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經國大典의 반포

이강기 2015. 9. 26. 15:58
民族史 千年의 반성 - 經國大典의 반포
 
계승되지 못한 훌륭한 法정신이 아쉽다
 

李成茂 국사편찬위원장
經國大典의 法정신
 조선왕조 5백년간 통용되어 오던 기본법전인 「經國大典」(경국대전)은 세조가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으며, 수록법령의 범위는 위화도 회군(1388)으로부터 성종15년(1484)까지 이르는 94년간에 내려진 법령들이다.
 
  「經國大典」의 내용은 대부분 국가의 행정기구나 그 운용에 관한 행정법이요, 관리들의 직무준칙이었다. 따라서 「經國大典」은 관청의 관리들에게만 배포되었지 일반백성에게는 배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經國大典」은 지배층의 법령이며, 일반백성을 위한 법령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현행 법률이 「經國大典」을 母本으로 하지 않고 대륙법을 비롯한 서양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행정관서의 법체계는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일반행정제도에는 지금 참고해도 좋을 만한 것도 있다. 우리의 근대화가 서구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너무 전통법을 도외시한 감이 있다. 주체적이 아닌 타율적인 근대화였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이 소화한 서구법을 그대로 써온 흠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經國大典」의 법정신은 어떤 것이며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점, 극복해야 할 점은 어떤 점인가.
 
  첫째로, 법을 만드는 데 신중을 기하였다. 「經國大典」이 趙浚(조준)의 「經濟六典」 편찬(1397)으로부터 88년, 세조의 종합법전 편찬(1455)으로부터 30년 만에 완성된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법을 함부로 만들지 않고 오랫동안 검토와 토론을 거쳐 확정했던 것이다.
 
  둘째로, 제정된 법을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先代(선대) 왕이 만든 법은 「祖宗成憲」(조종성헌)이라 하여 마구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은 「經國大典」에 있어서도 원문은 고치지 않고 추가되거나 변경되는 조항을 원문 뒤에 附記(부기)하는 추록방식을 택하게 하였다. 전통을 중시한 법정신이었다.
 
  셋째로,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는 전통제도의 틀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한국은 일찍부터 분권제인 封建制(봉건제)를 경험한 적이 없다.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일찍부터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착적이고 강인한 씨족공동체·촌락공동체의 틀 때문에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는 데 오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국가행정체제와는 별도로 지방자치적인 조직체계를 지방통치에 별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국가행정체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써왔다. 고려·조선시대의 지방통치가 특히 그러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지방자치조직이 국가행정체제에 예속되게 되었다. 국가가 지방양반이나 향리의 세력을 제압하는 데 1천여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經國大典」을 비롯한 조선의 법전에는 이러한 중앙집권체제의 점진적인 강화책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중앙지향적·정치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는 이러한 성향이 잘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넷째, 「經國大典」은 백성들로 하여금 법에 걸리기 전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즉 죄지은 사람을 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죄짓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법보다는 예를 중시하는 禮治主義(예치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合理的 法제도 추구해야
 
 
  그러나 「經國大典」의 법정신 중에도 계승할 수 없는 것들이 없지 않다.
 
  첫째로, 계급주의는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經國大典」은 양반 위주의 신분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에게 유리하도록 법이 제정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양반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奴婢制度(노비제도)를 법으로 규정하여 실시하였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일반평민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애매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으면서 의무에 관해서는 소상한 규정을 마련하고 있고, 양반과 경쟁이 가능한 中人(중인)에 대해서는 상세한 규제조항을 설정했다.
 
  둘째로, 「經國大典」은 일반용이 아니라 관리가 일반민을 통치하는 데만 이용되고 있었다. 「經國大典」을 관리들에게만 배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필요하면 관리들에게 물어서 대처하게 했던 것이다. 이 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계승할 수 없는 점이라 하겠다.
 
  셋째로, 조선왕조는 예치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禮不下庶人(예불하서인)이라하여 일반인에게 예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복종의 예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점도 민주주의 사회에는 걸맞지 않는 점이라 하겠다.
 
  「經國大典」은 전통시대의 종합법전이었으므로 한국인의 생활과 사고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그리고 「經國大典」의 법정신 중 좋은 점은 우리 법에 잘 반영시키고 나쁜 점은 버려서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산업사회에 맞는 새로운 법은 서구법의 좋은 점을 수용하고 전통법의 좋은 점을 가미하여 우리 사회와 정서에 맞는 합리적인 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법은 지나치게 서구지향적이고 고유법과 법정신은 도외시되고 있다. 슬기로운 반성과 재고가 요구된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