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건국한 태조 王建(왕건)은
즉위 한 26년이 되는 해이자 후삼국을 통일한 7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난다. 그때(943년) 왕건은 내전에서 大匡(대광) 朴述熙(박술희)를
불러 訓要(훈요)를 직접 작성하는데 그의 後嗣(후사)들이 경계해야 할 10조목이 그 내용을 이룬다. 이 10조항에는 왕건의 불교 및 풍수지리설에
대한 사상과 왕자로서의 태도, 왕위계승 원칙 등에 대한 견해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1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여덟째 조항인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 쪽은 山形(산형)과 地勢(지세)가 모두 거꾸로 뻗쳤으니 인심도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고을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이나 왕실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이 거동하는 길을 범해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자료는 차령 이남과 금강 바깥 쪽 곧 충청·전라도 지역이
풍수상 배반의 성격을 지닌 형상을 하고 있으니 인재등용에 주의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병폐 중의 하나이자
망국병으로까지 거론되는 지역 감정의 원인제공으로 흔히 얘기되고 있다. 과연 이게 사실일까. 목포대 고석규 교수는 방송에서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같은 「高麗史(고려사)」에 훈요십조의 발견 경위가 써 있는데 고려 개국 후 1백년이 지난
顯宗(현종) 때 제안이란 사람이 우연히 崔沆(최항)의 집에서 발견해 세상에 전해졌다고 한다. 백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호남사람을 차별하라는 내용을 담은 訓要十條가 갑자기 나타난 것인데 개인의 저택에서 발견되었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이는 당시 중앙 정치 세력들간의
정쟁에 이용하기 위해 개작하거나 또는 가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실제 전라도 사람들이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주 吳(오)씨 다련君의 딸을 莊和王后(장화왕후)로 삼았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고려의 2代 왕인
惠宗(혜종)이다. 그밖에도 영암 출신의 최지몽, 영광의 김심언 등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많은 사람들이 「高麗史」에서 확인이 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서도 개경사람들과 나주 사람들이 세력을 다투는 와중에서 개경사람들이 갑자기 호남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통일의 과정에서 後百濟(후백제) 지역 즉 호남지역의 통합이 신라지역의 통합보다 어려웠음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王建과 甄萱(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공작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고, 또 고려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920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과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왔고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줌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925년 왕건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자 화친을 맺고 서로간에 인질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점을 볼 때에도 왕건은
후백제 지역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대에서 정치적 감정을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건은 결코 지역감정의
뿌리를 제공하고자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역사인식과 지역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1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지역감정이 마치 왕건에 의해 제기된 양,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질적인 민족성인 양 잘못 알고
있다. 고려 이후 조선시대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경상도와 전라도는 곡창지대로서 경기도와 함께 중앙을 떠받들고 있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嶺南學派(영남학파)와 畿湖學派(기호학파)가 두 축을 이루면서 발전해 왔듯이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해왔다. 문제는 지금의 지역차별, 지역감정의 뿌리는 현대 정치사에 있다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에 출마한 朴正熙(박정희)와 金大中(김대중)의 경쟁, 그 이후 金大中의 피랍사건, 朴正熙 암살, 이후 들어선 경상도 군인들에
의한 군부 정권의 장기화, 산업발전의 불균형으로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전라도 지역, 이러한 파행적인 지역차별 개발이 지역감정을 낳게 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朴정권 시절의 개발독재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된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에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도 정치권은 정권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선거계절만 다가오면 지역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 문화에 있어 지역성과 혈연성이 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역감정이 오랜 역사를 지닌 것같이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의문투성이의 기록에 얽매이거나 전근대적인 세계관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세계는 지역을 넘어 민족을 넘어 변하고 있고 역사는 화합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