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6일 金玉均(김옥균)
朴泳孝(박영효) 洪英植(홍영식) 徐光範(서광범) 등 開化黨(개화당)인사들은 밤을 꼬박 새면서 협의·작성한 政令(정령 혹은 정강)을 국왕
高宗(고종)의 傳敎(전교) 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어 오후에는 高宗도 이 정령의 실시를 선언하고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 무렵 淸國(청국)의 袁世凱(원세개)는 무력을 동원하여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淸軍(청군)을 주축으로 한 진압군은 1천여 명
이상, 개화당 쪽 군사는 日本軍(일본군) 1백50명을 포함해서 5백∼6백 명 내외. 양측간의 상당한 병력과 화력의 차이로 말미암아 싸움도
벌어지기 전에 이미 그 승패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결과 1884년 12월4일 郵政局(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단행되었던
甲申政變(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 天下(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한국근대사상 최초의
「위로부터의 변혁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대중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으며, 外勢(외세)를 끌어들여 군사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이 韓國史에 등장한 수많은 군사변란 중 유일하게 변혁운동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金玉均 등이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의 역사적 과제인 反봉건·反외세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개화당
인사들은 修信使(수신사)·報聘使(보빙사) 등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 혹은 미국을 직접 견문함으로써 서구식 제도와 국제정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각종 開化·自彊(자강)정책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自主獨立(자주독립)과 富國强兵(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이르렀다. 개화당 인사들은 왜 자신은 물론 가족과 가문의 명예와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정변을 도모했던 것일까. 갑신정변 때
발포한 政令에 의하면, 개화당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보존함과 동시에 국정 전반에 걸쳐 전통적인 제도를 근대적 체제로 개혁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추구하였다. 그러나 壬午軍亂(임오군란)이 일어나자 淸國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한 다음 朝鮮의
내치와 외교에 직접 간섭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自主的 개혁자세의 부족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화당은 淸國의 외압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정개혁도 추진할 수 없다고 인식하여 淸國의
개입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전략적 차원에서 日本軍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외세를 배척하기 위해 또다른 외세를 끌어들인
사실은 그들의 치명적인 결점으로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갑신정변이 일본의 사주 혹은 책동에 의해
단행되었다고 매도하거나 고종과 閔氏척족이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淸軍의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으로 개화당은 인민평등권의 제정·문벌의 폐지 등을 통해 양반신분체제를 타파하고, 내각제도를 비롯하여 각종 근대적 경제·군사·사법·경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체제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閔氏척족을 비롯한 집권층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채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있었고,
개화당이 추진하는 사업을 위험시하고 저지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개화당은
閔氏척족과 그 측근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다음 자신들이 구상해왔던 개혁을 단행하기로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개화당이 발포한 政令의 이면에는 그들이 國王의 專制(전제)와 척족의 전횡을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기존 체제 하에서 소외된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정략적 의도가 담겨져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시했던 政令은 대체적으로 근대국민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과제였으며, 향후 甲午改革(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변혁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곧 다가올 새 천년을 맞이하는 현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甲申政變을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백여년 전 열강의 외압이 가중되고 전통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甲申政變은 자주독립의 보존과 근대적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하려 했던 변혁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무능·부패했던 집권층은 개혁을 단행하기는커녕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외세를 끌어들이기마저 서슴지 않음으로써 국권을 강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본질적으로 1백여년 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족분단까지 겹쳐친 오늘날, 집권층은 물론 全국민이
自主的(자주적)·主體的(주체적)·積極的(적극적)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동참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