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고려의 주자학 수용

이강기 2015. 9. 26. 15:30
民族史 千年의 반성 - 고려의 주자학 수용
 
개혁적 生活철학으로 도입, 後期로 갈수록 敎條化
 

文喆永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고려의 朱子學은 삶의 樣式
 한국사에서 최초의 朱子學(주자학) 수용자로 알려진 安珦(안향)이 충렬왕 원년(1274년)에 상주판관이 되었을 때의 일화이다. 그때 여자 무당 3인이 있어 妖神(요신)을 받들고 뭇 사람을 유혹하여,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를 꾸미어 공중에서 불러 은은하게 꾸짖는 것 같으니, 듣는 자가 달려가 앞을 다투어 祭(제)를 차리었고, 비록 수령이라도 또한 그러하였다고 한다. 상주에 이르자 안향이 곤장을 쳐서 칼을 씌우니, 무당은 神의 말을 칭탁하여 禍福(화복)으로써 겁내게 했다. 그러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는데, 수일 뒤에 무당이 애걸하므로 놓아주자 그 요사스러움이 드디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당시 巫格(무격)신앙이 지방의 군현을 중심으로 온 마을이 떠들썩할 정도로 성행하였으며, 그 위세가 수령을 엎드리게 할 만큼 대단했음을 보여 준다. 어찌 보면 영적 싸움의 한 장면으로도 보여지는 이러한 싸움에서, 神의 말을 칭탁하여 禍福으로써 위협하는 상대방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의 정신적인 이념이 곧 朱子學이었던 것이다.
 
  安珦의 예에서 보듯이, 고려 후기 수용된 주자학은 사색적이고 우주론적인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삶의 양식이었다. 그래서 안향은 당시 國子監(국자감)의 젊은 학생들에게, 부모를 버리고 出家(출가)하여 倫理(윤리)를 업신여기고 義理(의리)를 어그러뜨리는 불교에 대비하여, 『聖人의 道는 日用倫理(일용윤리)에 지나지 않으니, 아들로서 효도하고 신하로서 충성하며 禮(예)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信(신)으로써 벗과 사귀며 자기를 닦는 데는 敬(경)으로써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는 반드시 誠(성)으로써 할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현실생활과 주어진 사회관계·인간관계 속에서 孝道(효도)하고, 忠誠(충성)하고, 禮를 행하고, 信義(신의)를 베푸는 실천 속에 성인의 道가 있는 것이지, 현실을 떠난 虛無空寂(허무공적)한 곳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그의 삶은 현실을 떠난 곳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이원론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신봉하는 진리로서의 新儒學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고 검증해나가는 투쟁의 장이었던 것이다.
 
  훗날 鄭夢周(정몽주)도 『儒者(유자)의 道는 모두 日用平常(일용평상)의 일이니, 음식이나 남녀관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바로서 지극한 理가 그 속에 있다』라며 불교와는 달리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유자의 道의 일원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道의 실현은 현실사회 속에서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을 떠나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불교나 기존의 유교와는 달리, 주자학은 현실 사회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응책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론체계에서 출발하여 일관된 원칙인 道義와 그 실천형식인 禮로써 개인의 삶에서부터 가족생활, 국가정치 및 천하의 안정에 이르는 질서와 가치체계를 제시한 주자학은 개혁을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도층인 사대부들로부터 실천적 경세론으로서 공감을 얻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 역할에 한계
 
 
  주자학적 이념의 개혁이 확산되는 동안 주자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사조로 그 위치를 확고히 굳혀나갔다. 그 결과 이미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불교나 토속적인 祭奠 등이 극단적으로 부정되어지기에 이르렀고, 유학 자체에서도 주자학만을 유일하게 정당하게 여기는 사상적 경향이 형성되어 나갔다.
 
  종교나 지성적인 운동이 전개될 때, 우리는 두 가지 역사적 단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열성적인 순수한 정신으로서 이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단계이고, 또 하나는 현실에 적응하고 타협하는 단계이다. 기존의 정치 및 사회체제와 타협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종교와 사회조직을 트뢸취(Ernst Troeltsch·독일의 종교사회학자-注)는 「敎會(The Church)」라고 불렀고, 정신적인 순수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모든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단계를 그는 「小宗派(소종파·The Sect)」라고 하였다.
 
  고려 후기 주자학이 수용되었을 때, 본래적인 정신은 「小宗派的」인 점에 치중하였으나, 그 후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 주자학은 점점 「敎會的」 색채를 띠고 변용되어 갔다.
 
  주자학은 조선왕조가 시작할 무렵 새로운 왕조의 정신적 방향과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행 가능한 방법을 제공하는 활기찬 이데올로기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6세기경 절정에 다다른 정통으로서의 주자학은 그 이후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고, 점차 침체된 전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적인 전통에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좌절된 욕구의 충족을 다른 대안들, 즉 實學(실학), 陽明學(양명학), 그리고 특히 西學(서학)으로 알려진 가톨릭 신앙 등에서 찾으려 했다.
 
  결국, 朝鮮 창건의 주도적 이념이 되기도 했던 주자학은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그 역할은 외부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만 하였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