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사상비교 푸코와 동양의 '성의 역사' |
저 ‘아랫도리’를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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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희 _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동서라는 공간적 거리와 고금이라는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성애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차라리 인간에게는 영원무궁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너무 허망하므로. 그런 믿음 중 하나가 남녀결합으로 이룬 가족과 핏줄의 불멸성에 대한 신화이다. 남녀 사이의 결합은 음양의 조화이며 자연스러운 본성이자 나아가 우주적 질서이므로 오랜 세월 영원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자연스러운 질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중핵이므로 더 이상 질문이 필요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지금의 성도덕은 역사적 발명품?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야말로 동서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금기이며 따라서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질서이자 상징적인 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주장으로 유추해 보건대,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유림들의 공포는 자신의 근원, 즉 아버지를 모름으로써 근친상간이라는 무질서상태를 막을 수 없다는 데서 유래한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체계 안에서 남성다운 남자는 ‘반드시’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해야 하고, 여성다운 여자는 ‘반드시’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되었지만 동성동본 결혼금지도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구별의 기준이 바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친족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래서 유림들은 호주제가 폐지되면 천륜(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의 도리를 넘어 하늘의 도리이므로)도 모르는 금수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는 과도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발명품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랜 세월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여졌던 남녀의 결합, 즉 이성애·일부일처제는 자연스러운 질서가 아니라 ‘강제된’ 제도이며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에 기초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관계를 구태여 구성해야 하는가? 부부는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그렇다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는 것이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부부의 인연은 인간들끼리 맺은 계약이라면 얼마든지 파기하고 재계약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야 하는 당위적인 질서에 질문을 가하기 시작하면 온갖 의문들이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딸려 나오게 된다. 제기하지 말아야 할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성/쾌락/권력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평을 열어 준 철학자가 푸코이다. 성애 역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 재구성되는 것임을 구명하려고 한 철학자가 푸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산되기만 하는 것인가? 동양에서도 그의 주장은 타당한가? 동서양의 성풍속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맥락에서 푸코가 말하는 성(섹스)/성애(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성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인들의 초월적 사고의 시원(始原)은 그리스이다. 플라톤 시절 생산노동은 노예나 하는 것이며 임신·출산과 같은 재생산노동은 여성이 담당하는 것이었다. 유교문화에서의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서양 귀족들은 노동을 경멸했다. 사실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노동의 윤리를 만들어낸 것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초래된 현상이었다. 그리스 귀족들은 생존과 결핍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생존노동과 재생산노동은 노예와 여성들이 담당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남아도는 시간에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자신들의 존재정당성을 찾았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성애는 재생산으로부터 벗어난 성애를 의미했다. 생존에 바탕한 필연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유의 영역으로 초월하는 것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오랜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철학과 놀이의 성에서 억압의 성으로 서구 관념론의 원조인 플라톤은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매달렸다. 그에 따르면 영원불멸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장애요인은 가변적인 인간의 육체다. 육체에 기초한 감각 지각과 사랑의 감정은 믿을 수 없고 불안정하다. 정신은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육신은 시, 공간적인 제약에 묶여 있다. 육체는 질병에 노출되고 끊임없이 변신한다. 따라서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변덕스런 육체로부터 영원한 진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게 이들에게 가장 고결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된 성애는 철학자 남성과 미소년들 사이의 사랑이었다. 나이든 철학자는 소년을 가르치는 연인(lover)이다. 사랑받는(beloved) 소년은 사랑하는 철학자와의 사이에서 쾌락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소년은 사랑의 황홀이나 쾌락으로 몸을 떨거나 의식이 몽롱해져서는 안 된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눈을 감음으로써 맹목에 빠져들지 않고 끝까지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두 사람은 (경륜과 지위의 측면에서) 권력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 시대의 동성애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 동성애는 변태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 종이 지닌 동물적인 속성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철학자들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였다. 이처럼 그리스 귀족사회에서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은 사실 젊고 아름다운 소년과 성인 남자 사이의 사랑을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남자들 간의 사랑이야말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지고의 사랑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성애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놀랍지 않은가. 독일 동성애 감독인 데릭 저먼의 <세바스천>이라는 영화는 플라톤의 동성사회적인 개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플라톤 시대 남성들 사이의 성애를 찬미하는 철학적 담론의 이면에는 육체가 아닌 영혼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그 영혼의 아름다움은 노동하지 않는 남성들 사이의 사랑과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동성애적이고 동성사회적인(homosexual/homosocial) 이데올로기를 영원불멸의 ‘진리’로 유포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이후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면서 서구에서 성은 오랜 세월 억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이 쾌락과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중세는 성에서 쾌락을 억압하고 성을 재생산 영역에만 묶어두려고 했다. 중세가 끝나고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던 르네상스 시기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였던 17세기에 이르는 동안에는 성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솔직한 태도가 널리 퍼져 있었다. 엄격한 이성애·일부일처제가 강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부정과 불륜이라는 개념 자체가 느슨했다. 호색한이 호기를 부리고, 앙큼한 여자들의 유혹은 무람없었다. 노골적으로 뒤섞이는 육체들,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음담패설들, 그 주위를 호기심으로 빤짝이는 눈을 하고서 어슬렁거리는 조숙하고 영악한 아이들. “한마디로 육체가 공작새처럼 날개를 활짝 폈던” 시기가 17세기였다고 푸코는 그리움 그득한 목소리로 기술한다. 하지만 또 다시 화려한 성애의 짧은 대낮에 뒤이어 황혼이 뒤따르고 마침내 성애의 긴긴 밤이 찾아온다. 빅토리아조에 이르면, 성은 부부의 밀실에만 밀봉되면서 재생산을 위한 공리적인 성만이 허용되었다. 생식의 범주, 즉 이성애 ·일부일처제·성기 중심의 성애를 제외한 모든 성행위는 거부되고 추방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의가 본격화되면서 집약적인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쾌락적인 성은 억압되었다고들 흔히 말한다. 질탕하게 성을 향유하면서 방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밤새 노래하고 술마시고 성을 향락한다면,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분산되고 다음날의 노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터였다. 그러므로 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성만을 용인하게 되면서부터 성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는 근검, 절약, 근면과 같은 초기 자본주의 윤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로써 성은 오로지 이성애·일부일처제에만 국한됨으로써 수많은 금기와 변태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선교사 체위(남성 상위 체위)가 아닌 체위는 변태에 속했다. 크라우프트 에빙이라는 사람이 분류한 변태의 목록은 120가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왜곡된 성애를 통과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성애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정도이다. 국가가 간섭해 온 개인의 ‘아랫도리’인가 성의 억압 가설은 대단히 편리한 설명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성을 억압했다고 주장한다면, 자본주의만 해체하면 온갖 모순은 해소되고 성해방은 금방이라도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성해방 담론이 폭발적이었지만 자본주의는 해체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의해 성해방 담론이 폭발적으로 유포되었다. 푸코에 의하면 억압 가설은 경제적인 토대 변화와 성담론을 연결시키려는 안일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억압 가설은 억압의 단일 기원을 설정함으로써 문제를 편리하게 해결하고자 한다. 단일 모순과 억압을 상정한다면(페미니즘의 경우 가부장제, 마르크스주의 경우 경제적인 모순, 정신분석학의 경우 오이디푸스화 등등), 그것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푸코에 의하면 성이 극도로 억압되었던 시절, 역설적으로 성담론은 넘쳐났다. 의료과학, 정신분석학, 교회의 고백술, 병원 등의 제도적인 장치들은 단순히 억압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체를 생산하는 권력장치이기도 했다. 푸코는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바로 그 권력이 우리를 주체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권력과 법의 생산적인 측면을 논의한다. 푸코에 의하면 성애는 권력이 작동하는 특권적인 공간이다. 개인을 훈육하는 과정의 핵심에 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관리하는 훈육적인 생체권력은 개인뿐만 아니라 인구전체의 세부적인 일상생활과 행동을 규제하는 미시권력의 모세혈관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라는 영화에서 호정(강수연 분)은 간통죄로 고소당한 후에, 윗도리로 얼굴을 가리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 국가가 내 아랫도리를 관리했냐?”며 사뭇 당당하다. 그런데 그녀가 놓친 점은 국가는 언제나 개인의 아랫도리를 관장했다는 점이다. 섹스는 극히 사적인 것이므로 국가가 간섭할 사항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며 개인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일 따름이다. 국가는 일상의 미시권력과 극히 사적이라고 보았던 개인의 성애를 항상 훈육해 왔다. 또한 성애는 인구관리의 핵심이기도 하며 생명유지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1960~70년대 한국 사회는 급증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피임을 권장했다.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여성에게는 낙태를 눈감아 주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애인들, 광인들, 부랑아들과 같은 사회적 부적격자들에게 불임시술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그 결과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인해 우리 사회는 이제 인구노령화라는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 그러자 국가는 출산을 적극 장려하고 나선다. 이처럼 성애는 무한대의 감시와 영구적인 통제, 치밀한 욕망의 배치, 의학적인 지식, 심리적인 검사를 통해 몸과 관련된 모든 미시권력의 그물망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특히 이성애·일부일처제 커플을 정상적인 성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어린이들의 유아성욕, 광인, 범죄자, 동성애자, 성도착자의 성적 행위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아 생체권력을 형성함으로써 성에 관한 훈육적인 사회로 나간다. 따라서 생체권력은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비(非)정상적인 성을 생산하고 ‘정상적인’ 성적 주체를 만들어낸다. 역사상 다양한 성행위는 있었지만 그런 성행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전도된) 시대가 도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는 것이 푸코의 지적이다. 그 이전에도 남색과 같은 동성애 행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정체화하려는 경향은 극히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말하자면 ‘나’의 정체성 안에 성적 정체성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경향성에 의해 ‘나’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푸코에 의하면 생물학적인 성으로서의 섹스는 사회문화적인 성으로서 젠더 규범이라는 모태를 통해 일관된 정체성을 산출하는 규율적인 관행에 의해 생산된다. 섹스/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런 성은 배제된다. 그 결과 욕망의 이성애화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셈이다. 이처럼 생물학적인 성인 섹스는 성적 경험, 행동, 욕망의 원인으로 설정된다. 상품의 하나인 화폐가 모든 상품의 가치를 매겨주는 물신화된 기준이 되는 것과 흡사하게, 사회문화적인 젠더의 효과로 구성된 섹스가 오히려 성적 정체성을 규율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푸코에 의하면 성차의 범주화에 선행하는 섹스의 범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성애의 양식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그 결과 섹스는 젠더를 규율하는 원인이자 자연적인 성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섹스라는 물화된 범주에 의하면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남성, 여성이라는 양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헤귤라인처럼 양성구유와 같은 제3의 성은 정체화될 수 없다. 헤귤라인은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이자 비정상의 범주로 배제된다. 이성애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의료담론 안에서 양성구유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애를 욕망하지 않는 성애는 우연성이자, 괴물, 비정상적인 성으로 배제된다. 푸코가 보여준 통찰은 자연스런 성애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사실은 권력과 지식과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준 데 있다. 그렇다면 푸코가 때로는 이상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자화하기도 했던 동양의 성은 과연 어떻게 구성되는지 살펴보자. 도가, 성을 자연으로 보다 동양은 서양을 오랑캐라 하고 서양은 동양을 야만이라 일컬으면서 서로를 타자화시켜 왔던 오랜 경험이 있다. 서양인들의 유전자 속에 혹은 역사적인 기억 속에는 동양의 스키타이족, 훈족, 칭기즈칸의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들의 잔인함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서양의 잔인한 제국주의 영향은 동양인들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양대 문명 사이의 충돌은 ‘성’을 중심으로 서로를 타자화하면서 서로의 나르시시즘을 표현한 오랜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유교문화권의 자긍심은 여성의 정숙한 성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을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라는 식으로 번역했다. 반면 서양은 동양을 원시적인 난교의 세계이자 성의 유토피아라는 식으로 타자화했다. 서구의 시선 아래 동양은 성적으로 야만의 세계가 되었다. 따라서 서구인들에게 동양은 인간으로 계몽되기를 기다리는 여성적인 영토로 등치되었다. 그렇다면 성의 억압 가설을 무화시킬 정도로 동양은 성적 유토피아였던가? 분명 그렇지 않다는 데 항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노장사상이 지배했던 먼 옛날 성은 자연의 일부였으며 신성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교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성은 관리의 대상이자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국에서 널리 전해오는 음식남녀(식욕과 성욕)는 물질생활(음식)의 재생산과 성욕(남녀)에 의한 후손의 재생산을 일컫는다. 음식남녀는 엥겔스가 말한 두 가지 재생산의 중국식 표현이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두 가지 재생산 이론을 언급한 바 있다. 하나는 재화의 재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재생산이다. 말하자면 물질의 재생산과 인적 자원의 재생산이 그 두 가지이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오욕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돈황의 벽에 그려진 조소에는 늙은 원숭이가 한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생식기를 만지면서 만면에 희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食)과 색(色)은 자연스러운(인간도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이라는 점에서) 욕망이며 그것이 음식남녀의 진정한 의미이다. 원시 도가에서는 자연을 숭배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의 일부로서의 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도가에 따르면 예(삼강오륜), 제도, 의식, 규범, 지식과 같은 인위적인 문화는 자연을 교란시키는 폭력일 따름이다. 도교에서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에 인위적인 것이 끼어들게 되면 그것은 항상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무위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계획적인 인간의 간섭이 자연의 조화를 깨뜨린다고 믿었으므로 자연적 리듬과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야말로 도가의 이상이었다. 그들에게는 지식욕마저 분별심으로 인해 경쟁심을 자아내고 물욕을 부추겨서 분란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연과의 합일을 원하는 원시 도가 사상에 의하면 성은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스러운 욕구이므로 억압의 대상이 아니다. 성의 억압은 자연의 억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양생의 방법으로서 성애는 신선놀음하는 노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녀의 합일을 운우지정(雲雨之情)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구름과 비는 하늘과 땅의 교합이며 바람(하늘)과 구름(땅에서 증발)의 결합에 의해 비(제3의 산물)가 내린다. 성에 관한 도가의 이론들은 천인감응(天人感應), 음양오행, 쌍수로 이어진다. 도교는 인간의 욕망, 그 중에서도 성을 자기수련의 방법이자 지고의 도에 이르는 방편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도가에서 노년의 성은 주접이거나 수치스러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로장생의 비결이자 신선으로 노니는 한 방편이기까지 했다. 많은 밀교와 신비주의자들이 순수한 쾌락의 순간에 신과의 합일을 경험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성리학, 성의 빗장을 걸고… 그러므로 옛사람들에게 성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성행위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자 천인감응이었다. 들판에서의 성교는 토지를 비옥하게 한다고 여겼다. 야합(野合)의 풍속은 오늘날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옛사람들은 성교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성한 행위로 숭배했으므로 야합이야말로 천지의 기운에 순응하는 성행위였다. 야합이 혼외의 불법적인 정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품위가 추락된 것은 자연과 합일하는 성행위가 추문거리가 된 이후의 일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야합으로 태어났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공맹의 도를 대표하는 공자 자신도 사생아이자 불륜의 결과물인 것처럼 조롱할 때 언급되는 일화이지만, 사실 야합, 즉 들판이나 보리밭에서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성풍속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시절 야합은 지금의 맥락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절 적당한 성교는 건강을 증진시키는 반면 지나친 성행위는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되었다. ‘일곱 가지 손상과 여덟 가지 보탬(七損八益)’이 그것이다. 성적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건강 증진법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고대인들은 방중술을 하나의 양생의 도나 장수의 도로 보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손사막은 《천금요방》, 《방중보익》에서 방중술의 중요성과 그 목적을 강조했으며 이것을 음란한 쾌락이 아니라 건전한 양생법으로 보았다. 양생술은 체력을 보강해서 함부로 여자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뇌를 보강하여 병을 쫓고 건강하게 사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이처럼 성을 신성시했으므로 고대의 예기(禮器)들은 생식기를 상징했다. 옥종은 여성 생식기, 즉 여음의 상징이었다. 옥종은 고대 황후가 지니고 있던 상서로운 물건이었다. 황제는 규를 들었고 황후는 옥종을 잡았다. 규의 모양은 남근과 같고, 옥종의 모양은 여음과 같다. 규는 고대 귀족의 조회, 제사, 장례에 쓰였던 예기로 주대의 무덤에서 늘상 발견되었다. 쌍물고기 도형과 조개는 여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불경에서 연화부는 여음을 가리키고, 금강부는 남근을 가리킨다. 연화부는 연꽃이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나왔어도 오염되지 않았기에 성스럽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그 원래적 의미는 여음을 상징했다. 중국에서 성을 신성시하는 풍속은 장이모의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영화에서 ‘나’의 할머니는 문둥병자에게 강제로 시집왔지만 한사코 합방을 거부해 3일 만에 친정으로 내쳐진다. 친정으로 돌아가던 길에 할머니는 붉은 수수밭에서 ‘나’의 할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한다. 이때 할아버지는 저항을 멈춘 할머니를 곧장 덮치지 않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치른 후에 성관계를 맺었다. ‘나’의 할아버지의 행위는 병주고 약주는 격이지만 어쨌거나 여성의 성은 신성한 것이므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동양 혹은 적어도 중국에서 자연스러운 행위로서의 성이 억압의 대상이 된 것은 오랜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성욕이 억압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정주학의 영향이었다. 주희의 성리학이 득세하면서 특히 여성에게 정절은 예와 동일시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재생산을 위한 공리적인 성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여성의 성을 단속하려는 가부장제의 오랜 기획과 분리될 수 없었다. 유교문화의 결과 성의 억압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가부장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열녀전》에 이르면 “대저 예(禮)에는 천자가 열둘, 제후가 아홉, 경대부가 셋, 사대부가 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도대체 이 숫자(《열녀전》에 이르면 이 숫자는 그나마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실인 일처에 덧붙여 이 숫자 정도의 첩을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남성들 사이의 예(禮)라고 규정되어 있다. 아내는 남편의 사유재산이므로 남편은 재산증식 개념으로 아내를 늘려갈 수 있었다. 앞으로는 근엄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뭐든 가리지 않는 표리부동의 체면문화는 성의 억압과 분리될 수 없었다. 처첩을 거느리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이성애·일부일처 결혼을 내세운 가부장적 사회는 재생산이 가능한 시기 이외의 모든 성욕을 부정하고 부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왔다. 특히 여성에게는 재생산을 위한 성에서도 쾌락의 기능을 부정했다. 봉건예절을 대표하는 보수적인 성도덕은 진보적인 사상가의 비판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청대의 유정섭은 《정녀설(貞女說)》에서 “복건(福建)의 풍속은 딸을 낳으면 반은 못 건지니 커서 열녀가 되기를 바라서라네. 사위가 죽으면 까닭없이 딸도 없애니, 독은 술잔에, 동아줄은 대들보에, 살고 싶어하는 딸을 어찌 내몰리오마는, 찢어지는 맘으로 가문을 보전하네. 3년이면 열녀문을 세워주지만 새 귀신 혼 돌려달라는 소리 들리네. 오호라 남자가 충의로 자책함은 가하나 부녀의 정절이 어찌 그러한 남자의 영예와 같으리오!”라고 말했다. 계속 될 뿐인 신화, 이성애 이렇게 본다면 푸코가 이상화한 동양의 성은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양생술은 자아의 기술이자 일종의 생활양식이었으므로 억압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그의 주장은 절반의 사실일 따름이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사유재산이었으므로 남성은 자신의 능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처첩의 수를 늘렸다. 이런 처첩들에게 성적 자율성은 없었다.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남편에게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었으며 사형(私刑)은 다반사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라도 사회적 사형(死刑)이었던 수절자살을 강요하기도 했다. 뒤에 남은 남성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 말이다. 푸코는 성이 지식과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성의 억압 가설을 부정했다. 특히 그는 동양의 방중술은 양생의 도, 자아의 기술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서구의 억압 가설을 뒤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방중술이 남녀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과연 적용되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푸코처럼 동양은 성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아수련의 테크닉으로 활용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푸코가 바라본 동양의 양생술은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일 수도 있다. 어린 여성의 성은 늙은 남성의 양생과 회춘을 위한 도구로 오랫동안 착취당해 왔다. 왜곡된 성교 지침서에 의하면 같은 여성과 잠자리를 오랜 세월 하면 음기가 메말라서 남성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많은 여자와 상대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젊은 여성과의 연애가 늙은 남성의 활력과 회춘에 도움이 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음기를 보양하는 것이든 엔돌핀의 분비로 늙어서도 젊게 사는 방법이든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은 역사적, 경제적, 지역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구성되고 재구성되면서 한 사회를 유지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성애·일부일처만이 정상적인 성이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신화일 따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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