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朝鮮新聞 發達史 - 車相瓚

이강기 2015. 9. 28. 09:02
잡지명 개벽 신간 제4호
호수 신간 제4호
발행년월일 1935-03-01
기사제목 朝鮮新聞 發達史
필자 車相瓚
기사형태 논설

一. 朝鮮新聞의 起源

朝鮮新聞의 기원을 말하자면 먼저 세계신문의 기원을 잠간 말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 잇서 신문의 원조라 할만한 것은 羅馬의 유명한 英傑 『씨사』가 제1집정관시대에 창설한 『아구타, 쎄나토우스』와 『아구타, 데웰나, 포푸리, 로마니』라 칭하든 官報니 (서기 전 60년경) 兩者는 주로 그때 원로원의 회의 及 其 결정에 관한 간단한 기록과 국민의회의 기사 及 기타 공공적 기사를 보도하였었다. 그 官報의 내용을 발표하는 방법은 石膏를 塗한 板上에 문자를 써서 일반시민에게 공시하였으니 즉 금일의 게시와 비슷하였고 旦 지방주민을 위하야는 다수의 서기로 此를 필사하야 요구자에게 발송하얏섯다.
서양의 신문 史家들은 이 羅馬의 官報로써 세계신문의 원조라 칭하나 동양 諸國 중 특히 中國에서는 『春秋』라 칭하는 원시적 官報가 상술한 羅馬의 2종 官報보다 약 5,600년을 훨신 압서서 발행되였은 즉 官報로는 이것이 최초의 것이라 하겟다. 그 후 唐 玄宗때 (羅馬 官報時代보다 약 800년 후)에 이르러 또 저명한 邸報가 있었으니 이 邸報는 당시 唐의 國都 長安에 잇는 16절도사의 사저에서 발행하야 각기 소관 지방으로 통보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황실의 동정, 조칙, 章奏, 관리의 서임, 사령, 朝謁, 賞恤, 廟堂의 회의 及 기타 私事통신 등을 기재하였으니 明代의 『宮門抄』, 淸代의 京報와 同質異名의 것이다. 그러나 소위 근대의 신문형식을 具한 신문은 光緖 26년(서기 1900년)에 이러난 소위 義和團事件 직후에 발행한 白話愛國報니 此는 中國新聞의 원조요 其次는 光緖 30년(서기 1904년)에 창간된 京話日報, 又〈2〉 其次는 同 35년(서기 1909년)에 창간된 北京日報니 이 北京日報는 諸 신문 중 내용과 체재가 비교적 완비하엿섯다.
歐羅巴는 저 역사상 유명한 羅馬가 멸망하고 게루만의 蠻族이 全 歐洲를 지배하게된 뒤로 그 찬란한 녯 문화가 여지없이 파멸되고 蠻族 新문화가 아즉 발전이 되지안어 소위 암흑시대를 형성하였을 때에는 일반문화의 정도라든지 사회의 제도가 도저히 신문의 발행가튼 것은 꿈도 뀌지 못하다가 제12세기 내지 13세기에 이르러 겨우 사원, 대학, 기타 승려간에 한하야 보고 及 信書 송달이 개시되였고 제14세기-15세기에 이르러서는 상업 及 도시 관직에 관한 信書 교통을 위하야 우편과 유사한 통신기관이 생기고 신문지라는 말도 이때에 비로소 생기였다. 즉 大상업도시 교통 중심점이 되는 지방에서는 각지로부터 오는 여러 보고를 수집 편성하야 서신 또는 부록으로 此를 각 방면에 송달하였으니 此가 즉 소위 『쓰아이쓴구』 또는 『노이에쓰아이쓴구』라 하는 것이였다. 此 서간 신문지의 내용은 주로 정치적 보도이였고 그 기사의 재료는 대개 親知人의 구두 또는 편지의 보도 외에 행상인, 출정군인, 漫遊外人, 유학생, 기타 궁정에서 파견한 使者, 귀족의 서기 등에게서 채취하였섯다. 그러나 소위 신문지가 근대식과 같이 영리적으로 경영하게 되기는 서기 1566년에 伊太利의 『베니스에서 창간된 『노데잇이에, 스쿠릿데』가 효시니 신문 명칭의 한아로 일반이 사용하는 소위 『카제트』라 하는 것은 당시 그 신문의 일부의 대가로 사용하든 小화폐 『카제트』에서 생긴 말이라 한다. 당시 『베니스』는 동서교통의 매개자요 또는 근래 외교통신 及 정치적 통보 사무를 장악한 정부의 소재지로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오는 중요한 소식이 모도 이곳에 집적되였은 즉 이 영리적 신문의 발생은 필연 또는 당연의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일간신문의 창시에 관하야는 諸說이 구구하나 일반으로 인정하는 것은 1660년에 獨逸에서 창간된 『라이푸지가, 쓰아이쓴구』요 其次는 1702년에 英國에서 창간된 『데이리, 구-란드』와 1777년에 佛國에서 발행한 『쥬-나-루, 도, 파러』요 米國에는 1784년에 『펜실바니아, 빠겟트, 앤드, 데이리 아드바-라이싸』가 발행되고 日本은 그보다 훨신 후 明治 3년 12월(哲宗 7년 庚午)에 橫濱每日新聞이 최초 일간신문으로 발행되였다한다.

상술함과 같이 官報를 신문의 원조라 할 것 같으면 우리 朝鮮에 잇서서는 官報의 일종인 소위 『기별』紙가 신문의 원조라 하겟고 민간에 잇서서는 야담, 야사 가튼 것도 또한 일종의 신문으로 볼 수 잇다. 然而 그 시초된 년대에 잇서서는 아즉 상세한 기록을 발견치 못하얏으나 新羅史에 의하면
神文王 12년 壬辰(서기 682 = 距今 1253년 전)에 薛聰이 이두(音두)문을 지여서 官府文札에 사용하였다 하였은즉 그때부터 기별紙 가튼 것이 벌서 시행되였던 것을 족히 짐작하겟고 또 宣祖 11년(1578)경에는 관료파 족친의 無職人들이〈3〉 소위 朝報라는 것을 발행하야 자생하다가 宣祖에게 觸怒되야 금지 유형된 事가 잇섯다.- 宣祖實錄에 云하되 遊手輩, 得政府許, 印行朝報, 賣以資生, 行之數月, 上震怒流之- 그때 그 朝報의 내용이 어떠하엿던 것은 지금에 足徵할 문헌이 없으나 역시 官報의 일종, 다시 말하면 신문의 일종이였던 것은 사실이다.

二. 朝鮮新聞의 創設時代(1883년-1888년 경)
그러나 소위 근대식의 신문이 형체를 가추어 가지고 나온 신문은
李太王 20년 癸未(서기 1883- 距今 52년전) 8월에 창간된 漢城旬報니 당시 朝鮮은 그 전 해 壬午軍亂 직후에 淸將 吳長慶의 군대가 와서 주둔하며 정계에는 事大黨의 세력이 더욱 강대하게 되였으나 그 반동으로 이러난 開化黨의 잠세력도 또한 적지 안어 음적 양적으로 朝鮮 개화운동에 주력하니 아모리 頑迷한 그 당시의 정부라?? 또한 외래 신사조의 대세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닷고 재래제도를 다소 변경하야 총리교섭통상아문을 신설하고 機器局 典?局(造幣局) 博文局을 설립하며 閔泳翊의 추천으로 井上角五郞을 촉탁으로 雇聘하고 (혹은 金允植, 朴泳孝의 추천이라 하나 실은 閔이 金에게 薦한 것이다.) 博文局 사업으로 漢城旬報를 발행하게 되였다. (신문 편집은 姜瑋( 秋琴) 朴永善 등) 博文局의 위치는 지금 慶雲洞 女高附屬 師範寄宿舍 址에 있엇고 신문은 그 명칭과 같이 旬刊이며 그 양식은 순 朝鮮紙에 구식 鑄字를 그대로 쓰고 문체도 순 漢文이어서 일견하면 고대 문집과 비슷한 감이 있었다. 기사의 내용에 있어서는 宮廷錄事, 내외 관리의 이동, 외교 조약, 其外 市區探報(지금으로 치면 경제면 기사) 각 단체기사(정치면) 잡기 聞(소위 3면 기사) 등이엿으니 그 창간사라 할만한 『旬報序』의 1절에- 今風氣漸闢, 智巧日長, 輪船馳?環瀛, 電線聯絡四土, 朝廷開局設官, 廣譯外報, 幷載內事, 頒示國中... 』 운운의 문구가 잇는 것을 보면 그 당시 기사 내용의 如何와 문체 如何를 족히 짐작할 것이다.
이 漢城旬報는 명색 신문이나 그 주재자가 모도 관변 인물이요 독자도 官公吏에 한하고 내용도 대개가 관변의 일이엿기 때문에 일종 官報의 영역을 넘지 못하다가 창간 후 3년 즉 1886년(李太王 23년 丙戌) 1월에 旬報를 週報로 변하며 문체도 正音과 漢文 혼체를 쓰고 (金允植과 井上角五郞의 발의) 내용도 범위를 다소 넓히며 독자도 또한 일반에 許하였으니 전날 旬報보다는 비교적 대중적이요 신문으로서 正漢文 交用의 신문체를 쓰기도 이것이 효시엿다.

三. 米國系 新聞時代(1896년-1898년) 『獨立新聞, 京城新聞, 每日新聞』

그러나 이 신문이 창간되던 익년 甲申 10월에
金玉均 일파의 개혁운동이 실패되야 開化黨 인물이 모도 逃竄亡命하고〈4〉 日本의 對 朝鮮세력이 감축되며 淸國세력이 일층 강대하야 짐을 따러서 事大黨 즉 守舊黨이 猶益跋扈하게되니 전일에 시설하엿던 소위 新문명의 기관은 一掃無餘하게되야 1888년 즉 李太王 25년(戊子)에 至하야는 博文局까지 폐지하고 그 週報도 또한 폐간의 운명을 당하니 그때로붙어 甲午 日淸戰爭 시기까지 약 6,7년동안은 朝鮮의 신문은 그 影字도 볼 수 없게 되였다.
그러다가 乙未年(明治 28년 4월 17일)에 日淸 馬關條約이 성립되며 *朝鮮의 독립을 세계에 선포하고 그 익년 丙申에는 연호를 建陽이라 하고 삭발의 令과 기타 신제도를 발포하며 往者 甲申政變때 米國으로 망명한
徐載弼의 죄를 蕩斥하고 정부의 고문을 삼으니 그는 귀국하는 직후 다년간 米國에서 訓習한 자유독립주의와 평민주의를 고창하야 그 전날에 李商在, 南宮檍, 劉猛, 기타 신진인물로 『民權擁護와 政治改善의 促進』이란 표방 하에 조직되엿던 유사 정당의 建陽協會(此 會의 위치는 처음에 桂洞에 있었다)를 확장개변하야 朝鮮 최초의 민간 정당인 獨立協會를 창립하고 동년 4월 7일에 그 會의 기관지로 신문을 발행하였으니 此가 즉 유명한 獨立新聞이다. 이 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그 체재는 비록 평판 중형 4頁에 불과하고 1년 후 徐씨의 後를 繼하야 尹致昊씨가 주간하기 전까지는 격일 간행한 대 불과 하였으나 그 내용에 잇서서 민권사상의 고취와 독립자유의 사상을 주장한 격론열說은 그 뒤 어떠한 신문에서던지 其比를 見치 못할만 하엿다. 그러나 그 익년 丁酉 즉 1897년에 露國公使로 온 『스페에르』가 朝鮮政府와 비밀교섭하야 馬山港을 自國 해군의 근거지로 조차하랴던 계획을 그 지상에 미리 폭로하고 獨立協會에서 그것을 극력 반대하야 露使의 음모가 실패된〈5〉 관계로 露使의 음흉한 책동은 徐씨의 입적국인 米國에까지 교섭하야 그로 하야금 고문의 職을 辭하고 1년만에 부득이 渡米하게되니 그 신문은 다시 米人 아펜설라씨를 발행인, 尹致昊씨를 주필하야 일간으로 발행하다가 1898년 즉 戊戌 11월 27일에 獨立協會의 주요 인물이 皇國協會의 책동과 정부의 미움을 바더 入獄되는 동시 會는 해산의 명을 당하고 따러서 신문도 또 발행치 못하게 되엿다. ( 獨立協會의 활약하는 사실은 너무 장황하기에 此에 약함)
이 獨立新聞과 시대를 가티하야 京城 及 每日 兩 신문 (지금 京城, 每日 신문은 물론 딴것이다)이 탄생하였으니 전자는 米國通인
尹致昊씨의 從弟 尹致昭형제의 경영으르 100원 미만의 소자본을 가지고 1898년(光武 2년 戊戌) 3월 8일에 창간된 것이니 지면의 大가 불과 솟바닥만 하엿섯고 후자는 米團人 경영인 培材學堂의 梁弘?씨가 前記 京城新聞보다 약 수개월 후 창간한 것이다. 摠而言之하면 이때의 3신문 특색은 전부가 순 朝鮮文인 것과 계통이 米國계통인 것과 정치 이외에 기독교의 냄새가 만흔 것과 계급타파, 노예해방, 자유평등을 주창한 것이였다.

四. 皇, 帝 兩 新聞 倂立時代
獨立新聞이 폐간된 후 乙巳(1905년)保護條約 시기까지 약 8년간은 皇城, 帝國 兩신문의 병립시대라 可謂할지니
皇城新聞=은 光武 2년 戊戌 9월(1898년)에
獨立協會 회원 중 南宮檍, 羅壽淵 외 某某씨가 전날 尹致昭씨의 경영하던 京城新聞을 讓受하야 명칭을 皇城新聞으로 변경한 것이니 자금은 股金制로 하고 처음의 위치는 左巡營(黃土峴 紀念碑閣址 = 현 光化門通)으로 정하얏다가 뒤에 鍾路 白木廛뒤 (현 崔相仁 상점 後址)로 이전하고 주간을 일간으로 변하며 체재는 獨立新聞과 같이 중형 4頁, 단수는 8단, 평판 인쇄, 그 문체는 朝漢文 交用이엿고 또 논조는 獨立新聞과 대동소이하야 항상 비분강개의 사설로 당시 정부를 비난 공격하고 인민의 자유평등과 배타사상 등을 고취하였으니 역대 사장으로는 南宮檍, 張志淵, 南宮薰, 金相天, 柳槿 등이요. 또 역대 명 논설기자로는 張志淵, 柳槿, 申采浩, 朴殷植 등이였으니 1905년 11월 17일 保護條約 당시 『是日夜放聲大哭』과 『擲筆大呼』의 兩논설은 당시 일반민중의 열혈을 약동케한 名 논문으로 지금까지 누구나 회자하고 또〈6〉 그 필화로 인하야 필자는 縷?의 욕을 당하고 신문은 발행정지의 처분을 당하엿다가 2개월 후 다시 해금이 되야 계속 발행하다가 庚戌年 합병시에 폐간의 비운을 만낫다.
帝國新聞=은 皇城新聞을 발행하던 동년 8월 8일에
李鍾一, 沈相翊, 廉伸模, 張孝根 등이 전날 梁弘?씨의 경영하던 每日新聞을 인수하야 帝國新聞으로 개칭한 것이니 위치를 漢陽洞(금 敦義洞)에 두엇고 문체는 순 朝鮮文으로하야 彼 皇城新聞이 독자를 상류계급을 대상으로한데 反하야 이 帝國新聞은 중류 이하 계급과 부인층을 대상으로 한것이 한 특색이엿다. 그러나 그 논조에 잇서서는 皇城과 대동소이하였고 어느 해 萬壽聖節( 李太王 誕辰) 때에 그 축사를 쓰는데 『만세』란 만짜(萬字)를 교정이 잘못되여 『망세』로 발표하엿다가 그것이 宮內에까지 문제가 되여 사장 李鍾一이 불경죄로 일시 구금을 당한 일은 지금까지 斯界에 한 이약이거리가 되였다.
이 신문은 재정의 곤란으로 1907년(丁未) 9월 21일에 임시 휴간하엿다가 동년 10월 3일에
鄭雲復이 사장이 되야 다시 계속 발행하다가 庚戌合倂시에 다른 신문과 같이 폐간의 운을 당하고 말엇다.

五. 全盛期와 暗黑期
乙巳保護條約 이후로 朝鮮人의 집회, 언론은 말할 수 없이 만흔 제한을 바덧지 만은 彼 노장 정치가인 新 통감
伊藤博文은 예의 노회한 고등정책을 써서 내외 인심을 완화식히고 또한 자기도 일반여론을 참고하기 위하야 어느 정도까지 언론 자유를 용인하였으니 乙巳年으로부터 庚戌合倂 시기까지 약 6년간은 朝鮮에 신문이 탄생 후 전성의 시기라 可謂하겟다. 그때 朝鮮文의 중요한 신문을 소개한다면 상술한 皇城, 帝國 兩 신문 외에 大韓每日, 萬歲報, 大韓民報 등이 있었고 또 一進會 기관지 國民新報 등이 잇섰으니
大韓每日申報=는 1905년 8월11일에
梁起鐸을 주필로 하고 英人 裵說이 창간한 것이니 裵說은 영사재판을 밧는 특권이 잇는 것을 밋고 극단히 排日論을 주창하야 당시 일반 朝鮮사람의 환심을 크게 사고 따러서 부수도 各紙 중 최고의 부수를 가졌으며 光武 11년(1907년) 여름에는 彼 유명한 海牙 밀사사건을 발표하야 내외인의 이목을 聳動식히고 그 사실로 말미암아 裵說은 금고 3개월의 형사 처분까지 바든 일은 누구나 아즉 기억에 남어 잇고 1909년에는 裵說을 代하야 英人 萬咸이 계속 발행하다가 다시 李章薰의 명의로〈7〉 변경되며 합병 당시에는 統監府에서 매수하야 그 기관지를 삼고 每日申報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니 즉 금일의 每日申報가 그것이엿다.
萬歲報= 이 신문은 光武 9년 6월에 천도교에서 발간한 것이니 위치는 (今 旭町 1丁目) 사장은 吳世昌, 주필은
李人稙이엿다. 그들은 다 신진 인물인 중 특히 李씨는 다년간 東京에 체류하는 중 신문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잇는 이만치 재래 朝鮮에 잇던 신문보다 체재 내용을 모도 일신케 하야 단수도 재래 8단이던 것을 처음으로 10단으로 하고 활자도 朝鮮 초유의 루비식 활자를 쓰며 『鬼의 聲』 『血淚』 등 신소설을 처음으로 게재하엿으니 그 필자 菊初 李人稙은 朝鮮 신소설 작가의 선구자요 그 신문은 朝鮮 신문계의 혁명이엿다. 그러나 재정의 곤란으로 3년 후 丁未년 秋期에 李完用 내각의 기관지로 양도되고 제호를 大韓新聞으로 변하야 계속 발행하다가 합병 당시에 또한 폐간되였다.
大韓民報= 이 신문은
李容九, 宋秉畯 일파의 一進會鄭應卨, 高羲駿 일파의 國是遊說團을 대항하기 위하야 天道敎의 획책으로 이러난 朝鮮 최후의 정당 大韓協會의 기관지로 1909년(隆熙 3년 己酉) 7월 8일에 창간되였으니 皇城 帝國의 兩 신문과 異名同論의 자매지 격이 되여 인심의 고무와 정부를 비난 공격하는 당당한 언론이 만었음으로 일반의 환영을 바덧섯고 貫齋 李道榮의 풍자만화는 朝鮮 신문에서 최초 게재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흥미를 만히 끌었섯다.
그 社 위치는 壽松洞(금 鍾路 소학교 址)이엿고 사장은 大韓協會長
吳世昌이 겸임하엿다가 합병 당시 또한 폐간되였다.
이 외에 和文新聞으로는 菊池謙謙의 漢城新報, 萩谷籌夫의 大韓日報, 蟻生十郞의 大東新報, 仁川의 朝鮮新聞과 報知 時事, 國民, 萬朝, 大朝, 大每 등 支局이 설치되여 일시 京城에는 신문 간판이 사립학교 간판과 백중을 다툴만치 만었섯다.
그리고 당시 朝鮮新聞으로 乙未 후
閔元植의 時事新聞과 비슷한 대우를 밧던 신문이 또 있었으니 그것은 一進會의 기관지인 소위 國民新報다. 그 위치는 美洞,(今 黃金町) 주필은 梅下 崔永年으로 합방건백서를 그 지면에 발포하고 張遑 論說한 것은 아즉것 우리의 기억에 살어지지 안코 독자에게 紙上 투표모집을 하기도 此報가 처음이엿다.
그러다가 庚戌 8월 29일에 日韓合倂의 되고 무단무치의 대표인물인 寺內總督이 朝鮮을 통치하게되니 朝鮮의 언론계는 그의 一刀之下에 여지없이 말살되야 소위 어용지 每申, 이외 朝鮮文 신문은 모도 殘命조차 보존을 못하게 되였으니 그때로붙어 己未年까지 약 10년간은 朝鮮新聞界의 암흑시기라 可謂하겟다.

六. 三新聞 鼎立時代
그러자 己未年 3월 1일에 만세의 소리가 터지며 長谷川總督이 봇짐을 싸가지고 東京으로 건너가고 齋藤總督이 繼任하게 되니 그는 도임 벽두에 朝鮮에 문화정치를 施할 것을 포고하는〈8〉 동시 언론의 자유도 다소 용인하여 몃 개의 신문과 잡지를 許하게 되였으니 신문으로는 東亞, 朝鮮 외
國民協會의 기관지 時事新聞이 생기고 잡지로는 開闢이 그 대표적이엿다. 이하에 略記하면
東亞日報= 東亞日報는 大正 9년 4월 1일에 그 社의 최초 사장이던
朴泳孝, 주주대표 金性洙, 柳槿, 李相協, 張德俊씨 등을 중심으로 창간된 것이니 그 당시는 민족주의 사상이 최고조에 달하엿든 때라 『朝鮮民衆의 표현 기관으로 자임함. 2. 민주주의를 지지함. 3. 문화주의를 제창함』 등의 세 가지 강령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 그때의 東亞日報는 정가 月額 60전 평판인쇄 4면에 불과하엿다. 그리고 제1보로부터 수지의 불합과 頻頻히 당하는 발매금지의 액운으로 인하야 신문경영에 막대한 타격을 받엇슴으로 이 難境을 개척하기 위하야 동년 7월에는 윤전기를 사드리고 정가를 80전으로 올리드니 발간 말기에 權悳奎씨의 『假明人頭上에 一棒』이라는 논문 때문에 儒林의 반감을 사서 朴泳孝씨는 그만 사장의 의자를 떠나고 동년 9월25일에는 사설 중 「三種의 神器」가 近因이 되고 朴泳孝를 사직케한 것이 遠因이 되어 기사 불온한 이유로 여긔에 제1차 정간을 당하야 170일 후 즉 익년 1월 10일에야 解停되엇다.
大正 10년 2월 21일에 다시 속간하야 동년 9월에는 公稱 자본금 70만원의 주식회사 東亞日報가 성립되는 동시
宋鎭禹씨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大正 13년 5월에는 李昇薰씨가 사장으로 취임. 동 10월에는 李昇薰씨가 사장을 그만두고 金性洙씨가 사장으로 취임하엿다. 大正 14년엔 절첩식 윤전기를 증설하엿고 동년 8월 1일에 지면을 6頁으로 확장하는 동시 정가를 1원으로 인상하엿다. 그러나〈9〉 大正 15년 3월 5일, 國際農民組合에서 朝鮮民族에게로 보낸 축전을 게재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3월 5일부터 4월 19일까지 제2차 정간 처분을 받엇다. 동년 12월 11일에는 光化門通 현 사옥으로 이전하고 昭和 4년 9월 20일에는 지면을 다시 8頁로 확장하고 10주년을 마지하더니 昭和 5년 4월 16일에 다시 제3차의 정간을 당하엿다가 동 8월 31일에 解停되고 昭和 8년부터는 지면을 10頁로 확장하야 금일에 이른다.
朝鮮日報= 朝鮮日報는 大正 9년 3월 6일에
大正親睦會의 기관지로 趙鎭泰, 宋秉畯, 芮宗錫, 崔崗 등이 중심이 되여 창간되얏다. 同紙는 최초 大正親睦會 기관지로 실업신문을 표방하고 나왓스나 논조가 항상 불온한 까닭에 압수를 만히 당하다가 동년 10월에 『星帽賊』이라는 기사로 인하야 제1차 정간을 당하고 1개월 후 즉시 속간되엿다. 그러나 재정의 곤란으로 大正 12년에 大正親睦會에서 宋秉畯 개인의 손으로 넘어가서 사옥을 三角町으로붙어 水標町으로 이전하고 趙鎭泰 후계 사장 劉文煥이 사임하고 宋씨가 직접 사장이 되였다가 후에 南宮薰이 사장이 되고 大正 13년에는 申錫雨 崔善益 일파가 宋씨로부터 매수하야 李商在옹을 사장을 삼는 동시에 지면의 대혁신을 단행하고 『朝鮮民衆의 新聞』이란 표어를 목표로 一路邁進하엿다. 大正 14년경에는 朝鮮日報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하야져서 민족주의의 낙인을 받은 東亞日報를 일시 압도하는 기세를 보이드니 大正 14년 9월에 『勞農露國과 朝鮮의 政治的 關係』라는 사설로 인하야 제2차의 정간을 당하엿스며 필자 辛日鎔씨는 피신을 하고 발행인은 체형을 당하고 윤전기는 압수되엇다. 정간된지 40일 후 적색 기자를 일절 면직식히고 동 10월에 해금. 大正 15년 7월, 堅志洞 신축 사옥으로 이전. 昭和 2년 2월에 사장 李商在씨가 별세하야 申錫雨씨가 그 대신 사장으로 취임. 昭和 3년 5월 9일 『濟南出兵壁上觀』하라는 사설로 인하야 제3차의 정간을 당하고 133일만의 9월 19일에 도루 해금 속간 되엇다. 昭和 6년 3월에 재정난으로 인하야 申錫雨씨가 퇴사하고 安在鴻씨가 사장으로 취임하엿다. 그러나 역시 여전이 속속되는 재정난 때문에 昭和 7년 3월 3일 救濟金 消費問題 事件으로 사장 安在鴻씨와 영업국장 李昇馥씨가 수감되고 새로이 兪鎭泰씨가 사장으로 취임하엿다. 동년 5월 28일 재정 곤란으로 발행권이 林景來씨에게로 가게되매 在社 사원들은 林씨는 그 인물됨이 朝鮮日報 경영자될 자격이 없다고 스트라익을 결행하얏기 때문에 林씨는 발행권을 손아귀에 쥐고 明治町 2丁目으로 옴겨가서 4頁新聞을 발행하다가 동 7월 29일에 부득불 휴간할 수 밧게 없엇다.〈10〉
동년 11월 21일에
曺晩植씨와 朱耀翰, 趙炳玉씨 등이 인수하야 다시 堅志洞 사옥에서 속간 중 판권 문제로 林景來 일파가 문제를 이르켜 일시 휴간, 昭和 8년 3월 23일에는 曺晩植씨가 사장이 되고 方應模씨가 발행인이 되어 蓮建洞에서 속간되엇다. 同 6월 23일에는 30萬圓(일시불) 주식회사가 조직되엇고 동년 7월 18일 曺晩植씨가 사장을 사퇴하고 方應模씨가 사장으로 취임하엿다. 동 8월 28일에 지면을 10면으로 확장하는 동시 자본금 20만원을 증가하고 太平通 1丁目에 사옥을 신축하는 중이요 그리고 금년에는 朝鮮新聞계에서 최초로 社用 비행기를 구입하엿다고 신년 벽두붙어 자랑 선전.
朝鮮中央日報= 현재의 朝鮮 中央日報를 말할나면 먼저 그 전신의 전신인 時代日報 시대부터 훌터 내려와야되겟다 時代日報는
崔南善씨가 주간하든 주간 잡지 東明(大正 11년 9월 창간- 12년 6월 3일 폐간)의 후신으로 大正 12년 발행된 것이다. 재정난으로 인하야 일대풍파를 이르키면서 普天敎 일파에게로 넘어가 버리드니 다시 大正 14년 6월에 洪明憙씨가 사장이 되어 다시 진영을 갓추엇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재정난으로 인하야 그만 문을 다더 버렷다.
中外日報, 時代日報 발행권이 취소된 직전 大正 14년 9월 18일에
李相協씨가 時代日報의 뒤를 이어 제호를 곳치고 발행인가를 얻은 것이 곳 中外日報다. 大正 15년 11월 15일에 社의 조직을 주식회사로 하고 창간 제1호를 , 발행하엿스니 그때의 정가는 60전이엇고 「最良最廉」의 신문으로 일대 비약을 꾀하엿스나 이것도 역시 재정난으로 막대한 곤란상태에 빠젓섯다. 昭和 3년 12월에 무기 정간을 당하고 익년 2월 중순에 解停.
昭和 4년 9월에는 사장
安熙濟씨와 李祐植씨 중심으로 발행을 계속하는〈11〉 동시에 지면을 8頁로 확장하야 東亞, 朝鮮의 기를 先하드니 그 뒤 이번 역시 재정난으로 드듸어 昭和 5년 10월 15일에 휴간을 신청하고 익년 2월 10일까지 휴간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니되엇다. 그 뒤 中外日報는 金炯元씨 외 1,2 기자의 적극적 노력으로 발행을 게속하드니 마츰내 9월 2일에 해산의 비운을 당한 것이엇다.
中外日報가 해산된 후
盧正一, 金贊成씨가 발행 허가를 다시 얻은 동시에 제호를 곳처 中央日報로 하엿다. 그러나 이 亦 재정난과 社內 不統一로 인하야 昭和 7년 5월 25일 휴간하엿다. 그 후 崔善益, 尹希重씨가 인계하야 동년 10월 31일부터 또다시 속간하게 되엇다. 昭和 8년 2월에 呂運亨씨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동년 3월에 제호를 朝鮮 中央日報로 곳치고 동년 7월에는 4頁이든 지면을 6頁으로 확장하고 昭和 9년 7월에 30만원의 주식회사가 되며 동월 16일부터 조 석간 8頁로 확장하고 정가를 80전으로 인상하야 금일에 이르럿다.
(끗)〈12〉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