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권위주의체제와
경제발전 |
1. 대한민국의 국가목표와 기존 교과서의 문제점 이 글은 1961년 5월 군사혁명과 함께 출범하여 1987년 말까지 지속된 朴正熙·全斗煥의 權威主義(권위주의) 時代에 대한 기존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2004) 서술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적 역사서술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 교과서 서술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전제로, 먼저 대한민국(이후 한국)의 성립과 함께 부상하게 된 국가목표와 박정희 중심의 군사혁명이 발생한 1960년대 초 국가목표의 현황에 대해 살펴본다. 주권 근대 국가로 출범한 한국의 일차적 국가적 과제는 물론 國家安保다. 전체주의적 통제경제 사회인 북한과의 대결 상황에서 유래하는 특수한 긴장, 특히 6·25의 경험은 이 과제를 절박한 常數的인 국가적 과제로 떠오르게 했다. 主權在民과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실천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건국 시기에서 문명사적 보편적 가치였다. 한국도 民主共和國 憲法을 채택하여 민주주의의 실천이 국가적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국민적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국가는 자연스럽게 正統性 유지를 위한 조건 중의 하나로 경제 발전을 통해 모든 구성원의 후생을 어느 정도 보장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는다. 한국도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는데, 한국은 자본주의를 수용하여 이 과제에 접근하게 된다. 뒤에 제시되는 바와 같이 경제 발전은 여타 국가과제 달성에 필요한 하부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불가결한 우선적 작업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전개된 분단체제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통일은 건국 이후 또 다른 과제로 되었다. 오랫동안 단일 민족국가로 존속해 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역사적 관성과 함께, 그것이 지닐 수 있는 잠재적인 적극적 경제적 含意(함의), 그 밖에 수많은 離散家族(이산가족)들의 정서적 요구 등이 이 과제에 무게를 더해 온 요인이다. 그러면 박정희 군부 권위주의 체제가 출범한 1960년대 초 국가적 과제의 현황은 어떠했던가. 6·25 이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의해 보유하게 된 국민군에 힘입어 6·25전쟁 이후 安保體系는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북관계의 균형을 깨는 요인이 발생한다. 즉, 북한은 종전과 함께 소련의 원조와 全體主義的 사회동원 체제에 특이한 초기 효율성에 의존하여 한국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지닌 사회로 변모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국에 적극적 평화 공세를 취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은 수세적 자세로 임하게 되는데, 이는 심각한 안보 위협요인이 잠재화됨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도 4·19혁명 이후 활성화되어 한국 사회의 統合 危機를 야기한 친북적 통일지상주의운동의 배후에는 남북 간의 불균형적 경제 관계가 놓여 있었다. 이 밖에 1960년대 초 한국의 안보체계의 취약성과 관련하여 한국 재정의 치명적 한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 한국은 常備軍예산의 거의 10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는 한국이 국민군의 형성과 재정의 자립이라는 기본적 조건을 결여한 국민국가였음을 보여 준다. 아무런 역사적 체험, 그리고 사회·경제적 기반도 없이 당위론적 요청에 따라 하루아침에 수입된 민주주의는 안보적 긴장에,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인격 요인까지 가세하여 1950년대를 통해 심각한 施行錯誤(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었으며, 1950년대는 끝내 4·19혁명으로 종결된다. 뒤를 이어 집권한 자유주의적 張勉 정부 치하에서도 민주주의는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어 예측 가능한 사회질서를 창출하기보다는 무질서와 불안정을 日常化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실천이 단순한 통치 엘리트의 교체보다 더 심층적 차원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1960년대 초는 민주주의 실천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가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한 시기였다. 갑작스러운 植民地母國 경제와의 단절에 뒤이은 분단과 전쟁의 충격 아래 거의 해체 지경까지 몰렸던 국민경제는 종전 후 대량의 미국 원조에 힘입고, 동시에 미국의 지역통합 정책에 맞서 국민경제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이승만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쟁 전 생산수준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의 열악했던 경제 상황을 반영하여 한국 경제는 1960년대 초 世界 最貧國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종전 이후 점증하는 국민의 기대심리에 비추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현상이었다. 동시에 1950년대 후반 급속하게 감소하는 미국의 無償援助는 경제 발전을 절박한 과제로 만든 또 다른 요인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경제 발전은 한국이 근대 국가로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도 절박하게 요청되는 사항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재정수입의 거의 50%를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통일정책 추진에서도 커다란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었다. 1950년대의 경직된 냉전 질서 아래서 이승만 시대 통일논의는 北進統一論 등 단조로운 범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허용한 百家爭鳴(백가쟁명)의 분위기에 힘입어 잠복해 있던 급진 정치세력은 소위 민족문제의 해결이 모든 것에 앞서는 과제라는 통일지상주의적 발상 아래 한국의 실정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민중주의적 방식으로 통일을 추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제력에서 우위에 있었고, 일원적 전략 하에 모든 대남 정책이 통제되는 북한은 여유로운 자세로 한국의 급진세력과 직접 소통하는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이는 한국이 무분별한 감상적 통일 논의를 억제하고 통일 과정에서 주도권이 완전히 상실되는 사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논의는 1960년대 초 한국은 네 가지 국가적 과제가 모두 未盡한 국면에 머물러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조건이 결여된 사회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과제의 동시적 추구가 아니라 경제 발전이라는 단일 목표에 국가적·국민적 역량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에 있음을 보여 준다. 안보와 관련해서 경제 발전은 북한이 한국 사회의 정통성을 근원적으로 침식하는 것을 先制的으로 예방하고, 상비군의 재정적 기반 확보를 통해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다. 10여 년에 걸친 민간 정부 하에서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시행착오 역시 그것의 着根을 위해서는 단순한 엘리트 교체가 아닌 경제 발전을 통한 사회적 기반 확보가 필요한 것임을 보여 주었다. 원래 갈등의 여과 없는 표출을 자극·허용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는 시민의식을 內在化하고 기존 질서의 안정적 작동을 선호하는 다수의 중간계층을 사회적 기반으로 해야 한다. 경제 발전은 이러한 계층을 창출해 내는 유일한 방도다. 이 조건이 결여될 경우 민주주의는 오히려 무절제한 참여와 집권자의 이에 대한 포퓰리즘적 대응 또는 자의적 권력행사를 촉발할 높은 蓋然性(개연성)을 지닌 제도다. 전체주의적 북한 체제와의 親和性 있는 통일을 방지하고,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이 우월한 경제적 위상에서 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런 면에서도 경제 발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상의 상황인식은 기존 역사 교과서 인식의 문제점 조명에 필요한 기준을 제시하며, 동시에 1960년대 초부터 작동하기 시작한 군부 권위주의 시대 역사인식을 위한 기본 방향을 시사한다. 이런 전제에서 볼 때, 기존 교과서의 결정적 문제점은 국가목표의 복합성과 그것들 사이의 優先順位에 대한 인식 없이 단순히 구호적 수준에서 이해된 ‘민주’, ‘민중’, 그리고 ‘民族’ 개념으로 역사를 裁斷(재단)한 데 있음을 알게 된다. 구체적으로 이와 관련하여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의 한계는 먼저 좁은 의미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전개한 정치사 서술방식에서 찾아진다. 정치는 가장 고차원에서 국가사회를 경영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정치사는 국가목표의 복합성과 그 우선순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교과서는 정치의 要諦(요체)는 어떠한 상황 또는 발전단계에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태도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정희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특징은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276쪽) 가운데 민주주의의 시련기였다는 식으로 규정된다. 또한 전두환 시기에 대해서도, 역시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의 발전’(290쪽)이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민주화운동이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기존 교과서는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의 문제를 논하는 데도 결정적 한계가 드러난다. 즉,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에 의해 실현되는 현상이라는 단순한 전제에 따라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다. 민주화 현상을 서술하는 어느 부분에서도 그 시대에 성취되었던 경제 발전, 그것이 초래한 사회계층 구조의 변화라는 사회·경제적 함의가 민주화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즉, 확대된 중산층의 의미에 대해선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민주화는 민족·민중을 앞세우는 운동세력의 獨占的 成果物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인식 태도가 전두환 시기 서술에 배정된 5페이지 가운데 2페이지를 광주민주화 항쟁 서술에만 할당되게 만든 요인일 것이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중의식’과 ‘민족민주운동’(291쪽)의 토대가 되었다고 강조함으로써 민중·민족 편향적 인식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정치 영역을 논하는 데 나타나는 또 다른 爭点은 그 시대의 동태를 규정하는 가장 종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던 安保 쟁점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에 의한 각종 도발과 1960년대 말 닉슨 독트린의 闡明(천명)에 뒤이은 미군철수 등에 따라 조성된 안보 긴장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핵심적 사항 중 하나다. 기존 교과서는 좁은 의미로 이해된 정치사 서술에 뒤이어 박정희·전두환 시대 30년에 걸쳐 전개된 경제 발전 현상에 대해 서술하는 데 전체 353페이지 중에서 5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당시 이루어진 경제 변화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는 충분치 못한 양임에 틀림없다. 그나마 전두환 시대 경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시되어 불과 다섯 줄 정도로 언급 하고 지나간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에는) 외국 자본과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소비재 수출 산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수출 중심’(326쪽)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1970년대에는 重化學工業部門에의 투자를 통해 성장을 지속했다고 서술한다. 객관적으로 묘사된 것 같은 이러한 기술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偏向性이 발견된다. 즉, 눈부신 발전은 있었지만 그것은 ‘외형적으로’(327쪽) 된 것이라는 수식어가 첨부되고, 또한 경제가 변화해 가는 과정은 외국에의 ‘의존’(327, 328쪽)이 심화되는 과정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또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구조변화에 관한 서술에 2페이지를 할당하고, 그 중에서도 1페이지는 財閥을 일방적으로 부정적 경제 실체로 묘사하는 데 쓰여진다. 경제 발전이 자주적이지도, 민중 지향적이지도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교과서의 閉鎖的 의식은 외자 도입 대신 외자를 ‘끌어드린다’(326, 327쪽)는 표현을 되풀이하고 있는 데서도 엿보인다. 무언가 외자 도입은 陰謀的(음모적) 요인이 내재되어 있는 현상인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그 시대 경제 발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것의 사회적 결과 서술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산업화의 가장 현저한 사회적 결과의 하나인 도시화를 2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근대 의식과 문화 등을 확산 시키는 機制로서의 도시화의 적극적 기능 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주로 빈민가의 형성과 같은 도시화의 부정적 측면만 묘사하는데 전 지면이 할당되고 있다. 특히 한 페이지 전체를 1960년대 청계천 주변 등에 형성되었던 빈민가의 慘狀(참상)을 묘사하는 데 배정함으로써 이 교과서의 민중 지향적 인식을 여과 없이 노출시킨다. 이 교과서는 또한 2페이지에 걸쳐 산업화의 사회적 결과를 노동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 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며, 이들이 ‘자주성’(337쪽)을 앞세우고 통일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산업화가 결과한 생활양식의 근대화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요약하면 기존 교과서는 주류사회가 시대적 과제를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과감히 도전하여 이루어 낸 성과를, 구호적 수준에서 애용되는 민중·민주 민족 개념 등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貶下하는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에는 이상의 문제점을 극복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 교과서의 서술 방향에 대해 개략적으로 논의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먼저 새 교과서의 목차를 제시하고, 그 순서에 따라 주요 서술의 내용을 제시한다. 2. 새 교과서의 목차와 서술 방향 및 내용 아래에 제시되는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대한 목차는 다음의 전제를 基本原則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첫째,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시대에 산업화를 향한 大疾走(대질주)가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인식한다. 서론에서 논했듯이, 이는 다른 국가목표 달성을 위한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한국 사회의 전반적 선진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시대는 민주주의의 실천에 많은 제약이 작용하고 있던 시대였고, 따라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葛藤(갈등)은 그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이었다. 동시에 逆說的(역설)으로 그 시대는 갈등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가 놓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1) 새 교과서의 제목과 목차 제목: 권위주의체제와 경제발전 1. 5월혁명의 배경과 의미 (1) 배경 (2) 4월혁명의 촉진요인 (3) 5혁명의 의미 2. 경제발전과 산업사회의 형성 (1) 산업화의 배경과 의미 (2) 산업화체제의 형성과 전개 (3) 산업사회의 특징과 문제점 3.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 (1) 3공권위주의시대와 갈등 (2) 10월유신과 박정희의 죽음 (3) 박정희시대 민주화운동의 특징 4. 신군부의 등장과 산업화의 심화 및 6·29선언 (1) 신군부의 대두 (2) 경제개혁과 산업화의 심화 (3) 시민사회의 성장과 6·29선언 다음에는 위의 목차에 따라 새 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논해 본다. 제1장 ‘5월혁명의 배경과 의미’에서는 먼저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는 이유로서 5·16은 단순한 不法的 權力交替를 넘어서서 1960년대 초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던 산업화를 향한 대질주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렇게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 서술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당시 군부의 정치적 突出은 단순한 몇몇 음모자들의 행위를 넘어서는 높은 역사적 개연성을 지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5월혁명은, 1950년대를 통과하면서 누적되어 온 構造的 背景을 지닌 사건이면서, 4혁명 이후 발생한 상황적 요인에 의해 촉발된 사건임을 말한다. 구조적 요인은 6·25 이후 한국의 군부는 최선진국인 미국으로부터의 지원과 교육에 의해 한국 사회에서 강제력으로서뿐만 아니라 組織管理能力의 면에도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것, 반면에 1950대의 불만족스러운 정치·경제 상황은 편파적 진급 정체 때문에 분노하던 군내 疏外勢力(소외세력)과 개혁 지향적 小壯將校들로 하여금 자유당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쿠데타 요인이 축적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실제로 군내에서 강직한 인물로 알려져 있던 박정희를 중심으로 이들 소장 장교들은 이미 1960년 1월경부터 政府顚覆謀議(정부전복모의)를 진행하다가 4월혁명으로 중단하게 된다. 4월혁명은 확고한 정통성을 지닌 자유주의적 장면 정부를 創出시켰지만 사회적 불안정이 오히려 증폭되고, 또한 개혁파장교들의 軍淨化要求(군정화요구)가 거부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4월혁명 이후 전 사회가 더욱 정치화됨으로써, 행동 지향적이 된 박정희 등의 군부내개혁세력의 정부 變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5월혁명의 가장 직접적 의미를, 2공화국 치하에서 국가경영의 원칙을 놓고 대립하던 두 세력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적 통치집단의 등장이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첫째로, 그들이 대체했던 장면 정부 통치 엘리트 집단은, 당시에 경제 발전을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다른 한편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4·19 이후 불어 닥친 숙청의 여파로 극도로 빈약해진 국가 관료제를 운영할 능력과 의지를 결여한 집단이었다. 군부가 제거했던 또 하나의 세력은 배타적 反美主義, 통일지상주의, 민중지향적 평등주의 등을 신봉하는 좌파적 급진주의 집단이었다. 이들에 대해 5월혁명을 계기로 등장한 통치집단은 현실 인식, 추진력, 사회적 성격 등에서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는 자들이었다. 즉, 이들은 경제 발전을 지상과제로 인식하고, 군특유의 강한 추진력을 지녔으며 근본주의적 민주주의관점의 비현실성과, 통일지상주의의 위험성을 확신하던 자들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당시 사회 기득권세력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있던 자들이었고, 연령적으로도 30대가 중심이어서 60대가 중심이었던 이전의 통치집단과는 克明한 對照를 보였다. 5월혁명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논의는 제2장에서 ‘경제 발전과 산업사회의 형성’에 대한 서술로 이어진다. 경제 발전은 새 통치집단의 가장 중요한 역점 사업이었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성과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먼저 새 통치 엘리트가 경제 발전 또는 산업화로 이해되는 ‘조국근대화’를 국정 운영의 최우선과제로 설정하는 이유로는, 절대빈곤을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사회적 욕구, 경제적 우위를 달성한 북한으로부터 오는 안보 위기에 대한 첨예한 인식, 그것이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효율적 방안이라는 판단,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는 새 지도자의 배경 및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의 실천과 안보위기해소를 위한 기본수단일 뿐만이 아니라, 통일에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가장 실질적 방법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실용주의적 判斷 등이 있었음을 지적할 것이다. 뒤이어 경제 운영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국가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취해진 다양한 조치들, 예를 들어 앞선 군의 조직관리기법의 도입, 경제기획원 창설, 장기 경제개발계획의 도입, 시중은행의 사실상의 국영화, 수출 진흥 확대회의 등에 관해 서술할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市場機制의 자발적 작동에 의해서만 성장동력이 창출될 수 없었던 後發산업화국가 한국의 독특한 조건을 반영한 조치였다. 이상의 제도적 개혁에 앞서 급진 세력을 불법화하여 자본주의적 국가운영의 근본 방침에 대한 갈등을 공론의 장에서 배제하여 경제 활동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예측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언급된다. 이 밖에 노동운동의 과잉 활성화에 의해 그것이 수출, 그리고 성장 지향적 경제 운영에 대한 비토 그룹으로 전환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법제적 조치도 도입되었고, 재벌과 사업가 집단에 대해서는 금융통제와 그 밖에 다양한 정책적 수단의 동원을 통해 효과적 규율을 통한 지원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음이 강조된다. 이상의 움직임과 함께 도입된 새 정부의 중요한 조치는 대외 지향적 발전전략을 채택한 것인데, 이는 수출지향 정책과 외자 도입의 적극적 추진으로 자본주의 최선진국인 미국·일본과 적극적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발전을 위한 한미일 삼각 협력 관계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는 後發國의 利點을 살려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탈피하게 한 핵심적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산업화 체제의 틀 속에서 1960년대에 한국 경제는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외자와 풍부하게 공급되는 良質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공업 제품 수출에 집중함으로써 기록적 성장을 달성한다. 1971년 말에 구상되어 1973년 1월 대통령 정책 선언의 형식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중화학공업화 정책 추진의 결과, 한국 경제는 1970년대 말에 名實相符(명실상부)한 공업경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의 배경에는 10년간 추진되었던 경공업 위주 발전전략의 한계라는 경제적 필요성과 아울러 1968년 초에 발생한 북한의 청와대 습격, 1960년대 말에 시작된 미군철수 등이 야기한 안보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자주국방 체제의 수립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눈부신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전 시대에 축적되어온 양질의 노동력과 다양한 경제 하부구조, 5월혁명 이후 시작된 재건국민운동, 새마을운동 등 정신개혁운동을 통해 형성된 발전을 향한 강한 사회적 집단의지 등과 함께 당시 후진국의 발전에 호의적으로 작용했던 동아시아와 세계자본주의체제 등이 지적될 수 있다. 덧붙여 강조할 것은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와 권력 행사방식의 도입이 한국 산업화 체제의 성공적 작동을 위해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산업화 체제는 여러 종류의 비자유주의적 조치, 예를 들어 금융통제, 노동통제 등을 주요 구성 부문으로 하여 작동하는 체제였고, 또 중대한 정책들, 예를 들어 한일회담의 타결,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에 필요한 국가 능력과 자율성이 확보되는 과정은, 동시에 권력의 집중화와 정치 과정에 대한 최고정책 추진자의 권위주의적 統制力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이에 덧붙여 급속한 산업화가 법칙적으로 야기하는 격렬한 계층, 지역, 또는 집단 간 갈등을, 민주적 정치과정이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한국적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방식의 권력 행사가 불가피했다는 점, 자본주의 경제의 주요 부문에 시장 기제를 도입하는 과정, 예를 들어 기업공개에 의해 자본시장을 창출해 가는 과정에서도 강압적 국가권력의 작용이 필요했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제 발전의 성공적 결과로 한국 사회에 도래한 산업사회의 여러 모습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먼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삶의 질의 향상과 생활양식의 근대화를 교통·통신망의 확충, 평균수명의 증가, 유아사망율의 감소, 향상된 고등교육 指標 등의 제시를 통해 보여 줄 것이다. 또한 계층구조의 변화 양상과 이 현상의 장기적인 정치적 함의로서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한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동시에 산업사회는 本來的으로 새로운 다양한 갈등을 창출해 내는 사회라는 것이 강조되며 노사갈등의 새로운 양상 등에 대해 논한다. 특히 類例(유례)가 없이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는 점, 또한 개방형 발전전략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선진국의 示威效果에 더욱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한국의 사회갈등은 상대적으로 더욱 심각한 양태를 띠게 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제3장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 순서에 따라 서술된다.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갈등은 경제 발전 문제와 함께 박정희 시대의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 장에서는 궁극적으로 박정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이 갈등 현상을 먼저 3共和國 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논한다. 우선 박정희 정부가 모범적 3공화국 헌법 절차에 따라 출범했음에도, 민간 대항 엘리트 집단은 박정희 정부가 근원적으로 쿠데타에 연원을 둔 정부일 뿐 아니라 헌정질서가 회복된 후에도 권력 운영과 국가 관리 과정에서 情報部, 保安司 등 정보기구와 강제력 기구에 의존하여 정당과 국회의 기능을 周邊化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를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 비판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실제로 박정희는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실천에 필요한 기초 조건이 결여된 사회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효율성을 최고 기준으로 하는 군사작전 개념으로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정보부, 군부 등의 힘에 의존했다. 이러한 정치 과정의 비민주성에도 불구하고 3공화국 시대에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권력이양이 국민적 참여가 보장되는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거는 당시 주요 쟁점을 부각시키는 통로였고 산업화에 의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기제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 통치집단의 비민주성이 주요 쟁점이 되었던 1963년 대선에 비해, 1967년 대선은 박정희 정부가 이룬 경제성과의 성격이 주요 논점을 이루다가, 1971년 대선에서는 金大中 야당후보가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일반대중과의 衡平이 무시된 재벌과 성장 위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대중경제론을 일종의 대안적 발전 논리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배후에는 이미 그해에 있었던 전태일의 분신이 보여 주듯이 한국 사회에 산업사회적 갈등이 표면화 되고 있었다는 사정이 놓여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산업화의 진전과 정치 사이의 관계는 力動的 현상이라는 점을 3공화국 정치가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1963년 선거에서 고전했던 박정희는 1967년 선거에서는 경제성과에 힘입어 樂勝(낙승)을 거둔다. 그러나 1971년 선거에서는 10년간 지속적으로 고성장을 달성했다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고성장이 불가피하게 동반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을 선거 쟁점화하는 데 성공한 야당의 공세에 맞서 힘든 선거를 치르게 된다. 특히 1971년 선거에 뒤이어 각종 사회집단이 더 큰 자율성과 金錢的 報償을 요구하며 동시 다발적 집회를 개최하는데 정부는 결국 비상사태 선포로 사태를 수습하게 된다.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에 산업화의 진전이 초래한 갈등이 중첩적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업적에 대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1969년 3선 개헌을 단행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維新體制의 도입으로 영구집권을 모색하게 된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갈등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유신체제는 간접선거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정당이 참여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제도정치권을 무력화하고, 영도자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아 三權分離 원칙 위에 군림하게 된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제도라는 것을 설명한다. 동시에 유신체제 도입의 배경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 욕구 이외에 미국과 중국의 접근, 주한미군의 점진적 철수 등이 야기한 안보 위기 상황 등이 있음을 언급한다. 또한 유신시대에 국가 可用資源을 거의 총동원하여 추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서는 유신체제와 같은 非常한 권력질서가 요청된다는 시각도 있다는 것도 제시한다. 유신체제 도입의 名分이 어떻든 그것은 이미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國民情緖에 수용되기 어려운 면이 있었고, 따라서 강한 반대 운동을 야기시켰다. 제도정치권이 사실상 無力化된 상황에서 반대운동은 불법단체의 결성 또는 국민운동과 같은 장외 투쟁적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은 정보부, 군 등에 의한 대응을 일상화했고 이는 역으로 다시 특히 대학생과 유신체제 하에서도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 산업화 정책의 결과로 양산된 新中産層 사이에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더구나 중화학공업화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 운영을 불가피하게 했고 또한 높은 인플레이션이 조장되었으며, 거기다 장기집권 정부에 불가피하게 창궐하는 부패 등으로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의 중요 수혜 계층인 일반 중산층까지도 유신체제에 등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사실은 집권 공화당이 야당에 비해 저조한 得票率을 보인 1978년 선거 결과를 통해서도 노출된다. 이런 民心 離反을 배경으로 잠잠했던 제도야당 정치권과 재야 명망가들의 민주화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싸고 이미 1975년 육영수 암살 이후 과잉 확대된 경호실의 권한을 둘러싸고 발생하기 시작한 통치 엘리트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고 이는 마침내 박정희의 암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때 강조될 것은 박정희 사망 때까지도 제도로서의 군부와 관료집단의 박정희에 대한 충성에는 어떤 龜裂(균열) 조짐도 나타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이상의 관찰에 근거하여 박정희 시대 민주화운동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박정희 시대 민주화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비추어 명분이 있는 운동이었다. 특히 그것이 한국 사회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가치라는 면에서 그들의 투쟁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들이 반대했던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부단하게 성공적으로 추구되었던 산업화가 결과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현실화를 돕는 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경제 발전이 동반하는 사회적 변동은 상황과 단계에 따라 사회적 안정과 민주화를 향한 정치 변동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산업화의 성공적 추진은 상당 기간 안정보다, 특히 상대적 박탈감 등의 증폭을 통해 새로운 갈등을 야기시켜 煽動(선동) 정치에 유리한 토양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셋째, 산업화는 한편 민주화를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놓는 동시에 그것이 국가 주도적으로 추진될 경우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지배력도 상당 부분 강화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가 간단히 해소될 수는 없다. 제4장은 박정희 사망 후 뒤이어 등장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권위주의 시기에 대해 서술한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은 18년에 걸쳐 국정 운영과 정치 과정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퇴장은 두 가지 절박한 국가적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을 먼저 강조한다. 그 하나는 權力空白을 메우고 국가를 안정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권력체계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고, 또 다른 과제는 박정희 시대를 일관했던 성장 위주 정책과 1970년대 중심 과제였던 중화학공업화 추진 정책이 낳은 부작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개혁을 통해 경제의 성장 동력을 다시 찾아 선진 경제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주목하여 이 장에서는 먼저 박정희의 사망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新軍部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관해 논한다. 박정희 사망 후 일반 사회 분위기는 유신체제는 새롭게 제정될 민주적 헌법에 따라 선출되는 민주 정부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과도 정부 首班 崔圭夏도 약속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또 다른 군부 지도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집단이, 박정희 시대를 통해 민주화 투쟁을 이끈 경력 때문에 당시 차기 집권자로 유력시되던 金永三·金大中을 제거하고 기본적으로 유신 권위주의 체제와 유사한 체제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와 관련된 요인으로 다음 사항들을 제시한다. 군부 내에는 유신체제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이념 그리고 이익 면에서 거부했던, 박정희에 의해 分離支配 원칙에 따라 군을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성된 하나회라는 凝集力(응집력)이 강한 사조직이 있었고, 이들의 정치적 부상을 허용 또는 촉진하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첫째, 최규하 과도정부, 공화당, 군부로 형성되어 있던 범여권, 그리고 김대중·김영삼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던 범야권 모두가 분열되어 정국을 주도할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해 사회 전반에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증대되었다. 둘째, 최규하 과도 정부가 조기 총선을 주저하고, 소위 二元執政制案(이원집정부제안)의 제안 등으로 새 정부 창출 이후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려는 의도를 보임에 따라 정국의 불투명성이 더욱 확대되었고, 이는 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을 갈망하는 학생들의 격렬한 반발을 야기시켜 정치사회의 불안정이 더욱 가중되었다. 셋째,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과 함께 급속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안정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세력의 부상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 전개에 힘입어 신군부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들의 집권 과정에서 있었던 광주민주화항쟁의 결과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는 전두환 정부의 胎生的 原罪(태생적 원죄)로 작용하여 반미 급진세력 확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신군부는 집권과 함께 ‘正義社會具現’ 등의 구호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경제 개혁을 통해 성장 기조를 되찾는 데 전력을 경주한다. 이들이 집권한 1980년에는 20년 가까이 고성장하던 성장률이 -4%까지 곤두박질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의 동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소위 구국을 앞세운 집권 명분은 상실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특히 경제적 불안과 침체에서의 탈출을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수동적으로나마 그들을 지지했던 중산층의 지지 상실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전두환이 역할 모델로 삼았을 경제 제일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일관했던 박정희로부터의 學習效果도 작용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를 강타한 심각한 장애 요인은 高物價와 國際收支 惡化였다. 이미 유신 말기에도 경제 안정화 추진의 필요성이 정부 일각에서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결국 이 과제는 전두환 정부가 떠맡게 된다. 전두환 정부는 단호한 태도로 이 과제에 접근하는데, 이는 기업의 賃金凍結 등을 유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1985년 총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무시하고 국방 예산을 포함하는 정부 예산 동결, 그에 따른 공무원 임금 동결, 추곡수매가격 인상 극소화 등의 조치로 나타난다. 이 결과 안정화 정책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불어 닥친 소위 3低現狀에 힘입어 국제수지의 大反轉을 고성장과 함께 달성하여 경제 운영에서 획기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긴축에 강박 관념적으로 집착하여 경제 인프라 투자에 소홀히 하는 등의 실책을 범한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안정화에 성공하여 성장 추세를 살려 건국 이후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물가 안정을 달성한 것은, 1961년 박정희의 집권과 함께 본격화된 산업화를 향한 대질주가 한 단계를 마감하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전두환 정부 경제 성공에 작용한 큰 요인으로, 불가항력적 힘에 의해 1980년대 중반에 발생한 소위 달러화의 약세, 낮아진 국제금리와 석유가격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집권 초기에도 모든 이해당사자 심지어는 군부의 불만까지도 무시하고 안정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던 전두환 시대의 강력하고 자율적 국가 체제의 가능도 그 요인 중 하나였음을 지목해야 할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의 역할과는 별도로 집권과 함께 민주화 세력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다. 유신체제와의 차별화를 위해 단임제의 고수와 평화적 정권이양 의지를 계속 천명했지만, 대통령 간선제의 유지는 전두환 체제가 類似 유신체제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으며, 집권 과정에 광주에서 발생했던 流血事態, 사회정화의 명분 아래 있었던 수많은 인권 침해 사례 등은 민주화 세력의 도전을 자극한 요인이다. 집권 초기에는 충격적이고 강압적 분위기, 그리고 경제의 위기 상황 등을 배경으로 민주화 세력의 도전이 본격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80년 중반에 접어들며 민주회복 운동의 상징이 된 소위 직선제 개헌을 기치로 하는 야당이 김영삼·김대중의 적극 지원 아래 활성화되고 이것이 중산계층의 지지를 획득해 가며 직선제 개헌 운동은 정치의 중심 話頭로 자리 잡게 된다. 애초에 이에 대해 단호한 거부 입장을 취하던 집권세력은 시간이 경과하며 중산층마저 광범위하게 이 운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결국 1987년 6월 29일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에 동의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里程標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6·29宣言을 불러온 요인으로 행동적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투쟁과 함께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통해 일관되게 국가 최우선과제로 추진되었던 경제 발전이 창출해 낸 두터워진 중산층의 역할과 전반적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近代性의 성장을 들 수 있다. 6·29선언의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4월혁명 이후와 같은 逆轉 事態 없이 6·29선언과 함께 형성된 헌법 체제가 2006년 현재까지 2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덧붙여 군부 권위주의 하에서의 급속한 산업화는 일거에 한국이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한 반면, 일종의 사회적 過負荷(과부하) 현상을 야기하여 사회 일부에 경직화된 급진주의를 확산시켰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시대정신 창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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