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망명자로서 11년 동안 미국에서 근대사회를 체험한 徐載弼(서재필)은 조국에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1896년 4월에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7월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그 목적은 「자유주의·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민중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徐載弼·尹致昊(윤치호)·李商在(이상재)·南宮檍(남궁억) 등 근대적 개혁사상을 가진 新지식층을 지도부로 하고, 서울의 시전상인 등 시민층을 주요 구성원으로 했으며, 학생층·노동자층·부녀층 등 광범한 사회계층을 포괄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국민의 모금으로 건립하는 창립사업을 통하여 국민대중에게 독립의지와 애국정신을 고취했으며, 강연회·토론회와 신문·잡지를 통하여, 국민대중을 근대지식과 국권·민권사상으로 계몽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의 에너지를 사회변혁에」동원코자 하였다. 1898년에 들어 러시아에 내정간섭 문제로 정치·사회활동을 본격화했다. 3월10일에 독립협회는 1만여 명의 군중을 종로광장에 동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집회인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때 李承晩(이승만)은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즉시 철수시키고, 한국의 자주권리를 지키자』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케 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는 당시 한국의 자주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였으므로, 독립협회의 자주국권운동의 제1의 표적은 러시아였다. 독립협회는 민중집회에 힘입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와 목포·진남포 일대의 매도요구를 저지했고, 러시아의 재정진출을 위한 한러 은행도 폐쇄케 했으며, 일본의 석탄고 기지도 환수케 했다. 한편 독립협회의 거대해 가는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정부와 이권침탈에 방해받은 외세의 결탁에 의하여, 5월14일 徐載弼은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尹致昊·李商在를 중심으로 독립협회는 강력하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의 기본방향은 개혁내각을 성립시키고 민선의회를 만들어, 민권을 보장하고 국권을 수호할 수 있는 근대적 자강개혁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1898년 9월 이후로 독립협회는 참정·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시기에 독립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민중대표기관으로 성장했다. 지도력과 성숙한 시민세력 없는 근대화는 불가능 9월11일 金鴻陸(김홍륙)의 고종독살미수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위력으로 10월12일에는 수구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공사는 「민중의 힘에 의한 내각의 교체」를 「평화적 혁명」이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0월29일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에 정부대신을 합석케 하여 官民共同會(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관민공동회의 핵심 과제는 의회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서,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결국 11월2일에는 민선의회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官制가 반포되었다. 이 의회식 중추원 관제의 반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설립법의 제정을 의미하며,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참정권의 공인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민권의 개념조차 모르던 민중을 계몽하여 자주적 근대화운동과 근대적 정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자유민권의 민주주의 사상을 어느 정도 민중 저변에까지 파급시켜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가 기능화하게 했다. 또한 종래의 배외적 자주운동과 다른 차원에서 자유민권운동과 결합된 자주국권운동 곧 민주주의를 내포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운동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으로계승되어 일제시대의 민족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3·1 운동 직후 나타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모두 공화제를 표방하게 된 것도 그 인맥과 사상면에서 독립협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유민권의 확립과 자주국권의 수호 및 근대개혁의 달성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보면 실패한 운동이었다. 고종과 수구세력, 일본 등 외세의 야합에 의한 무력탄압, 급진 소장파의 과격한 극한투쟁, 그리고 나아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의 지도력의 부족과 시민세력의 미성숙 등이 실패의 요인이었다. 이러한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실패는, 집권 수구세력이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와 결탁하여 역사발전에 부합되는 재야 개혁운동을 말살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그 정권 자체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혁명운동이 아닌 개혁운동인 경우에, 과격한 극한 투쟁은 정부의 탄압과 동시에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아가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실패는, 통일적이고 효율적인 지도력 없는 민중운동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으며, 성숙한 시민세력이 없는 근대 개혁운동의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