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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斗律을 민주인사라고 변호한 중앙일보 權寧彬 주필 인터뷰

이강기 2015. 9. 25. 14:54
宋斗律을 민주인사라고 변호한 중앙일보 權寧彬 주필 인터뷰
 
『나보고 회색주의자라고요? 나는 열린 보수입니다』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宋斗律을 민주화운동 인사라고

 중앙일보 주필 權寧彬(권영빈ㆍ60)씨는 宋斗律씨를 공개적으로 변호한 언론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2000년 7월7일자 「권영빈 칼럼/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에서 宋斗律씨를 「李應魯(이응로), 尹伊桑(윤이상)에 이어 지난 암울했던 군사 독재정권의 희생자」, 「비록 외국에서지만 維新과 光州탄압에 분노하고 격렬히 맞섰던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라고 표현했다.
 
  이 칼럼에서 權주필은 宋斗律씨의 내재적 접근론은 상대의 눈높이에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통일 논의의 키워드라고 평가하고, 「그만큼 북한을 객관적으로 알려하고 사실상 북한의 주체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가 없을 것이다」고 표현했다.
 
  그는 칼럼에서 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란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제발로 오겠다는 사람마저 오지 못하게 하고 2년이 넘도록 송두율을 계속 김철수라는 의혹으로 남기고 있는데 이는 國情院의 직무유기가 될 뿐만 아니라 한 지식인의 생명을 냉전 이데올로기로 목조르는 또다른 폭력에 속한다」며 國情院을 비판했다.
 
  宋斗律씨가 김철수란 가명의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특종 보도한 기자는 權주필이 무슨 이유에서 宋斗律 옹호 칼럼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는 지난 10월8일 중앙일보 편집국내에 있는 權寧彬 주필 사무실을 찾아갔다. 다음은 일문일답.
 
  ─宋斗律씨를 만난 일이 있습니까.
 
  『1995년인가 1996년 무렵 北京에서 열린 통일 관련 포럼에서 한 번 만났어요. 내성적이고 말도 어눌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지 못했어요. 그가 북한 노동당원이라거나 김철수란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宋斗律씨를 변호하고 國情院을 비판하는 칼럼을 쓰기 전에 國情院에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았습니까.
 
  『그런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내용들을 참고했습니다』
 
  ─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란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것은 宋씨가 黃長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때 國情院이 재판부에 보낸 사실조회 회신에 나와 있습니다. 재판기록은 참고하지 않았습니까.
 
  『재판기록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林東源 前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답변에서 「宋斗律씨는 김철수가 맞다」고 말하기에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확인하지 못한 점은 불찰』
 
  ─왜 宋斗律씨 주장만 인용하고 黃長燁씨 주장은 묵살했습니까.
 
  『양쪽 주장을 다 고증하고 나서 칼럼을 써야 하는데 치밀하게 사실 확인을 하지 못한 점은 불찰이지요』
 
  ─盧武鉉 대통령 장인의 공산당 활동을 두둔한 이유는 뭡니까.
 
  『내게 친삼촌이 둘 있는데 둘 다 좌익 활동을 했습니다. 한 명은 남로당원으로 6ㆍ25 전쟁 전에 월북했고, 막내 삼촌은 보도연맹원이었는데 전쟁 후 고향(경북 예천)에서 사형당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6ㆍ25 당시 예천군 내무과장이고 큰아버지는 지주였습니다. 이념 때문에 형제 간끼리 반목하는 험악한 꼴을 보며 자랐습니다. 5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또다시 갈등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盧武鉉 대통령의 장인을 두둔한 것입니다』
 
  ─6ㆍ25 전쟁에서 어느 쪽이 먼저 총을 쏜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崔章集 교수의 6ㆍ25전쟁관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徐東晩 國情院 기조실장도 같은 입장입니다.
 
  『崔章集 교수는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서울大 3학년 때 나는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 멤버였고, 崔교수는 고려大 민비연 소속이었습니다. 崔교수는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가기 직전에 내가 근무했던 月刊 「세대」誌에 잠시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徐東晩 실장 역시 중앙일보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잠시 나와 같이 근무했습니다.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신뢰가 쌓였고, 그래서 변호하는 칼럼을 썼던 것입니다』
 
  ─權주필의 칼럼은 宋斗律씨 주장처럼 「경계인」처럼 보이고, 일부에서는 權주필을 회색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회색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나는 「열린 보수」라고 해석합니다. 「열린 보수」의 입장에 서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權주필께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를 주제로 해서는 한 편의 칼럼도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내가 잘 모릅니다. 북한을 네 번이나 갔다왔지만 보지도 못했고, 北에서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탈북자 증언이 있지만 그 수가 많지를 않아요. 나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칼럼을 쓰지 않습니다』
 
  ─宋斗律씨는 스스로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을 밝혔습니다. 宋斗律씨를 변호한 칼럼을 써 국민들을 혼란하게 했으니 고백록 성격의 칼럼을 쓸 계획은 없습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입니다. 다만 어린 시절에 6ㆍ25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전쟁의 상처를 가지고 자꾸만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편을 들기도 했고 비판도 했습니다. 내 칼럼이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한 점은 사실이나 저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宋斗律씨 문제와 관련해 그런 성격의 칼럼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월간조선 200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