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6권 제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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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6권 제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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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4-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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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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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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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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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任에 際하야
本人이 病後의 몸으로 5,6年間 新聞社 事務와
著述에 必身이 疲勞하엿사옵기 朝鮮日報社 取締役 副社長의 職을 辭하옵고 이로부터 約 1年間 山水間에 放浪하야 休養을 圖하려 하오며 放浪인지라
住地를 豫定할 수 업슴으로 自然 通信이 杜絶되겟사오니 知舊 여러분은 照諒하시기 바라오며 그 동안 변변치 못한 이 몸을 愛護하여 주신 厚誼를 못내
感謝하옵니다. 1934年 5月 22日 李光洙
春園은 어듸 갓는가. 春園은 長安의 家家戶戶를 차저 보아도 이 글을 조선일보 紙上에 내이든 5月 23日부터 종적을 감추고 말엇다.
春園은 과연 어듸 갓는고?
그러나 그가 이 글월을 발표한
것이 오월 스무사흔날이엇지만 그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후리후리한 큰 키의 그름자가 서울 시내에서 사라진지는 그보다 10餘日 前인 5月
7,8日頃이엇다. 처음 신문지상에 「그 女子의 一生」이 90餘回에 이르러 갑작히 筆者病이란 一片의 社告도 업시 中斷이 되자 이 소설의 애독자들은
퍽으나 궁금하여 하엿다. 그래서 신문사로 전화도 걸고 혹은 편지를 하여 보앗스나 시언한 대답이 업섯다. 그러나 이 소설이 中斷된 것을 가지고
全朝鮮<92> 數萬의 春園宗 愛讀者들은 그리 몹시
失望하지 안엇다. 그 까닭은 春園은 元來 病弱한 몸임을 잘 아는
때문이라. 그러기에 이전에 아모 신문에나 쓰든 連載小說치고 200회 300回 거듭하는 사이에 作者因病으로 2,3次 혹은 5,6次가 中絶아니
된 때가 거지반 업섯다. 「再生」이 그러 엿고 「端宗哀史」가 또한 그러 하엿다. 더구나 몃칠을 쉬일 뿐더러 永永 꼬리를 감추고 中斷하여
버린 作品까지 잇섯스니 녜전 東亞日報에 나든 「金十字架」가 그러 하엿고 「流浪」이 그러 하엿고 「朝鮮文壇」에 나든 「엇던 아즘」 또한 그러
하엇든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벌서 근 이십일 동안을 두고 아모 말업시 나지 안엇다. 그리하든 까리에 突然히 哀調에 잠긴 이 悲壯味를
띄인 聲明이 나온 것이다. 엇재서 이 聲明이 哀調와 비장미를 띠엇다 하는고 그는 『約 1年間 山水間에 放浪하리라 하엿다. 구름과
흐르는 물! 벌서 그리할 나이 아니건만 雲水의 遍路! 이것부터 엇더케나 뜻밧게 말인고 그런데다가 『放浪인지라 自然 通信이 杜絶하겟고』 라
하엿다. 俗世와의 通信去來까지 끈코 지난 해 솟는 달을 天地寂滅한 山寺 川邊에서 마즈며 비바람으로 더부러 벗하리라 하엿다. 놀나운 心境의
變化다.
그러면 엇지하여 春園은 朝鮮日報 副社長의 자리를
突然히 辭職하엿고 또 好評이엇든 「그 女子의 一生」의 붓조차 꺽거 버리고 자최를 감추엇는고 몬저 朝鮮日報社와의 關係부터 둘추어 보자. 5月
初旬 엇던 날 아츰 社長 方應模氏는 春園에게 한 장의 글월을 手交하엿다. 春園은 無心코 밧어 읽엇다. 그 글속에는 XXX道 記者團의 名義로 方社長에게 보낸 便紙 한 장이 드러
잇섯는데 「貴報에 揭載되는 「女子의 一生」이란 小說은 戀愛中心의 感傷的 小說로서 生에 躍進하여야 할 朝鮮의 靑年大衆에게 그릇된 精神的
糧食을 주는 것이니...」하는 一種 彈刻文이엇다. 春園은 낫빗을 變하엿다.
이날부터 신문紙上에는 小說이 끈처젓다. 春園은 일즉이 小說을 쓸때에
萬一 이번 小說이 失敗한다면 나는 一生을 다시 두 번 붓을 잡지 얀으리라 맹세하엿다. 그는 그 言質에 責任을 젓슴인가 비록 一道 記者團의
共同聲明이 아닐지라도 다만 一人의 排斥者가 天下에 잇다 하더래도 그 責任을 질 것을 覺悟하엿섯슴인가. 그러치도 안으면 詩人的 銳敏한 感觸이 그
便紙 傳하여 주든 方法에 心境을 害하엿슴인가. 이튼날부터 副社長室에는 倚子만 主人을 쓸쓸히 기다리고 잇섯슬 뿐. 그러면 이것이 辭職한
原因의 全部엇는가? 春園은 일즉<93> 「나는
囑託이요」 하는 말을 입버릇모양으로 하엿다. 그는 비록 方社長의 知遇와 草廬三顧의 厚禮로 東亞日報 編輯局長자리를 버리고 朝鮮日報 副社長이
되엿섯지만은 金權으로 다진 株式會社 機?속에 잇서선 아모 實權을 쥘 수 업섯다. 또 政治的 術謀를 斥하는 單純한 性格의 그는 淸濁倂飮式行政을
하지 못하야 內部로부터도 遠而敬之를 밧는 格이엇다. 더구나 朱耀翰氏을 일코 曹晩植氏 去하고 金東仁 李鍾洙氏 等이 離한 뒤는 孤島에 流配온 듯 日日夜夜 配所의 달을 처다
보앗다. 實權업다는 證據르 春園은 일즉 李箕永氏의 「民村」이 끗난 뒤를 이어 羅蕙錫女史의 處女作長篇을 連載하기를 主張하엿지만 文藝的 敎養에는 그리
?富치 못한 方社長이 이를 눌넛고 朴花城女史의 「古都紀行」도
中斷의 不得已에 至하엿고 더구나 蔡萬植氏의 探偵小說이 실닐 때는
알지 못하엿다 한다. 문에 잇서 권위라 할 春園을 몰내이고 新聞社의
文藝行政에 이르기까지 이러케 進行되엿다. 이러한 社의 態度에 聖人이라도 마음이 조왓스리 업섯스리라. 이리하야 그는 「나는
顧問이오」 하는 命題를 스사로 이마에 부치엇다. 이 밧게 人事에 잇서, 財政處*에 잇서, 副社長은 尸位素찬이엇다. 그는 여러번 辭表를
내엇다. 朱耀翰氏가 나갈 때에도 내엇고 그 뒤에도 5,6次내엇다. 바로 4月 下旬에도 그는 辭表를 내고 飄然히 서울을 떠나 아모도 몰느게 어느
山谷 절간 속에 숨엇다. 겨우 支局의 發覺으로 營業局長 金箕範氏가 專往하여 同行歸社하엿다. 그러나 이번만은 끗끗내 新聞社와
袂를 갈느고 말엇다.
그러나 春園이 放浪을 決心한 動機는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今春에 가장 最愛의 일곱 살 먹은 아드님을 不過 2,3日에 일엇다. 早失父母하고 肉親의 愛情에 주우리며 40平生을
사라오든 그의 겨우 하늘에서 바든 한낫 선물인 이 愛兒까지 마저 빼앗겻슬 때 그는 하느님에 復警할 것까지 생각한 아조 惡魔的 虛無的 心境에
잠기엇든 것이다. 또 그는 近來에 生活도 裕足하지 못하다. 西大門집은 銀行에 잡힌지 오래고 著書의 版權도 大部分 放賣하엿슴으로 精神的,
肉體的 여러 가지 苦因이 그의 精神을 좀 먹엇든 듯 하다. 그런데다가 昨秋 以來 健康을 害하엿다. 그의 心靈은 孤寂에 울엇고 그의
健康은 늘 不安에 떨엇다. 이것이 春園을 山寺에 닷게 한 한
까닭이엇다.
春園은 어듸 갓는고? 그의 부인 許英肅 女史도 一時 간 곳을 몰낫고 新聞社에도 그의 所在處를 몰녓다.
그는 어듸 잇다는 住所도 記하지 안코 한갓 辭表를 同封하여 郵送하엿는데 便紙에<94> 찍힌 郵便局의 日附印으로 보아 嶺東地方이
아닐가, 嶺東이라면 金剛山 엇던 深해 산골속 절간이 아닐가, 推測할 뿐이오. 아모도 그의 在處를 모른다. 혹 推測모양으로 關東 어느 地方에
잇섯다 할지라도 하로 30里식 거러도 이튼날은 江原道 五臺山에 나타낫다가 그 사흔날쯤은 또 다시 新羅古都의 半月城에 이르러 往年의 五道踏破를
계속하고 잇슬넌지 모른다. 그러기에 이 글이 세상에 발표될 때쯤은 혹은 嶺南山川을 두루 도라 秋風嶺지나 漢陽 기슭을 스처 大洞江畔에 서서
「영채」나 「김형식」의 자을 찻고 잇슬넌지 모른다.
조선에서 가장 존경을 밧는 분도 春園이요, 가장 미움을 밧는 이도 春園이다. 그가 新郞이 된다면 祝辭드릴 사람도 數萬일 것이요. 그 結婚式에 돌 던질 이도 數萬일 것이며, 또 그가
不幸히 저 세상에 간다 하면 그 葬式에 吊花를 보내며 눈물 뿌릴 사람도 數萬일 것이요. 잘 죽엇다고 욕할 사람도 수만이리라. 엇잿스나
稀有의 才分을 기우려 조선사람의 心靈의 糧食이 될 詩와 小說과 그 밧게 조흔 글을 2,30年來 꾸준히 보여주든 恩人인 氏의 붓이 한동안 멈처질
것은 틀임업는 일갓다. 아! 春園은 어듸 갓는고. (5月
23日記) 이 雜誌世上에 내보려 하든 5月 31日에 듯건데 氏는 瓢然히 서울에 도라왓다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또 旅裝을
차릴는지...<95> <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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