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의 역사를 읽노라면 우리는
기쁨보다 憂愁(우수)에 젖게 될까? 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감격보다는 悲憤慷慨(비분강개)의 필치로 글을 쓰게 될까? 어떤 역사적 사실이 당초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 우리는 차라리 비감한 심정으로 책을 덮을 때가 많은데 그러한 역사 중의 하나가 바로 갑오 농민 혁명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등장하는 悔恨(회한)에 찬 話頭(화두)는 그것이 왜 실패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비록 軍紀(군기)가
엄정하지 못했고 무기가 변변치 못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농민군이 參禮(삼례)를 출발하여 호호탕탕 북진할 때만 해도 그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 많은 군대가 어쩌다 一敗塗地(일패도지) 했을까. 혁명군이 일본 군대와 실전에 돌입한 것은 공주에서
1894년 11월8일부터 20일까지의 13일 동안이며, 혁명군을 격파한 일본군 주력 부대는 19대대 2중대의 모리오 마사가츠(森尾雅一)가 이끄는
1백70명의 기관총 부대뿐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군대의 숫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3만의 군대가 1백70명의 기관총 중대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회한으로 남아 있다. 갑오 혁명의 실패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양면의 적과
싸울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어려움이었다. 민족주의 운동이란 일차적으로 외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前근대 사회의 농민들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항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한다는 데 더 큰 어려움이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의 민족이
겪게 되는 아픔이 내재적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그 사회의 지배 계급에 먼저 공격의 화살을 겨누며 내정 개혁을 요구한다.
이때로부터 수구 세력은 기득권 보호를 위해 외세와 결탁하게 된다. 혁명군으로서는 지주를 적으로 몰고, 지주는 외세보다도 더
가혹하게 혁명군을 억압했다. 유림들은 靖亂軍(정란군)이라는 이름으로 농민군을 요격했고, 정부군은 토벌대라는 이름으로 농민군을 협공했다. 이러한
현상은 물리적 열패 이전에 농민군을 悲感(비감)하게 만들었고 사기를 떨어뜨려 이미 교전 이전에 농민군을 심리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농민군이 실패한 두 번째의 원인은 지도자들의 전략이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농민군이 전투에 익숙한 무리가 아니라는 원천적인 약점 이외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들의 종교적 이상주의였다. 종교는 농민군에게 죽음을 뛰어넘는 용기를 주고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리라는 소명감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교전이 벌어지면 그것은 비정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부적을 가슴에 달면 총알이
뚫지 못하고, 기도문을 외우면 적의 총구에서 물이 쏟아지리라는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는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지배계급의 책임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역전의
용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생이었을 뿐 병법을 알거나 신식 문명이나 무기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정적
순간에 멈칫거렸고 이반하는 軍心(군심)을 추스를 수 있는 영도력도 없었다. 그들이 전쟁을 생각했고 작전이나 전략을 생각했더라면 농민군의
全琫準(전봉준)이 아니라 동학군의 金開南(김개남)을 대장으로 뽑았어야 했다. 그러나 전봉준은 趙秉甲(조병갑)의 학정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한
하나 때문에 농민군은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들이 원한이라는 것과 전략이라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안 것은 패주의
길목에서였고 그 깨달음은 너무 늦어 있었다. 갑오 농민 혁명의 실패가 주는 세 번째 교훈은, 그것이 실패의 원인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왜 그들이 忠君(충군)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시대적 조류나 여건으로 볼 때 그들에게 공화정이나 인민 주권의
논리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이미 그보다 1세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영국에서는 이미 1640년대에 공화정의 수립에 성공했다. 이러한 기대에 대하여 동양에서는 주자학적 충효 사상이 넘을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은 불가능했다고 농민군을 감싸는 논리도 있지만, 서구의 왕권신수설에 비하여 주자학의 근왕의 논리가 더
공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물론 그들이 공화정을 표방하고 북진했더라도 혁명은 실패했을
것이지만 후대가 그들을 보는 역사적 평가는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 역사가 왜 실패했을까를 묻는 이유는
수레바퀴처럼 윤회하는 역사의 반복 현상에서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갑오 농민 혁명이 주는
교훈은 부패로부터의 해방, 민족의 통합과 그를 통한 역량의 결집, 그리고 지배 계급의 悔心(회심)일 것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顧炎武, 天下興亡 匹夫有責)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끝내 지배 계급의 결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