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교과서 집필 방향과 내용(2)- 1905~1945년 시기, 일제의 조선 지배와 조선사회의 구조적 변화

이강기 2015. 9. 19. 11:11

[특집] 일제의 조선 지배와 조선사회의 구조적 변화
 
1905~1945년 시기 교과서 집필의 방향과 내용


[李榮薰 | 서울대 교수 경제학]


Ⅰ. 소개

2006년도판 『고등학교 한국근ㆍ현대사』교과서 (이하 『근현대사』로 약칭)에서 식민지기(1905-1945)에 관한 서술은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목차로 이루어져 있다.

1. 일제의 침략과 민족의 수난
(1) 20세기 전반의 세계 (2) 일제의 침략과 국권의 피탈 (3) 민족의 수난 (4) 경제 수탈의 심화

2.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ㆍ1운동 이전의 민족운동 (2) 3ㆍ1운동의 전개 (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 무장 독립전쟁의 전개
(1) 국내 항일 민족운동 (2)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활동 (3) 1920년대의 무장 독립전쟁 (4) 1930년대의 무장 독립전쟁 (5)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4. 사회ㆍ경제적 민족운동
(1) 사회적 민족운동의 전개 (2) 민족실력양성운동의 추진 (3)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전개 (4)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

5. 민족문화 수호 운동
(1)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치 (2) 국학운동의 전개 (3) 교육과 종교 활동 (4) 문학과 예술 활동

『근ㆍ현대사』는 모두 6종이다. 그 가운데 (주)두산, 법문사, (주)천재교육,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 출간된 4종이 위와 같은 목차를 정확히 공유하고 있다. 나머지 2종은 (주)금성출판사와 대한교과서(주)의 교과서이다. 이 두 교과서의 목차는 위와 꼭 같지는 않으나 절의 제목과 순서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무언가 의미 있는 차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대로 두드러져 보이는 차이가 있다면, 두 교과서가 제 1장에서 日本軍 慰安婦(위안부)에 관한 독자의 절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금성출판사는 ‘주제5 전쟁동원과 군 위안부 징용’으로, 대한교과서(주)는 ‘5. 아직도 진행 중인 군대 위안부 논쟁’의 제목으로 위안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4종의 교과서도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독자의 절이 아니라 제 1장 4절 ‘경제 수탈의 심화’에 첨부된 ‘도움말’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6종의 『근ㆍ현대사』는 비록 筆陣(필진)을 달리하고 있지만 기획과 편집에서 거의 완벽한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 검인정 교과서의 체제에 걸맞지 않게 교육부로부터 장과 절의 제목과 순서까지 미리 부여되었던 모양이다. 반드시 그 때문만이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절 이하의 서술 내용에서도 거의 완벽한 통일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굳이 검인정제가 채택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6종의 교과서는 千篇一律(천편일율)의 서술을 보이고 있다. 교과서의 집필에 참여한 다수의 역사가들은 검인정이란 체제를 활용하여 식민지기에 관한 자신의 역사인식을 개성적으로 펼쳐보고자 시도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장과 절의 제목과 순서가 미리 부여되었기 때문만이라기보다 식민지기에 관한 집필자들의 역사인식 자체가 이미 천편일률의 고정적인 틀에 얽매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6종의 『근ㆍ현대사』를 접한 나의 첫 인상은 이와 같다.

그 고정적인 틀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위와 같은 목차 구성에서 저절로 환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6종의 교과서는 제 1장에서 1905-1910년에 걸쳐 大韓帝國의 國權이 일제에 탈취되고 끝내 일제에 병합되는 정치외교사를 소개한 다음,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10년대의 강압적인 헌병ㆍ경찰통치에서 20년대의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나아가 30-40년대 戰時期의 민족말살통치로 전개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한 민족의 수난과정은 토지, 식량과 노동력이 수탈되는 과정이었다. 일제는 土地調査事業을 실시하여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였다. 또한 일제는 産米增殖計劃을 추진하여 대량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일제의 수탈은 전시기의 징병ㆍ징용에 의한 노동력 수탈에서 극에 달하였다. 특히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한 범죄행위가 모든 교과서에서 공통으로 중시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그대로이다.

이어 제 2장부터 5장까지는 이 같은 일제의 억압, 수탈과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줄기차게 저항하였던가에 관한 서술이다. 조직적인 저항의 출발은 3ㆍ1운동과 뒤이은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수립이었다(제2장). 국외에서의 저항은 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만주와 중국을 무대로 한 ‘무장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은 마침내 1944년 임시정부 산하의 光復軍으로 집결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對日 전쟁에 참전하여 각종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아쉽게도 국내로의 進攻作戰이 펼쳐지기 전에 일제는 패망하고 말았다(이상 제3장). 일제에 대한 저항은 국내에서도 여러 형태의 사회ㆍ경제적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중요했던 것은 민족실력양성운동과 자치론자에 맞서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와 좌파의 연합으로 전개된 민족유일당 운동, 곧 新幹會의 활동이었다. 이외에 교과서는 계급운동으로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역할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이상 제4장). 마지막으로는 일제의 말살정책에 맞서 민족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 소개되는데, 특별히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國學運動으로서 한글운동과 교육운동으로서 夜學運動 등의 선진적인 의의가 강조되고 있다(이상 제5장).



Ⅱ. 비판

이상에 명확하듯이 식민지기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은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우리 민족이 벌인 抵抗과 戰爭의 역사를 基本軸(기본축)으로 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에 관해서도 한 가지로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 형태와 방식이 어떠하였든 제국주의의 지배는 식민지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많은 경우 제국주의의 수탈은 식민지의 사회와 경제의 정상적인 발전경로를 왜곡하였다. 일제의 조선 지배도 크게 보아 이 같은 비판을 모면하기 힘들다. 그 점에서 교과서의 식민지기 서술이 제국주의 비판의 시각에서 억압과 저항의 패러다임을 취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을 전제하면서 교과서의 질적 개선을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한다. 우선은 일제의 수탈에 대한 고발이 여러 모로 사실이 아니거나 부정확하거나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토지의 수탈과 관련하여 『근ㆍ현대사』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때 사실상 농민의 소유였던 많은 농토와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 또는 집안의 공유지로 명의상의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토지의 상당 부분이 조선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실은 2006년도판 『근ㆍ현대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2005년까지의 교과서에 비해 많은 개선을 보이고 있다. 이전의 교과서들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 당시 土地所有權申告가 무엇인지 모르는 농민들에게 짧은 기한의 신고를 강요하여 대량의 無申告地의 발생을 유도하였으며, 그 결과 전 농지의 4할을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하였다고 가르쳐왔는데, 이는 그야말로 소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이런 荒唐說(황당설)이 지난 40년간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왔던 데서 우리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식민지기의 역사 서술에서 얼마나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교과서의 이 같은 난폭한 서술에 대해 몇 차례 비판을 제기해 왔다. 그 때문인지 2006년도판 『근ㆍ현대사』는, 국정 중ㆍ고등학교『국사』도 마찬가지로, 기만적인 신고 방식에 의해 토지의 4할이나 수탈되었다는 난폭한 서술을 배제하고 있다. 이는 환영할만 한 일이다.

그렇지만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2006년도판 『근ㆍ현대사』의 위와 같은 서술도 정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제는 일차 國有地로 편입된 토지 가운데 “사실상 농민의 소유였던 많은 농토”를 조사하여 농민의 소유지로 돌려 주었다. 또한 일제는 마을 또는 집안의 공유지에 대해 共同名儀의 신고를 허용함으로써 신고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실은 위와 같은 서술은 1930년대에 나온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최초의 논문에서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지금까지 실증된 적이 없는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요컨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한 일제의 목적은 토지의 수탈에 있지 않았다. 남의 토지를 가로채려는 모리배의 준동은 일제에 의해 엄히 단속되었다. 일제는 왜 그렇게 했을까. 이전에도 몇 차례 강조한 적이 있지만, 한반도 전체를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킬 계획에서 일본과 동일한 토지제도를 창출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그런 거창한 수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이지 농민들의 토지를 도둑질이나 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토지를 측량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조선의 쌀을 수탈하였다는 교과서의 서술도 부정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2006년도판 『근ㆍ현대사』는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쌀을 ‘수탈했다’거나 ‘가져갔다’거나 ‘搬出(반출)’하였다 등의 다양한 修辭(수사)를 동원하고 있다. 실제 조선에서 일본으로 쌀이 넘어간 것은 輸出이라는 경제적 메카니즘을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수탈과 수출은 결코 혼동할 수 없는 상이한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빼앗아가는 수탈이면 조선 내에서 재화와 소득의 순환과정은 축소될 수 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반면에 보다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수출한 것이라면 조선 내의 경제적 순환과정은 擴大再生産의 과정을 밟게 되며,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진다. 그러니까 ‘수출’을 두고 ‘가져갔다’고 쓰고 있는 2006년도판 『근ㆍ현대사』는 학생들에게 쌀이 일본으로 넘어감에 따라 조선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를 正反對로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60년대까지의 교과서만 해도 쌀이 일본으로 건너간 메카니즘을 경제적인 ‘수출’이라고 명확히 서술하였다. 쌀을 ‘가져갔다’는 식의 애매한 표현으로 일제의 수탈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서술은 교과서 편찬이 國定으로 바뀐 1974년부터 등장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한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지난 30년간 교과서의 질적 수준은 오히려 뒷걸음질 쳐 왔다고 해도 좋을 형편이다.

여러 교과서가 공통으로 강조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에 관한 서술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임의로 조선 여성들을 동원하던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였다(1944).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 공장으로 보내져 강제 노역을 당하였고, 또 다른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군위안부로 이용되었다.” 우선 법령의 원래 이름이 ‘女子挺身勤勞令(여자정신근로령)’인데 ‘여자 정신대 근무령’으로 잘못 표기된 문제를 지적해 둔다. 이 서술에서 가장 큰 문제는 1944년 8월 23일에 공포된 동 법령에 의해 挺身隊의 이름으로 동원된 여성의 일부가 전쟁터의 위안소로 보내졌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의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입증할 文獻史料가 없음은 물론이고, 최근까지 생존하여 증언을 남긴 위안부 175명으로부터도 그러한 사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보내졌다가 어떤 특수한 사정으로 대오에서 이탈한 몇 명의 여성이 위안부 생활을 경험한 사례는 있는데, 그것을 위 서술의 실증적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위의 교과서 서술은 지금까지 밝혀진 위안부의 역사와 무관하게 교과서의 집필자들이 머리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비판의 근간을 이루는 토지, 식량 및 여성에 대한 수탈이 여러 모로 부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음이 현행 『근ㆍ현대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하면 한국 정부는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놓이리라고 나는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의 수탈상을 어떻게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기술할 것인가. 일제는 무엇을 어떻게 수탈하였는가.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교과서의 서술이 정확하지 않거나 엄밀하지 않은 것은 이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예가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3ㆍ1운동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술도 따지고 보면 문제이다. “선언식을 마친 탑골 공원의 군중은 가슴에 고이 간직해 온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울 시가를 누볐다.” 그런데 이 기술 아래에 제시된 사진 자료를 보면, 서울의 종로를 누빈 시위 군중의 사진인데, 한 사람도 태극기를 들고 있지 않다. 언제인가 나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들려 3ㆍ1운동에 관한 사진자료들을 세심히 살핀 적이 있는데, 서울이고 지방이고 태극기를 손에 든 조선인을 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여겨 관련 분야의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아직 당시까지는 舊韓國 시절에 창제된 태극기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하여 시위 군중의 손에 태극기가 들려져 있지 않음은 당연하다는 대답이었다. 요컨대 3ㆍ1운동에 관한 위의 교과서 서술은 자신이 제시한 사진 자료에 의해 반박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빗고 있는 셈이다.

독립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라고 할 수 있는 1920년의 靑山里大捷(청산리대첩)과 관련해서도 미안함을 무릅쓰고 지적해 둘 점이 있다. 6종의 『근ㆍ현대사』가운데 (주)두산, 대한교과서(주), 법문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 나온 4종은 독립군이 숫적으로 몇 배나 우월한 일본군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무난하게 기술하고 있다. 반면에 (주)금성출판사의 교과서는 일본군을 1,200명이나 사살하였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60명과 부상 9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주)천재교육의 교과서는 세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1,600여명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피해를 안겼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여섯 부대 중의 하나인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만에서 1백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났다고 쓰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 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한 쪽이 부실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독립군이 거둔 커다란 전과를 숫자로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할 요량이면 독립군 측의 주장 만이 아니라 일본군 측의 戰爭史 자료까지 세밀히 뒤질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 둔다.

요컨대 현행 『근ㆍ현대사』교과서는 실증적 근거에서 너무나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교과서가 식민지기 서술의 기본축을 억압과 저항의 패러다임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불가피성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하여 교과서의 집필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두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근대과학의 본질은 엄격한 實證에 바탕을 둔 經驗主義에 있다. 다시 말해 현행 교과서는 제국주의 비판에 치우친 나머지 이 같은 근대과학에 요구되는 이성적 요건의 확보에 소홀하다는 흠결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 서술이 理性보다 感性에 치우친다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것인가. 그 문제를 현행 『근ㆍ현대사』교과서에 대한 두 번째 비판점으로 제기하고 싶다. 특정 시대에 관한 역사 서술이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당해 사회의 전체적 구조와 그것의 전후 시대와의 연관된 객관적인 의의가 놓쳐지기 쉽다. 실제 일제하 식민지기의 역사는 억압과 저항의 틀만으로는 그 전체상이 파악되지 않는다. 실제 그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소극적인 저항과 소극적인 협력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 시대를 살아 남았다. 그런데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1905년과 일제가 패망한 1945년 사이에 그들의 일상생활과 사회의식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1945년 일제가 이 땅에서 철수하였을 때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19세기까지의 전통 朝鮮人이 아니었다. 그들은 20세기의 현대 韓國人으로 변해 있었다. 모두가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上層를 점한 지도적 계층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대한민국을 세웠고 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발전하였다.

식민지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이렇게 複線으로 유지하게 되면 억압과 저항의 戰線만이 아니라 開發과 學習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전선을 발견할 수 있다. 현행 교과서는 일제가 구축한 각급 행정기관과 경찰기구와 재판소를 ‘억압기구’로 규정하고, 또 각종 경제기구로서 은행과 철도국과 전매국을 ‘수탈기구’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 각종 행정ㆍ경제기구들은 외래의 근대문명이 조선의 전통문명에 이식되고 상호 접합하는 경로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근대문명의 이식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1912년에 있었던 朝鮮民事令의 공포를 들고 싶다. 그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 民法이 시행되었다. 그것을 두고 한 인간이 근대적 私權의 주체로서, 다시 말해 한 인간이 그 사회적 人格權과 財産權에 관한 한 그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운 근대적 인간으로 자립하는 文明史의 대사건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요약할 수 있다. 식민지기의 조선인은 비록 일제로부터 정치적으로 차별되었지만,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는 이 같은 근대 인간으로 法定되었다. 그 점에서 식민지기의 인간들은 더 이상 신분으로 차별되고 수탈되었던 전통 조선인이 아니었다.

요컨대 현행 『근ㆍ현대사』는 1876년의 開港 이후 오늘날까지 130년간 한국의 전통 문명이 외래 문명과의 상호 작용과 접합의 과정에서 개성적으로 전개해 온 근대화의 역사 가운데서 짧았다면 짧았던 1905-1945년간의 식민지기가 차지하는 역사적인 位相,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이루어진 문명사적 전환과 그 역사적 의의에 관해 객관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현행 교과서는 식민지기의 역사를 野蠻(야만)의 시대로 상정하고 있다. 억압과 저항 그 자체만이라면 그것은 야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안간힘으로 근대를 학습하고 근대인으로 변신해 가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文明의 空白, 바로 그 점을 현행 교과서가 안고 있는 심각한 모순으로 지적할 수 있다.



Ⅲ. 대안

비판만이라면 무책임하다. 그런데 건설적인 대안을 내세우기는 쉽지 않다. 한 가지 이유로서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과격한 집단감정을 들 수 있다. 그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몇 년간 親日派 문제나 慰安婦 문제나 獨島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러하였듯이, 보통의 한국인들은 그에 관해 소수나마 다른 입장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식민지기의 역사에 대해 한국인들은 경직되어 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민족의 자존심을 할퀸 상처는 아직도 깊다. 거기에다 지난 40년간의 잘못된 국사교육이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農地의 4할을 빼앗았다, 쌀의 절반을 수탈하였다, 650만의 사람들을 强制連行하였다, 동원된 위안부가 수십만에 달하였다 등등, 하나 같이 허황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국사교실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에 주입되었다. 대학에서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위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에 하나같이 당혹스러워 한다. 어느 학생의 고백으로는 중ㆍ고등학교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선생도 울고 학생도 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오늘날의 20-40대 한국인들을 상대로 국사 교과서의 잘못을 비판하기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현대판 친일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은 변화를 과격하게 추구해서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너무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는 것도 能事는 아니다. 역사의 진실은 결국 승리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을 굳건히 하면서 용감하게 국민들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진실은 인간들이 안고 있는 역사의 상처를 치유한다. 진실은 인간정신을 過去事의 桎梏(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고급문명의 先進人間에게 있어서 역사는 분노의 淸算이 아니라 고요한 內面의 省察이다.

이 같은 자세에서 새로운 대안의 교과서가 식민지기의 역사를 다시 씀에 있어서 견지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이랄까 기초적 시각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억압과 저항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수정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교과서처럼 일제가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과 여성을 마구잡이로 수탈하였다는 식의 서술은 더 이상 곤란하다. 그 대신 억압과 수탈이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명시적인 제도나 암묵적인 규범으로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었던가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일제의 조선 지배가 갖는 유형적 특질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영국의 인도 지배로 대표되는 自治主義와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로 대표되는 同化主義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일제의 조선 지배는 동화주의의 유형에 속하고 있다. 아니 동화주의의 典型이라고 할만큼 일제는 한반도를 일본 영토의 일환으로 영구히 편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른바 永久倂合이 그것이다. 지배의 기본 입장이 그러하였던만큼 일제는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조선의 相對的 自律性을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제의 조선 지배는 헌병과 경찰이 대규모로 동원된 강압성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동화주의는 우선 경제 분야에서 철저하게 추구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의 市場으로 통합되었으며 자본과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조선을 정치적으로 차별하였다. 조선인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다. 세금은 거두면서 정치적 권리는 부정하는 모순이 일제가 추구한 동화주의의 모순이었다. 나아가 조선인은 교육ㆍ임금ㆍ취업ㆍ승진 등의 사회적 기회에서도 차별되었다. 조선의 역사와 언어는 부정되었다. 새로운 교과서는 이상과 같은 일제의 억압적인 동화정책의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결국 일제의 조선 지배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 변화와 더불어 조만간 破局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동화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일본의 조선 지배는 近代文明을 조선에 이식시켰다는 점이다. 식민지기에 걸친 근대문명의 이식은 制度와 形式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긴 역사의 행로에서 한국인들을 근대 문명인으로 발전시킬 중대 계기였다. 근대적 제도의 이식은 먼저 화폐, 금융, 재정의 방면에서 추진되었다. 이어서는 전술한대로 1912년에 朝鮮民事令이 공포되었다. 1910-1918년에 걸쳐서는 土地調査事業이 시행되어 토지의 사유재산제도를 확립시켰다.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자 인간들의 사회생활을 상이한 범주로 구분하고 차별해 왔던 身分制가 해체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3ㆍ1운동 이후가 되면 근대적인 敎育制度가 확대 보급되었다. 총독부는 식민지 지배의 효율을 위해 도로ㆍ철도ㆍ항만ㆍ전신 등의 사회간접자본에 크게 투자하였다. 그렇게 근대적인 시장환경이 조성되자 대외 貿易이 크게 증대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 자본이 한반도로 건너오기 시작하여 공업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라 식민지의 경제가 근대적 경제성장의 경로를 밟기 시작하였다. 어디까지나 일본 자본이 중심이 된 경제성장이었지만, 조선인에게 분배된 소득의 몫도 증가하였다. 조선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도 그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해방 후 국민경제를 담당할 企業家集團이 성장하였다. 새로운 교과서는 이상과 같은 식민지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그 근대화의 양상을 기탄없이, 그렇지만 차분한 논조로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민족 독립운동의 범위를 사회ㆍ경제ㆍ사상ㆍ문예의 여러 방면으로 폭넓게 확대하여 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國民國家의 건설과 발전의 주역으로서 현대 한국인이 형성되고 성숙하는 文明史의 과정으로 고쳐 쓸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대안 교과서를 모색함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도 논쟁적이며 전략적인 고려가 요청되는 대목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경제사 연구자로서 여타 방면의 자료를 많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자신 있게 주장을 내세울 처지가 못된다. 그 점을 전제하면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마음에 담아온 생각을 숨김 없이 드러내 본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현행 『근ㆍ현대사』는 식민지기의 역사에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이어 설정된 5개 장 가운데 1개 장은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나머지 4개 장은 그에 맞선 독립운동에 할당하고 있다. 독립운동 가운데 6종의 교과서가 공통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만주와 중국에서 전개된 ‘무장 독립전쟁’과 국내에서 전개된 농민ㆍ노동자의 계급운동과 新幹會로 대표되는 비타협적인 민족운동이다. 여타의 계몽적이거나 개량적인 민족운동에 대해 교과서는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독립운동사에 관한 이 같은 평가는 자신의 역사적 正統性이 전투적인 독립운동에 기원한다고 믿거나 믿고 싶어하는 남한과 북한의 두 국가로부터 공공연한 지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보통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지지는 難攻不落(난공불락)의 要塞(요새)처럼 강건해 보인다.

그럼에도 변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은 일제의 패망과 우리 민족의 해방은 전투적인 독립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931년 滿洲事變 이래 일제는 중국으로, 동남아로, 태평양으로 제국의 판도를 무리하게 확장하였다. 일제가 해체된 것은 그러한 일제의 야심이 미국과 충돌하고 미국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그와 같이 1930-40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있어서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싼 제국적 질서의 충돌과 교체에 의한 것이지,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다. 쓰라리더라도 이 점을 정면에서 냉정하게 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좀더 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립하여 1945년까지 존속한 舊제국주의체제는 직접적으로는 식민지 민족의 무장투쟁으로 해체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사례는 없다. 오히려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인간과 경제가 근대화하여 민족차별이라는 野蠻의 政治體制를 유지함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근본적 모순으로 인해 조만간 해체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해체에 박차를 가한 국제정치적 계기는 세계를 자유무역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것이 국익에 보다 유리하였던 미국이 최강의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함으로써 주어졌다.

우리 민족을 일제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이 같은 포스트-제국주의를 향한 國際政治의 力學이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이 엄연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인가. 교과서가 강조하고 있는 만주와 중국에서의 ‘무장 독립전쟁’도 1920년대 초의 짧은 기간을 제외한다면 독립운동의 세력이 여러 갈래로 분열된 가운데 1930-40년대에 이르러 중국 국민당의 통제를 받거나 중국 공산당의 抗日連軍이나 八路軍에 분속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 민족 스스로 독자의 전선을 구축하고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 점에서 ‘무장 독립전쟁’이란 표현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장하지 않은 전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장’이란 말이 동어반복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역사적 실태에 비추어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와 같은 포스트-제국주의의 국제정치를 해방의 조건으로 전제한다면,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 경제와 교육과 사상과 문예의 여러 방면에서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해방 후 진취적인 국민국가를 세워나갈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던 한국인의 모습에 좀더 적극적인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현행 교과서는 식민지기의 교육과 관련하여 대한제국기의 사립학교, 1910년대의 개량서당, 그리고 1920년대의 야학운동을 민족교육의 정통 라인으로 설정하면서 3ㆍ1운동 이후 특히 1930년대에 이르러 폭팔한 보통교육에 대한 대중적 열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비록 일제가 정비한 식민지 교육제도이지만, 교육의 내용에는 20세기 인류가 공유할 문명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통 朝鮮人이 현대 韓國人으로 전환하였던 문명사의 발전이 바로 그 교육의 장에서 펼쳐졌다. 한국의 현대 역사학은, 20세기에 들어 한국인들이 비로소 발견하게 된 민족이라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의식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이 같은 文明史의 轉換 그 자체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이 발견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문명사적 발전의 덕분이었다.
넷째는, 방금 지적한 바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조선을 규정한 국제정치의 조건과 변동에 관해 보다 많은 지면을 할당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현행 교과서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할 수 있었던 국제적 조건과 1919년 3ㆍ1운동을 발생시킨 국제적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만, 막상 1945년 민족의 해방을 가져온 1931년 이후의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ㆍ태평양전쟁에 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할당하고 있지 않다. 이들 전쟁이 우리 민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戰線으로 끌려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쟁이 초래한 것이도 했지만, 만주와 중국과 일본에 걸친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동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앞서 강조한대로 바로 이 전쟁과정에서 일제를 패망시킬 미국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바로 이 전쟁과정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자신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미국ㆍ중국ㆍ소련 등의 국가들이 나타났으며, 그들간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로운 긴장관계의 국제질서가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문제들이 많다. 이른바 15년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모순과 경제적 약점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무엇 때문에 끝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끝까지 조선 독립군의 독자적 군사활동을 용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해방후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지고 그 남쪽이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 들면서 한국인들이 반쪽이나마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를 건설하게 된 국제정치사의 배경과 그 문명사적 의의를 학생들로 하여금 성찰케 하는 데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식민지기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면, 장과 절의 제목과 목차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제1장 일제의 조선 지배와 식민지 통치기구
1-1. 20세기초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1-2. 일제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보호국화
1-3.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1-4. 한일합병과 조선총독부의 통치기구


제2장 사회경제 구조의 변화와 조선인의 동향
2-1. 근대적 민법의 시행과 사유재산제도의 성립
2-2. 시장경제의 이식과 시장기구의 확충
2-3. 대외무역의 증가와 자본의 이동
2-4. 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족기업가의 성장
2-5. 인구의 증가와 농촌경제의 동향

제3장 민족운동의 전개
3-1.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2. 교육운동과 실력양성운동
3-3. 농민ㆍ노동운동과 신간회
3-4. 민족문화의 발전
3-5. 해외의 독립운동

제4장 전쟁과 해방
4-1. 일본제국주의의 구조와 모순
4-2. 만주사변에서 아시아ㆍ태평양전쟁으로
4-3. 군수공업화정책의 전개
4-4. 농촌진흥운동과 전시동원체제
4-5. 항일 무장전선의 발전
4-6.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해방

제 1장은 먼저 1900-1910년대에 걸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격동, 그 속에서 전개된 일제의 조선 침략, 대한제국의 保護國(보호국)으로의 전락과 韓日合倂, 그에 저항한 조선인의 抗日義兵과 愛國啓蒙運動, 이들과는 지향을 달리하였던 一進會의 동향 등을 소개한다. 이어서는 보호국기에 統監府(통감부)가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으로서 시행한 화폐ㆍ재정ㆍ금융제도의 개혁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한일합병 후 조선과 일본과의 법적 관계, 朝鮮總督府의 특수한 지위, 지방행정제도를 포함한 총독부의 통치기구, 총독부의 동화주의 정책과 그 유형적 특질, 조선인의 정치적 무권리로 상징되는 지배정책의 억압성 등에 대해 서술한다.

제 2장은 식민지기에 전개된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와 그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 양상을 살핀다. 우선 朝鮮民事令과 土地調査事業의 시행으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고, 은행ㆍ회사 등의 시장기구가 발달하고, 대외 무역과 자본 유입이 활성화함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는 양상을 전체적으로 개관한다. 그와 더불어 조선인 가운데서도 기업가와 숙련노동자 계층이 성장하는 민족의 대응양상을 소개한다. 농촌에서는 植民地地主制가 팽창하고 그 지배 하에서 小農經濟와 小農社會가 발달하였는데, 그에 관해서도 균형을 맞추어 서술한다.

제3장은 3ㆍ1운동을 계기로 하여 활성화한 민족운동과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해 서술한다. 우선 3ㆍ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 뒤이어 국내에서 전개된 교육운동과 실력양성운동에 대해 소개한다. 이어서는 이들과는 계급적 성향을 달리하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그에 기초한 민족협동전선으로서 新幹會의 활동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소개한다. 또한 이들 정치적 민족운동과는 별도로 전개된 학술ㆍ문학ㆍ예술 방면에서의 발전 양상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나아가 1920년대에 北滿洲와 西滿洲를 무대로 하여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과 중국과 미주 등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서술한다.

제4장은 만주사변 이래 아시아ㆍ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팽창과 그를 규정한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에 대한 서술을 전제한 위에 동 15년간 식민지 조선에서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農村振興運動, 軍需工業化와 戰時動員의 제반 양상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서는 그에 맞서 주로 만주와 중국에서 전개된 조선인의 항일 무장투쟁과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끝으로 일제가 패망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성립한 미국, 중국, 소련 간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성격과 특질에 관해서도 해방 후 민족분단과의 전제조건이란 문제의식에서 적절히 설명한다.

앞서 고백한대로 나는 경제사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사, 정치사, 문화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밝지 못하다. 그 때문에 이상의 논의에서 많은 잘못이 빗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논점이 한 곳으로 치우쳤을 수도 있다. 그런 점들은 지적 되는대로 시정하겠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안의 새로운 교과서가 편찬될 것으로 믿는다. 관련 전문가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비판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시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