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교과서 집필 방향과 내용(3) - 1945-1960년시기, 해방과 근대국가의 건설

이강기 2015. 9. 19. 11:08

[특집] 해방과 근대국가의 건설
1945~1960년 시기 교과서 집필의 방향과 내용

[全相仁 | 서울대 교수, 사회학]



1. 왜 문제인가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에 의하면 “국사는 국어와 더불어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기초가 되는 과목이며,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교육해야 할 민족의 정신적 자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나라 국사교육은 교육체제나 교육과정의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중고등학교 국사 관련 교과서의 내용은 수많은 史實的 誤謬와 理念的 偏向性으로 인해 ‘민족정신을 배양’하거나 ‘민족의 정신적 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미처 갖추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국사 교육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각계에서 점차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2004년에 들어와 일부 매스컴이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것에 이어 국무회의석상이나 國會國政監査場에서도 국사 교과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한 정부 관계 당국의 입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즉, 현행 교과서에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서술한 부분이 없으며, 역사의 解釋에 대해서는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개입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2005년 1월 ‘교과서포럼’이 發足하여 교과서 문제의 社會公論化가 시작된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다. 주무부서인 교육인적자원부는 현행 국사 관련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과 사실적 오류에 대해 외면과 침묵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으로부터의 문제제기에 대한 정부 반응(governmental responsiveness)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처사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주무부서로서의 重且大한 職務遺棄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시중에는 도합 6가지의 『한국 근·현대사』 검정교과서가 시판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다. 안타까운 일은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전국의 1,415개 고등학교 가운데 과반수에 육박하는 701개 교가 바로 금성출판사 교재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이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구성과 내용 가운데 시기적으로 1945년 해방에서부터 1960년 李承晩 政權의 沒落까지의 15년 정도를 다루고자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시기는 한국 현대사의 礎石(초석)이 마련된 기간이자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성취한 주요 업적의 端初가 형성된 기간이다. 이를 위해 2절에서 이 기간에 대한 현행 교과서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비판한 다음, 3절에서는 그것에 대한 代案敎科書 집필을 염두에 두고 주요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이러한 일을 누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2. 무엇이 문제인가

1) 총론

현재 시판되고 있는 6종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선 체제의 측면에서 판에 박은 듯 유사하다. 비록 검정의 결과라고 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編制 자체가 꼭 劃一化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교과서 간행 체제를 굳이 왜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꾼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1945년에서부터 1960년까지의 한국 현대사는 총 네 단원 가운데 마지막인 제4단원 ‘현대 사회의 발전’에 속한다. 제4단원은 다시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제1장 ‘대한민국의 수립’ 전체와 제2장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의 처음 일부가 1945~1960년의 시기에 할당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한 현행 교과서들의 서술을 개괄적으로 훑어보면 다음 세 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첫째, 이들은 하나같이 같은 시기의 북한 역사를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우리와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청소년들에게 인식상의 혼란을 주게 될 것이다. 둘째, 해방 직후 혹은 그 이후 한국 현대사를 기본적으로 ‘分斷의 歷史’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의 분단이라는 사실이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특성이나 내용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統一至上主義 歷史觀을 유발할 것이다. 셋째, 현행 교과서들은 1950년대 및 그 이후의 한국 역사를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 근대적 사회변동의 다양한 측면들 가운데 민주화에 대해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로써 사회와 역사를 ‘民主 對 獨裁’라는 二分法的 視角에서 좁게 해석되는 경향을 보인다.


2) 각론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해방이 우리의 자주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聯合國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긴 했지만, 광복의 밑바탕은 우리 민족이 줄기차게 전개한 독립운동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해방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중앙교육진흥연구소 272-273쪽). 특히 금성출판사의 경우에는 臨時政府의 光復軍이 국내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만큼 연합국 승리에 의한 광복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253쪽).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 자체는 물론 소중한 것이었지만, 해방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나 광복군은 국제적으로 公認된 적이 없다. 그런 만큼 민족해방과 관련하여 연합국의 役割과 寄與는 사실대로 설명되어야 한다.

분단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미국과 소련 양측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금성출판사의 경우는 양국 군대 布告令의 비교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257쪽). 이로써 反美主義가 자연스럽게 鼓舞(고무)되거나, 아니면 미국과 소련의 내부 偏差(편차)는 무시한 채 ‘占領國家’라는 점에서 동일시하는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 해방 전후에 한반도에 먼저 진주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 군대였다는 사실이 모든 교과서에 명기되어 있지 않다. 또한 분단이 구체화되는 속도가 남한보다 북한이 더 빨랐다는 사실이 외면되어 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북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으며, 공산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징이 정부에 대한 당의 우위라는 점을 고려하면 1945년 가을 북한 내 독자적인 共産黨 創設의 의미는 충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광복 전후에 활동한 의미 있는 건국 주체로서 모든 교과서들은 충칭의 임시정부, 화북 지방의 朝鮮獨立同盟, 그리고 국내의 建國同盟 세 가지만 거론하고 있다. 이로써 후일 韓國民主黨으로 발전하게 되는 국내 보수우파 세력은 물론 在美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그의 건국 노력조차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승만이라는 일종의 ‘무자격자’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와 반면 교과서의 대부분이 建國準備委員會(이하 건준)에 대해 엄청난 프리미엄을 몰아준다. 특히 금성출판사는 呂運亨을 “상당한 정세 파악과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고 있으며(225쪽), 법문사 또한 건준에는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참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247쪽). 그러나 건준은 과도기에 治安維持만을 일본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불과한 존재였다. 특히 건준을 승계한 人共은 사실상 ‘종이정부(paper government)’에 불과했으며, 국내외 민족지도자들의 참여도 誇示用(과시용)이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건준과 인공을 강조하는 것은 해방정국을 ‘사회혁명’의 시각에서 설명하는 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농민·노동자운동을 결코 경시할 수는 없으나 소위 밑으로부터의 사회혁명이 시대적 대세였던 것처럼 보기는 어렵다. 1946년 봄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일련의 輿論調査 결과를 보면 이는 사실과 상이한 측면이 많다. 해방정국에서의 사회운동을 계급론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시 좌경적 사회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근·현대사 교과서들이 모스크바 三相會談 내용과 信託統治(신탁통치) 논의를 왜곡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특히 우파 세력이 反託運動을 “반소·반공운동으로 몰아갔다”고 기술한 대목(중앙교육진흥연구소 277-278)은 당시 贊託보다는 반탁 여론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련은 託治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미국은 미온적이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다.

미군정 시대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일제히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금성출판사는 미군정 치하에서 극심했던 食糧難과 經濟難을 강조하면서, 특히 東洋拓植會社를 승계한 新韓公社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260쪽). 요컨대 미국은 수탈정책에 관한 한 일제의 계승자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물론 미군정의 정책에 일정한 과오와 오류가 존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농지개혁이나 親日淸算 등 탈식민지 개혁과제에 대해 처음부터 열의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친일세력을 일부러 庇護(비호)하거나 남한을 의도적으로 착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령 미군정기 未曾有의 식량난은 남한 점령 초기 미곡의 자유시장 정책이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供出制가 도입되고 신한공사가 발족했다. 미군정을 반민족적·반민중적·반혁명적 세력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금성출판사는 남한이 분단국가의 수립을 선도했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로 제1차 미소공위 무산 직후 이승만의 단정수립 제안과 제2차 미소공위 決裂 이후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회부를 지목하고 있다(261, 265쪽). 이어서 금성출판사는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총회 승인은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뜻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반면 金九·金奎植의 이른바 ‘南北協商’을 남북분단을 막고자 했던 의미 있는 노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단정수립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우선 冷戰體制의 역사적 붕괴와 김일성·김정일 통치 하 북한체제의 참상을 감안할 경우 이승만의 단정수립 계획은 慧眼 혹은 叡智의 결실로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이승만의 구상은 영원한 단정이 아니라 통일 준비를 위한 단정 우선이었다. 만약 그때 이승만이 武力統一을 ‘상정’했다고 비판되어야 한다면 김일성은 그것의 ‘실천’을 시도한 것으로 비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단독정부 수립이 초래한 최대의 역사적 과오로서 친일파 청산의 좌절을 거론하고 있다. 금성출판사는 反民特委 활동의 좌절로 인해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단정하는 가운데, 이를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大肅淸과 대비하고 있다(266쪽). 물론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은 역사적으로 아쉬움이 큰 대목이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 발발까지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친일파 청산 문제에만 돋보기를 들이대어야 하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일제 잔재 청산과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을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리다.

한국전쟁의 개전사유와 주체에 대해 교과서들의 대부분은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금성출판사는 한반도 차원에서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전쟁의 발발에 대해 모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북한의 김일성에게 상대적으로 免罪符(면죄부)를 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268쪽). 또한 한국전쟁을 그 무렵 남북 사이에 빈발하던 무력 충돌의 연장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수정주의 사관을 답습하고 있다. 전쟁의 영향에 대해서도 남북한이 공히 입은 물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반외세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로써 한국전쟁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문명사적 측면은 외면되고 있다.

대부분의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이승만은 건국에서부터 4·19에 이르기까지 始終一貫 권력 강화와 長期執權에 집착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승만은 부패척결이나 친일파 청산을 외면한 채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주력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이승만은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총력을 기울인 것처럼 나타나 있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승만은 곧바로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금성출판사 276쪽). 이로써 1950년대 이승만 정부에 의한 주요 업적들, 가령 신속한 戰後 復舊와 國防力의 劃期的 增大 및 교육을 통한 문화적 인프라 증대와 인적 자원의 개발 등은 애써 외면되고 있는 것이다.

4·19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도 주로 “독재와 부패정부를 우리 손으로 무너뜨린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금성출판사 279쪽). 그리고 4·19를 反獨裁를 향한 학생의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노동운동, 청년운동, 그리고 특히 통일운동의 연관성 속에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점이 주목을 끈다(금성출판사 280쪽). 이는 4·19를 그 이전 내지 당대의 시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윤색이 가미된 일종의 사후적 관점에서의 해석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은 “사회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지 못한 민주당 정부 비판으로 이어진 다음, 4·19 정신은 “마침내 5·16 군사정변으로 꺾이고 말았다”는 결론과 자연스럽게 합쳐진다. 덧붙여 ‘사회민주화’라는 개념이 고등학교 수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3. 어떻게 고칠 것인가

1) 원칙과 목차

우선 1945년 해방에서 1960년 4·19까지의 시기를 서술하는 현행 교과서의 시대구분에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들은 이 시기를 ‘Ⅳ. 현대 사회의 발전’ 중 ‘1. 대한민국의 수립’과 ‘2.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등 두 영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과 미군정기 3년, 그리고 이승만 정부 집권 12년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여 한데 묶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독립과 분단, 건국, 전쟁, 전후 복구, 그리고 미국의 전반적 영향력은 사실상 분리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또한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근대적 국가 건설(state building)과 국민 형성(nation-building)이 이루어진 시대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시기를 포괄하는 총괄적인 제목은 ‘해방과 근대국가의 건설 (1945~1960)’ 정도로 다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이는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쟁취하고 자유민주주의 국민국가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해 낸 다음 대한민국의 존재와 역량을 세계에 각인시킨 1940~1950년대 한국 현대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는 趣旨의 결과다.

끝으로 1950년대 한국 현대사의 復元과 復權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처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잣대만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단죄하는 편향적 접근은 시정되어야 한다. 무릇 교과서라면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사회변동의 보편적 내용들을 소개한 다음, 그것들이 한국에서 각각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비교사적 관점에서 그것들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50년대는 전반적으로 ‘暗黑期’가 아닌 ‘動態期’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그 시기가 나름대로 경험한 경제성장과 교육 부문의 성취, 그리고 세계적 진출 등의 실상과 의미가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집필 원칙을 반영할 가상 목차는 다음과 같다.

해방과 근대국가의 건설(1945~1960년)
1. 해방 및 분단
1)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의 해방
2) 냉전체제와 민족분단
3) 국내의 건국 준비
2. 미군정기
1) 미국의 대한정책
2) 신탁통치와 단정수립
3) 미군정의 사회·경제정책
3. 대한민국 정부 출범
1) 5·10 총선거
2) 농지개혁
3)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
4. 6·25전쟁
1) 전쟁의 기원과 발발
2) 전쟁의 결과와 교훈
5. 1950년대
1) 원조 경제와 경제성장
2) 교육 입국
3) 사회조직의 발달
4) 한국의 세계적 진출
5) 민주주의의 시련


2) 주요 내용

‘해방 및 분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주어졌다는 객관적 사실을 분명히 밝힌 다음 전후 세계질서가 東西冷戰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희망의 역사나 당위의 역사가 아니라, 주어진 세계사적 상황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능한 最善의 選擇枝(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일종의 문명사적 관점에서 최상의 선택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겠다. 또한 해방 직전 국내 정세도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미군 점령 이전에 경험한 좌경적 정치 발전의 원인과 전개과정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군정기’의 서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에 가변적 요소가 많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곧, 반혁명세력으로서 미국이 처음부터 분단국가 체제로 直進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미국이 한국에서 親美·反共 국가 수립을 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게 전가하기보다는 근대적 사회제도 이식자로서의 미군정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당시 미군정의 사회경제정책 역시 收奪的·抑壓的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나름대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을 분단국가라는 시각이 아닌 근대 국민국가의 출발로 이해해야 한다. 단정수립은 그 당시 상황에서 비록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次善의 選擇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지금 돌이켜 볼 때 당시 이승만과 미국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5·10 총선거는 근대적 ‘個人의 誕生’을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농지개혁 역시 보통사람들의 私的 所有權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였음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또한 친일 청산의 필요성과 현실적 어려움이 동시에 지적되어야 하며, 한국전쟁 이전까지 시기에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에 뚜렷한 진전이 있었음이 설명되어야 한다.

‘6·25전쟁’에서는 무엇보다 전쟁의 주체와 責任所在가 분명히 구명되어야 한다. 분단에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할 수 있지만 전쟁의 경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정주의적 사관을 탈피함으로써 한국전쟁의 國際戰的 성격을 보다 강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의 起源과 勃發(발발)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남긴 장기적 영향과 구조적 유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며, 비록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전쟁이 남북을 불문하고 근대 국가 형성에 기여한 측면도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에 대한 생활사 내지 微視史的(미시사적)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1950년대’ 서술에는 다음과 같은 포함되어야 한다. 1950년대가 암흑기라는 先入觀, 그리고 1950년대를 독재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관행적 인식이 버려져야 한다. 한국의 전후 회복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것의 비결은 미국의 원조경제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아울러 1950년대 내내 경제성장이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자유당 정부 역시 국가 주도 경제계획을 결코 白眼視(백안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부연되어야 한다. 1950년대는 또한 교육부분의 획기적 발전을 경험했고,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민주 시민의 양성을 통해 4·19를 촉발하게 되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1950년대는 훗날 근대화의 先導集團으로 기능하게 되는 막강한 군부의 성장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양한 사회집단이나 조직의 성장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 또한 1950년대는 한국이 전쟁의 慘禍(참화)를 딛고 세계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연대였다는 점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자유당 정부의 독재에 의해 대한민국의 신생 민주주의가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도 교과서에 반영되어야 하지만, 4·19가 지향했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독재,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4. 누가 어떻게 고칠 것인가

현재 고등학교 2-3학년 과정에서 선택과목의 하나인 『한국 근·현대사』는 모두 6종으로서 이들의 체제와 내용에는 많은 사실적 오류와 이념적 편향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금성출판사의 것이 가장 심한 편이지만 다른 교과서들도 사정이 크게 나은 것은 아니다. 무릇 교과서란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볼 때 사실의 오류와 이념적 편향은 상호 因果關係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사실적 오류 때문에 이념적 편향이 나타나고 이념적 편향에 따라 사실의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문제는 내부적으로는 감상적 민족주의의 氾濫(범람), 외부적으로는 수정주의 역사관의 영향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주의 사관에 대한 代案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 외교사학계의 수정주의 이론은 냉전 붕괴 이후 국제적으로 그 위세가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盛業 중이다. 게다가 한국 현대사에 관련된 수정주의는 통상적인 진보·좌파적 시각을 넘어 친북·주체사상에 가깝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 처럼 ‘한국형’ 수정주의가 친북·주사적 속성을 갖게 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이른바 ‘內在的 接近’ 때문이다.
보다 안타까운 것은 수정주의 사관이나 내재적 접근이 넓게는 한국 현대사 연구, 좁게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 개입하게 된 경위다. 바로 이 대목에서 부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속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국사학 분야는 현대사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한국 현대사 연구에 관련된 이론이나 분석틀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대해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우리나라 역사학은 一國史에 치중한 나머지 比較史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사학 분야의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학 분야의 학문적 폐쇄성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곧, 국사학 분야에서 부실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한국 현대사 연구가 결과적으로는 반외세적·감상적 민족주의 사관의 溫床(온상)이 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국사 교육에 관한 한 제7차 교육과정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왜 근·현대사가 국사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지, 그것은 왜 필수가 아니고 선택인지, 또한 그것을 위한 교과서는 왜 국정이 아니고 검정인지, 그리고 검정 교과서라면 검정 방식이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지 등에 관한 총체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현대사 연구 및 저술과 관련하여 국사학계 스스로 이념의 과잉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비교사적 안목을 취하려는 개방적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 한국 근·현대사 분야에 대한 學際的 접근은 최대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과서 출판과 관련하여 국사학계가 저술, 검정, 출판 등의 과정을 사실상 독점하는 체제는 시급히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시대정신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