군 장교 하나가 집 前面(전면) 벽에 기대어 쌓아놓은 곡식 가마니 더미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양손으로는 왼
쪽 옆구리에 난 상처에 댄 압박대를 붙들고 있었다. 계급이 상위(작은 별 셋)였다. 나는 총구를 그의 가슴에다 대고
『일어섯! 가자!』 하고 호령했다. 그는, 『나는 못 가오!』라고 신음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못 가면 죽어야 해!』 하며 총구로 가슴을
쑤셨더니, 그는 할 수 없이, 『아이쿠…으으』 하며 몸을 일으키고 걷기 시작했다. 『1소대장님이 戰死했습니다』
사립문 밖으로 나서서 보니 우리 대원들이 집 옆에 엎드려 놓았던 포로들을 호송하여 후방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즉시 그들의 뒤를 따라 그를 앞세우고 걸어가면서 그의 옷 주머니들을 뒤졌다. 쓸 만한 것이라고는 담배 라이터 한 개뿐이었다. 나는 그 라이터를
「소대장님께 드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기습했던 집 옆에는 또 수십 명의 포로들이 붙들려 와서, 땅바닥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고 우리 대원 몇 명이 감시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집 앞에 있는 밭이랑을 잽싸게 걸어 다니면서 한 손에 권총을 들고, 『나왓! 손들고
나왓! 나오면 살려준다!』 하며 이리저리 발을 옮기고 있었다. 누구 하나 그를 경호하는 대원이 없어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뜸 그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중대장님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른 다음, 그의 앞을 가며, 『나왓! 나오면 살려준다!』를
연발하며 곡식 낟가리, 돌더미, 배수로 등을 샅샅이 뒤졌다. 이제 우리 가까이에는 더 이상 반항하는 敵兵은 없었다.
중대장이 포로들을 집결시킨 지점으로 왔을 때도, 총성은 사방에서 콩 볶듯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는데, 이제 도망친 敵兵들이 하천을 건너 숲속에
숨어서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해 갔던 1소대 대원 두 명이 「앞에 총」을 하고 헐떡이며 달려왔다.
『중대장님! 1소대장님이 戰死(전사)하셨습니다』 『그래? 시체는?』 『敵의 총격이 심해서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대장의 연락병이 『앗!』 하고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중대장은 『위생병!
위생병!』 하고 소리쳤으나 위생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병은 쓰러져서 신음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응급 조치를 하지 않았다.
내가 달려들어서 다리를 만져보니 피투성이가 된 넓적다리에 구멍이 났고 내 손가락이 구멍을 스쳤을 때 부서진 뼈 조각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止血(지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한 끈이 없었다. 나는 노획한 총들을 뒤져서 그중 끈이 길게 달린 소총을
하나 골라 그 끈을 풀어서 상처의 윗부분을 있는 힘을 다해 동여 맸다. 인민군의 총 끈은 가죽으로 된 것도 있었지만, 가죽끈이 아니고 그냥 노끈
같은 것으로 代用(대용)한 것도 많았다. 그러자 2소대 대원 한 명이 중대장 앞으로 달려왔다. 2소대 대원들이 포위한
집에서 敵兵들이 모두 투항해 왔는데, 단 한 명이 나오지 않고 항거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2소대 대원 한 명이 그를 설득하려고 집 뒤뜰로
들어가다 총에 맞아 죽었다고도 했다. 될수록 敵兵을 사살하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과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軍律(군율)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노력도 보람 없이, 대원 하나가 희생됐다는 것이다. 투항 거절한 인민군 중대장은
곧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도 다른 중대 본부 요원들과 함께 그를 따랐다. 집 주위에는 2소대장 이하 10여명의 대원들이 포위망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그 敵兵과 같이 집주인 식구들이 아직도 집안에 있다고 했다. 중대장은 집주인을 우선 구출해 내고 집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대원들이
『이제, 불을 지를 것이다. 빨리 나오라!』 하고 연방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아무도 안 나왔다. 나오지 않으면 불을 지른다고 위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불을 질렀다. 집이 불길에 휩싸이자 주인 부부와 딸 하나가 나왔다. 敵兵은 뒷문으로
뛰어나와 김치광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우리는 또 그 김치광에 불을 질렀다. 그때서야 비로소 敵兵은 손을 들고 투항했다. 아무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리라고 각오를 했었지만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피할 길을 찾게 마련인 것이 인간의 생존본능인가 보다.
지금 그의 계급이 뭐였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그가 인민군 하사관이었다고 생각될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를 최고 악질이라고 했지만,
인민군 쪽에서 본다면 그는 강인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충성스런 병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도 나름대로 민족의 안녕과 조국의 부강을 위해
싸웠으리라. 그 다음날 그는 우리 부대 全 대원이 정렬하고 지켜보는 앞에서, 총살형에 처해 졌다. 최후의 진술을 하라
하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당시 나는 물론이지만 대다수 우리 부대원들은, 나도 저같이 용감하게 싸우다 戰死할 때에는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리라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지금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군인들이 과연 그같이, 또는 당시의 우리 부대원들같이, 나라를
위해 군인의 본분을 다할 태세가 되어 있을까? 그러는 중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우리 부대는 서둘러 귀대 길에 올랐다.
敵 포로가 2백여명이나 됐고 노획한 무기도 거의 같은 수였고 또 각종 소화기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我軍(아군) 부상자도
몇명 있었다. 적군 부상자는 제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자기네들끼리 서로 부축을 해야만 했고, 임기응변책으로 급조된 들것 같은 것은 我軍 부상병들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포로, 「원(?)대로」 죽이다 포로들로 하여금 그 많은
노획품을 지게에 실어 지거나, 또는 새끼줄로 묶어 멜빵을 만들어 등에 지도록 하고, 我軍 부상자들의 들것까지도 포로들에게 들게 하고 좁은 산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강한 포로들과 我軍 부상병들의 일부를 먼저 후송하는 등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니 중대의 병력(당시 약
1백30명)보다도 더 많은 수의 적군 포로를 호송하며 험한 산길을 넘어 귀대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부대의
선두가 능선에 막 도달했을 즈음에, 사방이 조용하기만 하던 적막을 뚫고, 『탕!』하고 총성이 울렸다. 한 10여분 후에 또 한 방이 울렸다.
귀대 후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붙든 인민군 상위와 하퇴부(정강이)에 총상을 입은 또 한 명의 인민군 장교(역시 상위)가 『더 이상 못
걷겠으니 차라리 죽여주시오!』 하며 애원을 해서, 원대로(?) 죽여줬다고 했다. 우리가 능선에서부터 산 중턱 정도까지
내려왔을 때, 부락민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 길을 밝혀주니 우리의 발길은 한결 빨라져서 곧 부락까지 내려왔다. 부락민들이 집집마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방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상자니, 판자때기니 아무렇게나 임시 방편으로 마련한 밥상에 고깃국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밥을 차려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7명의 특공대에 차출되다 긴장도 풀리고
밥도 배불리 먹고 나니, 전사한 1소대장 생각이 났다. 그는 나와 같은 흔치 않은 靑海 李氏(청해 이씨)인데다 같은 고향 사람으로 우리 집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혹, 내가 戰死라도 하면 그가 나의 소식을 고향에 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보다 먼저
죽다니? 이제 내가 죽지 않고 돌아가면 내가 그의 소식을 고향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전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지금은 그의 이름까지 잊어버렸다. 그후 우리 부대는 4~5일간의 휴식을 취했다. 치악산
남방 약 5km 지점에 위치한 향로봉에서 우리 부대가 등지고 있는 치악산을 향해 인민군 ○○사단의 大(대)병력이 능선을 따라 후퇴중인데,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實戰을 통해서 단련된 강력한 부대인데다가 그 수가 엄청나니 웬만큼 안전한 상황이 아니면 敵兵을 생포할 생각을 말라고 했다.
또 우리 대대의 여타 3개 중대와 유격사령부 예하 1개 대대 병력이 향로봉 남방에서 적들을 추격중이어서 적의 大병력이 우리
앞으로 퇴각해 오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들을 원거리에서 사살만 하면 되니 가급적 조준사격을 하라고 했다. 적들은
향로봉에서 치악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北上 퇴각중이었으나 우리의 출현으로 이동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서 우리가 散開(산개)한 능선 앞의
계곡으로 도주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散開하고 있는 능선의 맨 위는 향로봉과 치악산을 잇는 본 능선인데, 그 지점에서 향로봉 방향(남쪽)으로
가만히 관찰을 하다 보면 가끔씩 사람의 그림자가 가물가물 보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적군의 관측병 아니면 통과중인 단위 부대의 지휘관이라고
판단됐다. 우리가 소지한 「아식 보총」이나 「M1 소총」의 유효 사정거리인 4백50m를 넘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그
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팬 계곡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차차로 우리 중대가 散開한 능선 앞으로 가까워지는 그런 지형이었다. 敵들은 퇴로가 그 계곡
외에는 달리 없었으니 부득이 총탄이 비 오듯 하는 그 계곡을 따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我軍은 정오가 지나도록, 종일
계곡을 달려서 내려가는 적들을 향해 계속 사격을 가한 결과, 많은 敵兵들이 죽어서 계곡에는 시체가 너저분한 것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가
있었으나, 대대장에게 보고할 물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중대장이 조바심이 났다. 다만 한 명이라도
敵兵을 생포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대대장 앞에 가서 敵兵 1만명을 사살했다 한들 대대장이 믿어줄 것인가? 이런 중대장의
고충을 읽은, 중대 선임하사관 박 상사(이름을 기억치 못해서 그저 박 상사라 부르기로 함)가 『제가 한 번 계곡을 내려가 보갔습네다』하며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대원 한 댓 명만 달라고 했고, 중대장은 『그래? 한 번 해볼래? 대원은 마음대로 차출해서 데리고 가!』 라고 승낙을
했다. 박 상사는 나를 포함한 각 소대에서 파견된 4명의 연락병과 중대본부 요원 2명 등 도합 6명을 차출했다. 박 상사를
포함해서 7명의 특공대가 편성된 셈이다. 우리들 7명은 敵兵들이 줄지어 도망치고 있는 계곡을 향해 조심조심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갔을 때, 총성도 멈추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때 어디선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한태주 동무…!
한태주 동무…!』 하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下山(하산)하던 발길을 멈추고 사방을 살펴보니, 저 멀리 계곡 가까이에서 私服(사복) 차림의
한 사나이가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한태주 동무…!』를 연발하고 있었다. 빨치산으로 위장
박 상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전투에 유리한 한 지점을 택하고는 그 소리치는 사나이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동무…! 이리 올라오시오! 우리는 빨치산이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또 소리를 쳤다. 이번에는, 『한태주
동무! 여기 빨치산이 있소오!』하고. 곧 그 사나이는 視野(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방은 적막에 싸였다. 저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니 敵兵들의
시체가 너저분한데 가끔씩 삼삼오오 敵兵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총성이 없으니 뛰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적들과
근거리에 있는지라,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며 적들의 동태를 한참 동안 살피고 있는데, 바로 발 아래 숲 속에서 무엇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복을 한 장정 셋이었다. 등에는 배낭을 하나씩 지고 씩씩거리며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깜짝 놀라 박 상사를 쳐다봤다. 박 상사는 그들을 향해, 『동무들 수고가 많소. 어서들 올라오시오』라고 아주 태연하게
말하고는 우리 대원들을 향해 『동무들! 이 동무들 좀 도와주라우!』라고 지시했다. 우리 대원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부축해서,
우리가 서 있는 좀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박 상사는, 그 세 사람에게 말했다. 『동무들! 여기는 최전방이면서도 적의 후방이오. 그러니
동무들은 일단 몸수색을 받고, 간단한 심사도 받고 한 다음에 우리 공화국의 공민임이 틀림없으면, 우리 빨치산에 입대해서 힘을 합쳐 같이 싸우도록
합세다』라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우리 대원들을 향해서, 『김동무, 리동부, 박동무! 이 동무들 몸과 소지품을 수색하고, 간단하게 심사도 해
보시오!』 했다. 나와 두 사람의 대원이 달려들어서 몸수색도 하고, 배낭의 내용물도 조사했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 노동당
당원증을 목에 메고 있었지만, 총기는 소지한 것이 없었다. 남루한 옷과 배낭이었지만, 배낭 속에는 밤, 감, 대추, 콩강정, 담배, 성냥 등
외에 사업일지 등을 비롯한 몇 가지 서류들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전라남도 광주 지방까지 남하했던 위생 공작원, 문화
공작원, 정치 공작원 등이었다. 그러는 중에 저 아래 숲 속에서 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완전 무장을 한 인민군들이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겁이 덜컥 나서 박 상사의 팔을 살짝 치면서, 『쏩시다,
쏴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선임하사관은, 『가만 있어 임마…!』하고는, 다가오는 인민군을 향해 두어 발짝 다가섰다. 한 손에는 따발총을
꽉 움켜쥔 채…. 나는 그의 대담성에 놀랐다. 『동무들 수고가 많소! 나는 치악산 지구 빨치산 총사령관이오! 선임자가
누구요?』라 했다. 적들은 우리 발 밑에까지 올라왔는데, 권총을 든 군관(장교)이 1명, 작대기 세 개짜리 견장을 달고 따발총을 든 분대장,
작대기 두 개짜리 견장을 달고 역시 따발총을 든 부분대장, 그 외에 따발총을 든 하사관 한 명이 더 있고, 나머지는 모두가 소련製 아식 보총을
들고 있었다. 도합 13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군관이 서 있는 쪽을 쳐다봤다. 군관은 계급장도 없고 모자도 없이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고
있었다. 그의 긴 머리와 복장으로 봐서 군관임을 알 수가 있었다. 대담한 박 상사
박 상사는 위풍당당하게, 『오! 군관 동무구만. 일단 정렬들 하시오!』 했다. 군관은, 『이만 했으면 정렬이 되지 아이 해씁네?』
했다. 선임하사관은, 『좋소. 나는 치악산 지구 빨치산 총사령관이오. 동무들이 아다시피, 여기는 지금 전투지구요. 기리니끼니, 동무들은 일단
무장을 해제하고, 심사를 받은 후에, 우리 대열에 합류하기 바라오. 동무들이 소지한 무장을 일단 이리 올려덜 놓으시오!』 했다. 우리가 서 있는
지형은 우리 발 아래 정렬해 있는 敵兵들의 목 높이 정도였다. 『아니 우리가 지금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있는데도 무장해제를
하고 심사를 받다니오?』 그들은 즉각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래도 박 상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동무들!
시간이 없소! 적들이 지금 바로 우리 뒤에 진을 치고 있소. 얼떤, 얼떤, 협조들 하시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목에 메고 있던 당원증을
끄집어내면서, 『우리 여기 당원증도 있소, 인민군 신분증도 있소』 했다. 박 상사는, 『지금 이런 전투지구에서 당원증,
신분증이 무슨 소용이 있소, 기딴 종이 조각을 가지구 敵과 동지를 구분하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요. 敵들이 기딴 당원증을 못 만드는 줄 아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을 받아서, 『동무들이 인민군대의 정복을 하고 당원증을 제시하는 우리를 못 믿는다면, 동무들은
공화국 빨치산이 아이오!』 하며 박 상사의 요구에 응하려 들지를 않았다. 이때 내가 거들었다. 아직 이남 말에 물들지 않은
싱싱한 이북 사투리로…. 『이 동무들 정신이 나갔구만, 우리가 낙동강에서 여게까지 후퇴하문서 국방군의 기만전술에 속은 일이 한두 번이오? 적의
특무들두 기딴 당원증을 갯구 있이오! 어디케 우리가 동무들을 믿는단 말이오?』 하고는 이어서, 『여게 공작원 동무들도 있디만…, 않기래요,
동무들?』 하고 공작원들을 돌아다봤다. 그러자, 그 공작원들이 합창을 했다. 『옳소! 믿을 수 없습네다!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 합네다!』 『동무들 우리는 대한민국 국방군이오』 그러자, 박 상사가 용단을
내렸다. 『이동무들 말로만 해서는 안되겠소. 자! 동무들! 내레가서 강제로 총을 빼띨라요! 얼떤 얼떤!』라고 우리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순간
대원 셋이 맨손으로 뛰어내려가서, 강제로 총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도 그들 중 부분대장을 향해 걸어갔다. 대열 맨 끝에 서 있던
부분대장이 내 왼편으로 돌아서 올라왔다. 그는 그의 우측으로 경사진 지형을 따라 올라왔고, 나는 나의 좌측으로 경사진
지형을 따라 내려가다 중간 지점에서 마주섰다. 그때 나는 지난번 전투에서 노획한 소련 기마병이 사용한다는 소총을 갖고 있었다. 이 기마 소총은
역시 아식 보총과 똑같은데, 다만 銃身(총신)이 좀 짧고 총 끝에 달린 총검은 그대로 접었다 폈다 하게 돼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앞에 총 자세로 다가갔다. 여차 하면 그를 총검으로 찌를 각오를 하고, 그가 어깨에 멘 따발총만 응시하면서…. 다행히도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길 위치에 있지를 않았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면서, 『동무 멧사요?』하고 물었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뭐요?』하고 되물었고, 그는 『아니, 멧산가 말이오?』 하고 또 물었다. 순간 나는 『그건 알아서 뭘해?』 하면서
잽싸게 바른손으로 그의 따발총의 총신을 잡고 머리 위로 들어올림과 동시에 내 총을 버리고 두 손으로 따발총을 붙들었다.
그러자, 이 부분대장은 총을 안 놓치려고 꽉 붙든 채, 『분대장 동무, 총을 줍니까?』하고 소리쳤고,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 상사는,
『분대장 동무도 이미 무장 해제를 했어요!』라 외쳤다. 분대장은 이미 총을 빼앗긴 다음이었다. 그러자 부분대장도 총을
순순히 놓아 줬다. 나는 곧 따발총 끈을 어깨에다 걸치고 앞에 총 자세를 취하고 노리쇠를 뒤로 당겨서 사격태세를 취했다. 후에 알게 됐지만
인민군에서는 「○○사단」이란 말을 「○○사」라고 줄여서 사용하고 있었다. 참으로 찰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순간순간이었다. 박 상사의 대담성도 대단했지만, 완전 무장을 한 敵들에게 맨손으로 달려들어 총들을 빼앗은 세 명의 대원 또한 그 대담성을 높이
평가할 만했다. 사실 그때 나는 제 정신으로 그 부분대장의 따발총을 뺏은 게 아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몸이 그렇게 움직여 줬고,
말이 그렇게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敵兵 13명을 모두 무장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박 상사는 평북 신의주 출신인데 체격이 巨人(거인)인데다가 성미가 급했다. 그가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상상을 못 했었다. 어쨌든 이같이 敵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한 다음에, 박 상사는 우리가 서 있는 지반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의기 양양해서, 『동무들 잘 들으시오! 우리는 대한민국 국방군이오!』라고 선언했다. 두 번째
살인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敵兵 13명은 하나같이 뒤로 돌아섰다. 마치 누가 구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그러고는
산 아래로 줄행랑을 쳤다. 물론 이와 동시에 우리들은 있는 총기를 총동원해서 사격을 가했다. 그때, 우리 7명의 대원 중
남조선 학생 출신 2명은 여타 대원들보다 뒤에서 후방 경계라는 구실하에 공작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머지 5명이 갖고 있던 총기, 敵兵한테서
빼앗은 따발총 3정과 박 상사의 따발총 1정 및 아식 보총 1정 도합 다섯 정의 총기가 불을 뿜어댔다. 우리는 조준할 겨를도 없이 그냥 쏴댔다.
앞으로 거꾸러지는 놈, 뒤로 자빠지는 놈, 옆으로 뒹구는 놈, 총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모두 도망을
쳤다. 다만 나한테 따발총을 빼앗긴 부분대장만은 내가 쏜 따발총을 세 발 이상 맞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나는 따발총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 순간 총알이 그의 등 한 가운데에 「팍, 팍, 팍」 세 방인가 네 방이 박히는 것을 나는 똑똑히 봤다. 얇은
군복을 뚫고 등에 박혔다. 나는 이때에 두 번째의 살인을 범한 것이다. 주님 용서하소서. 그는 앞으로 거꾸러졌다. 나는
계속해서 그와 그의 동지들을 향해 따발총을 갈겨댔다. 순식간의 일이다. 순간적으로 그들은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모르긴 해도 13명
중 10명 이상은 죽었으리라. 물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그는 억세게 재수가 좋은 사나이라 하겠다. 그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더러는
처자도 있어, 고향에서 그들의 생환을 빌며 그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을까? 당시에는 그저 승리감에
도취돼 쾌재를 부르며 신이 났었지만,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는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명복을 빌며, 전쟁을 도발한 金日成(김일성)
집단을 저주하며, 우리나라의 허리를 지도상에 연필로 한 획을 그어 쉽게 두 동강을 내버린 강대국의 정책 입안자들을 원망하곤 한다.
그후 어느 날, 우리 부대 대원 전원을 한 광장에 집합시켜 놓고, 부대장 한관흥 소령이 우리들에게, 이제 군번이 배정됨과 동시에
모두가 육군 1등병으로 진급됐다고 하며 축하하는 연설을 했다. 앞으로 더욱더 분발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 달라고 격려와 당부의
말도 했다. 그때 내가 받은 군번은 「0371027」이다. 그때가 1950년 10월 말경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후
내가 부상(동상)을 입고 1953년 9월 대구 제27육군병원에서 제대 수속을 할 때, 육군 본부에 조회한 결과, 나의 계급은 여전히 육군
이등병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 부대는 횡성에 주둔한 일도 있었고, 홍천에 주둔한 일도 있었다. 홍천에서는 우리
부대가 육군 유격사령부 예하로 편입되었다고도 했다. 우리는 구포에서 서울까지 행군해 올라오는 동안에 몸덩어리가 썩어서 퉁퉁
부어오른 채 길가에 너저분하게 깔린 인민군의 시체들을 수없이 보았었다. 제천읍내를 빠져나올 때에는 캐터필러가 끊어지고 꼭대기의 둥그런 출입문이
번쩍 열린 채 길가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인민군 탱크가 있었다. 그 안에 인민군 병사 셋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부둥켜안은 채 죽어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의 빡빡 깎은 머리는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한데 머리 꼭대기에는 구더기가 오글오글거렸다. 특히 원주 시내로
들어설 때에는 진창이 된 大路上(대로상)에 인민군의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는데 그중 몇몇은 탱크가 깔고 지나가 창자가 나오고 머리가 부서진
광경도 보았었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보지 못할 끔찍한 장면들이었다. 제2부·패잔병에게 쫓기는 춘천
수비대 대대장의 추대 우리 부대는 경기도 포천에서 춘천, 홍천 등지를 경유해서
강원도 원주 북방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횡성으로 가서 주둔했다가 11월 하순경, 다시 춘천으로 이동했다. 당시 태백산맥을 따라 北上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은 인민군 총사령부의 命(명)에 의하여,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지에서 北上을 포기하고, 再집결하여 대대적인 유격전을
펴서 我軍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대대를 포함하는 육군 유격 사령부 예하 2개 대대가 주력이 되어 이미
춘천 지방의 치안 임무를 맡고 있던 전투경찰대와 합동으로 춘천 지방을 敵의 유격대로부터 방위하는 작전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가끔씩 중대별로 敵 빨치산 부대(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춘천 북방 산악지대로 출동하곤 했지만 번번이 敵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유격대란 기본 전술이 적이 공격해 오면 은밀하게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법도 했다.
여맹 위원장 즉결 처분 언젠가 行軍(행군) 도중 홍천 근방 어느 마을에서 宿營(숙영)한 적이
있었는데, 대대장 나성준 대위와 우리 연락병 두 명은 같이 한 民家에 묵게 되었다. 그 집은 크고 방도 많은 그런 집이었는데, 읍내에서 피난온
친척들을 합해 꽤 여러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중 미모의 여인이 하나 있었다. 그녀를 본 나성준 대위는 곧 군침을 삼키며
어느 장교를 시켜서 그녀로 하여금 「수청」을 들도록 주선하라 명했다. 장교가 알아보니 그녀는 유부녀로 어린애의 어머니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
대위는 그래도 막무가내로 어떻게 해보라고 강압했다. 그러는 중에 부락민 하나가 와서는 인민군 치하에서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附逆(부역)한 여자가 있다고 신고를 해왔다. 대대장은 부하를 시켜서 그 여자를 「대령」하도록 명했다. 그녀를 데리고 오자, 나
대위는 심문도 않고 그녀를 앞세우고 근처 한 野山으로 올라갔다. 나와 또 한 명의 부대원도 함께 갔다. 小路(소로)를 따라 야산으로 올라가다
정상 가까이 도달했을 때, 나 대위는 그녀더로 바른쪽에 있는 밭으로 들어가라 했다. 그녀가 밭으로 한 10여 발짝 들어갔을 때, 나 대위는
옆구리에서 권총을 빼들고는 그녀를 향해 순식간에 두 방을 쏴 갈겼다. 그녀의 등과 엉덩이에 탄환이 박히는 것이 뚜렷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나는 빨갱이니까 죽어 마땅하지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별로 그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녀인들 자기가 원해서 여맹 위원장직을 맡았었을까? 총 쥔 인민군이 감언이설로 회유했을 터인데 이를 거절할 자 누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때 나 대위가 그녀를 그렇게 쉽게 쏴서 죽여버린 것이, 그 미모의 여인을 품안에 품을 수 없었던 화풀이가
아니었던가 하고도 생각하곤 한다. 우리 대대 본부에는 17~18세 전후의 아가씨들이 두세 명 대대장 주위에서 생활을 하며
밥 시중도 들고 빨래도 하고 또 떨어진 군복도 꿰매는 등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대대장 나성준 대위는 출동이 없는 날이면
거의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잠자리에서는 잠이 들 때까지 이 아가씨들에게 안마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에게 同寢(동침)까지도 요구하며
치근대는 바람에 이들이 대대장 침실을 뛰쳐나와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나는 수차 목격했다. 이 아가씨들은 생포된 인민군
의용군 출신이라고도 했고, 원주에서 자원 입대한 학도 의용군이라고도 했는데, 그들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나는 그들을 대하기가 몹시
수줍어서 公的(공적) 용무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과의 대면을 기피하곤 했다. 출동 명령이 하달된 저녁에도 나성준
대위는 술에 만취돼 한참 추태를 부렸다. 그러니 대대의 출동이 재빨리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대대장의 숙소는 大路上에서 수십m 떨어진 지점의 한
民家였는데, 대원들이 모두 집합했다는 전갈이 수차 있은 후에야 연락병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합 장소로 나갔다. 대대 全 병력 4개 중대가 大路上에
정렬하여 대대장의 출현을 대기하고 있는데, 나타난 대대장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대대장은 대원들이 정렬해서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대열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강장섭과 내가 양 옆에 붙어서 부축하며, 『대대장님 출동입니다!』를 연발했지만, 그는
그야말로 人事不省(인사불성)이었다. 그는 양다리를 길게 벌리고 주저앉은 채, 옆구리에 찼던 권총을 꺼내들고는 양다리 사이 땅바닥에다 마구 『꽝!
꽝! 꽝!』 쏴댔다. 그러자 중대장들이 안되겠다 싶어서 대대장을 버려둔 채 출동을 했다. 나는 대대장의 노는 꼴이 하도
한심해서 그를 쏴 죽이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중대장들이 『대대장 잘 모셔라』는 분부를 했지만, 그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나의 출신 소대인 2중대 5소대로 가서 함께 출동했다. 5소대장도 대대장의 행태가 미웠는지 나의 同行(동행)을 막지는 않았다.
이같은 대대장의 추태가 한관흥 중령에게 보고됐는지 모르지만, 보고가 됐다 해도 그를 처벌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대대장은 다음날 다리에 부상을
입고 후송됐기 때문이다. 패잔병에게 복병을 당하다 우리 부대가 춘천 시가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날이 샌 다음이었다. 거리거리에는 군인과 경찰들이 갖가지 차량과 野砲(야포) 등을 세워 놓고 철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10여 대의 日製(일제) 화물자동차에는 탄약 상자, 곡식 가마니 등 각종 보급품들이 실려 있고 더러는 꽁무니에다 대포도 달고 있었다.
지프와 스리쿼터 등도 보이는데, 몇 대 안되는 지프에는 유격 사령부 사령관 유 모 대령과 참모장 한관흥 중령, 그리고 경찰 간부들이
타고 있었다. 스리쿼터에도 각종 보급품이 실려 있었다. 이들은 밤새 철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전투 경찰대 병력은 적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는데 우리 부대 외의 국군 부대가 또 있었다. 나는 한낱 졸병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소속이나 인원수 등은 알 길이
없었다. 또 내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 我軍 병력은 경찰 병력을 합쳐 적어도 천 명은 더 될 것
같았다. 유격 사령부 병력만 해도 2개 대대는 됐으니까. 이같이 군인과 경찰들이 모두 철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춘천
시민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보따리를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손수레나 우마차를 끌고 거리로 나와서
군경들 틈에 끼여들고 있었다. 어떤 부대에서는 피난민들을 자기네 대열 사이에 끼워 주기도 했지만, 어떤 부대는 피난민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가라고 야단들이었다. 아마 정오가 가까웠을 때쯤에야 비로소 대열이 대강 정렬이 되어 철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선두에는 인민군 冬服(동복)을 입고 인민군한테서 노획한 인민군의 무장을 한 보병 부대(우리와 같은 유격사령부 예하 부대 같았다)가 도보로 행군을
해 나갔다. 그 뒤에는 우리 유격사령부 제1대대 병력이 도보로 뒤를 따랐다. 다만 우리 부대의 선두에는 스리쿼터가 한 대 가는데, 거기에도 무슨
화물이 잔뜩 실려 있었고, 운전병 옆의 앞좌석에는 나 대위가 타고, 적재함에 실린 화물 위에 나와 강장섭이 타고 갔다.
우리가 탄 스리쿼터 앞에도 우리 부대의 짐을 실은 日製 트럭이 한 대 가는데 그 위에도 짐이 잔뜩 실려 있었고, 그 짐 위에 우리 부대 대원 두
명이 체코製 경기관총을 장치하고 사격 준비 태세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부대 後尾(후미)에는 각종 군수 물자를 싣고 砲(포)를 견인하는
트럭이 몇 대 따르고, 그 뒤로는 전투경찰대 병력이 도보로 행군을 했다. 총 소리 하나도 안 들리고, 敵이 추격하는 기미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이같이 大병력이 싸움도 안 해보고 도망을 가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를
위협하는 敵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패잔병의 집단인데…. 총 버리고 도망치는 我軍들
대열은 경춘가도를 따라 가평읍을 향하고 있었다. 춘천 서남방에 위치한 의암교(지금의 의암 댐)를 건너 한참을 가니, 우리 대열의
좌측에는 북한강이 흐르고 우측에는 10여 길 절벽이 치솟고 있었다. 아마 원당리쯤이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선두 도보
부대가 원당리를 지나 높은 절벽 아래 도로를 행군하고 있을 때 우리 앞을 가던 트럭이 도로 우측으로 내려오는 한 능선의 끝자락을 통과하면서
도로를 따라 약간 우회전을 시작했을 때, 난데없이 중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소총 소리도 머리 위를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앞에 가던 트럭이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도로 옆 언덕받이로 내려가 섰고, 그 적재함 위에다 체코식 경기관총을 장치하고 가던 대원 둘이 총성이
나는 방향으로 응사했다. 그들의 행동이 참으로 민첩했다. 대대장과 나도 순간적으로 용수철에 튕기듯이 차에서 뛰어내려 우측 능선 자락 끝에
붙었다. 앞을 바라다보니, 높이가 약 50m 정도의 야산 꼭대기 잡목이 무성한 숲 속에서 민간복 차림의 敵兵 2~3명이
총을 쏘며 『만세, 만세』를 외치며 달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대대장과 나도 곧 응사를 시작했다. 만세를 부르며 달려
내려오던 敵들이 돌아서 산 위로 올라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대장은 권총, 나는 따발총을 갖고 있었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병사들도
재빨리 우리의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散開하여 敵 진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그 총소리가 참으로 요란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천여명이나 되는 대병력이 각종 소화기를 총동원하여 한참 동안 쏴댔다. 그러나, 총격에도 불구하고, 적군에게 어떤 피해를 가했는지는 전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선두 대열에서 앞서 갔던 병사들이, 더러는 머리에 손을 대고, 더러는 가슴에 손을
대고, 더러는 한쪽 손으로 반대쪽 팔을 붙들고 피를 흘리면서 『아이고, 아이고야, 어머이야!』 등 신음을 하며 도망을 쳐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
총은 버린 채…. 저녁놀이 들기 바로 전쯤이었다. 멀리 저 앞을 바라보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길가에 쓰러진 我軍들이 더러 보였다.
敵兵은 보이지 않았지만 我軍의 총소리는 해가 질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아마 敵들은 산 너머 안전지대에서 응사도 안하고 우리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으리라. 도망 그래도, 나만이라도 나의 정위치로 돌아가서 우리
부대 장교에게 이런 사태를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의 원위치를 찾아 하류 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유격 사령부 사령관 유 모
대령과 참모장 한관흥 중령이 참모들에게 둘러싸인 채 상류 쪽으로 후퇴하고 있지를 않은가! 사태가 이쯤 되니 나도 후퇴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동했다. 후퇴를 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나도 상류 쪽을 향해 도망 길에 들어섰다. 장병들이 강을 건너고 있는 지점을
지나 상류쪽 강 건너 산 아래에는 경춘선 철로가 지나가는 「터널」이 보였다. 강을 건너고 나니, 산 위로 올라가는 小路가
있었다. 이곳이 아마 나루터였는지도 모른다. 도망가는 장병들은 小路를 따라 頂上(정상)까지 가서는 강 하류 쪽을 향해 진로를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강 건너에는 우리가 버리고 온 온갖 보급품이 실린 트럭들에서 물건들을 내리는 민간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이는데,
그들은 敵兵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美軍(미군) 비행기가 오기 전에 물건들을 내려서 은닉할 심산인지 그들은 몹시 서두는 것 같았다. 그 수는
1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我軍 장병들은 그림자도 안 보인다. 그 많은 군인들이 벌써 다 강 이쪽으로 퇴각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유격사령관 유 대령이나 참모장 한 중령은 부하들이 다 도망간 줄을 알고 부득이 후퇴를 한 것인가?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전투
위치로 돌아가 싸울 생각을 했었으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부대가 훈련이 잘된 사병들과
군인 정신이 투철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더라면, 이같이 도망도 안 치겠지만, 지금 강을 건너와서도 대열을 再(재)정돈해서 강 건너에서 우리의
보급품을 약탈하고 있는 敵들을 향해 총이라도 좀 쏴줄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는 자는 없고 그저 도망가기에만 바빴다.
2사단 32연대에 배속 나는 단신으로 청평으로 도망쳤다. 청평 국민학교 교정에는 수천의 장병들이
붐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장교, 하사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수천의 사병들이 넓은 운동장을 꽉 메우고 우왕좌왕하는데 도떼기시장 같았다.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나의 본대인 유격사령부 1대대 대원들이 집결한 장소를 찾아갔다. 그때 육군 제32연대가
창설되고 있었는데, 이 사단은 제17연대(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기성 연대), 제31연대(신설 연대), 제32연대(신설 연대) 등 3개 연대로
편성된다 했다. 유격 사령부 제1대대의 全 장병들은 그대로 2사단 32연대 제1대대로 再편성됐다. 우리 제 2사단은 곧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준동하는 敵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때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남으로 철수하는 UN군을 막
추격해서 내려오는 시기였으므로, 敵 패잔병들은 北上 퇴각을 하다 말고, 재편성 조직되어 대대적인 유격전을 전개해서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패잔병이란 말은 적합한 표현이 못 되었다. 그들은 무장 면에서는 열세했지만, 조직 면에서는 정규군이나 다를 바 없이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군대였다. 나는 새로 대대장 직을 대리하게 된 전 1중대장 이주기 중위의 연락병이 되어 항상 대대장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녔다. 전임 대대장 강장섭이 후송되는 나성준 대대장을 따라 서울로 갔으므로, 이 중위는 중대에서 데리고 있던 연락병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우리 부대는 곧 출동했는데, 그때에는 유격 사령부의 大부대와 전투 경찰대를 춘천에서 몰아내고 가평으로
후퇴하는 길을 매복 차단한 敵 유격대가 가평까지도 점령하고 청평을 위협하고 있는 때였다.
제3부·38선을 넘는 중공군 최전방 高地의 연말연시 1950년 12월 중순경,
우리 육군 제2사단은 경기도 가평군 북부 38선 상에 위치한 華岳山(화악산) 일대에 작전 배치되었다. 화악산은 경기도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가평읍의 북방 약 25㎞ 지점에 위치한 높이 1,468m나 되는 험산이다. 임무는 南下하는 중공군을 맞아 38선 越境(월경)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와 UN 본부에서는 南下하는 중공군이 과연 38선을 넘어서 계속 南進(남진)을 할 것인가?
38선을 넘어서 계속 진격해 온다면, UN군은 과연 이들의 남진을 저지하고 한국을 지킬 수가 있을 것인가를 점치고 있을 때였다.
우리 2사단은 중공군의 38선 以南(이남) 침공을 저지할 임무를 띠고, 화악산에서 동서로 뻗은 능선을 따라 작전 배치되었다. 우리
32연대가 중앙에 陣(진)을 치고, 한쪽에는 31연대, 다른 한쪽에는 17연대가 포진하게 되었다. 그럭저럭 그 험산
오지에도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1950년 12월25일이 됐다. 그날 아침 일찍, 연대본부에서 전화 통신이
왔다. 내용은 『북괴군 패잔병 잔당 약 일개 소대 병력이 北上중이니 경계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부중대 대원은 총동원되어 부락 주위
사방에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서 참호를 파고 보초 인원을 추가 배치하는 등 경계 태세를 강화했었다. 그러나 북괴군
패잔병은 나타나지 않은 채 12월31일이 왔다. 양력으로 섣달 그믐날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 최전방 군인들에게는 별다른 음식이나 선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아침 식사에 쇠고기 국이 나오긴 했지만, 섣달 그믐날이 아니더라도 쇠고기 국은 가끔씩 먹는 음식이었다.
그것도 최전방 高地(고지)에는 국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본부중대 대원들은 밥과 고깃국을 먹지만 高地에는 주먹밥이 올라갈 뿐이었다.
대대장, 중대장의 식사만 겨우 국을 곁들여서 차려 올려보내곤 했다. 국까지 高地로 올려보내기에는 용기도 부족했지만 용역 인원도 모자랐다. 또
올라간들 가는 중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니 山中(산중)에서 국을 데워 먹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엄마야…』
그때까지 수일간, 중공군 大병력이 38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高地(OP)에서 관측되었었다. 이때만 해도,
UN군측에서는 중공군이 과연 38선을 넘어서 남침할 것인가?, 아니면 38선까지만 와서 전진을 멈출 것인가를 명확히 점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기 전에는 발포를 않는다는 것이 UN군의 방침이었다. 수일 전 노무자들이 도착한 때부터
매일같이 실탄, 수류탄 등 보급물자를 高地로 올려가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敵軍이 접근하자 高地(OP)에서나 본부중대(CP)에서나
손에 땀을 쥐는 긴박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대대 CP 통신실에 배치되어 野戰(야전) 전화기를 이용하여 대대장이
있는 전방 高地(OP)에서 오는 상황보고를 연대본부(CP) 상황실로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저녁 8시를 기해
드디어 敵의 공격은 시작됐고, 我軍도 陣地(진지)를 지키기 위해 방어전에 돌입했다. 포 소리, 기관총 소리, 소총 소리 등이 멀리 高地에서
들려왔고, 자정이 가까워오자 부상병들이 高地에서 후송돼 오기 시작했다. 우리 대대 의무실은 20평도 채 못되는 작은 농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의료기구란 주사기 몇 개와 주사기 소독용 용기 몇 개가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위생병 한 명과 두세 명 보조
사병들의 근무 장소일 뿐이었다. 1천여명의 건강 관리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의무실이었다. 군의관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구머니…』 『엄마야…』 등 신음하며 들것에 실려온 부상병들은 치료도 변변히 못 받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후송 차량은
다음날 아침 우리 위치가 중공군에게 기습당할 때까지 한번도 오지 않았다. 중공군의 마을 進入
OP에서 통신병이 응답했을 때는 다음 날인 1951년 1월1일 오전 3시경이었다. 그때 戰況(전황) 보고에 의하면, 我軍은
陣地를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高地 남쪽으로 퇴각했지만 대대장 지휘하에 전열을 再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 보고를
연대본부로 전달한 후부터는 무선 전화도 연결이 안 됐다. 연대본부와는 野戰 전화로 통신을 했다. 한참 동안 高地와 통신
연결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더 이상 시도를 포기했다. 그래도 설마 我軍이 高地를 완전 포기하고 퇴각하리라는 불길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나
통신병 金중사뿐만 아니라 본부중대 요원 중 장교도 사병도 그런 염려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총소리, 포소리도
별로 안 들린다. 자려고 해도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 그저 따뜻한 온돌방에 뒹굴면서 OP에서 우리를 호출하는 소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어느새 날이 밝았다. 金중사나 나는 그래도 我軍의 반격이 적군을 무찌르고 성공리에 高地를 탈환했다는 연락이 오리라 믿고 대기하고 있었다.
동창이 훤히 밝아오자 나는 맑은 공기를 좀 마실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대문 밖으로 나오니 취사장 대원들이 아침밥을 짓느라
분주히 오가고 취사도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데 밥짓는 냄새와 국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를 자극했다. 그런데,
어느새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황급히 마을 앞 한길을 지나 우리 위치보다 약 5리 남쪽에 위치한 연대 CP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인들 중 한 육군 소위에게 『웬 군인들인데, 어디를 가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오, 연락 가는
길이야!』하고는 그냥 지나쳤다. 그들의 걸음이 빠르고 어딘가 표정이 밝지 못해서 의아한 생각이 났지만 나는 그들이 후퇴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내가 취사장 앞마당에서 산책하고 있는 대대 부관 김응기 중위에게 이런 상황을 보고하려고 그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부락 서편 언덕 위 초소에 배치됐던 보초병 한 명이 앞에 총을 한 자세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는 김응기 중위에게
보고하기를 『이상한 복장을 한 군인들이 저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후퇴하는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서 우리와는 불과 20~30m 거리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중공군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하얀 망토 같은 것을
입고 앞에 총 자세로 진격해 왔으나 총은 쏘지 않았다. 달아난 지휘관 그때
김응기 중위는 미군용 국방색 모직 바지와 와이셔츠를 잘 다려 입고 바지는 멜빵으로 붙들어 메고 허리에는 소련製 권총을 차고 아주 멋을 부릴 대로
부린 자세였다. 그 이상한 사람들을 보자, 金중위는 보고를 막 끝낸 보초병이 들고 있던 M1 소총을 나꿔채더니, 空砲(공포)를 한 방 쐈다.
그러자 敵들이 전진을 멈추며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 화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金중위는 보초병에게 총을 던져주고는 자기의
숙소 방향으로 달려갔다. 대원들에게는 아무런 지시도 않고…. 나는 그가 완전 무장을 하고 다시 나타나서 전투를 지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를 않았다. 순간 인사계 선임하사관 박승철(가명) 상사가 소리를 쳤다. 『인사계 대원은 모두 응사하라!
도망가는 놈은 내가 살아서 돌아오는 한 즉결처분이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즉시로 어깨에 메고 있던 M2 카빈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러고 나서 인사계가 들어 있던 農家 옆으로 敵을 맞으러 갔다. 통신실은 南向(남향)집이고, 인사계가 들어 있던
집은 東向(동향)인데, 통신실보다는 20여m 서남방 한길 가에 서 있었다. 그러니 敵은 인사계 집 뒤 방향에서 진격해오고 있었다. 敵을 맞으러
가면서, 나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군인은 이런 때에 싸우다 죽어야 한다. 이놈들을 여기서
막지 못하면, 연대 CP가 유린당할 것이 아닌가!」 인사계가 들어있던 집 우측(남쪽)에는 잡목으로 엮은 울타리가 7~8m쯤
도로 가까지 쳐져 있었다. 나는 그 집과 울타리 사이에 난 틈새로 敵들의 동향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4~5명의 敵兵들이
총도 안 쏘고 길 한 가운데에 모여 서성대고 있었다. 도저히 전투 중에 있는 군인들 같지가 않았다. 나는 곧 울타리를 지나
도로상으로 나가 섰다. 그러고는 『야, 이 새끼들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내 M2 카빈총으로 한 5~6발을 갈겼다. 나는 그야말로
士氣(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아니 신바람이 났다. 敵들이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뛰었다. 조준도 않고 어림짐작으로 쏴댔기 때문에 누가 맞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고는 냉큼 인사계 집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敵兵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총알이 울타리를 지나면서 잡목을 건드리니 총에
맞아 부서지는 잡목 조각들이 땅에 떨어졌다. 인사계 집 왼쪽(북쪽)에는 4~5인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참호가 하나
있었는데, 이는 12월25일 인민군 패잔병 약 일개 소대 병력이 北上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이에 대비해서 파놓은 것이었다. 처음 敵을 발견했을
때에는 3~4명의 戰友(전우)들이 이 호에 들어가 총을 쏘고 있었는데, 이때 보니 아무도 없었다. 불과 몇 초가 지났을까. 그런데 벌써 모두
도망간 모양이다. 세 번째 살인 그래도 나는 죽기로 각오한 터라 다시 울타리
쪽으로 와서 敵情(적정)을 살폈다. 敵兵 하나가 앞에 총 자세로 살금살금 길을 따라 내가 숨어 있는 울타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지를 않은가!
『야! 이게 웬 떡이냐!』 나는 신바람이 나서 곧 울타리의 남쪽 끝(도로 가)까지 허리를 굽히고 나가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가 울타리 끝까지 왔을 때, 나는 그의 배에다 총구를 대다시피 하고, 『꽝!』 한 방을
갈겼다. 그는 그 자리에 엎어졌다. 총을 가슴에 안은 채 그대로 엎어졌다. 참으로 통쾌했다. 가만히 보니 울타리 끝에
쓰러져 있는 敵兵이 아직 생명이 붙어 있어서 가슴 아래 깔려 있는 총을 얼굴 쪽으로 끄집어내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목 밑 쇄골(鎖骨=빗장뼈) 위 움푹 파인 곳에 내 총구를 갖다대고 장난 삼아 두어 번 쿡쿡 찔렀다. 아무 표정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에게 두 방을 더 쏴줬다. 아마, 심장의 피가 폐부로 들어가는지 『끄르륵, 끄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범한 세 번째의
살인이다. 나는 다시 집 앞으로 피신을 하고 울타리와 집 사이의 틈으로 敵情을 살폈다. 마치 敵兵이 수없이 쳐들어와도 나
혼자서 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도취돼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敵兵 하나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기 戰友를 향해 달려왔다. 순간 나도 그를 맞이하기 위해 울타리 끝으로 달려갔다. 그가 가까이 왔을 때 약 1m 앞에서
나는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네 번째 살인 그는 놀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달려오던
탄력 때문에 그랬는지 한 1m 가량 껑충 떠서 내 뒤에 있던 벼 낟가리에 머리를 박고 거꾸러졌다. 그때, 나는 我軍 병사 하나가 바로 그 벼
낟가리 옆에 서 있다가 그 敵兵의 등에다 M1 소총을 한 방 쏘는 것을 봤다. 그 敵兵은 쓰러진 戰友를 보고, 『여보게 웬일인가? 정신
차리게!』 하며 달려오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됐다. 나의 네 번째 살인이다. 대대 본부가 敵에게 점령당했다.
나는 단신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한 1분 이상 달려서 개울가에 도달했다. 깨진 토관으로 된 징검다리가 있는 지점에서 한 3백m
이상 북쪽이다. 무슨 밭인지 약간 경사진 밭 위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렸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완전히 敵에게 노출된 상태였지만, 敵의
총성은 5~6발밖에 안 들렸고 나는 안전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나는 敵의 기습을 받고 도망칠 때면, 『나는
절대로 총에 안 맞는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만만하게 도망치곤 했다. 이번에도 다행히 敵의 총격이 심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나는 무사히 개울가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꿀맛 같은 주먹밥 12월31일 초저녁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을 맞은 我軍은 각종 소화기와 수류탄을 총동원하여 陣地 방어 전투를 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계속 밀어닥치는 적군의 파상 공격에
압도되어 부득이 高地를 포기해야 했다고 했다. 일단 高地 아래로 퇴각하여 대열을 再정비하고, 高地 탈환 작전을 펴려고
했으나, 우리 대대 陣地의 좌측(서쪽) 능선과 우리 陣地 사이의 계곡으로 수없이 많은 敵의 大병력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南進하고 있는 것을
보고 탈환 계획을 포기했다고 했다. 대대장 이하 주력부대를 맞은 정보관 이하 4인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것같이
기뻤다. 어제 저녁식사로 노무자들이 가마때기에 넣어서 등에 지고 올라갔던 주먹밥 천여 개 중에서 겨우 반 정도를 그때까지 노무자들이 등에 지고
퇴각하고 있었다. 눈 덮인 산길을 따라 가마니에 한 3분의 1 정도씩 채운 주먹밥을 등에 지고 高地로 올라가노라면 눈길에
넘어져 계곡 저 밑에까지 구르기도 하고 또 敵에게 쫓겨 도망오는 중에 더러는 노무자까지 행방 불명됐다고 했다. 敵의 공격이
계속되는 바람에 밥을 먹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밥이 아직껏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두 사람 앞에 주먹밥(쇠고기 장조림과
된장이 가운데 들고 날 김으로 싼 것) 한 개씩이 배급되어 아쉬운 대로 요기를 했다. 종일 눈을 뭉쳐 먹거나 솔잎을 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지라 얼음같이 찬 밥이었지만 꿀맛 같았다. 영하 30도나 되는 혹한 속에서도 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 밥이 당초부터 뜨거운 밥이었지만
등에 지고 다니는 노무자의 체온 덕이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대대장 최동훈 소령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힘겹게 일어섰다.
『빨리 가야지』 하면서. 주위의 참모들과 다른 장교들도 모두 그를 따라 일어섰다. 全 장병이 모두 일어나 그저 대대장의 뒤를 따랐다. 대대장도
너무 지쳐서 그랬는지 가끔 주위의 참모들과 진로를 상의하는 외에는 말이 없었다. 참모나 다른 장교들도 말없이 대대장의 뒤를 따를 뿐이고 부하
사병들에게 무슨 지시나 명령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대대장의 거동만 살피다가, 그가 가자면 가고, 쉬자면
쉬고 모두가 기계같이 움직였다. 나는 대대장 측근에서 행동하고 있는 정보관 李소위의 옆에서, 뒤에서 내내 행동을 같이했다.
총 한 방에 무너진 대대 한참을 가다 보니 우리 앞에는 높은 산이 가로 놓여 있었다. 우리의 위치에서
그 정상까지 능선이 한 5백m 가량 곧바로 뻗어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대대장이 또 『갑시다』하고 일어섰다. 全 장병이 그를 따라
일어서서 언덕받이로 다가갈 때에, 저 앞산 중턱쯤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 나타나더니, 『동무들! 죽지 않을래문, 총대 까끄루 메구 일루
올라오시오!』 라고 소리쳤다. 아마, 수일 전에 北上하고 있다던 인민군 패잔병 중의 일원인 것 같았다. 2소대 3분대장이
사수에게 사격준비를 하라 했다. 사수가 어깨에서 총을 내려놓고 사격 태세를 갖추자 대대장이, 『그만해!』라 명했다. 그러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敵兵이 공포를 쏜 것이다. 그 총소리는 이 산 저 산을 다 다니며 한참 동안 메아리를 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가 먼저 시작을 했는지, 그 많은 장병들이, 적어도 1천명은 될 大병력이 『와르르---!』 하고 마치 천둥 소리와도 같이 온 산을
흔들면서 길도 없는 우측(서쪽) 산비탈로 뛰어내려 도망을 치지 않는가? 순식간에 全 장병이 산 아래로 사라지고,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산중에는 뽀오얀 눈보라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데, 그들이 내려 달리며 내는 우레와 같은 굉음은 계속 들려왔다.
산 아래에는 서남 방향으로 난 小路 옆 솔밭 사이로 중공군의 대열이 그칠 줄을 모르고 종일 南으로 南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리로
내려가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길은 가평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이제 밤이 돼 공습의 염려가 없으니 중공군들이 솔밭에서 나와 그 小路 위를
행군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니디 띵 호!』
1월4일, 한낮이 막 지났을 무렵에, 우리 대열은 한 능선 자락을 우측에 끼고 구부러진 길을 막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도 별로 없는 야산 중턱에 중공군 다섯 명이 서성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뭔가 분실물을 찾는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대 CP가 기습받았을 때 중공군을 처음 보고는 大병력이 어둠 속에서 행군해 가는 것을 공포 속에서 관찰한 일은 있었어도,
대낮 맑은 하늘 아래 선명하게 나타난 敵兵의 모습은 처음 대하는 것이다. 흰색 방한모자에 역시 흰색 망토를 입고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어딘가 유령이 나타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소리치면 말이 들릴 만한 거리였다. 대대장이 『대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태연스럽게
간다!』고 했다. 『예!』 『2중대 선임하사관 앞으로!』 그는 대대장 뒤 멀지
않은 곳에서 행군하고 있었다. 『중국말 하지?』 『예!』 대대장이 걸음을
멈췄다. 全 대원이 제자리에 섰다. 『뭐하는 놈들인가 한 번 물어봐!』 선임하사관 朴(박)상사가,
중공군을 향해 소리쳤다. 깜짝 놀란 敵兵들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 朴상사와 敵兵 중 한 명이 몇 마디를 큰 소리로
주고받았다. 우리가 인민유격대라 하니 대표자 한 사람씩 우선 만나서 얘기를 해 보잔다. 朴상사가 대대장에게 통역을 하니, 『네가 나가 봐!』
했고 朴상사는 곧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누가 나가란 말도 안하는데, 내 멋대로 朴상사를 따라 나섰다.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朴상사는 카빈 소총을 총끈으로 어깨에 멨는데, 나는 M2 카빈총을 든 오른손을 뒤로 한 채 둘째손가락을 방아쇠 앞에 붙이고,
여차하면 총을 앞으로 하고 쏠 각오를 하고 갔다. 대표자 한 명씩만 만나자고 했었지만 敵兵은 우리측에서 두 사람이 나온
것에 대해 아무 말 안했다. 敵兵 대표자와 마주 서고 보니, 그의 얼굴은 한 달이나 세수를 안한 것같이 더러웠고, 양손을 서로 반대쪽 소매에
쑤셔 박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총은 한쪽 어깨에 메고 방한모도 썼지만 발은 양말도 안 신은 채 덧버선보다도 얇은
포목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발등에도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다. 군인이 戰場에서 그런 신발을 신고 있다니,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朴상사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미니 그는 팔짱을 꼈던 상태에서 한쪽 손만 옷소매에서 빼내 간신히 악수에 응한다. 손등과
팔목에는 새까만 때가 끼어 있다. 그러고는 한두 마디 뭐라고 말을 하더니 악수했던 손으로 朴상사의 군복 윗도리의 앞자락을 만지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그의 말을 알아차리고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총을 앞으로 내어 두 손으로 쥐고는 길옆으로 돌아서서 눈
위에다가 「人民遊擊隊(인민유격대)」라고 썼다. 그랬더니 그는 朴상사를 쳐다보며 싱겁게 웃었다. 그러고는 자기 同志(동지)들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朴상사도 뒤의 우리 대열에 손짓을 해서 우리 대원들과 敵兵들이 막 한데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고는 서로 서툰
중국말을 한두 마디씩 뱉으며, 『니디 띵 호!』 또는 『니 호마?』 등을 연발하며 엄지손가락을 주먹 위로 치켜세우면서 그들의 등을 두들기기도
하며 환영의 손짓 몸짓을 재주껏 연출 해냈다. 敵兵의 진술에 의하면 그들이 배회하던 야산 바로 뒤에는 큰 부락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중공군 모 사단의 大부대가 수일 전부터 주둔하고 있고, 그 서남방이 청평이라고 믿어지는 지역까지 중공군의 대병력이 곳곳에
散開하여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대대장은 다시 行軍을 계속하였고, 대원들은 敵兵들과 알아듣지도 못할 중국말들을 제멋대로 지껄이며 흥이 나서 그의
뒤를 따랐다. 생포 얼마 동안을 가다가, 도로 양쪽에 숲이 우거지고 좀 으슥한
지점을 지나갈 때에, 대대장이 全 대원이 들을 수 있게 명령을 했다. 『이제, 얘네들 무장을 해제할 것이다. 모두 준비를 하고 別命(별명)이
있을 때까지 계속 행군한다!』라고. 행군을 계속하면서 敵兵 한 명당 5~6명의 우리 대원들이 둘러쌌다. 잠시 후 대대장이,
『준비 다 됐나?』 하고 물었다. 대원들이 상기된 음성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대대장이 『그럼 시작해!』 하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대원들은 敵兵들을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세우고,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가 중공製 모직
방한모에다, 등은 모직, 바닥은 가죽으로 된 장갑을 끼고 솜을 넣고 누빈 국방색 冬服을 입고, 그 위에다 광목으로 만든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망토는 겉은 흰색이고 안은 푸른색이었다. 공습시에 풀밭에서는 푸른 쪽, 눈 위에서는 흰 쪽을 밖으로 입은 채, 엎드리면
훌륭한 위장이 되게끔 고안된 것이었다. 무장으로는 日製 소총을 한 정식 소지했고 실탄은 탄실에 들어 있는 다섯 발뿐이고,
총검과 중공製 수류탄 두 개씩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망토의 양쪽에는 군복 입은 팔이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서, 양팔은 밖으로
나와있는데 총은 어깨에 메고 있었다. 우선 총을 뺏고 모자와 장갑을 빼앗아 우리 것과 바꾸고 나서, 망토를 벗기니 광목으로
만든 전대를 한쪽 어깨에다 둘러 메고 있었다. 총과 수류탄 및 전대를 빼앗고 나서 망토도 우리 대원들이 입었다. 무장해제를
시작하자 그들은, 『아이야, 마야…!』 하면서 어린애들같이 칭얼거렸다. 하기야 그들의 나이가 16~20세였으니, 아직 어린애들이었다. 모자와
장갑을 벗길 때는 춥다는 시늉도 했다. 호주머니에서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나왔다. 전대 속에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주 딱딱한 직경 한 뼘 정도 크기의 빈대떡같이 둥그런 모양의 식품도 있었다. 양쪽에는 깨알이 몇개씩 박혀 있는데, 我軍으로 치자면
야전용 건빵과 같은 용도의 식품 같았다. 한 귀퉁이를 깨물어 씹어보니 깡마른 옥수수 씹는 것보다 그 강도나 맛이 별로 나은
것 같지 않았다. 색깔이 약간 누르스름한 점으로 봐서 아마 쌀겨와 밀가루를 혼합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종일 깡마른 옥수수와 눈만
씹으며 굶주리고 있던 우리 대원들이 서로 한 조각씩 뜯어서 입에 넣고 씹어먹었다. 敵兵 5명 모두 두 손을 등 뒤로
포박하고, 행군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심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래가 장개석軍이었는데,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 휘하의 중국 공산군에게
패망하고 대만으로 도망가자, 중공군에게 자동 편입됐으며, 공산군은 장개석軍 출신 장병들을 이 한국전으로 몰아 넣어서 변변한 무기도 안주고 몽땅
소모 병력으로 투입하고 있다고 했다. 여섯 번째 살인… 포로 처형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린 16세의 敵兵은 장개석軍에서는 중대장 연락병을 했는데 지금은 일반 소총소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들은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남향
산비탈을 찾아 나와 약초 등 산채를 찾아다니다가, 우리에게 발견되어 붙들리게 됐다고 했다. 소속 부대가 ○○사단이라 했지만 나는 지금 그
부대名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대장은 敵 후방에서 생포한 敵兵들을 호송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만의 하나 그중 한
명이라도 도망을 친다면 상당한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들(5명) 중 4명을 처단하기로 했다. 다만 제일 나이가 어린 16세의 敵兵은
연대장 앞까지 데리고 가서 戰果(전과)를 보고할 때에 증거물로 이용한다고 했다. 대대장 최동훈 소령은 정보관 이성열
소위에게 포로 네 명을 당장 처형하라 했고, 李소위는 정보과 선임하사관 주성찬 상사(실제 계급은 나와 같은 이등병임)에게 그 집행을 命했다.
주 상사는 나와 허종호를 불러서 그 일을 함께 처리하자고 했다. 우리 셋은 4명의 포로들을 일단 대열의 맨 꽁무니로 데리고
와서 한참 동안 행군을 계속하면서 방법을 연구했다. 길가의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로 했다. 총살을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지만, 敵후방에서 총성을 냈다가는 敵의 추격을 받을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에는 총검이 보급된 바 없었으므로, 그들한테서 노획한
日製 소총과 총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주 상사가 대열 중에, 敵兵한테서 뺏은 일제 소총과 총검을 휴대하고 가는 대원 하나를
맨 뒤로 데리고 와서는 자기의 카빈총을 그에게 주고 그의 일제 소총과 총검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4명의 포로 뒤를 따라가는 나와 허종호에게
말했다. 『야! 저기 저 야산 보이디? 거기가 나무두 많구 적당하디 않카서?』 그는 상당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예! 거기가 제일 좋을 거 같네요…』 내가 답했다. 대열은 곧 그 지점을 통과하게
됐고, 허종호와 나는 포로 네 명을 앞세우고 도로 왼쪽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주 상사가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총에다
총검을 장착했다. 도로에서 한 10여m 들어가니 분묘가 두 개 있다. 그 앞엔 자그마한 공터가 있다. 맨 앞에 포로 둘이 가고 그 뒤를 허종호가
카빈총을 앞에 총 자세로 따라가고, 그 뒤에 또 두 명의 포로가 가고 그 뒤를 내가 M2 카빈총을 들고 가고 있었다. 물론 포로들의 두 손은 등
뒤로 포박되어 있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주 상사가, 『여게가 좋구만, 여게서 하자우!』하고는, 허종호와 나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내 앞으로 나오더니, 내 앞에 가던 포로 두 명을 단숨에 해치웠다. 호박을 찌르듯
오른쪽에서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들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그저 『흑!』 『헉!』하고 숨소리만 조금 내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 상사는 『야! 너네들 좀 하라우!』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총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 총을
받아들고 내 총을 주 상사에게 줬다. 마침 내 마음 속에는 『나도 한 번 해봤으면…』 하는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허종호 앞을 가던
두 명의 포로가 뒤에 쓰러진 同志들을 내려다보며 공포에 질려서, 맥없이 『마아야…』 했다. 나는 그중 한 놈의 앞으로 다가섰다. 총검을 그의
가슴 앞에 대다시피 하고…. 그는 겁에 질려 『마아야…!』 하며 몇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등을 돌리며 허리를 굽혔다. 나는
그의 등을 냅다 찔렀다. 총검이 그의 등에 꽂히지 않고 휘청하고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아마 총 끝이 척추 뼈에 명중했던가 보다.
『헉!』하고 숨을 내뱉는 그의 오른쪽 등을 재차 찔렀다. 총검은 그의 상체를 뚫고 가슴 앞까지 나와서 그 끝이 보였다.
솜이 든 두툼한 冬服을 입었지만 총검은 마치 호박을 찌르듯 아무 저항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끔찍하기도 했지만 야릇한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총검을 허종호에게 주면서, 『한 번 해봐!』 했다. 그러나 그는, 『니가 다 해라 마!』 하면서 총을 받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이번에는 하나 남은 포로 앞에 마주 서서 총검의 끝을 그의 앞가슴에다 대다시피 하고, 『허잇!』하고 그를
어르면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마아야…』 하면서 등을 돌리고 허리를 구부리며 제풀에 옆으로 쓰러졌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무릎에 힘이
빠지는가 보다. 나는 그의 상체가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오른쪽 가슴에 총검을 꽂았다. 네 인간의 생명이 순식간에 단절됐다. 나로서는 여섯
번째로 범하는 살인이었다. 『주여, 이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신봉하는 가정에서 평소에 착하고, 정직하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천성이 착하고
얌전했다. 가정에서나 이웃에서도 착하고 인정 많은 어린이로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이때 내가 이 野獸(야수)와
같은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죽어가는 敵軍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스릴에 찬 쾌감을 음미하며 장난기 어리게 살인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흔히 말하는 군인 정신 내지는 충성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나에게는,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야만성이 先天的(선천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자랑삼아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어떻게 그같이 표독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도 야만적일 수가 있었을까?하고 自問(자문)하며 골똘히
생각해 보곤 했다. 물론, 戰場에서 강요되는 순간적 판단이 생사를 가름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필요에 따르는, 또는 내가 살기 위한,
살상 행위는 그 정당성 또는 타당성이 인정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살상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스릴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이 잠재하고 있다는 야만성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일제시대에 중등 교육까지 받은지라, 일본 선생들이 말하는 소위
「야마도 다마시」, 즉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적함에 「다이빙」할 수 있는 표독성 내지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녀야만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할 수
있다는, 세뇌 교육을 받은 탓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더 빈번하게 그때 그 일을 성찰하고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다시
생각하며 그 사건을 再조명하며 내 행위의 공과를 再정의하곤 한다. 『주여, 이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때 그
행위, 그때 그 감정은 계획된 고의가 아니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본능의 발로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언젠가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 앞에서 나의 월남 과정과 그후로 당한 여러 가지 고생담을 말했더니, 그분이 평하기를, 『李형이 그같이 용맹스럽게 전투를
하며, 잔인하게 敵兵을 살상한 것은 월남 직후에 전쟁을 만나 피란 가는 길에, 남조선 관헌들한테 심한 고문을 당한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의 말은 내가 그 혹독한 고문을 받을 때에, 내가 북한의 공작원이 아니고 철저한 반공투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럴 길이 없어서 얼마나 애타게 그 방법을 갈구했을까? 그런 연고로, 『李형의 잠재의식 속 깊이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또 인정받고 싶은 그런 갈구가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도래했으니 그 기회를 마음껏 이용하여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나는 이같이 빨갱이를 증오하는 철두철미한 반공투사이다」라고 밝히고 과시하게 됐던 것이리라』고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 같았다.
우리를 중공군 소굴로 유인하는 안내인 대열이 북한강의 얼음판을 걸어서
渡江(도강)을 완료했을 때, 1951년 1월5일이 밝았다. 우리는 논과 밭 사이, 또는 산과 밭 사이를 꼬불꼬불 지나는 小路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두 개의 능선자락 사이를 지나게 됐는데, 왼쪽 산 아래 밭두렁에다가 지게를 하나씩 작대기로 받쳐 세워놓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쉬고
있는 농부 차림의 노인 두 사람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게에는 식기 등 부엌 살림이 실려 있고, 피란민같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의 출현을
전혀 모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앞에 가던 장교 한 사람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이리
좀 오시오, 길 좀 물읍세다』 그들은 곧 우리한테로 다가와서는, 『지원군 동무들에게 점심 갖다 주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고 묻지도 않는데 대답부터 했다. 아마 우리를 인민군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국방군이오!』라고 하자, 그들은
놀라면서도 애써 태연한 체했다. 『어디를 가시는데요?』 『양수리로 가는 길을 좀 안내해 줘야겠소!』
『저기로 돌아서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수고스럽지만 같이 좀 가줘야겠소!』
『네, 그러지요. 지게를 갖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갑시다. 이리 와서 앞서세요. 지게는 있다가 찾아가고…. 두 분 다
같이 갑세다!』 지원군 동무들에게 밥 시중을 들었다 하니, 혹 공산분자이면 한 사람만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敵軍에게 우리의 출현을 신고라도 하면 큰일 날 일이 아닌가! 그들은 순순히 우리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다. 점심을 갖다 준
중공군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왼편 산을 넘으면 그 아래에 수없이 많은 중공군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지역을 피해서
迂廻(우회)했다. 우리가 쉬었던 山中의 기와집에는 서울에서 피난 왔다는 서울 모 중학교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우리
국군과 같이 간다고 따라 나섰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이 학생이 우리 대원에게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물었고, 그 대원은 양수리 방향으로 가는
중이라 답했다. 그랬더니 이 학생이 정색을 하면서, 『이 길은 청평으로 가는 길인데, 청평에는 중공군이 득실거린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은 곧 대대장에게 보고됐고, 대대장은 대열을 멈추고, 학생에게 그 말의 신빙성을 타진했다. 그의 말은 과연 신빙성이
있었다. 선두에서 대열을 안내하던 두 노인을 심문했다. 『이 길이 양수리로 가는 길이 틀림없소?』하고 묻자,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노인들이 말을 더듬으면서 당황한다. 그들이 우리를 일부러 敵의 소굴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남로당원 또는 親北(친북) 부역자로서, 대한민국 국군을 敵地(적지)로 몰아 넣으려고 시도한 악질 반역자임이 밝혀진 이상, 그들의 안내를
따를 수가 없었다. 마침 그 학생도 양수리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그 학생의 안내를 받기로 하고 두
노인은 당장 처형키로 했다. 여덟 번째 살인 대대장은 이번에도 정보과장
李소위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고, 李소위는 허종호와 나에게 그 집행을 명령했다. 나는 어제 포로를 刺殺(척살)할 때 사용한 日製 총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그것을 사용할 생각을 하니 그것이 온데 간데 없다. 대원들 중에 중공군한테 노획한 총검을 갖고 있는 자가
있는가 살펴보니 아무도 총검을 휴대한 자가 없다. 우리는 총검 대신에, 부엌칼이나 도끼라도 사용할 작정으로 길가에 있는
집마다 모조리 뒤지고 다녀봤지만 도끼도 부엌칼도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피란 가고 집이 모두 비어 있는데 피란가면서 모두 갖고 간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떤 가옥으로 들어가서 문을 꽉꽉 닫고 총을 사용키로 했다. 대열에서 수백m를 떨어져 가다가,
길이 우측으로 구부러지는 지점에 집이 두 채 있었다. 우리는 그중 한 집으로 두 노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자그마한 뜰이
있고 집은 「ㄱ」자로 돼 있었다. 왼쪽이 사랑방 같았다. 우리는 그 사랑방으로 두 노인을 데리고 들어가서, 하나씩밖에 없는
창문과 출입문을 꽉꽉 닫았다. 집은 빈 집이었지만 방에는 남루한 이불이 한 채 있었다. 마침 창호지로 된 출입문 위에 못이 하나 박혀있었기에,
그 이불을 그 못에다 걸어서 防音(방음)장치를 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이미 체념을 하고 쪼그리고 앉은 두 노인에게 담배를 한 대씩 주고
불을 붙여줬다. 그들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은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 내가 허종호의 팔을
툭 치면서 눈짓을 했다. 허종호는 출입문 쪽에 창문을 등지고 섰고, 나는 그의 왼편에 역시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쾅!』 하고 소리가 나며 화약 냄새가 나는데, 내 발 앞에서 한 노인이 쓰러졌다. 그러나 허종호의 총은 『딱』
소리만 내고 불발이었다. 내가 허종호 앞의 노인도 쐈다. 그러고는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방을 나와서 토방 돌을 내려섰다. 창문 안에서 『꾸르르,
꾸르럭』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심장의 피가 폐부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1월1일 새벽에 대대 CP 앞에서, 내 발 아래
쓰러진 敵兵을 확인 사살했을 때 들린 그 소리와 꼭 같았다. 이로써 나는 여덟 번째의 살인을 한 셈이다. 주님 용서하소서!(中略)
동상에 시달리는 가엾은 병사 나는 그날, 아침부터 동상 때문에 발이 아파서 억지로, 억지로
참으며 행군을 했었다. 이제 저녁을 실컷 먹고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드러누우니 발이 점점 더 아파 와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군화를 벗고 발의 상태를 점검하고 응급조치라도 좀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주위의 아무도 무슨 조치를 취해보라고 권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날도 군화를 신은 채로 온돌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1월6일 아침 모두가 늦잠을 자고
나서, 부락민들이 지어준 조반을 먹을 때에도 발이 몹시 아팠다. 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픈 발로 간신히 일어서서 총 끈을
앞가슴으로 하고 총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비스듬하게 등에다 멨다. 그러고는 방문을 나와, 그 폭이 겨우 두 자 정도밖에 안되는 마루
위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서기 위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마루 아래로 내려디딘 발이 너무 아프고 힘이 없어서 나는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정보과 선임하사관 주성찬 상사가 내 손을 붙들고 나를 부축했으나 나는 일어서지를 못했다. 주 상사가 어디서 났는지
붕대를 한 타래 갖고 와서, 두 쪽 난 내 총의 개머리판을 서로 합쳐서 둘둘 감아 싸맸다. 그러고는 총을 다시 내 등뒤에 메어주고는, 『야!
정말 못 가간?』 하고 물었다. 나는 『아! 진짜루 못 가가시요! 나 여게 있을 거니까 먼저들 가라요!』했다. 그러자 그는
날더러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정보관 이 소위와 허종호가 가다 말고 돌아와서, 나를 부축하면서 가자고 했다. 나도 기를
쓰고 그들에게 매달려서 걸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주 상사가 암소 한 마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대원들과 합세하여 나를 소
등에다 올려놓았다. 가까스로 소 등에 올라타기는 했으나, 발이 너무 아팠다. 피가 아래로 내려 밀리니 썩어 가는 발을
자극하여 엄청난 통증이 엄습해왔다. 『아이고…오! 못 가요…! 아이고…오! 이거 진짜루 못 겐디가시요…오! 정말 사람 좀 살리라요…오!』하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주 상사와 이 소위는 『참아! 임마…, 너 낙오되문 죽는 줄 몰라?』 하며 소리치고는, 소를 몰았다.
에필로그 동상이 심해 걷지도 못하게 된 나는 소 등을 타고, 아니면 지게에 얹혀서, 아니면 소달구지에
올라 대원들과 同行 철수했다. 그러다 경기도 용인 부근의 한 農家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내 동료 한 사람과 중공군 점령하의 農家에서 착한
농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29일간 지냈다. 2월 초순에 접어들자 중공군이 철수했고 미군 병사들이 반격해 왔다. 부락민들은 『미군이 20리 앞까지
왔다』며 내게 용기를 북돋웠다. 며칠 후 일단의 미군 병사들이 나타났다. 내가 묵던 집에 미군 병사 두 명이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ROK Soldier』(대한민국 병사)라고 소개했다. 1951년 2월4일 나는 군용 들것에 눕힌 채 미군
지프에 올랐다. 상처를 본 군의관은 이기동과 나의 엉덩이에다 주사를 놔주고 발에 무슨 약도 발라주었다. 그리곤 이기동과 나의 목에 「POW」라
인쇄된 꼬리표를 달아주었고, 그뒤 그것을 펜으로 두 줄로 지운 뒤 그 위에다 「ROK Soldier」라 썼다. 후에 안 것이지만 POW는
전쟁포로(Prisoner Of War)의 약자였다. 그후 미군에 의해 수원·부산 비행장을 거쳐 부산 서면 거제리 제2포로수용소 병원에 갔다.
나는 그때까지도 육군병원으로 移送(이송)될 때까지 임시로 이곳 병원에 있는 줄 알았다. 그곳에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는
동상 걸린 발목을 잘라냈다. 억울하게 포로수용소로 온 사람은 나같은 국군 낙오병뿐이 아니었다. 민간인들도 많았다. 외국
군인들이 볼 때 민간복을 입었더라도, 국군복을 입었더라도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닥치는 대로 포로로 끌고갔다. 나는
1951년 말 거제 포로수용소로 이송됐고, 1952년 5월 마산의 민간인 억류자 수용소로 갔고 그해 여름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다. 그뒤 나는
육군 병원에서 4개월 지낸 뒤 명예제대증 한 장을 입수했다. 제대증은 1953년 9월12일자였고 귀가 조치는 그로부터 10일 뒤였다. 제대증에
기입된 나의 계급은 여전히 육군 이등병이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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