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역사성
■ 일시 : 2003년 9월 27일(토) 10시~18시
■ 장소 :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모의법정
■ 주최 : 사단법인 역사문제연구소
■ 후원 : 한국학술진흥재단
차 례
재건국민운동 ;‘반동적 근대주의자’들의 접합과 분화 - 허 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교육과 경제성장 - 오성철
남북한 근대화전략: 박정희식 발전 모델의 북한적용 가능성 - 김연철
박정희 체제와 두 가지 문학의 부활 - 김재용
박정희 시대의 군대와 군사문화 - 노영기
<부록>
박정희 시대 교육관련 연표 및 자료
행사일정
10:00 ~ 10:10 인사말
오전발표
10:10 ~ 11:00
재건국민운동-‘반동적 근대주의자’들의 접합과 분화
발표: 허 은(고려대) 토론: 전재호(서강대)
11:00 ~ 11:50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교육과 경제성장
발표: 오성철(청주교대) 토론: 이기훈(역문연)
11:50 ~ 13: 20
점심시간
오후발표
13:20 ~ 14:10
남북한 근대화전략-박정희식 발전 모델의 북한 적용 가능성
발표: 김연철(고려대) 토론: 김성보(충북대)
14:10 ~ 15:00
박정희 체제와 두 가지 문학의 부활-국민과 민족의 길항
발표: 김재용(원광대) 토론: 이태훈(역문연)
15:00 ~ 15:50
박정희시대의 군대와 군사문화
발표: 노영기(조선대) 토론: 한홍구(성공회대)
종합토론
16:00 ~ 18:00
박정희시대의 역사성
재건국민운동
-‘반동적 근대주의자’들의 접합과 갈등 -
허 은 (고려대)
1. 머리말
2. 분단국가 국민운동의 갈래와 수렴
1) 勝共을 위한 國民運動
2) 1950년대 ‘국민운동’의 갈래와 수렴
3. 국민운동 노선의 갈등과 운동의 효과
1) 재건국민운동 조직과 재편
2) 재건국민운동의 진로 - 갈등의 지점
3)재건국민운동의 역할 - 福祉國家
3. 맺음말
1. 머리말
6·25전쟁과 남북대결, 미국의 전면적 개입 등을 수반하며 진행되었던 1950년대 남한의 근대화는 공산주의와 서구적 근대를 비판하며 새로운 근대의 내용을 모색했던 일군의 집단들을 배태시켰다.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1950년대 미국 주도 근대화에 가장 많은 세례를 받았던 군대와 지식인 집단 내에서 형성되었고, 근대화를 위한 계몽과 인간개조를 외치면서 국가, 민족, 전통 등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는 재건국민운동을 일제시대와 1970년대의 중간에 위치한 위로부터 관제운동으로서 보다는1) 1950년대 국가에 의해 추진되었던 ‘근대화’에 대한 다양한 대응들의 접점으로서 주목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 접점의 내용과 외연을 파악하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에 모아졌던 국민운동의 흐름과 내적 갈등을 추적하고 공산주의/파시즘/자유주의의 극복을 강조했던 집단과 그 지향들의 귀결을 살펴보고자 한다.2)
2. 분단국가 국민운동의 갈래와 수렴
1) 勝共을 위한 國民運動
재건국민운동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 운동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의 시대인식과 이념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군사쿠데타 세력이 권력장악 직후 곧바로 추진했던 재건국민운동에 일군의 민간인들이 왜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참여했는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던 兪鎭午와 柳達永 두 인물을 통해 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 집단의 지향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초대 본부장을 맡았던 유진오는 군정초기 군사쿠데타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2대 본부장 유달영은 군정 전 기간에 걸쳐 재건국민운동을 이끌며 운동의 민간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러므로 이 양 본부장이 지녔던 세계관과 동시대 인식에 대한 검토는 군사정권과 민간인들간의 연결고리를 확인시켜 줄 것이다.
유진오가 정치집단의 능력과 시대상황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보다 ‘勝共’에 대한 適否였다. 제 2공화국 시기를 ‘혁신세력의 발호로 민족이 북한공산 괴뢰집단의 손아귀에 빠질 뻔했던 시기’로 규정했던 그에게 장면정권은 혁신세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권으로 그려진다. 그가 의미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비판에 무기력한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파시즘과 적극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는 근대국가는 국민전체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방법을 가진 경제체제를 위한 훈련’을 받아, ‘거대하고 규율이 있는 조직에서 전문적이며 협소한 차원에서 반복되는 일을 맡아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회’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남한에서 당장 추진해야 할 사업은 반실업의 상태에 빠져있는 농민들을 거대한 규율사회에서 경제주체이자 정치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신과 생활규범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3) ‘근대 자유국가’에서 평등보다 규율사회에 순응하는 自律이 근대적 인간형의 덕목으로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4)
유진오는 역사적으로 서구 근대민주주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를 흡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서구화 자체를 논리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실제 남한사회의 서구화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精神’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 ‘外形’만 모방하는데 그쳤다고 비판했다. 서구모방과 민주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민주주의 교리의 암기가 아닌, ‘自主自律·獨立不羈’의 자율적 정신을 내면화시키는 것이었다.5) 그런데 자유민주주의가 자연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곳, 민주주의 후진국인 남한에서는 민주주의를 의식적으로 육성해야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6) 따라서 그가 재건국민운동에 본부장을 맡았던 동기는 단순히 ‘군부와 기성정치인 사이에 가교역할’ 이라는 상황에 대한 기능적 대처 차원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 속에 명확한 참여 논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편, 2대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취임한7) 유달영은 재건국민운동의 순수 민간운동 전환과 자주자립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통한 군정 조기종식이 자신의 뜻임을 명확히 표명했다.8) 2공화국에 대해서 유달영은 ‘무자각 한 국민들의 극단적 이기주의, 무제한의 자유 남용 등이 혁명(4월혁명)의 불꽃을 사라지게 만들었던’ 시기로 평가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는 유진오와 마찬가지로 기존 정권의 통치방식이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이승만식 반공정책은 ‘증오의 감정만을 키우는 반공’이며 이러한 방식은 궁극적인 勝共을 가져올 수 없었다. 더구나 ‘썩은 정객과 매국적 모리배’들에 의해 주창되는 감정적 반공은 공산당보다도 국가와 민족에게 해로운 것이었다. 이에 대신 그가 승공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은 ‘높은 윤리에 터잡은 국민정신, 순화된 종교, 건전한 경제생활, 문화의 순조로운 발전’이었다.9)
전통을 부정하는 서구화를 유달영은 인정하지 않았다. 전통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보수란 그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문화흡수의 가장 올바른 자세는 보수적인 토대에 새것을 끊임없이 건설하며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다.10)
그는 민족이 ‘大我的 自我’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대주의와 이기주의를 근원적으로 뿌리뽑아야 한다고 보았다.11) 사대주의와 이기주의를 벗어나 역사진전을 시작하기 위한 일차적인 과제는, 덴마크의 그룬트비가 했던 것과 같이, 민중들이 무지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달영은 자립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민주주의 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적 계몽만큼이나 농촌의 문화적, 경제적 향상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12) 그러므로 대아적 자아를 찾기 위한 국민운동은 사대주의와 이기주의를 일소하는 정신혁명과 생활체제 개선을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요컨대, 유진오, 유달영은 모두 승공과 자유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해서는 밑으로부터의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서구에 대한 단순한 모방을 거부하며 자유(방임)주의와 공산주의의 양자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모색했다. 그 형태와 내용은 논리적 완결성을 갖지는 못했으나, 규율의 내재화와 전통을 중시하는 형태로 드러났다.
2) 1950년대 ‘국민운동’의 갈래와 수렴
유진오, 유달영 두 민간인 본부장을 통해 살펴본 지향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과 어느 정도의 외연을 확보하고 있었는지를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의 성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자.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의 최대 외연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의 명단을 통해 대략 확인할 수 있다. (<표1><표2>참조) 중앙위원회는 재건국민운동 사업에 대한 심의 결의기관으로서 조직 위상으로만 본다면 운동의 최고기관이었다.13) 본부 중앙위원회에 참여했던 성원들의 이전 활동과 지향을 검토해보면 세 가지의 운동을 통해 긴밀한 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과 그 운동 자체들도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차원에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① 新生活運動
대한민국은 국가수립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국민들에게 생활규범을 제시하며 새롭게 재편하고자 했다. 정부가 주도한 일련의 생활규제 시도들은 그 성과여부와는 별개로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생활양식과 공동체의 규범을 끊임없이 제어하며 규율된 국민을 만들어 가고자 했음을 보여준다.14)
그런데 유달영이 생각한 신생활운동은 관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신생활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부터 척결하는 그리고 밑으로부터 구심체가 만들어지고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방식을 구상했다. 4·19이후 대학생들 주도의 신생활 운동에 대해15)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는데, 그는 신생활운동을 당면 사회혁명의 주된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운동이 학생운동에 한정되지 말고 사회에서 신생활운동의 구심체가 수립되는 방향으로 확대되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16)
그러나 학생층과 일군의 지식인 집단 간에 신생활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치했는지는 의문이다. 학생들의 신생활운동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와 1960년 말부터 조직적인 통일운동이 전개되는 것과 맞물려 점차 약화되었던 반면,17) 1961년 3월 유달영은 李寬求, 金八峰, 金基錫 등과 같이 ‘新生活協議會’를 조직하여 ‘國民 新生活運動’의 지표를 천명했다.18) 달리 말하면 학생운동 주도세력과 혁신세력들이 통일을 당면과제로 제시했던 시점에, 이들 지식인 집단은 민족통일이 비극적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튼튼한 기초’를 쌓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했던 것이다.19) 이 범국민 신생활운동의 제창 논리는 분명히 혁신계와 일부 학생층과는 다른 통일관을 전제하고 있다. 통일은 남한사회의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시점까지 미루어져야 하고 그래야만 ‘비극적 통일’로 귀착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관구는 쿠데타 이후 ‘신생활운동-재건국민운동-자주적 통일달성’ 간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밝혔다. 신생활운동은 재건국민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재건국민운동의 목적은 ‘자주 통일’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기 위한 운동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서 ‘자주통일’이란 북한과의 대결을 통해 통일에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통일은 주도권을 장악할 때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대결자세를 확고히 하고, 경제재건을 통한 실력양성이 달성될 때까지 미루어진다. 이 통일방식은 이관구의 표현을 빌리면 ‘實力을 갖춘 뒤에 統一’인 것이다.20)
② 기독교 농촌운동과 민족주의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 참여자들을 묶어주는 다른 범주가 ‘기독교 농촌운동’이었다.21) 裵敏洙와 유달영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22) 기독주의 농촌운동의 주창자들은 실천적으로 농촌의 물질적 경제자립과 정신적 복음화를 통한 자립적 기독교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고23),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24) 함께 자본주의 체제의 부정적인 면을 죄악시했다. 利己主義와 個人主義가 共産主義(또는 國家社會主義)의 출생의 근원을 제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병폐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전체가 하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하나가 전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민주주의와 협동생활’의 실천이 제시되었다. 相互扶助는 ‘現世天國’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단계인 ‘現世王國’을 구축하기 위한 방안이며, 그 복음의 대상은 가장 빈곤한 농민들로 설정되었다.
배민수나 유달영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민중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가 불교, 유교의 뒤를 이어 민족의 정신적 중추가 되기 위해서는 농촌 민중 속에 들어가 지반을 닦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25)
그런데 유달영은 전후 친미적 성향이 더욱 강화된 배민수와 달리, 이승만 정권에 밀착되어있던 50년대 기독교계를 비판하며 외국 종교계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이식하려는 ‘종교의 식민지화’를 경계했다.26) 여기서 유달영이 기독교 인사 중 함석헌, 김재준과 같이 1950년대 사회 참여적이며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인물들을 중앙위원회에 참가시켰던 또 다른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유달영과 함석헌은 이미 ‘무교회신앙운동’ 시기부터 민족주의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함석헌의 민족정신 강조는 유달영과 달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지양을 명확히 전제했다. 그는 군사쿠데타 직후에 民族改造의 필요성을 지적했으나, 그 맥락은 쿠데타세력들과 다른 각도에 맞추어져 있었다. 민족개조의 필요성은 ‘民族至上主義, 民族神聖主義’로의 복귀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의 자기반성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민족지상주의를 탈각한 세계국가, 인류파탄을 극복하는 평화주의, 우주시대에서의 과학과 종교의 화해들을 주목했다. 따라서 그는 후진국의 사대주의와 역사주체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그 종착점은 민족주의/국가주의를 탈각하는 ‘民族改造論’을 제시했다.27) 함석헌의 민족관은 군사정권의 민족정신 강조가 국가주의로 귀결될 때 이들과 분화될 수밖에 없는 내적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③‘國民思想運動’
‘국민사상운동’은 민족 통일과 부흥의 돌파구를 민족사상(문화)의 발견, 창조에서 찾으며, 그 사상을 국민에게 확대시키고자 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표1>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중 金基錫, 朴鍾鴻28), 張俊河29), 金八峰30), 金凡父 등이 예기에 해당된다. 김범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6·25 戰時에 창간되었던 잡지 ‘思想’과 이를 뒤이은 ‘思想界’를 매개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31) 일부는 신앙과 地緣으로 묶여 있었다.32)
事大와 依他 黨爭을 비판하고, 통일과 경제부흥을 위한 ‘전 민족의 상과 이념의 통일’을 주창했던 잡지 ??思想??은33) 戰時에 자신들이 직면했던 현실을 평가하며 민족과 국가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좌담회를 개최했다.34) 同族간에 전쟁을 벌이는 현실과 냉전의 전선에 위치하여 실험대가 된 현실은35) 단순히 반공을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들이 직면한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찾고자한 민족사상은 무엇인가. 金基錫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경제 및 사상체계를 놓고 대립투쟁하고 있으나, 생활태도나 인생관을 기준으로 놓고 평가할 때 양자 모두 ‘개인의 이익만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功利主義’라 규정했다. 양진영은 궁극에 역사를 궤멸할 존재들로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실험대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은 ‘唯物論과 唯心論을 지양한 主體性의 哲學’, ‘資本主義와 共産主義를 함께 定罪하는 義의 思想’이 되어야만 했다.36)
역사상의 국가는 勸力國家, 文化國家 그리고 道義國家로 구분되었다. 물론 현대국가는 힘과 문화와 道義를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그 비중이 같지 않고, 국가의 근간과 주도력으로 삼아야 할 것은 道義로 설정되었다.37) 국가는 가족이 사회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정립된 ‘倫理의 自覺態’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익추구에 빠져 사회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막는 존재로 상정된다.38) 반면 개인은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헌신할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존재로 위치 지워 진다.39) 서양사는 공리주의에 빠져 도의국가를 체현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에 추종해야할 보편사도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사도 아니다. 단지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된다.40)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논리와 서구적 근대의 극복이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속에서 발견된 민족의 指導理念은 協同精神, 家族體精神이었다.41) 이병도에 따르면, 강대국에 둘러싸인 민족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인이 전체를 의식하고 전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정신적인 운동-協同 妥協精神에 있었다.42) 이 정신은 역사상에서 상호규찰, 상호부조, 상호협력의 정신으로 나타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위정자와 평민간에 다양한 제도와 공동체가 조직되었다고 설명했다.
思想運動으로 명명될 때 짚어야 할 점은 그 실천방식이다. 사상운동은 학생, 주부, 농민을 대상으로 생활운동, 윤리운동, 종교운동 등을 매개로 하여 구체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될 때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43) 그러므로 국민사상운동과 신생활운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사상운동은 신생활운동을 통해 구체성이 채워지고, 신생활운동은 운동의 역사적 논리적 정당성을 사상운동을 통해 확보하는 관계인 것이다.44)
요컨대 군정초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의 구성은 내적으로 운동과 사상의 지향에서 편차를 보이며 향후 분화의 소지를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그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 속에서 개인의 위치에 대한 입장이었다.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경향을 보이는 입장과 이를 거부하는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다.
1950년대의 이후 전개되었던 일련의 상황 - 냉전의 실험대가 된 6·25전쟁, 미국문화의 막강한 영향과 사회 가치규범의 혼란, 탈냉전과 남북통일 지향에 무기력함을 보였던 ‘자유민주주의’ - 은 논리적으로 상충하는 입장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었던 것이다.
민족정신, 기독교적 윤리정신, 반공/승공의 논리 틀을 통해 分斷國家를 民族國家로 정립시키고자 했던 이들에게 친일여부는 중요한 논쟁점이 더 이상 아니었다. 유진오, 김팔봉, 이흥렬, 고황경, 오영진 등의 친일행위는 국민운동 주도에 장애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경험은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여타 민간인들의 일제시대 경험과 함께 ‘국민’을 재건하는 자원 중에 하나로 활용되었을 여지가 크다.45)
3. 국민운동 노선의 갈등과 운동의 효과
1) 재건국민운동 조직과 재편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한 후 ‘혁명이념의 범국민적 구현’과 ‘혁명과업의 범국민적 수행’을 목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46) 재건국민운동 조직은 하향식 건설방식을 통해 7월말까지 급속히 조직되었다.47)
재건국민운동에는 앞서 보았듯이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들이 참여했고, 이들은 운동을 민간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유달영은 재건국민운동의 조직 발전단계를 크게 3단계 -완전 하향식 단계, 하향식 관제운동이 민간운동으로 대체되는 단계, 민간운동으로 전환된 단계 -로 구분하며48) 자신이 본부장을 맡은 시기를 두 번째 과도기로 규정했다.
유달영은 2대본부장으로 취임하자 민간운동으로의 전환을 조직개편을 통해 추진했다. 1961년 말부터 다음해 4월까지 진행되었던 지방에서 중앙까지의 조직개편은 가능한 한 관제기구의 성격을 탈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49) 교장이 대장이 되어 하양식으로 운영되던 학교촉진대를 재건학생회로 개편하여 학생이 회장을 맡는 자율적인 자치조직의 모습을 갖추었고, 일제하 전시체제기 말단통제기구를 연상시켰던 再建國民班은 해체되었다. 대신 각 마을에는 일선조직이자 향토건설의 핵심체로서 再建靑年會와 再建婦女會가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재건국민운동 지부 책임자들을 행정관료에서 민간인으로 대체시켜 나갔고, 지부직원들도 공무원에서 촉탁으로 변경시켜 민간인의 참여를 유도했다. 여기에 중앙과 도지부의 자문위원회를 대신하여 심의결의기관인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와 도지부위원회가 설치되었다.50)
재건국민운동의 자문기구를 심의 결의기관으로 승격시킨 것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재건국민운동 중앙회를 통해 쿠데타 세력에 대한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조직위계상 재건국민운동본부에 대한 감독권은 최고회의에 있었다. 그런데 재건국민운동을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시켜갈 때 장애요소는 최고회의와의 형식적 관계보다, 오히려 재건국민운동을 정치활동의 도구로 삼고자 했던 세력들의 개입이었다.51) 재건국민운동본부의 간부뿐만 아니라 각 지부의 차장을 군인이 장악함으로 외부세력이 개입할 소지는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따라서 자문위원회를 결의기관인 중앙위원회로 개편하고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로 인원을 구성했던 것은 민간운동으로서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군부의 개입 여지를 줄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52)
재건국민운동이 민간운동으로서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전기는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의 3차 개정에 따른 조직개편이었다. 1962년 8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서 ‘國民運動恒久化方針’을 결의한 것을 계기로 하여 조직개편이 11월 20일에 단행되었다. 시군구단위의 지부조직은 국가기구로 유지시켜 운동의 항구화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했고, 읍면재건위원회 이하 기구는 법인체로 만들어 관기구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민간운동의 발전토대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각 급위원회의 구성을 상향식으로 전환하여 하급대표를 대거 참가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政治的 中立性’을 요체로 하고 있는 재건국민운동의 항구화 결정은 일단, 국민운동이 비정치적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되어야함을 강조한 주장이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53) 그런데 쿠데타 주도 세력도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재건국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입법조치를 원하고 있었다. 민정이양 시기가 다가오면서 드러나는 군사정권내부의 균열과 갈등 과정에서 재건국민운동이 휩쓸리는 것을 민간인과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모두 원치 않았다.
유달영은 상임위원회의 입법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인 1962년 5월에 이와 같은 의사를 이미 표명했고54), 1963년 벽두에는 국민혁명으로서 국민운동은 결코 향후 여당이나 야당의 소유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여당(쿠데타 주도세력)을 등에 없고 철없이 날뛰는 일부 무자각한 무리들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었다.55)
최고회의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항구화를 발표했다는 것은 군사쿠데타 주도세력에게도 재건국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이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62년 8월 시점은 김종필 중심의 급진세력이 민정이양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사전조직’이 지방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던 때였다.56) 1962년 7월, 재건국민운동 운영부장 심이섭은 도지부차장을 맡고 있던 군부출신들이 ‘사전조직’에 참여하려 하자, 김종필과 최고회의의 힘을 빌어 이들의 정치참여를 막았다.57)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비공식적으로 움직였던 ‘사전조직’이 조직 틀을 완전히 잡기 전에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한 군부출신을 흡수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재건국민운동 도지부차장들이 정당활동을 위해 일방적으로 이탈할 때 사전정치활동과 재건국민운동의 정치도구화라는 사회적 비판을 모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쿠데타 세력내의 갈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더불어 실제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도 1년여의 정도의 기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의 가장 큰 대민기구인 재건국민운동 조직의 와해를 원치 않았다.58) ‘읍면동리 재건위원회, 재건청년회와 재건부녀회는 정치운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정치중립화 조항(29조)은 농민들의 정치활동을 막는 가장 정치적 문안이었기 때문이다.
2) 재건국민운동의 진로 - 갈등의 지점
재건국민운동의 핵심인물인 심이섭 스스로도 비판했듯이 군정초기 운동의 전개는 ‘나열식 행사활동’을 벗어나지 못했고59), 이러한 양태는 일면 군정이 종식될 때까지 계속 드러났다. 그렇다고 재건국민운동 담당자들이 운동의 방향에 대한 초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건국민운동의 담당자들은 항구적 ‘국민혁명운동’을 지향하며, 그 구체화를 위한 방식과 내용을 놓고 균열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1962년 12월 개정법률안은 또한 재건국민운동의 핵심 과제로 ‘향토개발’을 새롭게 배치시켰다.60) 향토개발운동은 정신적 개조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당면과제의 성취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부의장을 맡았던 고재욱은 운동에서 功利主義的 방식을 배제하지 말고 이를 정신적 내용과 병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지역사회개발에 자발적 참여를 통한 ‘독립과 협동’ 정신의 습득이 농민들의 정신개조에 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했고61), 경제수준의 향상이 없이 ‘新生活體制의 확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의 강조점은 生活樣式의 실제 개선에 있었다. 민주주의는 형식적 정치제도가 아니라 생활양식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파악된다.62)
향토개발사업이 전범으로 삼았던 것은 지역사회개발사업(Community Development Project)이었다.63) 지역사회개발 사업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합의 아래 1957년 11월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사업으로, 애초 12개 시범부락을 대상으로 미미한 출발을 했던 이 사업은 쿠데타가 발생한 1961년 5월 ‘國際地域社會開發會議’를 서울에서 개최할 정도로 확대되었다.64) 그런데 지역사회개발 지지자들이 해당 지역사회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농촌사회 구조를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했다는 점65)과 지역사회개발이 미 원조당국에 의해 제3세계의 안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착수되었던 사업이란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66) 지역사회개발은 밑으로부터의 자조협동정신 성취와 동시에 승공의 토대를 마련하는 수단이었다.67) 지역사회개발운동은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에게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독 농촌운동, 민중계몽 그리고 승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신생활체제의 확립에 적절한 구현수단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는 ‘지역사회개발사업’을 재건국민운동본부 산하로 이관시키고자 했다. 재건국민운동중앙회는 1963년 3월과 5월 두 차례 지역사회개발 업무를 본부로 이관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채택했다.68)
그러나 군사정권 농촌지도기구들의 일원화정책에 의해 벌써 1962년 4월에 발족한 農村振興廳에 흡수되었던69) 지역사회개발사업은 재건국민운동본부로 이관되지 않았다. 농촌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요구를 군정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군사쿠데타 세력들이 재건국민운동을 통해 관철하고자 했던 바는 유달영, 고재욱 등과는 각도가 달랐다.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요직을 맡았던 심이섭70)은 국민운동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념체계를 수립하며 국가에 기여하는 운동으로 보았다. 따라서 재건국민운동의 초점을 향토개발과 같은 물질운동 측면보다 정신운동에 더 두었다.71) 이념체계로서 ‘主體的 思潮’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민족 주체의식을 자각함으로써 성취되며, 현대 지도자는 ‘열렬한 민족애, 국가애’를 반드시 구비한 자로 규정했다.72) ‘국가와 민족의 總體運命’을 걸고 벌이는 ‘혁명과업이라는 一戰’은 혁명지도자에서부터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애국일념으로 뭉쳐야만 되는 시점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功利’가 ‘국가적 利益’에 선행될 여지는 추호도 없었다. 국민운동은 ‘국가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救國運動’인 것이다.73)
3) 재건국민운동의 역할 - 福祉國家의 제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의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74) 군정기간 위로부터 국가주도의 국민운동과 밑으로부터 민간주도의 국민운동의 흐름을 하나로 묶어 주였던 지향은 福祉國家의 달성이라는 것이었다.75) 재건국민운동은 쿠데타의 정당성 확보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와 국민의 내용을 새롭게 정의하며 양자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이자 수단이었다.
새로운 국가상과 국민상을 주지시키기 위해 재건국민운동 주체들이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교육사업이었다.76) 1961년 중견지도자에 한정되었던 교육과정은 1963년에는 전 국민을 교육대상으로 삼았다. 국민대상 교육사업은 군단위 교육기관인 향토교육원에서 사범교육을 받은 순회강사들이 각 마을의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교육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살 수 있는 길” 교육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민정이양에 대비해 1963년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추진되었고 대략 1천3백55만8천명을 교육시켰다.77) 이 교육을 통해 민족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국민, 근면자조정신의 국민,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이행하는 국민, 자율적 생활규제를 하는 국민 등이 복지국가 달성을 위한 국민의 자세로 제시했다. 민정이양 전에 이러한 ‘국민’의 자세를 최대한 공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은 교육사업을 골간으로 삼고 여기에 가시적 운동들 전개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과 자율적 국민의 자세를 제시해 나갔다. 승공토론대회 및 반공궐기대회, 國旗尊嚴性昻揚運動, 國民改唱運動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자매부락 결연사업을 추진하며 도시와 농촌의 현격한 불균형 발전에 따른 이질감을 약화시켜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이념이 유포되는 것을 막고, ‘동포애’란 민족정서를 동원하며 국민통합을 강화시키는데 있었다.78)
복지국가 달성이란 구호아래 재건국민운동에서 추진했던 의식주 개편 및 다양한 신생활운동은 국가가 국민들의 일상생활양식에 직접 개입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標準儀禮’과 ‘家族計劃’ 실천을 위한 활동이다. 전자는 1955년 실패했던 의례간소화운동을 이어 받아, 이를 제도화시키며 국민운동을 통해 전통적 생활규범 개편을 강제하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표준의례는 재건국민운동 시작되자마자 시안위촉, 초안작성에서부터 여론수집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961년 9월 19일 제정 공포되었다.79) 가족계획 실천에 대한 계몽지도는 국가가 가족구성에 직접 개입하는 과정이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보사부, 대한가족협회와 협조 하에 가족계획에 대한 지도와 계몽을 추진했다. 가족계획실천을 통한 인구증가율 조절이 복지국가 건설과 목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완수를 위한 중대과제로 선전하며, 재건국민운동의 순회강사는 可姙者 전원을 일일이 호별 방문하여 가족계획의 필요성과 피임방법을 계몽지도 했다. 이처럼 복지국가 달성을 목표로 제시하며 재건국민운동이 벌였던 사업들의 내역을 보면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부녀자를 국민운동에 적극 끌어들이며 국가 속에서 여성으로서 역할을 자각/자임하는 계기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80)
요컨대 재건국민운동은 복지국가를 목적으로 삼아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국민의 역할과 자세를 제시하며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교육을 통해 제시된 국민의 기준은 민족과 특히 국가에 대한 개인의 헌신과 자율적 태도를 갖추는 정신에 맞추어 졌다. 다양한 사업들은 민족애를 통한 국민간 통합을 유도하고, 국가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부각시키며 개인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기제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자유주의적 법치보다 규율통치가 강화되었던 것이다.81)
3. 맺음말
前線國家의 일군의 지식인들은 냉전의 실험대였던 6·25전쟁, 1950년대 자유주의 이식과 정치사회상 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공산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고 자유주의의 허약성을 지양하며, 민족정신을 통한 새로운 ‘근대’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반동적 근대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파시즘을 포함한 서구근대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다른 ‘반동적 근대주의’라 할 수 있다.
재건국민운동에 수렴된 ‘국민운동’은 대략 3가지 정도로 범주화시킬 수 있었다. 신생활운동, 기독교 농촌운동, 국민사상운동이 그것인데 이 운동들은 사상운동과 물질적 개선운동으로서 상보적인 관계로 설정되었다. 이 운동의 주창자들이 반공과 기독교, 민족주의를 통해 이념적 친화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일제시대부터 가깝게는 1950년 초반부터 인적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유진오, 유달영, 그리고 3대 본부장을 맡았던 이관구 등을 통해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로 모아졌다.
그런데 1962년 초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에는 민족, 국가, 국민에 대한 인식과 과거 경력에서 커다란 편차를 보이는 이들이 같이 참여했다. 국가지상, 민족지상 경향에서부터 정반대의 탈국가지상·민족지상의 입장이 있었고, 친일파와 항일운동가가 한데 엉켜 있었다. 전선국가이자 분단국가의 위상은 반자유주의와 반공이란 이념을 통해 이들이 일시적이나마 단합할 수 있는 광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중앙위원의 구성은 분단국가의 ‘반동적 근대주의’가 흡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외연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은 이 운동을 민간인 주도의 항구적 국민운동으로 전화시키고자 시도했다. 재건국민운동 2대 본부장을 맡았던 유달영은 국민운동은 민중이 주도하며 스스로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 군정종식이후에도 항구적 국민운동으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정 자립과 지역사회에서의 대표성을 획득해야만 했다. 유달영과 고재욱 등은 지역사회개발사업을 재건국민운동본부로 이관시켜 재건국민운동의 강화를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국가지상의적 사고 속에서 농촌사회의 민주화보다는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한 대상으로만 접근했던 군사정권이 농촌사회에서 권력의 분할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勝共과 反自由主義의 틀 안에서 위로부터 국가주도 국민운동과 밑으로부터 개인과 지역중심의 국민운동은 재건국민운동에서 접합되었으나 완전히 융합하지 못하고 갈등했다.82)
이러한 내적 갈등과는 별개로 재건국민운동은 분단국가가 복지국가의 지향을 제시하며 근대 국가의 정당성과 규율적 통치기제를 마련하는 계기였다. 정신혁명과 규율을 강조하는 국민운동 그 자체는 국가주도, 민간주도 그 어느 방식을 취하던 법치주의와 대의정치를 배제시키며 도의규범과 동원정치가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실제 재건국민운동이 벌였던 사업들은 개별사업들의 계몽적 성과와 별개로 국민을 국가에 종속된 존재로 위치 지우며, 국가가 개인들의 일상생활규범을 규율하는 기제들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진오가 표현한 ‘國家에 의한 自由’에서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없어지고 통치기제의 확대에만 결과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전선국가이자 분단국가가 일제말기 병영국가로 형태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이 다시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60년대 말부터 경제적 위기, 정치적 위기 그리고 지정학적 변동의 따른 이념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박정권과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일군의 지식인들은 다시 결합했다.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에서 탈국가지상주의 지향을 가졌던 이들은(함석헌, 김재준) 이미 이탈한 상태에서 국가와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이들로 그 범위는 좁혀졌다.83) 이들은 민족과 역사를 재창조하며 유신체제 구축을 통한 전사회의 병영화에 일조 하게 된다.
<표 1> * 중앙위원회(62년 2월 15일 현재)
성 명 |
분 과 별 |
직 업 |
비 고 |
金基錫 |
국민교육분과위위원장 |
단국대학교 학장 |
평북용천, MRA한국대표, 서울사대교수, 최고회의의장고문 |
金凡父 |
국민교육분과위원 |
사상가 |
경북,반일,건대동방사상연구소설립(‘58),5월동지회회장(’63) |
金成植 |
상 동 |
고려대학교 교수 |
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
金正基 |
상 동 |
2대 민의원 |
전남승주, 평양신학교수료 |
金八峰 |
상 동 |
京鄕新聞 주필 |
충북청원,친일,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고문 |
張載甲 |
상 동 |
변호사 |
|
李靑潭 |
상 동 |
佛敎僧 |
경남, 조계종 통합종단 2대종정(1966) |
李泰榮 |
상 동 |
江原道 農事敎導院 院長 |
|
朴 洸 |
상 동 |
독립투사 |
|
朴鍾鴻 |
상 동 |
서울대 문리대 교수 |
평양, 국민교육헌장기초위원, 한국사상연구회회장 |
咸錫憲 |
상 동 |
종교인 |
평북 용천, 반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1971) |
金相浹 |
상 동 |
문교부 장관 |
고려대교수, 고려대총장, 5공화국 국무총리 |
洪鍾仁 |
상 동 |
朝鮮日報 회장 |
한국신문연구소초대소장(1964), 국토통일원고문 |
裵敏洙 |
상 동 |
大田福音農民學園長 |
충북청주, 평양 숭실학교졸, 반일, 삼애농업기술학원 |
柳永模 |
상 동 |
전 오산학교장 |
오산학교교장(1921) |
尹日善 |
문화생활분과위원장 |
서울의대 교수 |
일본토쿄, 원자력병원장(1963), 대한의학협회 회장 |
金在俊 |
문화생활분과위원 |
목 사 |
함북경흥,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장(1963) |
李炯錫 |
상 동 |
예비역 소장 |
|
李恒寧 |
상 동 |
고려대 교수 |
홍익대총장,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1975-1977) |
李興烈 |
상 동 |
음악가 |
원산, 친일, 8·15직후국민개창운동, 한국작곡가협회장(1969) |
李 曉 |
상 동 |
대한체육회 부회장 |
만주출생,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63) |
馬海松 |
상 동 |
아동문학가 |
경기 개성, 어린이헌장기초, 1966년 졸. |
李顯益 |
상 동 |
공복동지회장, 大倧敎總本司專務 |
|
吳在璟 |
상 동 |
공보부 장관 |
허정국무총리비서관, 공보실장, 국제관광공사총재. |
吳泳鎭 |
상 동 |
씨나리오 작가 |
평양, 조선민주당참여, 월남, 북한문총조직, 출판문화활동 |
尹亨重 |
상 동 |
신부, 京鄕新聞 사장 |
충북진천, 경향신문사장역임, 미리내본당 신부(1959) |
高在旭 |
경제생활분과위원장 |
東亞日報 주필 |
전남, 반이승만, 동아일보사장(1965), 국토통일원고문(1969) |
張俊河 |
경제생활분과위원 |
사상계 사장 |
평북의주, 민주통일당최고위원(1973), 민주회복국민회의 |
張世憲 |
상 동 |
서울 문리대 교수 |
|
鄭錫海 |
상 동 |
연세대학교 교수 |
평북철산, 연희전문YMCA회장, 독일유학, 4·25교수단시위 |
張坰淳 |
상 동 |
농림부 장관 |
육사참모장, 최고회의운영기획위원장, 공화당사무총장 |
趙洪濟 |
상 동 |
제일제당 사장 |
경남함안, 효성그룹회장 |
李璟夏 |
상 동 |
항일투사 |
|
李寬求 |
상동, 중앙위원회의장 |
서울일일사장 |
서울, 반일 ,반이승만, 5·16장학회이사장 |
尹甲壽 |
경제생활분과위원 |
大韓商議 副議長 |
|
金士翼 |
협동생활분과위원 |
牛乳同業組合長 |
함남, 이화여대사무국장 |
張敦植 |
상 동 |
농 업 |
|
金性壽 |
상 동 |
축 산 업 |
|
李世基 |
상 동 |
4·19학생대표 |
경기개풍,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간사, 민정당 원내총무(1985) |
金致烈 |
상 동 |
변호사 |
|
鄭泰時 |
상 동 |
大韓敎聯事務局長 |
|
李奎喆 |
상 동 |
大韓勞總委員長 |
|
柳達永 |
상 동 |
재건국민운동본부장 |
경기,반일, 재건국민운동중앙회회장, 국토통일원고문(1974) |
韓 信 |
상 동 |
내무부장관 |
함남, 감사원장(1963), 육군참모장(1968), 합참의장(1972) |
鄭忠良 |
부녀지도분과위원장 |
서울일일논설위원 |
함북, 이대신방과 교수, 주부클럽연합회 회장 |
高凰京 |
부녀지도분과위원 |
서울여대학장 |
서울, 기독교, 친일, 대한어머니회(1958), 서울여대총장 |
李永春 |
상 동 |
農村衛生硏究所長 |
평남용강, 농촌 사회복지활동 헌신 |
|
|
|
|
<자료> 民主韓國革命靑史編纂委員會刊, 1963, ??民主韓國革命靑史??, 131-132쪽.
<표 2> 중앙위원회(1963년 5월 현재)
성 명 |
연령 |
분과별 |
주 요 경 력 |
국 민 운 동 전 력 |
비 고 |
高在旭 |
60 |
국민교도 |
동아일보 주필 |
전 중앙위원 |
副議長 |
尹景燮 |
46 |
|
시교육위원회위원 |
|
법정서울대표 |
金大經 |
61 |
국민교도 |
중앙교육위원 |
支部委議長 |
|
金士翼 |
38 |
향토개발 |
우유동업조합장 |
전 중앙위원 |
법정 충남대표 |
金昇漢 |
38 |
향토개발 |
서울신문논설위원 |
|
|
金營珍 |
53 |
부녀지도 |
적십자지사장, 군수 |
지부위원 |
법정 제주대표 |
金八峰 |
60 |
국민교도 |
문인(언론인) |
전 중앙위원 |
|
金學? |
47 |
향토개발 |
적십자사무총장 |
|
운영위원 |
朴德弼 |
47 |
부녀지도 |
실 업 |
지부위원 |
법정 강원대표 |
宋在哲 |
61 |
향토개발 |
충북대학 학장 |
중앙교육원교수 |
|
柳致眞 |
58 |
국민교도 |
예총 이사장 |
전 중앙위원 |
|
尹亨重 |
60 |
국민교도 |
신부 |
전 중앙위원 |
|
李寬求 |
65 |
향토개발 |
언론인 |
전 중앙위 의장 |
議長(본부장) |
李秉稷 |
43 |
향토개발 |
병원장 |
수원시촉진회장 |
법정 경기대표 |
李鍾垈 |
66 |
국민교도 |
청주시장 |
지부위 의장 |
법정 충북대표 |
李辰? |
57 |
향토개발 |
兒童救聯 총무 |
|
|
李判鎬 |
59 |
국민교도 |
군수 |
洞促進會長 |
법정 전남대표 |
李恒寧 |
48 |
향토개발 |
고대법대학장 |
전 중앙위원 |
운영위원 |
李曉 |
51 |
국민교도 |
체육회부회장 |
전 중앙위원 |
|
張敦植 |
43 |
부녀지도 |
篤農家 |
전 중앙위원 |
|
田善愛 |
59 |
부녀지도 |
여고교사(고조만식미망인) |
|
副議長 |
丁南鎭 |
57 |
향토개발 |
상업 |
김천시촉진회부의장 |
법정 경북대표 |
鄭在煥 |
57 |
향토개발 |
법무부차관 |
|
법정 경남대표 |
鄭鎭五 |
49 |
향토개발 |
방직업 |
|
법정 전북대표 |
鄭忠良 |
47 |
부녀지도 |
여류평론가 |
전 중앙위원 |
운영위원 |
韓景職 |
61 |
국민교도 |
목사 |
|
|
韓永敎 |
60 |
국민교도 |
교육가 |
부산시촉진회상무위원 |
|
黃光恩 |
40 |
국민교도 |
소년단 간사장 |
|
|
<자료> 再建國民運動本部, 1963, ??再建國民運動??,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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