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딘 애치슨 회고록 - 한국의 목숨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강기 2015. 9. 16. 10:06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① - 딘 애치슨 회고록 :「present at the creation」
 
한국의 목숨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6·25 전쟁 중 美 국무장관)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할 것인가, 버틸 것인가

中共軍 대공세, 기나긴 퇴각

1950년 11월 하순 유엔군은 압록강과 北進통일을 目前에 두고 있었다. 山中에서 뛰쳐나온 수십만의 중공군이, 최후의 진격을 감행하는 유엔군에게 대타격을 가한다. 맥아더는 유엔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리고 평양, 38선, 서울을 잇따라 포기한다. 중공군은 수원 以南으로 내려오고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다. 한국을 포기하고 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려는 계획이 심각하게 논의된다. 영국 등은 실질적인 한국 포기가 되는 현 위치에서의 휴전을 중공에 제의하도록 공작한다. 이때 목숨이 경각에 달린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사람들은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마셜 국방장관 같은 사람들이었다. 듣지도 못한 나라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미군 젊은이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국인을 공산당 손에 넘겨줄 수 없다」고 버틴 애치슨 장관, 중공군의 南進을 저지한 리지웨이 장군, 이들이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하였다

한국의 운명을 요리한 사람의 手記
리지웨이가 역사를 反轉시켰다
번역 : 李 南 圭 디지틀 조선 편집위원
해설 :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 인물

 

 

 편집자 注를 겸하여: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1950년 1월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琉球(유구)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 방어선 개념은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한 해 전에 공언했던 것과 같고 미국 合參이 설정한 방어선과 일치한다. 애치슨은 개인 의견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때 트루먼의 미국 정부가 갖고 있던 기본 전략개념에 기초하여 말한 것이다. 이 방어선에선 남한이 빠져 있었다.
 
  미국 정부는 남한을 반드시 지켜 내어야 할 사활적 이해가 걸린 나라로 보지 않았다. 애치슨의 이 연설은 金日成이 스탈린과 毛澤東의 지원下에서 남침전쟁을 일으키는 데 중대한 참고사항이 되었다. 金日成은 미군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남침 뉴스에 접하자 마자 미군 투입을 결심한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결단 중의 하나이다. 그때 미국이 갖고 있던 방어개념을 벗어난 결정을 즉각 내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1969년에 출판된 딘 애치슨 회고록 「현대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서(Present at the Creation)」는 6·25 전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그는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다. 이 회고록은 1970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글이 아주 솔직하고 긴박하다. 1950년 11월 통일을 향해 최후의 진격을 개시한 유엔군을 덮친 대재앙, 중공군의 기습을 전후한 대목이 가장 재미있었다. 
  
  
  恐慌 상태에 빠진 워싱턴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간 잡지」 月刊朝鮮은 그동안 「12·12사건 녹음 테이프」, 「金正日 육성녹음 테이프」 발굴, 黃長燁 망명 특종을 비롯한 수많은 기사들을 통해서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제는 시야를 넓혀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에 대한 결정적 기록을 소개하기로 한다. 딘 애치슨 회고록 중의 6·25 전쟁 이야기는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워싱턴 심장부의 전쟁 운영 기록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렸다. 약 5만 명이 戰死(전투 중 사망과 사고사 포함)하였다. 이로써 한국과 미국은 피로써 맺어진 血盟이 되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독특하고도 소중한 관계는 6·25 참전 결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애치슨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10명도 안 되는 워싱턴의 정책결정자 손에서 몇 번이나 지옥과 천당을 오고 갔다는 점이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戰勢를 일거에 역전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여 10월엔 압록강과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10월 말 기습과 11월 말 대공세에 직면하자 맥아더는 38도선까지의 후퇴를 지시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후퇴가 시작된다. 승리 일보 직전에 일격을 당한 워싱턴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트루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켜 한국을 공산군에 넘겨주는 계획을 심각하게 검토한다. 국무부, 국방부 수뇌부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맥아더는 중국 본토를 폭격하고 蔣介石(장개석) 군대를 중국에 상륙시켜 중국을 수복하려는 자기 나름의 야망을 워싱턴에 들이민다.
 
  영국은 유럽의 방위가 한국전 때문에 약해질까 봐 미국에 대해서 휴전을 제의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런 혼란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이성적인 정책결정을 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애치슨 장관에게 1950년 12월4일 조지 케넌(前 駐소련 미국 대사. 對蘇봉쇄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이 메모를 전달한다. 애치슨은 이 메모를 읽고 머리가 맑아지고 용기가 우러나오더라면서 참모들에게 읽어 주고는 자신의 회고록에 그 全文을 소개했다. 
  
  
  조시 케넌 메모: 『위기 때는 솔직해지자』
 
  <친애하는 장관님: 어제 저녁의 논의를 계속하는 입장에서 한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私的인 일에서도 그렇지만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일어난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 조국의 운명에 지금 큰 실수와 재앙이 일어난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문제는 미국인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사태를 솔직하고 당당한 각오로써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 배전의 노력과 결의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든다면, 즉 진주만의 경우처럼 필요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신감과 우방과 소련과의 협상력까지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국민들과 우리 우방들에 대해서 우리가 직면한 불행한 사태를 숨기거나 고함을 지르고 신경질을 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이 위기는 우리의 자신감과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해치는 방향으로 악화될 것입니다. 조지 케넌>
 
  
  한국을 포기할 뻔한 사건: 유엔의 對中 휴전 제의
 
  작년 9월 말 對北불법송금 사건이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의 국회 폭로로 드러났을 때 金大中 대통령이 조지 케넌이 건의한 태도로써 국민들 앞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全斗煥 대통령이 자신의 在任기간 중 광주의 비극에 대해서 조지 케넌의 태도로 대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타인의 심판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려는 자세, 순수함과 투명함으로 돌아가는 자세는 소중한 것이다. 잘못된 것에 대한 자기 고백이 가진 위대한 힘이 있다.
 
  애치슨 회고록을 읽어 보면 1950년 11월의 중공군 기습으로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후퇴, 서울 포기, 중공군의 금강선 진출 시기에 한국의 운명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워싱턴에서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곡절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번이나 미군 철수와 한국을 포기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몇 번이나 한국인을 공산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고 그 계획을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은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리지웨이 8군 사령관, 그리고 트루먼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1963년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를 떠난 군사정부의 실력자 金鍾泌씨가 미주리州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참 미안하게 되었소. 영국 친구들 때문에 통일을 시켜 드리지 못했으니 말이오』
 
  당시 영국은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애치슨 회고록에 따르면 애틀리 수상은 1950년 12월 초 워싱턴에 와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유엔 안보리 의석을 대만에서 빼앗아 중공에게 주어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당시 퇴각 중이던 미군을 안전하게 빼내어 오려면 그 정도의 代價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서 트루먼은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더 좋고 지지가 없더라도 우리 혼자서라도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은 캐나다, 인도 등 英연방국가들을 동원하여 1951년 1월 한국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휴전안을 만들어 유엔의 결의로써 중공에 대해 제의하자고 나섰다. 애치슨은 고민했다.
 
  영국 등이 초안한 제의내용은 現 위치에서의 휴전(당시 중공군은 수원까지 진출했다), 모든 외국 군대의 단계적 철수 등으로 한국의 실질적 포기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만약 이 휴전안에 미국이 동의하고 중공이 수용하겠다고 나서면 한국을 잃는 것이 되고 이 제의에 동참하지 못하겠다고 나서면 유엔과 동맹국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공이 결코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공은 그 무렵 대만으로부터의 미군 철수와 중공이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을 휴전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만약 중공이 받는다면?
 
  애치슨은 트루먼을 설득하여 영국 등이 마련한 휴전안에 동의한다. 속으로는 중공이 거부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과연 유엔이 채택한 휴전안을 중공은 거부한다. 미국은 안도한다. 영국은 그 뒤 할 수 없이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유엔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그때 중공이 유엔의 휴전안을 받아들였다면 휴전선은 충청도 금강을 따라 그어졌을 것이고 미군 철수 직후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사령관 후임으로 부임하여 중공군의 南進을 저지하고 봄에 반격으로 전환한다. 유엔군은 곧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회복했다. 이때부터는 한국 포기란 말이 사라졌다.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닌 리지웨이 장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공수사단장이었다. 중국 군대는 지금도 맥아더보다 리지웨이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맥아더의 꿈은 중국 收復이었다
 
  애치슨 회고록에는 워싱턴의 국무부·국방부·합참 등 전쟁지휘부와 東京의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 사이에 있었던 갈등_한국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신경전_이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다. 당시 미군의 최고 元老였던 맥아더의 카리스마 때문에 국방부와 합참의 지휘부는 물론이고 트루먼 대통령까지도 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모습이 회고록에서 잘 그려져 있다.
 
  맥아더는 北進할 때 중공으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가 있었지만 그들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맥아더는 내심으로는 중공군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만약 그런 개입이 이뤄지면 그것을 빌미로 하여 중공 수복작전을 벌인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중공군이 수십만 병력으로 개입하자 맥아더는 蔣介石 군대를 중국에 상륙시키고 중국을 해안 봉쇄하며 만주를 폭격하자는 대책을 내놓았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맥아더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이 나서서 擴戰(확전)을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했다.
 
  큰 꿈을 잃어버린 맥아더는 유엔군에 대해 총퇴각 명령을 내리고 증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건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미군 철수와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논의한다. 1950년 12월 하순 美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탄 지프차가 의정부에서 한국군인이 모는 트럭에 치여 워커는 사망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사기가 떨어진 유엔군을 다시 추스르고 반격을 개시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회복한다.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 저지에 실패했더라면 미군은 철수하여 일본 방어에만 전념했고 한국은 공산통일되었을 것이다.
 
 
  [애치슨 회고록 발췌]
  
  탱크가 서울로 접근하고 있다…
 
  1950년 6월24일, 토요일 밤, 나는 메릴랜드州의 해어우드팜에서 조용한 주말을 보내며 정원작업을 한 뒤, 책을 읽으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밤 10시, 좀처럼 쓰지 않았던 백악관의 긴급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 나가 있는 존 무초 대사로부터 북한군이 현지시간으로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했다는 電文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유엔담당 존 히커슨 차관보와 연락해 다음날 안보이사회 소집을 요청하도록 하고, 韓國에 있는 美國 민간 및 군사고문단에게 계속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州 인디펜던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워싱턴과는 時差가 2시간이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저녁식사를 막 끝낸 뒤였다. 그는 내가 취한 조처를 승인하고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굳이 위험한 밤 비행기를 타지 말고 좀더 상황이 분명해질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大부대가 서울과 김포공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나는 비행기를 이용해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있는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오전 7시 반에 블레어 하우스(백악관 영빈관)에서 국무부와 국방부 등 모든 관계자가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UN 안보이사회에 상정할 결의안을 작성했다. 처음 우리는 이 사태를 『대한민국에 대한 北韓의 부당한 무력공격』이라고 표현했으나, 일부 이사국과 논의한 결과 아직 상황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평화 침해행위』라고 수정했다.
 
  UN 안보이사회는 일요일 오후에 열렸다. 자유중국의 안보리 상임 이사국 대표권에 항의하여 이사회 참석을 거부하고 있던 소련 대표 말리크는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련한 즉각적인 휴전과 38선 이북 철수 결의안은 9 對 0으로 채택됐다. 유고슬라비아는 기권했다. 나는 이 소식을 가지고 공항으로 가서 대통령을 맞았다. 우리는 블레어 하우스로 직행했다. 
  
  
  미국의 위신·권위에 대한 도전
 
  몇 개월 前 蘇聯(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한 이후 全세계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소련이 계속 우리들의 결의를 탐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몇몇 위험지역에서 군사연습을 실시했다. 한국도 그 중에 포함되었지만, 우선 순위는 높지 않았다. 베를린, 터키, 그리스, 이란 같은 곳은 소련군의 재래식 戰力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국은 日本에 있는 주요 미군기지에서 가깝고, 소련군 기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게 적절한 목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공격은 소련이 준비하고, 北韓에 장비와 보급품을 제공하고, 또 그들을 부추긴 것이 거의 확실했다. 무력 이외에는 이 공격을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한국군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미국의 군사적 개입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른 나라의 군대는 정치적 또는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2주일 동안 유럽여행을 하면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분명히 이 공격은 소련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美軍이 점령하고 있는 日本의 안전을 위협했고, 韓國의 守護者(수호자)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미국의 지위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우리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이 도전에서 물러서면 미국의 힘과 위신이 큰 타격을 받는다고 판단되었다. 힘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위신은 커다란 억지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방위구역 안에 있는 이 중요한 지역이 소련의 괴뢰정권에게 정복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린 한국 대사
 
  대통령이 소집한 블레어 하우스 회의에서 나는 세 가지 건의를 했다.
 
  1. 한국에 군사원조계획에 따라 배정된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도록 東京의 맥아더 장군에게 지시한다.
 
  2. 美 공군에게 접근 중인 北韓 지상군이나 항공기에 대한 공격으로 김포공항을 방위하여 미국인 가족이 철수할 수 있도록 명령한다.
 
  3. 美 제7함대에 대해 필리핀으로부터 계속 북상, 중국의 臺灣에 대한, 또는 그 반대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한다.
 
  회의는 오전 11시경 끝났다. 대통령은 내 건의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고, 맥아더 장군에게 조사팀을 한국에 파견하도록 결정했다. 그는 또 나에게 소련이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다른 지역에 대한 조사와 화요일로 예정된 의회연설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나와 국방장관에게 그때까지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성명도 발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나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존 포스터 덜레스가 東京에서 보내온 전문을 대통령에게 보여 주었다. 電文은 「한국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소련의 대응을 무릅쓰고 美軍을 투입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한국이 부당한 무력공격으로 붕괴되는 것을 좌시한다면, 파멸적인 연쇄작용이 일어나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6월26일, 월요일.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나는 한국 대사 張勉(장면)과 함께 대통령을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는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호소를 전달했다. 張勉 대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를 위로했다. 
  
  
  『미군 개입 없이는 회복 불가능』
 
  밤 9시, 블레어 하우스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다. 반덴버그 장군은 『러시아 항공기 한 대를 격추했지만, 한국군은 모든 戰線(전선)에서 붕괴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1. 美 공군과 해군은 당분간 38선 以南에서 한국군에게 전면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2. 美 제7함대에 臺灣에 대한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고, 국부군은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한다.
 
  3. 필리핀 주둔 미군을 증강하고, 필리핀軍에 대한 원조를 촉진한다.
 
  4. 인도차이나에 대한 원조를 증가하고, 프랑스에 군사지원단을 파견할 의사를 제의한다.
 
  5. 대통령은 이 건의를 수락하면 이런 조처가 포함된 성명서를 발표한다.
 
  6. 다음날 아침 소집되는 UN 안보이사회에서 UN 회원국이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새로운 결의안을 제의한다.
 
  참석자들은 대체로 이 건의에 찬성했지만, 육군은 공군이나 해군의 한국군 지원능력에 의문을 표시하고 地上軍을 투입해야 할지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통령은 긍정적인 견해를 표시하고, 나에게 의회 지도자들과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나는 다음날 아침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6월27일로 예정됐던 UN 안보이사회는 인도 대표의 본국훈령 지연으로 28일로 연기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취한 조처의 일부는 사실상 이사회 결의 이전에 발동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중에 소련은 이것을 선전에 이용했다. 결국 UN 안보이사회는 우리가 제출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소련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는 반대, 이집트와 인도는 기권했다.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美 공군과 해군에게 한국 정부를 수호하고 지원하도록 명령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또 소련이 안보리 참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그들과 접촉해 이번 사태에 관한 책임을 추궁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사용하여 侵攻軍(침공군)을 철수시키고 적대행위를 종식하도록 요구했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29일, 『이번 사태는 南韓이 시작한 것이므로 그 책임은 남한과 그 후원세력에게 있다』고 응수했다.
 
  6월29일, 목요일. 기다리던 현지 보고가 왔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 파견한 존 처치 준장은 미군의 개입 없이는 현상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漢江에서 한국군의 후퇴를 정지시키려던 노력은 실패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오후 5시에 블레어 하우스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美 공군과 해군의 공격 목표를 북한內로 확대하는 문제와 부산의 항구와 비행장 및 통신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지상군을 투입하는 문제가 토의되었다. 
  
  
  맥아더에게 1개 연대 투입 권한 부여
 
  이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백악관으로 가서 대통령에게 3만3000명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蔣介石 총통의 제의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호의적이었으나, 나는 이 병력은 한국보다는 臺灣을 방위하는 데 더 필요하다고 반대했다.
 
  6월30일, 금요일. 한국 戰線을 시찰하고 돌아온 맥아더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에게 한국군의 후퇴는 敗走(패주)이기 때문에 美軍 전투부대 파견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는 즉각 駐日(주일) 미군 1개 연대의 전투부대를 파견하고, 가능한 대로 2개 사단으로 증강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새벽 5시, 산책을 나가려고 옷을 입다가 이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 장군에게 1개 연대 투입 권한을 부여했다.
 
  이날 아침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대통령은 다시 蔣介石 총통의 제의를 받아들일 뜻을 비쳤다. 나는 그렇게 되면 中共軍이 한국이나 臺灣에 개입할 구실을 주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참모총장들도 蔣介石의 군대는 북한군의 기갑부대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수송수단은 미군 부대와 보급품 수송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미군 전투부대 2개 사단 증강 추진을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 건의를 수락하고 필요한 조처를 승인했다.
 
  오전 11시. 백악관에 의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상황을 설명하고, 그가 취한 일련의 조처를 소개했다. 모든 의원들이 지지를 표시했는데, 케네트 훼리 상원의원만이 그런 명령의 법적 근거를 물었다. 그러자 알렉산더 스미스 상원의원은 대통령의 조처를 승인하는 의회결의를 하면 될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 모임은 대통령의 고향인 미주리州의 새 공화당 의원 듀이 쇼트가 『의회는 사실상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조처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날의 결정으로 미국은 이제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나중에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단행한 조처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그래서 『트루먼의 전쟁』이란 말도 나왔다. 그러나 설사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비판은 일었을 것이다. 의회의 승인을 받았던 링컨, 윌슨, 루스벨트도 비판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에 대한 비판은 미군의 고전과 희생, 비용, 제한적이고 끝이 없어 보였던 전쟁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속 집권하고 있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처음부터 제한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국무부와 국방부, 합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정밀한 자제와 조정을 필요로 했고, 이 때문에 「매파」와 「비둘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英國은 UN 안보리 결의가 있은 직후, 고맙게도 일본 영해에 있던 영국 군함을 맥아더 장군에게 제공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해 주었다. 그 후에도 영국은 글로스터 연대의 여단을 한국에 파견해 주었고, 이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영웅적으로 싸웠다.
 
  이와 거의 동시에 소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英國 정부는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7월 초, 駐蘇(주소) 영국대사 데이비드 켈리경은 소련 외무차관 그로미코와 접촉했다. 이들은 현상 휴전을 전제로 협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UN 안보리의 원상회복 결의 요구와는 일치되지 않았다. 7월6일, 나는 영국대사 올리버 프랭크스경과 식사를 하면서 『영국 정부가 우리에게 휴전을 위해 양보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수락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다음날 駐英대사 루이스 더글러스에게 그런 뜻을 英國 정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이와는 별도로 印度(인도) 정부는 중국의 UN대표권을 中共에게 주고, 이 문제 때문에 보이콧하고 있는 소련을 복귀시켜 미국과 소련 및 중공 세 나라가 주동이 돼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한다는 平和案(평화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문제의 초점을 한반도에서 UN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옮기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자동적으로 臺灣에서 자유중국 정부를 축출하는 문제로 발전하리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7월18일, 네루 인도 首相(수상)에게 서한을 보냈다. 
  
  
  맥아더의 트루먼 비판
 
  「…前略/평화 교란이나 침략행위는 UN이 대처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는 일이 현재 UN에 상정된 다른 의제의 부수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네루는 이 편지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틀 후 소련은 말리크가 UN 안보리에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인도의 평화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은 이런 환상적인 평화안보다는 UN 회원국들의 실질적인 지원이었다. 이해 말까지 15개국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고, 30개국이 민간인 구호와 재건작업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戰況(전황)은 계속 악화되어 우리는 부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의외의 골칫거리가 등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독단과 오만이었다. 臺灣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는 때때로 그를 찬양하던 공화당 보수파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민주당의 극동정책을 비판하고, 臺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8월1일, 우리는 맥아더 장군이 臺灣에 가서 宋美齡(송미령) 여사의 손에 키스를 하고, 그의 남편 蔣介石 총통과 회담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경악했다. 맥아더는 蔣介石 총통의 환대에 대해 양국 군대 간의 효과적인 군사적 협조를 약속하고, 국방부도 모르게 제트전투기 3개 대대를 臺灣에 파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8월10일, 그의 臺灣 방문이 사전에 미국 및 臺灣 정부 간에 정식으로 합의되고 조정된 것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맥아더 장군의 도발적인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월25일, AP통신은 맥아더 장군이 매년 열리는 해외참전군인 전국대회에 트루먼 정부의 극동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는 이 성명에서 臺灣을 방위하면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소외당한다고 주장하는 「유화론자」와 「패배주의자」를 비판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동양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격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18일 UN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 19일에는 의회에 대해 美國의 臺灣 정책은 제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7월8일에 UN軍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그와 상치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반항이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그 성명을 공개적으로 취소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아침, 백악관에서 열린 각료회의에 참석한 나는 대통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AP통신 보도를 낭독한 다음, 사전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에게 맥아더 장군이 그 성명을 취소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존슨은 맥아더 장군을 감싸려고 했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간 뒤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 성명을 취소 시키는 대신 맥아더 장군의 성명은 개인적 의견이고 정부의 공식정책은 아니라고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누구냐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그 성명을 취소하고, 非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맥아더 장군을 UN軍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駐日 미군사령관의 자리는 그대로 유지시키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그는 이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나진 폭격으로 국방부와 갈등
 
  맥아더 장군의 약점은 엄청난 오만과 허영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아첨꾼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유능한 참모들도 있었다. 어떤 회의에서 나중에 존슨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이 된 마셜 장군은 전쟁 중 맥아더 장군과 만났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맥아더가 「우리 참모 이야기에 의하면」하고 말을 꺼내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참모는 참모가 아니야. 臣下(신하)지」』
 
  美軍이 계속 투입되자 戰線은 「釜山 방위선」을 중심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7월20일, 항상 낙관적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에게 『敵은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이용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안심을 하게 된 것은 그 후 몇 주간의 치열한 전투를 겪은 다음이었다.
 
  존슨 장관의 국방부와 우리 국무부 사이에는 가끔 충돌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이 北韓의 羅津(나진) 폭격이었다. 소련 국경선에서 17마일 가량 떨어진 이 곳에는 화학공장과 철도 操車場(조차장) 같은 것이 있어 소련이 제공하는 물자가 모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8월12일, 우리는 美 공군이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곳을 폭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폭격이 국경선에 접근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고, 이런 작전은 사전 협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슨 장관은 국경선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계속 사전협의를 거부했다. 
  
  
  38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국방부와의 불화는 존슨 장관이 사임하고, 마셜 장군이 그 후임으로 임명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존슨은 치명적인 뇌종양을 앓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의 극단적이고도 기묘한 행동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방부內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고, 대통령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야당인 공화당 의원들과 손잡고 나를 몰아내려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마셜 장군의 임명을 환영했지만,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내가 한때 상관으로 모셨던 그가 나를 선임각료로서 깍듯이 예우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나보다 먼저 문을 통과하지 않았고, 함께 걸어갈 때는 항상 내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탈 때는 항상 내가 탄 다음 뒤를 돌아 내 왼쪽에 앉았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나 항상 내가 먼저 연설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전직 상관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괴로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정부운영 방식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아마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참모들과 함께 각 군 참모총장을 그들의 상황실에서 만나 협의하게 되었다. 나는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회의에서는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라든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8월 말, 戰勢(전세)가 호전되자, 국무부 안에서는 두 가지 대립된 견해가 등장했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군대가 38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침공군을 격파하는 데 필요하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이 지역의 안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측량사가 설정한 線을 따라 진격하고 정지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실제 상황이 벌어지기까지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9월15일, 美 제1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이 문제는 더욱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9월27일, 서울이 수복되고 워커 장군의 美 제8군은 「釜山 방위선」으로부터 北進(북진)을 시작, 敗走하는 북한군을 추격했다. 
  
  
  인천의 기적으로 도취된 맥아더의 北進에 브레이크가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 후에 미군이 겪은 大패배만 아니었더라면 세계 戰史(전사)에 남을 대성공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8월23일까지 이 작전을 지지한 사람은 맥아더 장군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포위작전이 아니라 敵의 후방까지 깊숙이 침투해서 보급·通信線(통신선)을 파괴하고, 서쪽과 남쪽 양 방면에서 敵을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합참본부와 각 군은 반대했다. 釜山에서 8군을 지휘하고 있던 워커 장군도 그의 방어선이 약화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상륙작전이 실패하면 美 8군은 북한군에게 압도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전이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컸다. 맥아더 장군 자신조차 성공 가능성이 5000분의 1이라고 보았다. 敵을 기습하여 意表(의표)를 찌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인천항의 접근로는 좁고 위험했을 뿐만 아니라, 최대 10m까지 이르는 엄청난 간만의 차이가 있었다. 상륙함정은 滿潮(만조)일 때만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다. 만조는 9월15일과 10월11일이었다. 干潮(간조)일 때는 이 일대가 개흙으로 변해 함정은 꼼짝하지 못하고 적군 야포의 목표가 될 수 있었다.
 
  8월23일, 東京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최종 회의에서 해군참모가 이런 모든 문제점을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회의를 끝냈다.
 
  『나는 운명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中略…/우린 인천에 상륙해서 놈들을 섬멸할 것이다』
 
  결국 합참과 대통령도 마지못해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운명의 여신은 맥아더의 편이었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시속 125마일의 속도로 상륙함대 쪽으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까지도 그의 편이 되어 동쪽으로 비켜 나갔다. 공산군 간첩은 일본에서 「상식작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작전의 정보를 입수했지만, 북한군에게 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으로 도취된 맥아더 장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훨씬 더 어려운 모험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이 그의 편이 아니었다.
 
  국무부內에서도 딘 러스크와 존 앨리슨이 담당하고 있던 極東局(극동국)에서는 38선 돌파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로는 평화와 안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 니츠의 정책기획국은 이 주장에 반대하면서, 맥아더 장군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한군을 추격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맞섰다. 게다가 李承晩 대통령도 한국군은 38선에서 정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대해서 美 육군은 美軍이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한국군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나는 무초 대사에게 긴급 電文을 보내서 그런 聲明戰(성명전)을 중지시키라고 지시했다. 
  
  
  맥아더에 무제한 北進 허용
 
  7월31일, 美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38선을 돌파해서 적군을 패배시키도록 UN軍 사령관에게 지시를 한다는 제안을 마련했다.
 
  1. 미국이 다른 모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군사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충분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
 
  2. 소련이 한국이나 다른 지역에 개입하지 않는다.
 
  3. 우리들의 전쟁목적은 자유롭고 독립된 통일 한국이라고 대통령이 선언하고, 의회가 지지하며, UN이 동의하고,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필요한 기간 동안 UN 사령부 아래 점령군으로서 한국에 계속 군대를 유지한다.
 
  9월1일, 백악관의 안보회의는 6월27일의 UN 안보리 결의에 따라, 적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패배시키기 위해 38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도록 허용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할 것을 건의했다. 여기에는 이 전쟁에 소련이나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거나 그럴 의사를 발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대통령은 이 건의를 수락하고,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시할 상세한 절차를 마련했다. 이 지시는 9월27일 맥아더 장군에게 내려갔다. 이 지시에는 38선 以北의 작전계획은 사전에 합참에 제출해서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28일에야 작전계획을 합참에 제출했다.
 
  9월28일, 뉴욕에서 UN총회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국방장관과 함께 워싱턴에서 한국사태를 협의하자고 전화를 했다. 다음날 우리는 블레어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한 육군 장교가 벽에 커다란 韓半島 地圖를 걸어 놓고 戰況을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마셜 국방장관은 美 8군에게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하여 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을 점령하도록 하고, 美 10군단은 배편으로 원산에 상륙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이들은 원산과 평양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8군과 연결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산항의 기뢰제거작업이 지연돼 10군단은 10월26일에야 상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그 틈에 빠져나가 버렸다. 육로를 이용한 한국군은 10월11일에 원산에 도착했다.
 
  마셜은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정주에서 흥남을 연결하는 線(선) 이북에는 한국군만 투입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소련군이나 중공군의 주요부대가 북한에 들어왔다는 징후는 없다고 하면서, 상세한 계획은 나중에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아주 치밀하게 작성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은 강력한 방위선을 구축해서 공산군의 반격을 저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력이 있고,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더 진격해서 자유롭고 독립된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UN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마셜 장군의 이 계획에 찬성했고, 대통령도 승인했다.
 
  이날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에게 『전술적 및 전략적으로 아무런 제한 없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길 바란다』고 電文을 보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이 지시는 敵이 항복할 때까지 全 한반도에서 무제한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회신했다.
 
  나중에 이 電文 교환이 문제가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전문 등을 이유로 국경선 지역에서 한국군 이외의 軍을 투입할 수 없다는 합참의 제한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런 電文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셜 장군의 電文은 분명히 권한남용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작전계획을 사전에 제출하라는 합참지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맥아더를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별도의 지시가 없는 한 38선 以北에서도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하라는 뜻이었다. 맥아더가 합참에 제출한 작전계획을 보면 그가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맥아더: 『金日成은 항복하라』
 
  한편 UN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以前의 결의를 다시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9월30일, 英國이 제안한 이 결의안은 사실상 1947년에 UN에서 채택된 「한반도의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 같은 것으로, 1)전국에 걸쳐 안정을 확보하고, 2)UN 감시 아래 선거와 정부수립에 필요한 기타 조처를 취하고, 3)모든 분야와 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UN의 이 같은 노력에 협조하도록 하고, 4)이런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만 UN군을 유지하고, 5) 한국의 경제재건을 돕는다고 되어 있었다. 이 결의안은 10월7일 채택되었다.
 
  1947년의 UN 결의가 부활된 것은 그 동안 이 결의안의 실행을 막고 있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의안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소련군이 북한으로부터 철수했고, 그 자리를 넘겨받은 북한군은 敗走하고 있었다. 이제 UN의 노력을 좌절시킬 실질적인 세력은 북한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국군이 국경지대에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소련이나 중공이 개입하지는 않으리라는 낙관론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소박한 낙관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 대신 매슈 B 리지웨이 장군이 그 임무를 수행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맥아더 장군은 10월7일 UN 결의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이 결의 어디에도 美 8군에게 한반도에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라는 구절이 없다. 美 8군의 임무는 한반도 全域에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0월9일, 맥아더 장군은 이 결의안을 인용하면서 다시 金日成(김일성)에게 항복하라는 방송을 했다.
 
  『UN의 결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本官(본관)은 마지막으로 귀관과 귀관 지휘下의 군대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귀관이 즉각 이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본관은 즉시 UN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통일된 독립 민주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는 문제에서 강력한 무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나, 이제 그런 걱정은 내버린 것 같았다. (맥아더의 越權에) 참다 못한 트루먼 대통령은 10월 초 태평양에 있는 웨이크섬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君主처럼 행세한 맥아더와 트루먼의 웨이크섬 회담
 
  트루먼 대통령이 나보고 웨이크섬에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사양했다. 맥아더 장군은 당시 외국의 君主(군주)처럼 행세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필요한 자문은 대통령과 함께 갈 무초 대사를 비롯해서 딘 러스크, 필립 조셉, 애버럴 해리먼 같은 사람들에게서 구하도록 하고, 나는 10월11일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18일에는 마중을 나가는 역할로 만족하기로 양해를 구했다.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오전 6시30분부터 9시까지 3시간 가량 만났는데, 그 중 半(반)은 두 사람이 모두 혼자 있었다고 한다. 조셉 대사의 비서 버니스 앤더슨 양은 옆방에서 성명서를 준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회담장의 문이 열려 있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또 성명서 작성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버니스는 그 대화를 速記(속기)로 기록했다. 나중에 맥아더 장군은 그것을 알고 도청을 했다고 비난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맥아더 장군은 이어 있은 확대회의에서 戰況에 대해서 낙관적인 견해를 표시하면서, 전쟁은 끝나가고 있으며, 미군은 2개 사단을 제외하고는 크리스마스까지는 한국에서 철수할 수 있을 것이고, 중공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사 개입한다고 해도 압록강을 건너올 중공군의 규모는 5만~6만 명에 불과할 것이므로, 南進을 시도하면 섬멸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통령 일행은 낙관론에 들떠서 돌아왔다. 이틀 후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대통령은 웨이크섬 회담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前略/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하겠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이야기해 본 결과 우리 외교정책의 목표와 행동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後略』
 
  그러나 이 완벽한 일치는 얼마 가지 않았다. 10월 중순이 되자 맥아더 장군의 부대는 9월29일에 승인된 작전계획에서 설정한 線까지 진출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지침에는 이 線 이북으로는 한국군만이 진격할 수 있었다.
 
  10월24일,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에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고 그의 지휘관들에게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全속력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합참이 설정하고, 대통령이 승인했던 미군의 진격 제한선은 사라졌다. 미군은 신속히 진격을 계속, 美 제8군의 7연대와 한국군 6사단은 10월26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압록강에 도달했다가 철수했다. 그러자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트루먼 말도 안 듣는 맥아더, 중공군 개입에도 모호한 보고
 
  국방부는 경악했고,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걱정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이 상황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적 필요에서 제한선을 넘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합참 지시에는 그럴 경우 支援線(지원선)으로 물러나도록 되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9월27일자 지침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나중에 수정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합참의 지시는 한국군 이외의 부대를 국경선 부근에 투입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책적 고려에 불과했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 모든 결정이 웨이크섬에서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승인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은 10월26일, 국경지대에는 한국군만 투입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그 다음날 UN軍의 임무는 한반도에서 적군을 一掃(일소)하는 것이라고 언론에 설명했다.
 
  10월26일 한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압록강으로 진출했다가 철수하면서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 있던 대규모 중공군 부대와 만나, 섬멸당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운산 북방으로 진출했던 한국군 2군단과 그 서쪽에 있던 미군 제5 및 제8기병대대는 압도적인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백병전을 포함한 밤낮 나흘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2군단은 더 이상 조직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게 되었고, 8기병대대는 병력의 半과 장비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중공군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美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2군단을 청천강에서 再편성한 다음, 맥아더 장군에게 이들이 『잘 조직되고 잘 훈련된 부대』의 기습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8기병대대 생존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0월31일에는 처음으로 蘇聯製(소련제) 미그 15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났다. 대통령이 설명을 요구하자, 맥아더 장군은 11월4일 아직 성급한 결론을 내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좀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 한편에서 맥아더 장군은 전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당시 美 제5공군은 필요하다면 국경지대에서도 전술항공관제나 관측기의 통제를 받아 지상군의 근접지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한이 완화되었지만, 국경선에서 5마일 이내에서는 폭격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0월9일, 美 공군기들이 「항법상의 오류와 판단착오」로 소련 영내 100km 지점에 있는 한 비행장을 폭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정부는 유감을 표시하고,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11월5일, 맥아더 장군은 美 제5공군 사령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에게 그의 모든 공군력을 동원하여 북한군과 그 동맹군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조종사들이 피로를 무릅쓰고라도 나진과 수풍댐 및 기타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압록강 철교 북한 쪽 부분 및 모든 통신시설, 공장, 마을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UN 안보이사회에 대해서는 UN軍이 중공군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통보하면서 12건의 사례를 열거했다.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은 그의 항공기들이 신의주와 中國의 安東(안동)을 연결하는 교량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하기 세 시간 前 그 명령을 국방부에 통보했다. 이날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로버트 로벳 차관이 이 명령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면서, 이 폭격으로 압록강을 통한 보급로가 타격을 입을지는 의심스럽고, 安東이 폭격을 받을 위험성이 크다고 말했다.
 
  함께 있던 딘 러스크는 우리가 영국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는 만주의 목표를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영국 정부는 이날 閣議를 열어 中共 정부에 대한 태도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검토하기 위해 UN 안보이사회 소집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그런 시기에 이 같은 일이 잇따라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마셜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합참에 요청해서 대통령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맥아더 장군의 작전을 연기시키겠다고 말했다.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다행히 투표를 하기 위해 고향인 캔자스시티로 가고 있던 대통령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맥아더 장군의 그 전날 최신 보고에는 압록강上의 이동상황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지 허가하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직접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맥아더 장군과 군사적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軍의 통신망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나와 로벳 국방차관이 판단해서 최선책을 취하라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안전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는 별도의 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공습작전을 연기하는 데도 찬성했다.
 
  로벳은 이 지시를 가지고 이날 오전 11시15분에 열리는 합참회의에 참석했다. 美 공군기들이 압록강 철교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하기 45분 전이었다. 합참은 국경선 5마일 이내 폭격금지를 再확인하고, 美國이 英國과 사전협의 없이 만주에 영향을 주는 작전을 실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맥아더 장군에게 압록강 철교를 폭격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電文이 왔다.
 
  『만주로부터 대규모 병력과 물자가 압록강에 있는 모든 교량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동은 본관 휘하의 軍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파멸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中略/이 같은 敵의 증강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공군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이 교량들을 파괴하고, 敵의 전진을 지원하는 북방지역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는 것입니다/中略/本官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번 신의주 폭격을 중지하고, 합참의 지시를 이행하겠습니다. 합참의 지시는 중대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관은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에게 제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美軍이 위험에 처했다는 말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합참은 마지못해 다음과 같은 전문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냈다.
 
  『귀관의 11월6일자 전문에 설명한 상황은 귀관이 11월4일 보낸 전문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압록강의 교량을 파괴하면 귀관 휘하 부대의 안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리라는 데 동의합니다. 단, 이 작전이 만주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고 이 때문에 중공군의 개입이나, 소련의 지원이 증가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입니다.
 
  그러나 11월6일자 귀관 전문의 첫 문장을 고려해서, 귀관의 신의주 목표와 압록강 교량의 북한 부분을 포함한 국경선 일대의 폭격계획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받는 시점에서도 계속 이 작전이 貴 사령부 휘하부대의 안전에 필수적이라고 판단된 경우에 한합니다. 이 승인에는 압록강의 댐이나 발전소 폭격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11월6일과 7일의 메시지는 워싱턴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공개적으로 발표된 6일자 그의 성명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북한군을 섬멸해서 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역사상 전쟁에 있어 가장 비열한 국제적 불법행위」인 중공군의 압록강 渡河(도하)로 새로운 적군이 등장하여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적군은 江 건너의 「특혜를 받은 聖域(성역)」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으므로, 「시의적절한 탐지와 능숙한 작전」만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陷穽(함정)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변덕
 
  맥아더 장군은 그 다음날인 7일에는 두 가지 분야에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중공군이 비록 그의 부대에게 「후방이동」을 강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전면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11월4일자 판단은 옳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적군의 戰力(전력)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전진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聖域을 제공하고 있는 만주 상공 비행을 금지하고 있는 제한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했다. 이 때문에 긴급추격권(hot pursuit) 논란이 생겼다. 11월9일, 맥아더 장군은 합참에 전문을 보내, 이제 무제한으로 공군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적군이 압록강을 건너 증강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11월4일에서 9일까지 보여 준 맥아더 장군의 행동은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고 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中共軍의 대거 침투로 그의 휘하부대가 위험에 처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는 다시 적군의 증강을 저지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그는 美軍이 압도적인 中共軍에게 포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워싱턴에서는 그의 기분을 맞출 수 없었다. 11월6일에서 8일 사이에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섬멸하라는 9월27일자 지시는 중공군이 개입했으므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는 電文을 보냈다. 그러자 맥아더 장군은 화를 내면서 UN의 정책까지 들고 나왔다. 저항하는 적군을 분쇄하고 한반도에 통일과 자유를 실현시킨다는 UN의 정책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일부를 침략자에게 내주는 것은 非도덕적이고, 미국의 영도력을 파탄시켜 그 지위를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英國의 유화정책도 비판하면서, 11월15일 쯤 다시 공세를 시작해서 國境(국경)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우리는 큰 災難(재난)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모두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했다. 나는 국방장관이나 합참의 참모총장들을 만나서 戰況을 토의했다. 12월 초까지 국방장관과 나는 대통령을 다섯 번이나 만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충분한 보좌는 하지 못한 것 같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간다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의 실체와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의혹에 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작전의 眞意(진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우수한 장비를 갖춘 中共軍의 강력한 부대가 美 8군을 공격한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 이들은 언젠가 다시 나타나 전보다 더 강력한 타격을 가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때와 마찬가지로 敵前(적전)에서 자기 병력을 분산시켰다.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8군은 서부, 에드워드 M. 아몬드 장군이 지휘하는 10군단은 동부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 중간에 큰 공간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모두 그 측면이 적군에게 노출되고 있었다. 이들을 조정하는 것은 30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수되는 정보를 기초로 지시를 내리고 있는 東京의 사령부였다.
 
  게다가 10군단은 세 개의 대열로 서로 지원할 능력도 없이 험준한 지형을 따라 北으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분산으로 인한 취약성은 더욱 커졌다. 美 8군도 네 개 이상의 대열로 분산되었고, 횡적인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 곧 다가와서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中共軍은 다리가 없어도 쉽게 건널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병사들에게는 惡夢(악몽)이 아닐 수 없었고, 맥아더 장군이 11월7일 주장했던 것처럼 이 겨울에 적군의 병력을 정확히 측정하고, 국경지대를 장악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임무는 北韓軍(북한군)의 잔존세력을 추격해서 섬멸하는 것이고, 통일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점에서 中共軍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통일한국을 수립하려고 하면 全面戰(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中國이나 蘇聯, 그리고 日本도 한반도를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어떤 목적지로 가기 위한 道路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美國 정부의 정책은 전면전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中共의 개입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탐색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의 작전을 반대할 수 없었다. 나는 軍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마셜 장군과 브래들리 장군에게 맥아더 장군의 병력분산이 타당한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합참이 전선에서 7000마일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지 사령관의 병력운용을 간섭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아무도 맥아더 장군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천에서처럼 5000 對 1의 확률 게임에서 다시 한 번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英國이 추진하고 있던 것 같은 휴전案이나, 평양-원산선으로 철수해서 병력을 집중하고, 한국군으로 탐색전을 수행하게 한다는 제안은 맥아더 장군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英國에게 UN에서 새로운 제안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설득했다.
 
  나는 크리스마스까지 美軍이 본토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낙관론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낙관론은 끝이 없었다. 11월17일, 그는 압록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24일 대공세를 시작할 것이라고 합참에 보고했다.
 
  그는 공습으로 적군의 증강이 저지되었다고 말했다. 비록 보급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압록강이 얼기 前에 적군을 一掃하겠다고 말했다. 합참은 그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보고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경고했지만, 그는 청천강에 있는 8군 사령부로 날아가 그의 대공세 계획을 발표하고, 그 작전이 성공하면 사실상 전쟁이 종식되고,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실현되어 즉시 UN軍이 철수하고, 한국인들은 완전한 主權(주권)과 국제적인 평등성을 구비한 나라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美軍이 포위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 사태의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월26일부터 11월17일까지의 3주일 동안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말을 안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국방부에 軍 관계자들이 꺼리는 제안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1864년 이래 수립된, 현지 사령관에게 적절한 권한을 위임한다는 美軍의 傳統(전통)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그랜트 장군을 中將(중장)으로 승진시키면서 그에게 美 육군의 모든 지휘책임을 위임하고, 워싱턴의 행정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만약 마셜 장군과 합참이 맥아더 장군에게 평양-원산선으로 철수해서 통합된 지휘체계 아래 이 방위선을 유지하도록 제안했더라면, 그리고 대통령이 그 제안을 수락했더라면, 우리는 미군이 입은 그 재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맥아더 장군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그는 이 때문에 승리를 놓쳤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셜 장관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워커 장군은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부대를 한국 서북부의 황량한 산악지대로 전진시켰다. 적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흘 후, 中共軍의 大攻勢(대공세)가 戰線 全域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미군부대가 포위되었고, 치열하고도 필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맥아더 장군의 낙관론은 일거에 날아가 버렸다. 그는 11월28일 합참에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경선으로 진격하여 한국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UN軍을 즉각 철수시키려던 우리들의 간절한 희망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전쟁을 局地化(국지화)하려던 모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後略』
 
  이날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브래들리 장군은 戰況을 설명하고, 맥아더 장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守勢로 돌아섰다고 보고했다. 中共軍의 개입규모를 알아본다던 그의 작전 목표는 달성된 셈이었다. 중공군의 戰力은 엄청났다. 만주에는 폭격기 200대를 포함한 300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아직은 투입되지 않았지만, 우리 地上軍과 공군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을 폭격하면 틀림없이 반격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반덴버그 장군은 日本에 있는 美 공군을 증강할 때까지는 폭격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마셜 장군은 軍 측의 의견을 종합해서 미국은 UN이 부여한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하며, 中共과 새로운 전쟁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전쟁을 局限(국한)시키고, 중국 영토를 폭격하거나 臺灣의 국부군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건의했다. 그는 이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美軍의 군사력을 신속하게 증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戰力으로 압도적인 中共軍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는 새해까지는 손실병력을 대체할 수 없었다. 새로운 師團(사단)도 다음해 3월1일까지는 불가능했다. 우리들은 모두 맥아더 장군의 작전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간섭을 할 수는 없었다.
 
 
  맥아더, 언론 이용 워싱턴 비판
 
  中共軍은 얼마든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시급한 과제는 우리가 후퇴해서 지켜 낼 수 있는 방어선을 찾아 내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韓國에서 철수한다면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우리 군사력과 동맹군의 군사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었다. 대통령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이날(11월28일) 회의는 끝났다.
 
  그 후 며칠 동안, 맥아더 장군은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11월29일, 합참은 적군이 8군과 10군단 사이의 공간을 통과해 이들을 포위하지 못하도록 그 간격을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 충고를 거부하고 병력증강과 새 지시를 요구했다.
 
  한편 그는 언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11월30일, 뉴욕 타임스에 北進작전을 옹호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12월1일에는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와 인터뷰를 하면서 滿洲 국경지대의 共産軍을 폭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UN軍은 軍의 역사상 전례가 없이 엄청난 핸디캡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맥아더 장군의 언론작전이 계속되자 트루먼 대통령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는 12월5일, 외교정책이나 군사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정부차원의 논평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는 마셜 장관과 나에게 군사령관과 해외 주재 외교관들에게 군사문제나 외교정책에 관해 美國의 언론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름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 지시의 대상은 맥아더 장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그는 그때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어야 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12월1일, 나는 국방부에서 국방장관과 함께 사태를 협의했다. 맥아더 장군의 실패로 UN에서는 일종의 恐慌(공황) 상태가 조성되고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 동맹국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美國의 領導力(영도력)이 도전을 받았다. 우리는 확실한 계획이 없이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敵의 공격을 저지해서 방위선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사태를 안정시킬 정치적 방안은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방위선을 유지할 수 없으면, 전쟁을 확대하든가, 아니면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토의했지만 신통한 답변은 없었다. 마셜 장군은 얼마나 답답했는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에게 직접 韓國으로 가서 사태를 파악해 보라고 지시했다. 분명한 것은 滿洲로부터 계속 中共軍이 증강되고 있고, 우리 軍은 지나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8군과 10군단을 통합해서 재편성하지 않으면 더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脫出路(탈출로)를 찾아 인천이나 원산, 釜山으로 집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만약 核武器(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당분간, 그리고 美軍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
 
  맥아더 장군이 제안한 中國 해안 봉쇄와 臺灣의 국부군 사용문제도 다시 토의했지만, 전술적 및 전략적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의 계획대로 추진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우리는 또 美軍을 韓國으로부터 철수하거나 海上으로 이동시켜야 할지 여부를 알게 될 때까지는 해군의 전투함과 수송함을 다른 임무에 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UN에서 완전히 영도력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양심상 한국인을 공산 측에 넘길 순 없다』
 
  12월3일, 궁지에 빠진 맥아더 장군은 그의 「조그마한 사령부」가 中國이란 나라 전체와 싸우고 있다고 하면서 증원군을 요청했다. 사흘 후 그는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이 26만8000명으로 추정되며, 압록강 건너 후방지역에는 최소한 55만 명이 대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또 中共 본토에는 400만 명의 무장한 예비병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합참은 이렇게 대답했다.
 
  『합참은 귀관이 병력 보존에 최우선적인 고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두보로의 집결에 동의합니다』
 
  이날 국방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장군들은 2~3일內에 위기가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10군단을 철수시켜야 하는데, 休戰(휴전)이 마련되지 않으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8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는 휴전은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인 영국 首相 애틀리를 만나서 협의하기까지는 생각할 단계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공산군은 엄청난 代價를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최소한 미군이 38선 以南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할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들은 또 美國이 臺灣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日本과 평화협상을 시작해서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제거하려 할지 몰랐다.
 
  전날 밤, 마셜 장군은 韓國에서 철수하는 문제에는 美軍을 구하는 문제와 미국의 명예라는 딜레마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양심상 南韓 사람들을 中共과 北韓의 적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는 데 생각이 일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철수는 최후의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마셜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덩커크式 철수도 중공이나 蘇聯의 공군이 개입하면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미군을 구하기 위해서는 만주의 비행장과 영토에 대한 폭격도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할 수 있지만, 그 결정은 맥아더 장군이 아니라 대통령과 마셜 장군이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력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긴급사태를 선포하자고 건의했다. 그래야 국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물가와 임금을 통제할 수 있고, 광범위한 생산통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고려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트루먼의 핵무기 失言
 
  마셜 장군의 지시에 따라 현지시찰을 나갔던 콜린스 장군이 東京에서 첫 보고전문을 보내왔으나 그 내용은 우울한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휴전이나 中國에 대한 폭격 또는 봉쇄, 미국이나 臺灣으로부터의 병력증강, 원자폭탄의 사용 같은 것이 실현되지 않는 한 그의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클레먼트 애틀리 영국 수상이 워싱턴으로 달려온 것은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영국 신문들이 과장보도해 큰 소동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UN軍은 한국에서 그 임무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 선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원자폭탄도 포함되느냐』고 물었고,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된다』고 대답했다. 그는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무기의 사용에 대해서는 항상 적극적인 검토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원자폭탄 문제와는 별도로 대통령은 『현지 사령관은 적절한 무기를 적절한 목표에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이 두 발언이 결합되었을 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영국 下院(하원)은 맥아더 장군이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이틀 동안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애틀리 수상은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진상을 파악하고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악관은 황급히 대책반을 구성해서 해명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이 보유한 모든 무기에 대해서 그 사용 가능성을 검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아직 그런 허가는 아무에게도 나간 일이 없다. 그런 허가가 있을 경우 현지 사령관은 그 무기의 전술적 운반책임을 지게 된다』고 이 성명은 말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애틀리 수상은 12월3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의 방문 사흘째 되는 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캐나다에 있는 우리 조기경보 레이더에 미국 남동부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비행물체가 탐지된 것이다. 편대를 지어 비행하고 있는 물체는 2~3시간이면 워싱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우리는 모든 요격체제에 경계령을 내렸다. 나는 영국대사 올리버 프랭크스경에게 이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는 애틀리 수상과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이 취소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전화를 했느냐고 그는 물었다. 나는 그저 알려주고, 기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대답했다.
 
  전화가 끝났을 무렵, 우리 고위 직원 한 사람이 사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그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황급히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중요한 문서는 지하실에 내려다 놓고 시골로 가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그렇지 않으면 구금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가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로벳 국방차관이 그 미확인 물체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물체가 「거위」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긴 후퇴… 영국의 패배주의
 
  영국인들은 戰況의 實狀(실상)을 알고 싶어 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은 그들에게 실상을 조금도 가감 없이 설명해주었다. 戰況은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믿기도 어려웠다. 戰況을 집중적으로 다룬 첫날 회의가 끝나기 전 한국에 갔던 콜린스 장군이 돌아와 최신 戰況을 보고했다.
 
  UN軍은 38도선까지 후퇴했고, 10군단이 동해안을 통해 철수할 수 있는 전망도 밝아졌다는 보고였다. 합참이나 맥아더 장군 모두 서울 이남의 방위선을 지킬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한국 철수론은 당분간 진정되었다.
 
  애틀리 수상은 中共과의 전쟁을 중지하고, 유럽의 안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에 파견된 美軍이 취약하기 때문에 휴전을 맺어서 그들을 철수시키려면 代價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과 대만에서 철수하고, 中共에게 UN 대표권을 주는 것은 별로 비싼 代價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시아에서 호의적인 여론을 확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역설했다.
 
  나는 미국의 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반박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마셜 장군은 西태평양 지역에서 우리 방위공약을 유지하고, 아시아인들이 우리 戰力을 믿게 하는 것이 그들의 호의적인 여론을 얻는 길이라고 반박했다.
 
  애틀리 수상의 워싱턴 방문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원자탄 사용 문제는 미묘한 줄다리기 끝에 해결되었다. 나는 美國 대통령은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합법적 권한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입장을 바꾸려고 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議會(의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성명으로 타협되었다.
 
  『대통령은 세계의 상황이 원자탄 사용을 요청하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또 수상에게 이 상황을 변화시킬지 모를 발전에 대해서 항상 수상에게 계속 통보하려는 열망을 전했다』 
  
  
  한국 포기, 美軍 철수 논란
 
  12월23일, 엄청난 불상사가 발생했다.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탄 지프가 얼어붙은 한국의 도로에서 충돌하여 사망한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는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되었다. 그 이틀 후, 리지웨이는 곧 10군단과 합치게 될 8군사령관에 취임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이 『8군은 자네 것이야. 자네 마음대로 하게』라고 말했다고 합참에 보고했다.
 
  12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나이더 재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그리고 나를 블레어 하우스로 불러 전략회의를 열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 대한 지침을 수정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한국의 중요성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中共軍의 戰力을 충분히 파악해서 군사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전에는 UN軍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어느 특정 선을 지키기보다는 공군과 해군, 그리고 한국군을 포함한 地上軍(지상군)을 동원해서 中共軍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강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의 군대는 궁극적으로 日本을 방위할 책임도 있으므로 섬멸당할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주장했다.
 
  다음날 합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새로운 지침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냈다.
 
  1. 현재의 UN軍 전력으로 한반도內 어느 지점에서 我軍(아군)에게 중대한 손실 없이 적군을 저지할 수 있고, 中共의 군사적 및 정치적 위신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미국의 國益(국익)에 큰 중요성을 가진다.
 
  2. 전면전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합참은 한국에 미군 추가병력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3. 따라서 귀관의 지침은 이제 귀관 휘하부대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한반도內 적군에게 가능한 최대의 손실을 입히면서 연속된 지점을 방위하는 것이다.
 
  4. 질서 있는 철수를 위한 마지막 합리적인 기회에 대해서는 합참이 사전에 결정을 내릴 것이다. 철수를 결정하게 될 조건에 대해서는 맥아더 장군의 의견을 요청할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이 지침을 받고 자기 생각을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지침은 韓國에서 승리할 의사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美軍을 증강하지 않겠다는 것은 「非현실적」이고, 美 8군에게 日本방위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그 대신 네 가지 건의를 했다. 『중국 海岸(해안)을 봉쇄하고, 중국의 공업시설을 폭격으로 파괴하고, 臺灣의 국부군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국부군의 중국 본토 작전을 장려해야 한다. 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병력도 증강시켜 주지 않는다면, 釜山으로 후퇴하는 것만이 합참에서 생각하고 있는 한국 철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1951년 1월9일, 합참은 다시 같은 지침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면서, 그의 일차적 임무가 「휘하부대의 안전과 日本 방위」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의 부대를 日本으로 철수시킬 권한도 부여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맥아더 장군은 이 지침을 들어 합참이 자기 건의를 수락했다고 주장했다. 
  
  
  戰況이 反轉되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없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는 합참을 통해 세 번이나 같은 지침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는 또 조셉 콜린스 장군과 호이트 S 반덴버그 장군을 한국에 보내 실상을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1월12일에 보낸 두 번째 지침은 콜린스 장군이 직접 가지고 가서 맥아더 장군 앞에서 낭독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1월17일, 한국에서 돌아온 콜린스 장군과 반덴버그 장군의 報告(보고)는 고무적이었다. 戰況은 일변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갔다는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세를 준비하고 있으며, 한반도 밖으로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라는 합참의 지시에 아무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맥아더 장군까지도 『「이제 아무도 美軍을 바다로 몰아내지 못한다」고 호언했다』고 보고했다.
 
  한 달도 안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후퇴는 끝이 났고, 미군의 사기는 되살아나 전진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北進은 2월 중순 中共軍의 大공세로 잠시 주춤했으나 3월7일의 「킬러 작전」까지 발전했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中共軍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주는 작전이었고, 또 그 목적은 달성됐다.
 
  3월15일, UN軍은 서울을 다시 收復(수복)하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았다. 4월9일에는 UN軍이 38선 북방에 캔사스 라인을 구축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 선을 지키면서 중공군의 다음 공세에 대비했다. 美國 정부는 이제 美軍이 中共軍의 어떤 공세도 저지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 철수론」도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다.
 
  합참이 몇 차례 보낸 지시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이 계속 언론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자, 마셜 장군과 나는 대통령에게 직접 親書(친서)를 보내서 경고해 달라고 건의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우리가 마련한 초안을 기초로 오랜 고심 끝에 친서를 작성했다. 그는 한국사태가 가장 큰 관심사라는 말로 이 친서를 시작하면서, 침략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열거했다. 그는 蘇聯의 개입을 강력히 저지하기 위해 UN에서 강력한 지지를 확보해야 하고, 이 때문에 전쟁확대를 회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친서는 맥아더 장군의 「훌륭한 리더십」과 그의 부대가 이룩한 「뛰어난 업적」을 높이 찬양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되어 맥아더 장군은 다시 변명과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2월13일, 한반도의 미래가 『현지에서 알 수 없는 국제적 고려와 결정』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는 신속한 철수, 적의 보급선 연장, 폭격의 「천문학적인 증가」에 따른 敵의 보급난 증대 같은 對중공군 전략은 좋은 성과를 올렸다고 하면서도, 「中國 영토가 聖域이라는 전례 없는 군사적 이점」 때문에 계속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통일 포기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의 국방부와 싸우고 있는 동안,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 戰線(전선)에서 敵과 싸우고 있었다. 8군은 10군단과 힘을 합치게 됨에 따라 사기가 올라갔고, 戰力이 집중되어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의 임무는 지역 수복이 아니라 敵의 섬멸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敵이 공세를 펴기 전에 철수해서 敵을 준비된 火網(화망) 안에 끌어들이는 작전까지 사용하면서 대단히 효과적으로 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군대는 계속 北進(북진)을 해서 다시 38선에 접근했다.
 
  이에 따라 무초 대사와 국무부 및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 새로운 정책을 토의하게 되었다. 이 협의에서 우리는 환상을 버리고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그 목표는 침략을 격퇴하고, 再무장된 유능한 한국군이 북한군과 대치하는 경계선을 구축한 뒤, UN軍 大부대가 단계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평화적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는 비록 요원하긴 하지만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우리가 지킬 線은 38도선 이북이어야 하고, 현실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전술적으로 방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같은 목표에 따라 리지웨이 장군은 그의 군대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敵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2년 동안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런 선을 찾아냈고, 결국 그것이 휴전선으로 낙착되었다.
 
 
  『맥아더가 미쳤다』
 
  『神(신)은 파괴할 사람을 먼저 미치게 만든다』고 유리피데스는 말했다. 맥아더 장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성공에 대해서도 『아코디온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냉소적이었다. 그는 아무리 中共軍 병사를 죽여도 中國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 1951년 3월7일, 그는 적군의 전쟁능력을 공격하지 않으면 전선은 곧 군사적 정돈상태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리지웨이 장군이 침략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방위가 가능하고 유리한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있었다.
 
  3월15일, 맥아더 장군은 軍사령관들에게 허가 없이 언론에 성명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한 대통령의 12월6일자 명령에 공개적으로 도전, UP통신 사장 휴 베일리에게 8군의 진격을 38도선에서 중지시킨 것과 「한반도 통일 임무」를 포기한 것을 비판하는 글을 보냈다.
 
  9일 후, 그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계획을 사보타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더 이상 대규모로 北進을 하기 전에 외교적으로 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동맹국과 협의하고 있었다. 3월21일, 대통령은 UN軍 사령부가 한반도의 광범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휴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UN 참전국 정부에 보냈다.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 전날,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 주고, 휘하부대의 안전을 위해 다음 몇 주일 동안 敵과 계속 전투를 벌이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있다고 대답했다.
 
  3월23일, 밤 11시, 로버트 로벳 국방차관과 국무성의 딘 러스크, 루시어스 배틀이 그날 아침 (東京 시간 3월24일) 맥아더 장군이 발표한 성명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로벳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을 즉각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성명을 읽어 보고 그가 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합참과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었다.
 
  자화자찬으로 시작된 그 성명은 中共의 군사력은 과장되어 있으며, 現代戰(현대전)에 필요한 공업기반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성명은 中共軍의 약점이 드러났고, 절대로 한반도를 정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부과된 규제만 풀어서 中共의 해안지역과 내부 기지를 공격할 수 있다면 中共軍은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같은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臺灣 문제나 中共의 UN 議席(의석) 같은 것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UN 사령관의 자격으로 敵의 사령관과 만나 UN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군사적 방법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대통령은 우리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그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분노를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우리에게 12월6일자 명령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貴官에게 1950년 8월6일 발송된 그의 명령에 유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951년 3월20일 貴官에게 제공한 정보를 고려하여, 앞으로 貴官의 성명은 12월6일자 명령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조정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만약 공산군 지도자들이 戰場에서 휴전을 요청하면 즉각 합참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도록 지시했습니다』 
  
  
  『맥아더를 해임하라』
 
  이로써 맥아더의 언론작전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그 여진은 계속되었다. 1951년 4월5일, 하원 공화당 총무 조셉 W. 마틴 의원은 臺灣의 국부군을 한국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조한 맥아더 장군의 3월20일자 서한을 하원에서 낭독하면서 행정부를 공격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서한에서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고, 외교관들이 말로만 싸우고 있는 동안 자기는 무기를 들고 한국에서 유럽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前略/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에서 패배하면, 유럽의 패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승리를 하면 유럽은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자유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하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같은 날 英國의 런던 데일리는 영국군 H. G. 마틴 중장이 맥아더 장군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맥아더 장군은 UN군이 여러 가지 인위적인 제한에 걸려 있다고 하면서 전쟁 중 사령관의 진정한 목적은 敵을 섬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전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미시간州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호머 퍼거슨은 의회조사단을 東京에 파견해서 맥아더 장군의 견해를 직접 청취하자고 제의했다.
 
  4월6일, 閣議(각의)가 끝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날 나와 마셜 장군에게 만나자고 했다. 나는 즉각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문제의 해결책은 단 한 가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백악관에 모였으나 결론은 내리지 못했고, 4월9일 월요일 아침 백악관에 다시 모였다.
 
  이 회의에서 마셜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주재한 합참회의가 만장일치로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하자고 건의했다고 발표하고, 그와 브래들리 장군도 이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도 같은 의견이라고 하면서, 후임자를 추천하라고 말했다. 이들은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을 추천했고, 대통령은 수락했다. 나와 해리먼은 이 결정을 환영했다. 우리는 다음날 모여 이 조처에 필요한 명령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4월10일 오후,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는 데 필요한 서류를 받았다. 이 서류는 釜山에 있는 무초 대사에게 민간 통신회사에 의뢰해서 암호전문으로 발송해 戰線을 시찰 중인 페이스 육군장관에게 전달하고, 페이스는 즉시 그것을 가지고 東京으로 날아가 맥아더 장군에게 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軍 통신망을 통해 직접 전달하는 것보다 그 편이 맥아더 장군의 체면을 세워 주고, 누설될 위험이 적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 장군과 함께 전선에 나가 있던 페이스 장관은 우박이 쏟아지던 텐트 안에서 이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들은 釜山으로 가서 서류를 정리한 다음 東京으로 날아가 기다리고 있던 맥아더 장군을 만났다. 
  
  
  일치된 목표
 
  우리는 언론과 의회로부터 날아올 치열한 포격을 조용히 기다렸다. 맥아더 장군은 美國으로 돌아와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의회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했고, 5월3일에는 상원 외교위원회와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진상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리처드 러셀 의원이 의장이 되어 진행된 이 청문회는 8주간이나 계속돼 많은 비밀자료가 공개되었지만, 폭발성이 강했던 맥아더 장군 문제는 그런대로 종식되었다.
 
  리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의 자리를 인계받은 뒤 UN軍은 캔사스 라인에서 진지를 구축하면서 증강되고 있는 中共軍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그 대비책의 하나로 중부전선에서 그의 부대를 북쪽으로 더 진출시켜 유타 라인을 구축하고, 다시 와이오밍 라인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지 10일 뒤에 시작돼 새 8군사령관이 된 밴플리트 장군의 반격으로 중간 수정을 하면서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중공군의 강력한 압력으로 한국군 부대가 잇따라 붕괴되어 戰線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에 8군은 후퇴하긴 했지만, 방어선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우리 軍은 38선으로 후퇴하면서 敵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
 
  中共軍의 1차 대공세가 끝나자 리지웨이 장군은 공격을 재개해서 라인을 회복하고 그의 부대가 분산되지 않도록 마련했다. 中共軍은 5월 중순에 다시 공세를 폈으나 UN軍의 반격으로 큰 손해를 입고 38선 북방으로 패주했다. 8군은 이들을 침착하게 추격하여 캔사스 라인을 회복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 처음으로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그리고 東京의 UN軍 총사령부가 정치적 목표와 군사적 전략 및 전술 등 모든 분야에서 의견이 완전히 일치되었다. 정치적 목적은 침략을 저지하고, 통일은 나중에 정치적 방법으로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전략은 캔사스·와이오밍 라인과 그 북방의 펀치볼에서 敵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전술은 치밀하게 짜놓은 우리 火網 안으로 敵을 유인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中共軍을 국경지대로 추격하면 우리 戰力은 분산되고, 敵의 보급과 증강을 초래해서 그들의 戰力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한편 UN과 세계 여러 곳에서 한국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 무렵 우리와 함께 일했던 조지 케넌(前 駐소련 미국 대사)은 국무부에서 휴가를 얻어 프린스턴에 있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조셉이 1949년 말리크와 접촉해서 베를린 봉쇄문제를 해결했던 사례를 상기한 닥 매튜스는 케넌에게 5월 중순 나와 함께 워싱턴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 우리는 蘇聯 전문가인 케넌이 말리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蘇聯 정부가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떤 제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는 케넌이 어떤 협상을 하기보다는 우리 정부의 의도와 목적을 蘇聯 정부에 명확하게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케넌은 그렇게 해 보겠다고 동의했다. 
  
  
  조지 케넌이 나서다
 
  케넌은 뉴욕에 있는 蘇聯 UN 대표부의 말리크가 머물고 있던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만자자고 했다. 말리크는 즉각 롱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으로 오라고 그를 초청했다. 5월31일, 케넌은 프린스턴으로부터 자동차를 운전해서 롱아일랜드까지 갔다. 그들은 만나 러시아語로 이야기를 했다. 말리크는 흥분했는지 과일과 포도주, 쟁반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케넌은 조심스럽게 문제의 핵심에 접근했고, 말리크는 즉답은 피하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1951년 6월5일,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 말리크는 蘇聯 정부는 평화를 원하고 있고, 가능한 빨리 한국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北韓이나 中共과 접촉해 보라고 충고했다.
 
  6월23일, 말리크는 UN의 라디오 방송에 나와 소련 인민은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그 첫 단계로 交戰(교전) 당사국이 휴전을 협상해 38선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일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양측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발언은 공식적이었던 것 같았지만,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스크바 주재 커크 대사는 그것이 蘇聯 정부의 공식입장이라고 확인했다.
 
  UN의 참전국 대사들은 모여서 한국전쟁을 협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찾아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휴전협상은 UN보다는 UN軍 사령부에서 추진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美國이 中國과 北韓을 승인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臺灣 문제나 中國 대표권 문제 같은 골치 아픈 문제를 건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中共 정부나 蘇聯 정부는 한반도에 있는 中共軍이 「의용군」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군인들은 이런 골치 아픈 임무를 맡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명령하자, 이들은 그 임무를 수락했다. 우리는 무초 대사를 통해 우리들의 생각을 李承晩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얼마 후 무초 대사는 골칫거리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통일에 미친」 李承晩 대통령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전투를 어떤 경우에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東京 시간으로 6월30일, 리지웨이 장군은 방송을 통해 한국內 공산군 총사령관에게 휴전과 정전을 협상할 용의가 있으면, 대표를 파견해서 협의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성명은 맥아더 장군이 3개월 전 정부의 허락 없이 발표했던 성명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지만, 그 효과는 달랐다. 리지웨이 장군은 6개월간의 노력으로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했고, 戰況은 일변했다. 그는 또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7월2일, 공산군 사령관은 리지웨이 장군의 성명에 호의적인 답변을 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만나자고 했으나, 共産軍은 개성을 주장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 제의를 수락하고, 양측 대표는 7월10일 개성에서 만났다. 
  
  
  38선에 대한 소련의 역사적 인식
 
  共産 측은 처음부터 宣傳戰(선전전)으로 일관해 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들은 38선을 다시 양측의 비무장 분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는 수락할 수 없었다. 우리는 캔사스 라인의 이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두 번째 요구는 美軍은 美 본토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7월19일, 마셜 장군은 24일, 외국군 철수 문제는 정치 문제이기 때문에 휴전을 협상하는 軍사령관들의 협상 과제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평화가 확고하게 수립될 때까지 UN軍이 한반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휴전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던 李承晩 대통령도 우리들의 성명을 환영했다. 한국 국회도 감사의 메시지 결의를 채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정책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놀랍게도 共産 측은 그들의 주장을 포기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線을 휴전선으로 요구하지 않았고, 외국군 철수도 더 이상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핵심적인 요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 협상이 2년 이상 계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첫 議題(의제)인 휴전선 문제가 합의되는 데도 6개월이 걸렸다.
 
  왜 共産 측은 그렇게 끈질기게 38선을 휴전선으로 하자고 주장했을까?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종식된 후 나는 전문가들과 당시의 협상상황에 대해서 토론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몇몇 전문가들은 우리가 개성에서 38선을 휴전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을 때, 蘇聯과 中共은 놀라고 사기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첫째 이유로 케넌이 말리크와 처음 만났을 때, 8군은 38선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서부전선은 그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케넌은 휴전선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리크는 UN의 라디오 방송에서 양측이 38선으로부터 서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회담에서 전적으로 군사적인 문제만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日本이 항복한 후, 美國은 38도선이 전적으로 군사적인 線일 뿐, 정치적인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 측은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몰랐지만, 더 중요한 것은 38도선이 露日戰爭(노일전쟁)이나 日本의 韓國倂合(한국병합) 이전까지 帝政 러시아나 日本에게 대단히 중요한 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전까지 日本은 두 세력간의 분계선으로 38도선을 주장했으나, 러시아는 그들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하고 있던 蘇聯과 蘇聯을 위해서 代理戰(대리전)을 치르고 있던 中共은 우리가 새로운 線을 주장한 것이 군사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위신이 큰 손상을 입게 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전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나는 中共은 蘇聯보다 추구하는 목표가 좁고 단기적이라고 생각했다. 蘇聯은 한반도를 장악해서 서방 측의 방위를 지연시키거나 저지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가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서 우리들의 영향력을 일소하려고 했다.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맥아더 장군의 생각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나는 휴전은 상당기간 준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목표를 위해서 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광적인 통일 열망」을 가진 李承晩 대통령과의 충돌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통일을 방해하는 어떤 방식도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전반적인 해결이나 환상을 추구하지 않고, 방위에 유리하며, UN軍이 상당기간 머무를 수 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전투를 종식시킬 수 있는 停戰(정전)을 추구했다. 
  
  
  방어선 구축에 성공
 
  개성회담은 휴전선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 그러다가 8월20일, 공산 측은 「전선의 일반 지역」 대신 「접촉선」을 휴전 분계선으로 고려하겠다고 제의, 협상이 진전될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제의의 의미를 미처 탐색하기도 전에 공산 측은 美軍機(미군기)가 개성에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주장하면서 회담을 거부했다. UN軍 사령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9월6일 새 장소에서 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나흘 후 美軍機 한 대가 실제로 개성의 회담장에 기총소사를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美軍은 적절한 징계조처를 취했다. 공산 측은 만족하고 개성 이외의 다른 곳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고, 그 절차를 둘러싸고 양측은 다시 긴 협상을 계속했다.
 
  지지부진했던 협상과는 대조적으로 전황은 호전되었다. 우리 軍은 평양-원산 선으로 진격할 생각을 버리고, 펀치볼 일대의 敵 진지를 탈환해서 캔사스 라인을 좁혀 방어력을 강화했다. 美 8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피의 능선」을 탈취했고, 오른쪽 측면을 위협하고 있던 단장의 능선은 10월 중순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이로써 캔사스 라인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같은 戰況 변동 때문인지, 한 주일 후 中共은 판문점에서 회담을 재개하자는 리지웨이 장군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워싱턴에서는 대공세를 취해서 회담을 빨리 끝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령관이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해서 많은 人命을 잃지 않은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나에게 방위선을 완전히 구축한 다음에는 대공세를 취하지 않겠으며, 人命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국무부에서는 韓國戰(한국전)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낙관적 보고서」는 협상으로 한반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으로,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판적 보고서」는 무시무시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중국內 기지 폭격, 禁輸(금수) 조처, 蘇聯의 극동 또는 中東 개입, 日本의 再무장 같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거되었다. 모두가 위험하고 저들이나 우리 어느 쪽에게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 딘 애치슨은 누구인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아래서 1949년부터 국무장관으로 일했던 딘 애치슨은 한국전쟁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시사한 1950년 1월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로 金日成이 南侵을 추진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애치슨은 실제로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진 이후부터 1953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 마무리될 때까지 이 전쟁의 정책을 전적으로 운영해 왔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는 美國의 보수파로부터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전쟁을 中國 본토로 확대해서라도 한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던 맥아더 장군 해임에 앞장섰다. 결국 그는 같은 성향의 조지 마셜 국방장관과 함께 한국전을 擴戰(확전) 없이 사실상 전쟁 이전 상태로 봉합했다.

이 글은 한국전쟁 휴전 50주년을 맞아, 그의 자서전(「Present at the Creation」)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부분을 뽑아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개입하는 과정, 중공군의 대공세로 제기된 한반도 철수론과 워싱턴의 심각한 敵前 분열 그리고 결국은 UN軍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 해임을 추진하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렸던 이 전쟁기록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도움을 요청하던 張勉 대사의 울음과 李承晩 대통령의 「광적인 통일 열망」 이외에는 언급된 것이 없다.

애치슨은 1971년 10월12일, 메릴랜드州 샌디스프링 자택에서 사망했다.

월간조선 2003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