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다 끝이 난 늦가을, 하얀 찬 서리가 볏단을 아우를 때
아버지는 느긋한 아침을 드시고 양지바른 마당 한 모롱이에 자리를 펴신다. 지난해 못 갈아 입힌 지붕의 이엉을 삼기 위해서다. 볏짚을 한 움큼씩
잡아 엮어나가신다. 어둠이 산골 동네의 구석 볏단에 침습할 때까지, 아니 몇날 며칠을 꼼짝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듯이 한 올 한 올 지신다. 어제는
앞집의 지붕이 노란 황금빛 때때옷으로 갈아입더니 오늘은 우리 집 차례란다.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오니 안채, 헛간, 곡간 지붕
위에 가을바람에 일렁이던 황금빛 들판이 온통 다소곳이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분명 온 마을의 축제다, 잔치다. 요즘 어느 집 어느 고을에 이런
풍광이 있을런가. 그저 그런 시멘트 콘크리트 벽돌 기와집이 아무렇게나 골목을 누비는 곳이 오늘의 시골 전경이다.
황금 가을 들판이 자연스레 옮겨와 앉은 것이 초가집 지붕이요, 강 건너 붉은
밭이랑이 걸어와 머문 것이 마을의 지붕 위 빨간 고추다. 날카롭거나 험준하지 않고 다소곳하며 부드러운 마을 뒷산의 능선이 초가집 지붕의
흐름이다. 초가 지붕은 호박넝쿨 조롱박 덩어리를 마다하지 않고 참새들을 품에 따뜻이 재운다. 그것은 기와집처럼 날렵하지도 오만하지도 않다.
욕심의 때로 여기저기 치장한 화려한 궁궐이나 양반 지주 집의 당당함도 권위도 없다. 그저 산야의 자연 그 자체가 옮아와 인간을 감싸 안은 것이
초가집이다.
여름밤 마루에 걸터앉아 뜨거운 수제비로 허기를 채우다가 고개를 슬쩍 들기만 하면
별은 쏟아져 입으로 들어오고 입 속의 열기는 우주로 하늘로 퍼져나간다. 우주와 자연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호흡하는 열린 공간이 마루다.
한여름 열기가 열대지방의 마루문화를 한반도까지 밀어 올렸다. 양옥집이나 아파트의 거실마루는 우리의 좋은 자연조건 즉, 맑은 호수가 있고 쏟아지는
별이 사는 동화 같은 밤하늘, 풍요로운 햇살, 싱그러운 자연의 공기를 차단해 버린 폐쇄 공간이다. 서양주택 공간의 폐쇄성은 시도 때도 없이 비를
뿌려대는 음습한 날씨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베리아 지방의 찬바람이 마루 바닥을 얼어붙게 할 때면 우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온돌 아랫목으로 기어든다. 구들장 위에 진흙을 덧씌운 온돌은 바닥에서 천장으로 열을 뿜으니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골고루 따듯한 피의 순환을
돕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밤새 돌과 흙으로부터 자연의 기운을 흠뻑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요 자연의
한 조각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교통하고 밀착했으니 몸이 가뿐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온돌
온돌은 따뜻한 부뚜막의 연장이다. 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남은 열기가 구들장에
모였다가 밤새 사람의 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된다. 열의 손실이 가장 적고 깨끗하여 인류 어느 난방 문화보다도 과학적이고 위생적이다. 실제 경남
하동에 있는 신라 때 절 칠불사의 온돌은 지금도 한 번 불을 때면 일 주일 정도 온기를 유지하고 한겨울에도 3일은 따스하다. 기록에는 100일
간 온기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연기와 일대 전쟁을 치르면서도 반 이상의 열기를 밖으로 빼앗기고 불 가까이만 따뜻하고 방 저편은 한기가 서리는
서양의 난방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효율이 월등 높다.
연기에 찌들고 추위에 지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코리언 룸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이다. 이것은 심지어 태양의 복사 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뜻하게 해 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온돌 바닥에 파이프를 깔아 뜨거운 물을 순환시키는 패널히팅 방법을 개발하여 그의 주택 작품에 사용하였다.
요즘 우리가 이용하는 온돌은 이렇게 해서 세계화되었다.
자연의 에어컨-흙벽
이제 벽을 치는 것을 보자. 마을 뒷산의 소나무 줄기는 기둥이 되고 잔가지는
기둥과 기둥을 가로 세로 이어주는 벽채의 버팀목이 된다. 그 사이 사이를 수수깡 줄기가 메워 준다. 이제 진흙에 물 붓고 지푸라기 섞어 벽채에
바르고 흙손으로 반듯이 문지르면 북풍한설도 걱정 없다.
벽돌처럼 흙을 다지고 굽지 않았으니 흙벽이 숨을 쉰다. 흙벽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기공이 있어서 찬바람은 막아주나 밖의 신선한 공기를 방안으로 뿜어 주고 안 공기의 탁함은 정화시켜 준다. 창호지문과 함께 습기
또한 조절기능을 흙벽이 가지고 있으니 방안은 쾌적하고 고슬고슬하다. 한겨울 영하의 바깥 찬 기운은 막아 주고 방안의 열기는 끌어 앉는다. 반면
여름 낮 뜨거움은 흙벽을 넘어들지 못하니 시원하다.
요즘의 콘크리트 벽돌은 겨울밤 내내 냉기를 머금었다가 낮 동안 방안으로 찬
기운을 뿜어대어 사람을 밖으로 내쫓는다. 그 벽돌은 여름날의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에 불덩어리처럼 되어 한밤의 인간을 괴롭힌다. 집은 사람을
자연의 가혹함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 진 것일텐데, 이놈의 벽돌은 사람을 추위와 더위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게 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죽은 백제 무령왕의 왕릉 지하 벽채는 아름답고 견고한 벽돌로 지었으되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궁궐은 그냥 흙벽을 친 것을 접하고 우리의
선인들의 지혜에 누가 머리 숙이지 않으랴.
벽돌 문화는 편서풍과 멕시코 난류가 흘러 그렇게 매섭게 춥지도 않고 찌는 듯한
더위도 없는 유럽에서 발달하였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겨울의 냉기와 여름의 열기가 아니고 사시사철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습기였다. 흙을
단단하게 다지고 구운 벽돌이어야 습한 기후에 벽채가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여름 장마 한철 며칠만 긴 처마로 흙벽이 비에 견뎌 주면
추위와 더위와의 싸움에 흙벽만큼 우리 몸을 보호해 줄 벽채가 있을 수 없다. 흙벽은 과학이지 미개함이나 어리석음이 아님은 물론이다.
아랫목 온돌의 열기로 고된 논일 밭일에 휘어진 온몸을 펴고 찜질하고 초가지붕
지푸라기 사이로 우주와 자연의 기운을 온몸 가득 안는다. 긴 밤 한숨의 담배연기는 담배 필타와 같은 창호지문을 타고 넘어 아침밥 짓는 굴뚝연기와
하나된다. 이제 개운한 몸으로 염생이 새끼 아침 꼴 베러 뒷동산에 오르면 찬 서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새로 이은 노오란 초가지붕이 도란도란
아침인사를 다정하게 나눈다. 초가지붕 속에 둥지를 틀어 찬 서리를 피하고 기지개를 편 어미 참새는 새끼들의 아침 끼니를 위해 분주하다. 이
정겨운 옛 시골 마을 어디에 부족함이 있으랴.
가난이다. 매일 같이 닭에 모이를 주고 병아리를 쳐도 삶은 달걀 반찬은 소풍갈
때나 맛보는 것, 김은 생일날 어른들과 형제들 눈치보며 한 두 장 싸먹는 별미, 해가 다 가도록 찢어진 고무신 사이로 발가락이 다 보인다. 집
앞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우리 초가집 방의 벽은 가난한 집 아이의 배처럼 불룩 튀어나와 금방 흙덩어리가 쏟아질 것 같다. 초가지붕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때도 권세 있는 부자들은 기와집에 살았다. 나는 교과서에서 본 벽돌로 진 2층 양옥 기와집이 꿈이었다. 실제로 그런 집을 산골
마을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이게 웬 소린가. “초가집도 허물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우렁차고 희망에
찬 ‘새마을’ 노랫소리가 마을 느티나무 꼭대기에 걸린 스피커에서 온 천지로 울려 퍼지지 않는가. 서양식 벽돌에 기와지붕, 반듯한 벽채로 단장된
내 공부방을 그리며 얼마간 들뜬 기분으로 지냈다.
새마을 운동과 사라진 초가집
이렇게 수 천년 아니 수 만년 끈질기게 기와집을 거부하고 버텨온 초가지붕은
사라져갔다. 드디어 어느 시골 어느 마을에도 스레트, 함석, 시멘트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뿐이 없게 되었다. 지붕의 근대화는 완성되었다.
관청의 무서운 의지와 관료들의 전시행정, 맹목적인 서구식 근대화 열기에 흙벽은 헐리고 콘크리트 벽이 반듯하게 집안을 휘둘렀다. 70년대의
‘농촌주택개량’ 사업은 전통적이고 과학적인 초가집을 이렇게 단번에 사라지게 했다.
근대성은 과학성이요 합리성이다. 근대적 인간은 민족의 자존과 민주적 삶의 양식을
추구한다. 민족의 오랜 정서와 전통이며 서민들 나름의 합리적 삶의 공간이던 초가집을 사라지게 한 것은 살아온 전통과 합리적 삶을 맹목적인
서구지상주의와 맞바꾼 역사적 죄악이다. 빗물에 썩기 쉬운 볏짚을 방부처리하고 습기에 약한 흙벽의 방습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적 연구가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노력이 아닐까.
종래 서민들의 초가집의 의미와는 다르긴 하지만, 요즘 부유층을 중심으로 흙벽
초가집 짓기 움직임이 살아나고 있다. 도시인들 가운데 흙벽과 초가지붕으로 된 전원주택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나 생기자 초가집 건축전문업자들의
영업이 그런대로 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제주도 관광지에 전통초가집 호텔이 개장되어 성업중이다. 그것은 헐어버려야 할
대상으로서의 초가집이라는 70년대 식 무모한 근대주의의 발상이 깨져나가고 있다는 증거요, 초가집의 과학성이 현실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고무적인
일이다. 어찌 아는가. 뉴욕이나 파리로 관광여행을 가서 초가집 호텔에 묵다가 오게 되는 날이 올지 기대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