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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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8권 제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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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6-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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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一千二百萬圓이라는 閔泳徽 財産은 어듸로 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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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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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잡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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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曲
『大匡輔國崇錄大夫子爵』 閔泳徽氏! 이러케 肩書를 써 노코
보니 그야말로 人臣의 最高水準 우에 榮職을 가진 분이다. 여기다가 朝鮮 第一位의 富豪를 兼또려 노코, 또 壽, 富, 貴 多男子로 繡를
노코, 거기에 潤色하기를 臥席終身의 終告平生을 하엿다면 그야말로 五福의 倍十福을 가진 말하자면 玉樓夢의 揚昌曲의 八字 아니 後身이라고 할 만
하다. 權門勢道로든지 皇室宗戚의 首班으로든지, 朝鮮 三千里 江山에 뻣첫든 그 뚜렷한 存在(?)로든지, 더구나 特權을 擁衛하고, 牒紙를 돈으로
맨늘기에 유명함으로든지 무엇으로든지 朝鮮의 第一人이요 또 朝鮮만이 가질 獨特하고 偉大하고 光輝(?)잇는 분이다. 韓末政局에 잇서도 그의
行蹟이 만헛고 合倂後에도 그의 「트릭」이 만헛스며, 大院君과 明成后를 끼고 쨔낸 演劇도 氏*의 脚色이엇고, 이 가치 韓末 秘史의 全幅에다
署名捺印을 第一, 二에 치게 된 氏인데. 氏가 公道의 鐵則에 따러 富貴功名頭上에도, 人間公道 웃지하랴, 神仙은 못 보앗다, 天子도 할 수
업다, 落地復生 헛말이라, 不死藥이 어듸 잇노?<65> 맛참내 娑婆世界에, 極貴, 極富를 애처럽게 떠나, 「空手去」를 하게
되자, 다시 京城 뿐 아니라, 三千里 坊坊曲曲에, 또 話題꺼리를 비저 노코 말엇다. 그것은 氏의 最後를 裝飾하랴고 한 子與侄의 勤儉節約이 비저
내노흔 戱曲이 너머나 燦然한 까닭이다. 여기에도 閔大植氏 (그의 寵愛하는
令胤)의 徹頭徹尾한 節約劇이 反映되고 寬大한 處分의 産物인 까닭이다. 却說
一時는 四千萬圓
閔泳徽氏의 總財産은 過去에
얼마이엇스며, 現在에는 어떠케 分布가 되엇는가는 우리가 가장 궁굼하여 하고, 또 가장 알고 십허하는 것이다. 함참 得勢之秋 더구나
平安觀察時代적부터 三千里 江山에서 誠金(?)格으로 글거모흐고, 또 皇室內 幣金을 이리저리 하야 이럭저럭 모혀 노흔 것이, 4,000萬圓이엇고 또
其外에도 中國 上海某外國人銀行에 積立하여 노핫든 것도 수 천만원이엇는데 이것은 閔氏의 名義로 國家公金을 맛겻섯다고 하나 이것의 後日譚을 쓰고저
하는 것이 아님으로 그만두거니와 하여간 氏의 財産으로 世上에 들어난 것은 4,000萬圓이라는 巨大한 富이엇스니 日本內地 財産家에 석겨 보면
住友, 三菱, 三井에는 비길 수 없다 해도 第二流에는 갈만한 處地이엇다. 그러나 現在에 일으러서는 世人이 일커르기를 一千二三百萬圓 程度라 하니,
그 중 2,000餘萬圓은 어듸로 갓는지 氏의 令胤들이 分財하여 잇는 것과 各 事業에 投身하야 損害를 본 것을 除하고 하는 말일지는 모르나 엇잿든
過去에 비하야 半 以上이 줄어든 것은 事實인 것 갓다. 그리고 養子로 들어온 長子 衡植氏의 一時 30萬圓 消費事件 以後로는 그 財産에 대한 世上
評判이 만헛스나 아직도 一千數百萬圓의 財産을 擁하고 잇는 것만은 事實인 것이다. 氏가 生存하엿슬 때에 그 致富術이 영농하엿고, 또 그 守錢術이
남에게 一步를 뛰어낫든 건만은 事實인 만큼, 世人은 氏가 一去하면 그 財産이 어떠케 될 것인가 이모저모로<66> 뜨더가면서, 그
觀測이 區區하엿섯다. 남의 財産이 어듸로 가든지? 어떠케 되든지? 高等政策으로 나아가든지? 그것이 우리 民衆이나, 우리 事業界나, 에 何等
利益을 주고 貢獻을 주지 안는 만큼 關心할 바도 없고 企待할 아모 關聯도 없지만, 自體가 有名하게 모흔 돈이오, 또 일홈 잇는 巨額의 財産인
만큼, 넌즛히 關心을 갓고 또 그 집 家庭의 內容이 普通 우리네와 달나, 大房마마의 直系血孫이 없고, 愛妾마마가 그야말로 八仙女는 됨에 따러 그
血屬이 만흔 만콤, 여기에도 한 가지 興味와 注視와, 分布如何를 疑視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財産이란 各各 이것을 비밀에 부치고,
掩弊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엿보고, 또 詳細히 알 길이 없는 것이매, 다만 그런 程度의 것이거니 할 뿐이오, 비밀의 비밀이 잇는 만큼 透徹히 알
수는 없으니, 이제 그 大體輪廓만을 공개함에 끄친다.
血屬派閥의 復雜
閔氏 재산의 去就如何를 말하자면, 먼저 閔泳徽氏
家庭의 血屬群像의 列傳을 大槪라도 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亦是, 閔氏 財産과 가치 복잡다단하며 문외한으로서는 能히 그 체계를 正規할
수 없고 비록 그 집에 2, 3년의 門客 노릇을 하엿다 하여도, 알 길이 없고 譜學의 권위라도 無可奈何의 難事이니 그야말로 重重疊疊한 그집
대문과도 가치 秘藏된 사건이라고나 할까? 閔泳徽氏는 과연 유사 이래로 各 부호가들의 밟은 바 女人界 行程의 水準을 훨신 뛰어나아가, 그의 絶倫한
精力의 입아지된 여인군상이 얼마인지를 헤아릴 수 없는 중, 매일 좌우에 侍立하고, 每夜에 그의 享樂을 위하야 대기하는 여성이 만헛든 만큼,
大房마마를 首位로, 平壤마마, 海州마마를 次席으로 淵堂마마 무슨 마마 하며 5, 6인의 妾室이 各各 駐屯所를 設置하여 가지고 列席하여 게시다.
그럼으로 氏의 그로 인한 因果이든지 大房마마께서는 血屬이 불행히 없고, 平壤마마도 남자로는 없고 오직 列位中에 大福을 가진 海州마마가 삼형제의
아들 大植, 天植, 奎植을 두어 三位一體의 아기자기한 장면을 맨들엇는데. 이 功에는 海州마마가 大勳位을 가저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지금이나
긋때나 어느 때를 勿論하고 閔泳徽氏 집의 權勢와 支配權은 海州마마가 掌握하엿스니, 그것도 生男한 덕분이다. 大房마마는 칠거지악에 無後第一이라는
東洋 獨特의 罪(?)로 上位에는 存在하엿스나, 勢力은 海州마마에게 비길 바 못 되엇다. 閔衡植氏는 嫡孫으로 養子가 되어 들어왓슬 뿐이오,
더구나 溫厚하고 長子의 風이 잇서 疏財淡泊함으로 窮한 사람을 救하고 업는 親戚을 도읍는 말하자면 閔氏家의 전통을 깨트린
反逆兒(?)라는<67> 稱號를 밧게 되엇스니 이로 인하야 저 有名한 30萬圓 消費事件의 發端이 되고 그로부터는 衡植氏는 完全히 去를
當하고 名目만 長子로 잇게 되어 그의 生活은 窘迫한 程度에 잇섯다. 즉 말하자면 閔氏의 堂堂嫡孫으로 그 一權을 掌握할 地位에 잇는 사람이지만
閔泳徽氏에게 信用을 밧지 못하며 去勢를 당한 것이니, 氏의 생각에는 血屬이 더 愛重하고 情이 더 가는 것이매 그럿치 안허도 養子에 대한 觀念이
그리 두텁지 못한 터에, 「돈」을 잘 지키지 못한다고 排擊함도 氏로서는 無理가 없슬 것이다. 그러면 閔泳徽氏의 令子令孃이 都合 幾人인지는 구타여
알 것이 없으나 養子되는 衡植氏를 머리로, 大植, 天植, 奎植 등 三氏와 李定宰氏 夫人, 寡居한 兩位 따님이 잇는데 (其外는 財産關係에 깁픈
關係가 없어 除外) 閔泳徽氏 財産은 이 六位를 싸고 돌며 늘 爭覇戰이 잇섯고, 그 家族別로 角逐이 잇섯든 것이라 한다.
主權은
閔大植氏
血屬으로는 長子이오, 사람으론 가장 信用하고, 守護하기에는 第一節儉하고 애끼기는 누구보다 애틋하고 聰明으로는 諸子 중
一人者라고 指目하는 大植氏는, 閔泳徽氏의 事實上 二世로 自他가 共認하게 되매 모든 權利와, 支配와 處理를 仝氏에게 一任하다 싶히 하엿다.
그럼으로 仝氏는 모든 主權을 掌中에 움켜쥐고 쥘낙필낙 하엿든 것이다. 閔泳徽氏 財産을 직히고, 늘이고, 活用하고, 左右하기는 『大植에게
잇다』고까지 되엇스니 氏는 東一銀行(前 韓一銀行)의 頭取인 同時 閔氏系統에 모든 重要한 자리를 占領하고 그 財産을 守護하고저 八陳圖를 布設하고
잇섯다. 이 守護神은 閔氏王國에 업지 못할 人物이오 엄연한 存在이엇든 것이다. 그럼으로 氏는 늘 一部에서 呑색漢, 깍정이, 안달뱅이. 소리를
들어가며, 그 財産을 마터가지고<68> 잇섯다. 비록 仁寺洞에 阿房宮을 짓고, 郊外에 「스윗홈」을 建設하엿다 하지만 그것은 自身의
위한 自身之策이니까 此限에 不在이다. 엇잿든 日常生活에, 節用節儉은 실로 徹頭徹尾하야, 그 類를 보지 못하겟다는 만큼, 世評이 높지만, 엇잿든
갸륵한 양반이엇섯다. 그런 까닭에 閔氏 王國에서는, 獨裁官이오, 全知全能하고, 暴君이며 主宰者이엇다. 누가 氏의 位를 넘겨다 보며, 누가 氏의
命을 거스릴 것인가? 한아로부터 千百까지 氏가 모르고는 되는 것이 업고, 一粒一系라도 氏의 許諾이 없고서느느 밖으로 나아갈 수 업다. 비록
父敎일지라도, 氏가 반대할 수 있고 氏가 許한 거면 父命도 撤回할 수 잇다. 可謂 莫能當이오, 全權이다. 그 집안에서야 실로 最高獨裁官인 것만은
事實이다.
一部는 法人으로 大部分은 私有
閔泳徽氏가 世上의 *譽*?을 등지고, 榮爵, 華位, 極貴 極富, 愛子,
寵妾을 다 버리고 一去歸不歸를 한 후 閔氏의 그 巨大한 財産이 果然 어듸로 갓나. 또 어떠한 分布狀態를 보이고 잇는가 함이 이 論의 中心이다.
그러면 閔泳徽 一去 後에 財産은 참말로 어듸로 갓나? 이제 그 側近者의 말과 巷間에 傳播되는 諸說을 綜合하여 紹介하면 이러한 것
갓다. 氏가 生存할 時에 大體의 分配는 정하여 잇섯다 한다. 卽 大體輪廓을 보면, 閔大植氏가 第一 巨大한 分配를 밧고, 그 다음이
閔奎植, 또 그 다음이 閔天植,(死亡) 다음으로는 李定宰 夫人(長女) 또 다음이 出家하엿다가
還元한 따님 끝으로 嗣子 衡植氏의 順位라고 볼 수 잇다 한다. 大植氏로 論하면 血屬으로 長子오 또 海州마마는 生男한 有福한 夫人이라 寵姬의
長子오 主權者오 寵兒이엇든 만큼 閔氏의 財産 중에서 大多分이 그에게로 갓다하야도 疑心할 것도 업고 變怪될 것도 업다. 말하자면 依例 그럿코 宜當
올은 일이다. 사람이란 非凡한 사람이 아닌 以上 血屬에 厚하고 名目만의 形式을 꾸미는 養子에게 薄할 것도 人情에 斯然한 바이라 唯獨
閔泳徽氏에게만 그 範疇 밖에 잇스라는 것은 無理한 일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大植氏로 論하면 生前이나 死後가 問題가 되지 안코 아조 田畓도
「노린자」와 가튼 것 40,000石 現金으로 數百萬圓을 차지하엿고 다음으로 天植(未亡人의 管理)氏가 4萬石의 土地와 數萬圓의 現金을 가젓고
奎植氏가 30,000石 現金 數萬圓, 李定宰氏夫人의 數萬石, 出還令孃이 數千石식을 各各 所持케 되고 其餘 數百 家率은 殘飯式으로 各 數百石,
乃至 數石斗落式을 分配하여 가젓다 한다. 그래서 巨大하기로 有名하든 閔泳徽氏의 集團的 財産이 氏 一去 後에는 分散分布狀態로 변하엿다고 볼 수가
잇다. 물론 이것이 令子令孫까지에는 閔家財閥의 領域을<69> 떠나지 안켓거니와 그럿타고 해도 今後로 一令之下에 左右되고 統制되는
單一財閥의 權能은 發揮하기가 어려울 것만은 事實인 것 갓다. 그러면 그의 嗣孫이오 閔氏 累代 祖上을 떠밧들 宗家 後繼者인 衡植氏에게는
얼마나한 分配가 돌어 갓는가? 그에게는 表面으로는 宗孫이오 宗家이지만, 前日 30萬圓 浪費事件이 말을 하엿는지? 그렷치 안흐면 直系血孫이 아닌
養子가 그로 하야곰 그러케 맨들엇든지 간에 3,000石의 田畓과 校洞住宅 一?(閔泳徽氏 常住하든 家屋) 밖게 돌어간 것이 업다
한다. 數千萬 長者의 後繼嗣孫으로 內實은 그 가진 바가 얼마 못되니 外富內貧의 가슴 쓰린 씁쓸한 우슴을 우슬 밧게 업슬 것이다. 氏가
血孫이 아니엇든 것이 罪인지? 그럿치 안흐면 30萬圓 浪費事件의 餘震이 未息함이든지 朝鮮舊來의 習慣으로 보아, 너머 分配가 薄하엿다는 것은 避할
길 업다. 그런데 이제 듯는 바에 의하면 閔天植氏의 所持分과 李定宰氏 夫人의 分配와 그 他群小財産을 합하야 法人을 組織하고 一便으로
永保「삘딩」을 經營하며, 기타 諸種權利 機關을 掌理하엿다 하니 그 閔氏 財産은, 分散作用을 하며 다시 一部는 集合體로 되어 잇는 것이다.
原動?인 閔泳徽氏가 死去하매 그 財産은 各各 細胞로 흘러가는 수 만흔 細?으로 달려갓다. 兩大靜?과 極小 部分의 動?이 橫으로 縱으로 흘너저
가는 것이 閔泳徽氏의 財産이 것는 「코-쓰」이다. 動?인 閔衡植氏의 心藏이 細微하고, 閔大植, 閔奎植 兩氏의 二大靜?의 勢力이
縱橫自在한데다가, 大腿?인 永保 中心의 財閥이 經으로 緯로 휩싸고 도니 果然 이 閔氏의 千數百*圓의 ?能이 如何할까. 今後가 注-되는
바이다.
뛰에 들은 餘*
以上 錯綜한 經緯를 錯雜히 써서 一般 讀者는 그 企待가 어그러젓다 하겟거니와 前項에서도
暫記한 바와 가치 全體의 것을 極秘함에 容易히 輪廓이라도 엿보기 어려운 데다가 갈피를 잡기 어려운 閔氏 諸族들의 內密한 것을 뜻대로 알 길이
업서 그럿커니와 이제 그 후들은 餘聞이나 또 한 토막 적고 끗을 맷기로 하자... 閔泳徽氏의 死去 後 葬禮가 너머 疏忽하엿다고 一般이
閔大植氏의 節約劇에 대하야 總攻擊의 화살을 던지자, 그로 인하야 그랫든지 京城府에다가 社會事業에 보태어 쓰라고 그 葬禮費節約한 것 一金
二萬圓也를 寄附하엿다 한다. 그랫더니, 이것을 또 가지고 말 조하는 世人이, 京城府에 寄附한 것 가지고 是是非非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모리
하여도 衡植氏가 30萬圓을 浪費하며<70> 信用을 先人에게 일엇건 말엇건, 宜當히 그 諸弟妹는 宗家오, 嗣孫인 衡植氏에게 配當한
財産이 過小하니, 그 二萬圓을 에게다 주엇스면 돌이어 그 父親의 贖罪나 될 것을....하고 ?口를 하니까 或 여기에 肝이 좀 찔이든지 閔奎植,
閔天植, 두 누님 합하야 3,000石 직이를 모하 주어라 하고 閔大植氏가 命令을 내렷더니 『閔奎植氏 擧聲大?曰, 兄님은 一斗落도 아니
내노코 우리더러만 내노흐라는 것은 千不當 萬不當하오』 一矢를 던지자 고만 閔大植氏 無色하며 그 말은 그대로 흐지부지 하엿다니. 내 것은
앗갑고, 남의 것만 내노흐란 廉?업는 소리를 두 번식 하기 어려운 것은 人之常情이거니와 또 그러면 나도 내놀 것이니, 그러케 하는 것이 올타고
할 閔大植은 아닌지라, 所聞의 所聞만 맨들어 노아, 世上 사람의 심심푸리 話題를 맨들어준 雅量에는 感服할지 몰나도, 3.000石직이 더 으들번
宅인 衡植氏의 今後 處世箋方이나 두고 보기로 하자. 그리고 끗트로 閔氏 財産의 傳統的, 光輝 잇는 그 偉力이 閔氏의 누구의 손으로든지 統制되고
合一되어 그 存在가 어듸까지, 또는 어느 때까지 持續될 與否에 대하야 우리는 注視를 게을지 안키로 하자.
(끝)<71><6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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