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3·1운동

이강기 2015. 9. 26. 15:55
民族史 千年의 반성 -   3·1운동
 
시작부터 지도자 없는 저항으로 각개격파 당해
 
李廷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우리 역사에서 3·1 운동만큼 불가사의한 사건이 있을까. 1919년 3월1일부터 최소한 4월 말까지 두 달 동안 전국에서 최소 2백만 명이 1천5백여 회 시위운동, 7천5백여 명 피살, 4만6천여 명 체포, 1만6천여 명이 부상당한 거대한 운동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운동의 불가사의함은 이러한 거대한 독립운동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 때문이다.
 
  「혁명은 썩은 문짝을 걷어 차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당시 제국주의 일본은 썩은 문짝이 아니었다. 식민지 지배를 위한 체제를 강고하게 완성한 시점이었다. 일제는 헌병 경찰을 주축으로 한 무단지배체제 구축, 9년에 걸친 토지 조사사업 완료, 원료수출과 제품수입이라는 식민지형 무역관계의 완성, 지방사회의 저항력을 분쇄하기 위한 면·동·리에 이르는 전면적인 행정구역 개편 등 강력한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을 완성하였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일본은 미국, 영국 등과 같이 3·1 운동 직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다.
 
  이에 반하여 우리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는 철저히 禁壓(금압)되었고,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건설한 국외 독립운동기지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제와 타협한 현지 국가 권력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던 연해주에는 러시아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국제 간섭군으로서 일본이 1918년부터 1922년까지 11개 사단을 진주시켜 점거하고 있었던 상황인지라, 조국 해방을 위해 국내 진공전을 수행해야 할 동포들은 연해주 해방을 위해 항일 빨치산 투쟁에 발이 묶여 있게 되어 있었다.

 

3·1 운동이 발발할 때 이와같은 어려운 조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운동을 조직화하고 지도할 지도력과 전략, 조직적 힘과 財源 등의 주체적 역량이 미약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의 세계정세 대변화라는 시대적 분위기, 광무(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독살설의 유포가 가져 온 민족 감정의 분출 등의 환경적 요소들에 크게 힘입어 이런 약점들이 보완되게 되었다.
 
  수만 명의 지방민들이 황제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서울에 모여 들었던 것도 운동을 지방으로 전파하는 데 필요한 조직적 역량을 대신해 주었다. 그리하여, 3·1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4월3일 서울의 조선 헌병대 사령관 고지마 소우지로(兒島次郞)는 본국에 『이제야말로 군대도 이미 1백21개소로 분산하여 진정에 힘쓰고 있으나 원래 한정된 결사단체가 아니고 주민 전부의 반항이므로 이에 대하여는 유감이나마 斷然한 조치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할 만큼 일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주체적 역량의 한계 때문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만세 시위들이 고립 분산성, 일시성을 피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를 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3·1 운동의 이러한 결과를 반성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게 된다.
 
 
  목표는 있으나 현실적 전략이 不在
 
 
  첫째, 3·1 운동시 운동을 지도할 중심이 없었다. 민족대표를 표방하고 운동의 중심에 섰던 종교계 지도자들은 당초 학생·시민과 함께 가질 예정이었던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을 예고없이 변경하여 인사동 요리점 태화관에서 따로 가지고, 일제 관헌에 통보하여 구금되어 들어갔다.
 
  민족대표들이 이러한 행동을 취한 데에는 이 운동이 군중 폭동화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 하나, 이로 인하여 3·1 운동은 그 시작부터 지도자 없는 운동, 민족대표 따로 민중 따로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둘째, 민족대표의 독립운동 추진 전략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민족대표들은 제국주의적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시대변화에 발맞추어 정의와 인도의 이상적 원칙을 표명하면 하늘이 돕고, 일본도 양해하여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목표의 선포는 있었으나, 현실적 전략이 부재했다. 민족대표 투옥 이후의 상황은 전적으로 민중에게 알아서 하도록 맡긴 형국이었다.
 
  셋째, 주체적 역량의 한계로 말미암아 국제사회의 호의와 지원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기대를 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전적으로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지도층과 일반 대중은 이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반인 중에는 만세만 부르면 곧 (외국이 도와주어) 독립이 되거나 이미 독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다.
 
  3·1 운동은 자유와 독립의 정신. 大義(대의)를 위한 결속,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 같은 국민 정신상의 소중한 역사적 유산을 남겨 주었다.
 
  이와 더불어 3·1 운동이 남긴 과제는 오늘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국민을 건전한 역사와 문화의식으로 결속시키고, 민중과 함께 하는 가운데 민주적으로 국가적·시대적 과제에 국력을 결집시켜 추진해 나가는 지도력, 시대적 과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현명한 전략, 국제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국제적 지원을 이끌어 낼 외교력을 갖춘 지도층을 가지는 일이 그러한 것이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