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나라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죽어가는 戰友(전우)를 보고 치솟은 분노 때문인가. 上官(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인가. 모두 正答(정답)일 수도
있고 또한 誤答(오답)일 수도 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군인도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심각한 戰場恐怖(전장공포)에 시달리다 못해 戰場(전장)에서
離脫(이탈)을 하는 병사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엄한 軍法(군법)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법회의를 열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戰場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전장이탈을 하는 병사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戰勢(전세)가 아군에게 극도로
불리한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말이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적에게 빼앗길 정도로 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공격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용감한 군인과 비겁한 군인의 차이는 후퇴할 때 곧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開戰(개전) 초기 임진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대의 편제조차 무너진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장병들을 再(재)편성하기 위해 某(모) 소령이
나와 장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계급장을 뗀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와 사병을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군인들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다 줄 배 한 척이 나타나자 모여 있던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자칭 장교라면서 먼저 타려고 했다. 그
소령은 조금 전에 장교가 있으면 나오라고 할 때는 나오지 않더니 배를 탈 때는 장교냐 하면서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 명령도
제대로 듣지 않던 장병들의 질서가 순식간에 잡혔다고 한다. 1사단 12연대 예하 중대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은 병사들에게도 심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집합명령을 내리자 하사관 몇 명이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집합이냐』면서 비웃자 중대장이 권총으로 세 명을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축 처져 있던 병사들은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내 집합했다고 한다. 극히 일부 부대에서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 국군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군이 연전연패를 되풀이하자 절망 속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이 제대로 통할 리가 만무했다. 많은 장병들은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제 한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군법회의에 회부할 만큼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 바로
卽決處分權(즉결처분권)이다. 「국군의 후퇴는 육참총장이 명령할 뿐이다」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던 1950년 7월3일, 육군본부에서는 「부대의 후퇴는 軍 최고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명령할 뿐이고 예하 부대장은 후퇴를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作戰訓令(작전훈령) 제2호를 선포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런 訓令만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사들을 돌려 전투에 투입시킬
수는 없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장병들에게는 陸參總長(육참총장)의 훈령도 그야말로 死後藥房文(사후약방문)이었을 따름이었다.
결국 육본은 7월26일 零(영)시부터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명령 없이 전장이탈을 하는 부하들에게 卽決處分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부여한다. 戰時(전시)에서의 卽決處分이란 곧 총살을 의미했다. 이후 卽決處分權은 군법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적에게 죽기 전에 자칫 잘못하면 上官에게 먼저 총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군법에 의하지 않고 지휘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卽決處分權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卽決處分權을 행사하는 지휘관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사전에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陸士(육사) 8기생들이 펴낸 「老兵(노병)들의
證言(증언)」이라는 회고록은 군법에 의하지 않고 명령 불복종인 부하들을 총살시킬 수 있었던 卽決處分權이 일부 지휘관에 의해 濫用(남용)되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6·25 발발 일년 전인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한 육사 8기생들은 대부분
중위 때 6·25를 맞았다. 실제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소대장으로 6·25의 초반부를 보냈던 그들은 육사 어느 기수보다
희생이 컸다. 1천3백45명의 동기생 중 6·25 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4백19명으로 전체 동기생 중 3분의 1에 달한다. 그 희생자
중에는 적군이 아닌 상관에 의해 卽決處分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8사단 10연대 1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金千萬(김천만)
중위도 그중 한 사람이다. 金千萬 중위가 배속된 10연대 1대대는 1950년 7월4일 강원도 원주와 충북 제천의
중간지점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앞세운 인민군의 야간 기습공격에 金千萬 중위의 소대는 전멸하다시피
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金중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卽決處分權을 앞세운 10연대장 高根弘(고근홍) 중령(육사
2기)의 질책뿐이었다. 결국 金중위는 연대장으로부터 명령 없이 후퇴했다는 이유로 卽決處分 선고를 받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즉결처분권은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 육사 8기생들은 책 속에서 그들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6·25 초전 일부 몰지각한 지휘관들은 최전선에서 분전하던 초급장교만을 선택하여 생명을
빼앗는 가혹한 횡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한 卽決處分이라는 용어가 유일한 무기이며 방편인 듯했다. 그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지휘권 남용과 횡포로 명령에 복종하는 초급장교의 충성을 짓밟았다. 그들은 계급적인 우월감으로 공포와 강압을
자행하여 암흑사의 주역으로 등장되었던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들의 잔인한 횡포는 砲火(포화)보다,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
포화보다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는 卽決處分에 부하를 잃어버린 아픔을 맛본 朴致玉(박치옥·75·前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씨. 당시 그는 金千萬
중위가 소속된 10연대 1대대장이었다. 『1950년 7월4일, 인민군의 대규모 야간 기습공격을 견디지 못한 일부 중대가
연대본부가 위치한 곳까지 후퇴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연대장 高根弘 중령이 명령 없이 후퇴하여 방어선을 무너지게 한 책임을 물어 소대장
金千萬 중위와 李寅洙(이인수) 소위를 卽決處分했다는 사실은 대대장인 저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연대장이 두 사람을 卽決處分시킨 다음에 나한테
전화를 해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내가 장교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항변하자 「그렇게 됐소」라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평시라면 모르겠지만 전시에 주둔지를 이탈해 연대장에게 가서 항의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혼자서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굳이 후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는 틈을 이용해 충분히 군법을
적용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소대장 한둘을 죽인다고 해서 이미 뚫린 방어선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맡고 있던 1대대 말고
10연대 예하 다른 대대에서도 소대장들이 高중령에게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연대본부를
향해서 기관총 사격을 감행한 중대장 朴致玉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日本軍(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던 高根弘 중령은 그 이후에도 몇 명의 초급장교를 더 卽決處分하는 물의를 일으킨다. 강원도 원주의
神林(신림)전투에서 崔庸德(최용덕·육사 9기) 소위가, 이어 丹陽(단양)전투에서는 인민군의 집중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진지를 이탈한
鄭求情(정구정·육사 8기) 중위가 高중령에 의해 총살되었다. 전투가 있으면 죽음이 따르는 것이 전쟁의 비극이다. 적군에게
죽는 죽음도 슬프지만 아마 그보다 더 억울한 죽음은 아군에 의해 총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서 일개 병사도 아닌 소대장들을 卽決處分시킨 高根弘 중령을 주위에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朴致玉씨의 증언. 『걸핏하면
卽決處分을 시킨다는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이 자꾸 돌자 연대장인 高根弘 중령은 연대 장병들로부터 신뢰를 받지를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모 중대장이
연대본부가 있는 곳을 향해서 기관총 사격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지휘관이 엄격한 軍法만을 내세워 부대를 통솔해서는 강한 전투력을 지닌 군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병사들이 지휘관을 형님처럼 믿고 따르는 부대가 오히려 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朴致玉씨의 계속되는 증언. 『卽決處分권은 일제시대 때 일본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이 일본 군대의 나쁜 모습을 배워온
것입니다. 특히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이 해방 이후에 국군의 지휘관이 되자 리더십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 卽決處分權입니다. 어떻게 적을 눈앞에 둔 전쟁터에서 자기 부하를 쏴죽입니까. 말도 안되는 얘기죠. 그리고 똑똑한 장교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것이 얼마나 손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6·25 때 인민군 장교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생각해보면 쉬울 겁니다』 卽決處分權의 희생자는 사병들이나 초급 장교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54주년인 지난 8월15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에게 勳章(훈장)이 수여되었다. 이날 발표된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 수상자 명단에는 臨時政府(임시정부) 휘하의 光復軍(광복군) 대원이었던 尹泰鉉(윤태현·사망)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尹泰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충남 公州(공주)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간다.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臨時政府 휘하의 光復軍에 입대하여 활동하던 그는 1945년, 臨政과 美 OSS(전략첩보국·CIA의
전신)가 합작하여 한반도에서의 게릴라 활동을 목적으로 수립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참가한다.
國家有功者 대상에서 제외된 까닭 우리의 손으로 일제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독수리 작전」은
훈련을 끝마친 대원들이 한반도 침투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끝나버렸다.
이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독수리 작전」에 참가했다는 경력만으로 尹泰鉉은 이미 오래 전에 功績(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아야만 했다. 해방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그가 國家有功者 대상에서 제외된 까닭에 대해서 그의 양아들인
尹德漢(윤덕한·51·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1963년도에 광복군 단체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독립운동 증거자료를 일괄적으로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다 인정이 되는데 유독 저의 아버님만 제외되는 겁니다. 그 이후
몇 번이나 더 증거자료를 모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버님보다 더 못한 독립운동 경력을 지낸 사람들도
훈장을 수여받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아버님의 서류가 심사대상에서조차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나자 허탈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번번이 공적심사에서 탈락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해방 후 귀국한 尹泰鉉은 육사 7기(특별)를 거쳐
소위로 임관한다. 대위 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그는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8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한다.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인 50년 4월, 共匪(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태백산맥에서 활동하던 이호제 부대의 부대장과 작전참모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던 尹泰鉉
소령이 번번이 국가보훈처의 심사에서 탈락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6·25 전쟁 중 卽決處分을 당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군법무관으로 6·25에 참전했던 太倫基(태윤기·82·변호사)씨의 증언. 『6·25 전쟁중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졌던
卽決處分權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고귀한 생명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은
평시가 아니라 인민군의 남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는
판국에 卽決處分權의 위법 여부를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卽決處分權은 부하들을 지휘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장이탈을 하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주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경고성
목적이 강했습니다』 실제로 분대장 이상 지휘관에게 卽決處分權이 주어졌지만 6·25에 참전했던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분대장이나 소대장이 예하 분대원들을 卽決處分 시켰다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소대원들 사이에는 死線(사선)을 함께 넘나들면서
알게 모르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꽁초담배 한 개비라도 나누어 피울 수 있는 전우애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 아니면 한솥의 같은 밥을 먹는 식구와 같은 부하들을 분대장이나 소대장이 총살시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 규모를 벗어나 연대급이나 사단급 정도만 되더라도 같이 얼굴을 맞대고 생활할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卽決處分權을
행사하기가 쉬웠다. 광복군과 일본군 지원병 출신의 만남 尹泰鉉 소령이 배속되어
있던 국군 8사단은 東海岸(동해안)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6·25가 발발하자 강원도 원주를 거쳐 7월6일 충북 단양까지 후퇴한다. 그곳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7월13일에는 경북 영주까지 후퇴했다. 그리고 영주와 풍기 일대에
방어선을 펴고 남하해온 인민군 8사단과 열흘간에 걸친 치열한 접전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연대장 金 모 중령에 의해
1대대장 尹泰鉉 소령이 卽決處分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21연대 대전차포 소대장이었던 宋濟根(송제근·72·前
경찰대학장)씨는 멀리서나마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다. 당시 그의 소대는 산악 지대에서 對전차포는 필요없다고 해서 對전차포는 경북 안동으로
내려보내고 보병소대로 임무를 전환하여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연대본부가 영주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1950년
7월17일경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소대는 연대본부 경비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파진 구덩이 앞에 팬티만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잠시 뒤에 총성이 울리더니 그가 쓰러지더군요. 죽은 사람이 1대대장 尹泰鉉 소령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卽決處分 연유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21연대 출신장교들의 모임에서 尹泰鉉 소령이 卽決處分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 얘기가 있었습니다. 尹泰鉉 소령의 1대대가
연대본부 작전계획대로 제 위치를 사수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것이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고 서너 번 그런 적이 있었다더군요. 즉결처분의 이유라면
결국 그것 때문이겠죠』 하지만 尹소령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르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막내동생인
尹柱鉉(윤주현·65·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씨는 尹소령과 같은 대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육촌 형(尹東鉉·사망)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둘째 형님(尹泰鉉 소령)이 그 참사를 겪기 얼마 전에 제 육촌 형은 중상을 당해 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거기에서
나중에 같은 대대에 있다가 부상을 당해 후송된 전우를 우연히 만났답니다. 그래서 형님의 생사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조심스럽게 얘기를 해주더랍니다.
원래 연대에서 내려온 1대대의 방어지점은 그 전에 배치되었던 다른 대대가 한 번 전멸을 당했던 곳이었답니다. 그래서 대대장이었던 둘째 형님이
연대장 명령대로 방어선을 펼쳤다가는 또 전멸당한다면서 원래 지점보다 약 1㎞ 정도 떨어진 후방에 병력을 배치시켰답니다.
그걸 안 연대장이 명령불복종이라면서 처벌하겠다고 하자 둘째형님이 명령대로 했다간 내 부하 다 죽인다면서 항명을 했답니다. 그것이 결국 말다툼이
되었고 그러자 화가 난 대대장이 결국 그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거죠』 두 사람의 증언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尹소령이
연대장에 의해 즉결처분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증언대로 1950년 7월17일에 尹泰鉉 소령이 卽決處分을 당했다면 문제는 또 있다.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진 卽決處分權은 1950년 7월26일 零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지휘관에게도 卽決處分權은
없었다. . 太倫基 변호사의 증언. 『상황에 따라서 좀 다르기는 하지만 卽決處分權이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지기 전인 1950년 7월26일 零시 이전에 卽決處分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한 불법행위고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법을 무시하고 일어나는 행위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나라가 없어질 판국에
전투의 결과에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지휘관으로서는 법조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무슨 수를 동원하더라도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것이 지휘관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때문에 몇몇 지휘관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자의적으로 卽決處分權을 행사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으로 6·25를 맞이한 尹興禎(윤흥정·76·前 戰敎司 사령관)의
증언. 『사실 卽決處分은 6·25 때도 물의가 많았습니다. 특히 일선 전투현장에서 분대장이나 소대장 같은 지휘관이 전투
도중 행사했던 卽決處分은 상황 자체가 군법을 행사할 만큼의 여유가 없으므로 이해할 수가 있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충분히 군법으로도 처리할
수가 있는 연대급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이 卽決處分權을 행사했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없습니다. 물론 卽決處分이 6·25의
전세를 바꾸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사실은 나도 6·25 전쟁 기간 동안 몇몇 상관으로부터 명령대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卽決處分을 시켜버리겠다는 위협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부하들에게 卽決處分權을 행사하라는 권유를 주위에서 받기도
했지만 나는 도저히 못하겠습디다. 어떻게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기 손으로 부하를 죽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상관이 내리는
공격명령의 태반이 실현 불가능한 일인데 말입니다. 사실 병사들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앞으로 돌격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들어야만 비로소 돌격을 하죠. 병사들에게 돌격을 하더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고 병사들은 그런 지휘관을 더 믿고 따릅니다. 강한 전투력은 바로 그럴 때 나오는 거죠』 즉결처분권은
督戰의 주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일부 지휘관들은 부하들을 믿고 따르게 하기보다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전근대적인
방법인 卽決處分權을 휘두르면서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특히 전선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는 바람에 벼랑끝으로 몰려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시기에는 그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낙동강 방어선의 한 축이었던 안동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던 宋濟根씨의 증언. 『그때
우리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는데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자기가 있는 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면서 전선 후방에 헌병을
배치시켜 놓고 후퇴하면 무조건 사살한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死守(사수)하라는 거죠. 그때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소대장인 제가
전투지휘를 하려고 소대원들이 있는 참호를 왔다갔다 하면 뒤에서 독전을 하고 있던 헌병들이 제가 전선을 이탈하려는 줄 알고 총으로 위협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것은 단순한 위협만은 아니었다. 「육군 헌병 50년사」에서도 卽決處分權을 督戰(독전)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全(전) 전선에 걸쳐서 후퇴 및 반격간에 발생하는 전투 기피현상과 신병들의 도망, 낙오
등을 억제하기 위해 후퇴자 중 12명을 全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卽決處分하고 명령 없이 후퇴하는 연대장을 구금했다」 이처럼
卽決處分은 무너지는 전선을 지탱하려는 주요 수단이었다. 동부전선의 영덕을 방어하고 있던 3사단에서도 전투에 패배한 책임을 물어 소대장을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사단 23연대장 金宗元(김종원) 중령은 예하 소대장이 지키고 있던 영덕 남방의 고지를 빼앗기자 탈환을
명령한다. 하지만 탈환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 책임을 물어 소대장과 사병 한 명을 卽決處分시켜 버린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냥 묻혀져버릴 뻔했던
이 사건은 후일 3사단 미군 고문관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金宗元 중령이 연대장직에서 해임되는 사태로까지 확대된다. 6·25
전쟁중 발생했던 卽決處分은 휴전 후 법적 소송으로까지 치닫는 경우도 있었다. 宋堯讚(송요찬) 장군은 수도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50년 9월, 17연대 3대대장이었던 趙榮九(조영구) 중령을 卽決處分한다. 경주 북방의 昆起峰(곤기봉)에 배치시켰던 3대대가 자꾸만
후퇴하자 여러 번 후퇴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후퇴를 하자 헌병을 시켜 卽決處分을 시킨 것이다. 당시 안강, 경주 축선이
무너지면 힘겹게 지키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일시에 무너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였다. 趙중령의 유가족은
1960년도에 宋堯讚 장군을 살인죄로 고소했지만 宋장군은 검찰에서 불기소처분되었다. 6·25 전쟁중 발생했던 즉결처분
때문에 유일하게 법적 소송에까지 휘말린 宋堯讚 장군에 대한 宋濟根씨의 증언. 『저는 8사단 21연대에서 소대장부터
대대장까지 하면서 3년 내내 일선 전투지구만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때 8사단장으로 부임해 왔던 宋堯讚 장군 밑에서 대대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총살을 잘 시키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는 좀 다릅니다. 휴전을 열흘 정도 앞둔 1953년 7월 중순일 겁니다.
하루는 사단장인 宋堯讚 장군이 대대장인 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도를 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도상의 한 고지를 좌표로
찍어주면서 그 고지를 점령하면 훈장 탈 준비를 하고 점령하지 못하면 총살당할 준비를 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하더군요. 그것은 점령하지 못하면 꼭
죽이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필사의 각오로 싸우라는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거죠』 이처럼 일부 지휘관들은 6·25 전쟁
기간 내내 즉결처분권을 약방의 甘草(감초)처럼 부하들을 독려하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실제로 즉결처분권이 유효했던 기간은 약 1년간에 불과했다.
지휘관의 독단에 의해 시행되었던 즉결처분권이 본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 軍 내부에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자 시행된
지 일년 만인 1951년 7월10일 零(영)시부터 취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휘관의 명령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군대의 생리상 일선
전투현장에서 卽決處分權의 위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병으로 입대했다 전쟁터에서 현지임관되어 대위로 전역한
金洪官(김홍관·70·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씨는 화랑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은 역전의 용사이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1951년 봄, 초임
소위들은 현지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전사했다. 소위들의 부족현상이 심해지자 소대 선임하사였던 그는 소위로 현지임관을 한다.
소대장을 버려두고 도망친 병사 중부전선 905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공군과 벌인 전투는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소모전이었다. 한때 그가 속한 중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30여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대장은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전화에다 대고 협박을 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 방법을 택한다. 소대가 점령해야 할 高地(고지)는 아군이 공격할 때 고지를 지키고 있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은폐물과 엄폐물이
전혀 없는 민둥산이었다. 그는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죽을 것이 뻔한 결사대에 부하를
내보내기에는 마음이 걸려 자신이 나섰다. 수류탄을 든 그는 엄호를 해줄 부하 두 명과 함께 포복으로 고지로 접근해 갔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부하가 誤發(오발)을 하는 바람에 고지를 지키고 있던 적에게 들켰고 곧 집중사격이 퍼부어졌다. 그때 뒤에 따라오던 부하들은
엄호를 해주기는커녕 자기들만 살겠다고 오히려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고지에서 살아내려왔을 때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부하 중 한
명이 개울가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그는 옆에 있던 선임하사의 총을 빼앗아
부하를 향해 발사한다. 『무엇보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소대장을 버려두고 도망친 부하들이 괘씸했습니다. 그래도 소대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걱정은 해야 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 아닙니까. 죽이겠다는 생각보다는 머리 끝까지 치민 화를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허벅지를 살짝 스쳐 지나가는 정도여서 목숨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손으로 부하를 죽이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했지만 지휘관들에게 卽決處分權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리가 6·25를 제대로 치러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金洪官씨의 증언. 『결사대의 공격마저 실패로 끝나자 대대장이 전화에다 대고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이
고함을 치더군요. 그때의 심정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날 새벽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남은 병력을 집합시켜 놓고 오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면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한발짝이라도 후퇴하면 내가 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병사들도 내가 대대장에게 어떻게 협박당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다른 말을 하지 않더군요. 하여튼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게 없더군요.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한 것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그날 드디어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나중에 고지까지 올라온 대대장이 며칠 만에 휑하게 변한 내 몰골을 보더니만 첫마디가 중대장더러 밥 좀 갖다주라고 하더군요. 사실
워낙 적의 포격이 심해 식사마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며칠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면서 전투를 치렀거든요』 사병을
총살시킨 사단장 朴致玉씨의 증언. 『경북 보현산 전투 때 망원경으로 일선참호를 살피는데
분대장급으로 보이는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뒤쪽으로 도망가는 병사를 향해 총을 발사해 쓰러뜨리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卽決處分權은 진짜
그럴 때 필요한 거죠. 그런 상황 아래에서 군법을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사관후보생의 신분으로 경기도 문산 전투에 투입된
이후 격전의 현장을 누빈 崔尙鎬(최상호·71·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씨는 일선 소대장이 된 지 한 달을 겨우 채운 1951년 1월에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거기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병원에서 2사단 소속 소위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단장이 全 사단 장병들을 모아놓고 특별 훈시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조금 움직였다고 해서 총살을 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단장이야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군기를 세우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겠지만
卽決處分權을 지휘관의 너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尹柱鉉씨의 증언.
『6촌형이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와 그런 얘기를 해주자 지금은 돌아가신 큰형님께서 8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둘째 형님이 무슨 이유로 즉결처분을 당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피하기만 할 뿐 아무도 속시원하게 얘기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4·19에 의해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세워지자 약간의 희망을 가졌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포기하다시피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당시 연대장이었던 그 사람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 진급하더군요』 尹泰鉉 소령의
조카인 尹恩漢씨의 증언. 『그가 육참총장을 하고 있을 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참모총장실로 찾아가 사유를 설명하고 면회를
요청하니까 부관이 나와서 돈이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돈보다 작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갔는데 명예라도 회복시켜 드리고 싶다고 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우리를 무서워했겠습니까. 마지막에 명예회복하는 데 제발 방해만 하지 말아달라. 그 말만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尹德漢씨의 증언. 『아직 정확한 사망날짜조차 몰라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분이 죽었다고 증언한 7월17일을 돌아가신 날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정부에서는 아직도 전사통지서 한 장 없습니다. 죄를 짓고 사형당한 사형수의 유가족에게도 사망통지만은 해주는 법인데
어떤 이유 때문에 총살을 당했는지는 아직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라를 지키려고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 아닙니까. 죽었다면
죽었다고 통보를 해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 아닙니까』 자식도 남기기 않고 죽은 尹泰鉉 소령의 제사라도 지내주기 위해 양아들로
들어간 尹씨는 작년 5월에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양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정부 곳곳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아직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대답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尹興禎 장군의 증언.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다시 일어난다면 자동적으로 후방에 있는 동원사단의 예비군들은 전원 소집됩니다. 그런데 이들
연령의 대부분은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家長(가장)입니다. 집에 남아 있는 처자가 뭘 먹고 살지도 모르는 판국에 예비군들이 제대로 전투에
임할까요. 아마 기회가 있다면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전장이탈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겁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동원되는 예비군들의
가족에 대한 생계 대책을 마련해 놓는 것도 극심한 혼란을 막을 한 가지 방법일 겁니다』 한 번도 양아버지 尹泰鉉 소령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尹德漢씨는 양아버지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전우들을 애타게 수소문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양아버지가 묻힌 곳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6·25 전쟁 중 卽決處分에 의해 희생당한 장병들의 數(수)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이 없다. 老兵(노병)들의 증언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몇몇은 卽決處分에 대해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굳이 우리 軍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서 얻을 것이 뭐가 있냐는 거였다.● 월간조선 1999년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