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으면서도
호화롭게 사는 양반들도 내가 집권한 이상 나라 발전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 상민만 내게 되어 있는 軍布(군포)를 양반계급에게도 확대적용하라.
지금은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며 양반이 놀고 먹을 수 없는 세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백40년 전인
1863년 12월 은인자중 끝에 安東金氏(안동김씨)의 세도를 잠재우고 대권을 거머쥔 흥선대원군(李昰應·이하응)이 개혁의 칼을 빼들고 고종
8년(1869) 획기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바로 양반계층에게 군포라는 세금을 물린 특단의 조치였다. 군포제란 원래 병역세로
징수한 것이었으나 특권층인 양반은 무조건 면제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철저히 그 稅源(세원)을 찾아 부과하였다. 심지어 어린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무차별 부과했다. 흥선대원군은 12세 먹은 그의 둘째아들(命福)을 趙大妃(조대비)와 맥을 통해 왕에 앉히고 高宗(고종)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여년간 그는 「섭정왕」, 「대원위대감」이라는 위엄 속에서 여러 가지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그는 『고질적인
세도통치 60년의 횡포·가렴주구·폭력·억압 등을 어찌 하루아침에 완전히 뜯어고치겠느냐마는 칼을 빼든 지 1년 안에 깨끗이 해치워야 성공한다』고
조기타결 방침을 세우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인사문제에 꽤 신경을 썼다. 그가 시정잡배·무뢰한과 어울려 「미친개」
「宮道令(궁도령)」, 「얼간이」 행세로 세도통치자의 색출·숙청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단련심을 길렀는가.
사색붕당의 폐해가 얼마나 국정을 후진시키는가를 고려하여 각 당파의 인사를 고루 적재적소에 기용하였다. 人事(인사)가 곧 萬事(만사)의 근원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소외되었던 北人系(북인계) 인사를 발탁하였다. 지역편중 인사정책으로 능력이 있어도 푸대접을 받았던 평안, 황해도 출신도
과감히 기용했다. 당파가 소외된 남인이라 해서 탈락했던 것을 그는 과감히 여론을 감안, 소외세력의 대동단결체를 모색해서
그들의 냉대, 소외를 어루만져 주었다. 결국 당파, 지역, 학벌, 문벌을 떠나 인재 위주로 지역감정의 골을 깨고 거국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1人 주도의 한계점 술 잘 마시고 호탕방일하게 놀던 자도 특장점이 있다면
특채하여 위축된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전국에 울려 퍼졌던 경복궁의 重創建(중창건)은 대원군의 소신 있는 결단력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였다. 몇 번이나 모아온 8도의 진귀한 재목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며칠씩이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물바다가 되었어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경복궁은 왕실의 법도와 기강을 확립해야 하므로 강행군해야 한다』고 스스로가 앞장서서 독려하였다. 이
宮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불태워 버린 지 2백70년간 폐허로 잡초가 무성한 채 방치되었으므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제도·정치복원」이라는 대명제
속에서 이를 강행한 것이다. 극성 끝에 2년 만에 제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깨끗이 단장했다. 그는 『개혁은 뜯어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지는 것이고 전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고 즐겁게 신명나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書院(서원) 철폐로 그의 보수정치철학을 뒷받침했던 儒林(유림)의 신경을 건드려 연일 데모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나는 이것을 그냥 밀고 나가겠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그는 최후의
실력자였고 오만, 쾌활, 담대한 인물이었다』고 말한 것에서 그 정치적 소신을 읽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된
며느리(明成皇后)와의 갈등, 불화, 閔(민)씨 척족의 대두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고 말년에는 全州李氏(전주이씨)의 친인척을 요직에 안배하여
「천하장안」이라는 신주류 심복들의 월권행위와 함께 지탄·성토의 씨앗이 싹텄다. 국산품의 애용, 뇌물퇴치, 공무원의 부정엄벌 등 기강법도의 쇄신도
이런 시행착오 속에서 신정치를 퇴색, 新惡(신악)으로 조성케 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모처럼 당긴 개혁의 불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더욱 그의 개혁은 제도적이고 기능적이며 분산적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1人 중심적으로 치달려 나갔기에 못말리는 브레이크가 된
것이다. 개혁의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백성들에게 편안함·즐거움·의욕적 삶을 강조하였던 그였건만,
爲民(위민)·愛民(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건만, 이를 순리적이고 합법적으로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지나친 한 사람 중심의 권력집중은 아무리
앞뒤가 맞는 개혁이라 해도 실패한다는 냉정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깜짝개혁은 즉각 실패라는 등식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