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9권 제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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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9권 제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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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7-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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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復興하는 東亞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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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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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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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寬洙씨 社長에 金性洙씨는 아조 引退乎? 將近 1년이나 停刊 中에 있든
東亞日報는 7월 1일부터 解禁이 되야 다시 續刊이 되어 나왔다. 그러자 미구에 蘆橋溝事變이 돌발하고 게속하여 日中 戰局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야
시국이 시각을 다투어 轉變이 되자 거리거리에는 號外가 빗빨치듯 나오게 되였다. 東亞日報의 재등장은 때마츰 이러한 호기회이었으니 德富蘇峰의 말을
빌면 전쟁은 신문을 크게 만든다 하는지라 평시엇다면 원상을 회복하기에 거대한 자금과 적어도 3년의 세월과 많은 人智를 너허야 할 것을 그토록 큰
대가의 지불이 없이 신속히 社勢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야 겨우 2, 3개월에 불과하였건만 東亞日報는 또다시 海內 海外 重要地에 깡그리
그 신문지가 배포되고 그 성세, 또한 隆隆한 바가 있다. 이제 更新한 該社의 근간인 新內閣의 인물들을 보건대 取締役社長 白寬洙 取締役支配人 林正燁 取締役 張德秀 同 梁源模 同 金用茂 同 玄俊鎬 監査役 張鉉植 同 玄相允 이러하니 舊社長 宋鎭禹씨 代에 白寬洙씨가 취임하였고 전에는 부사장이든 張德秀씨가 新 組織에 있어 그양 平取締役이 된 것이 新 事實이요
그보다도 더 괄목할 일은 同社의 지주 金性洙씨」의 일홈이 중역
멘버에서 저혀 자최를 감춘 것이라. 여기에 대하여는 요다음 「東亞日報와 金性洙」란 別文으로 詳記코저 여기에는 略하거니와 이리하야 同社의 두뇌
조직은 질적으로 일변함에 이르럿다.
恢復되는 紙數과 廣告量 이 우에서 昔日의 威容을 거지반 회복한 드시 말하였는데 그를 좀더
상기한다면 첫재 지면에 있어 紙價 高騰한 때에 불구하고 續刊 初日부터 朝鮮, 每申 兩紙에 뒤떠러짐이 없이 1일 12頁紙를 내였고 그 부수도
白사장의 말을 드러서는 解禁約 月餘에 그 부수를 완전히 회복햇고 그 우에 금일에 及하여는 전시 뉴-쓰 관계인지 모르나 오히려 3할 가량
증가하였다 한다. 이 말을 선전성을 빼고 드러도 3할 증가는 몰나도 원상 회복은 완전히 되였는듯 또 300의 지국도 다시 開門하게 된 것만은
정확한 듯하니 요지음 東亞日報 문전에서면 시골 지국장이 連絡不絶 來往함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면 廣告 地盤은 엇떠한고. 東京, 大阪 廣告主에
機分 의존하여 지내는 該社 광고 업적은 어떠한고. 한동안 광고주가 연합하여 「非國民的 신문」인즉 「不揭載」동맹을 하자 하야 일설에는 그가
성립되었느니 었저느니 하야 시청을 끄을었는데 그러나 이해에 좌우되는 상인에게 紙數 만히 내여 보내인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되랴. 그 증거로 요지음
차츰 東京 大阪 廣告가 실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다만 夏節을 겸병하여 광고진은 昔日과 가치 아직 되여 있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年來의
포부이든 社屋增築案도 지금에 있서 갑작히 증자도 新 拂入도 차입도 하기가 다소 어려운 사정이 있서 當今 보류하는
눈치였다.
編輯營業의 스탑 編輯局과 營業局의 진용은 었더한고. 新入古出로 녜전의 主筆 金俊淵씨는 하야하여 普成專門의 어느 농장에 독서하러 내려갓고 편집국장
薛義植씨 또한 물너갓고 論說客이든 李如星씨 또한 일련으로 引責退陣한 뒤를 이어 新 組織을 보면 아직
編輯局長도 결정되지 않은 暫定 陣營이라 즉 編輯局에는 編輯局長 社長 兼攝 編輯局次長事務 取扱經濟部長 高在旭
社員 金弘鎭
同 張鉉七
政治部 部長 金章煥
社員 卞榮魯
同 洪冀範
同 金昌洙
同 高永煥
社會部 社員 朴炳哲
同 任鳳淳
同 吳基永
同 梁在厦
同 鄭均*
同 鞠淳葉
同 李根榮
同 趙中玉
同 李康成
同 崔*
學藝部 部長
徐垣錫
社員 李無影
同 丁來東
同 朴承浩
地方部 社員 崔容煥
同 崔衡鍾
同 白南敎
整理部 部長 朴萬結
社員 安承誨 同 李鉀
同 盧鎔煥
同
金道慶
同 洪淳俊
同 黃信德
調査部 社員 金德山
營業部 營業局長林正燁
庶務部 部長 金鐵中
經理部 部長 金東燮
販賣部 部長 金哲圭
社員 金濟榮
同 高在燮
同 朴範緖
同 車乙燮
同 金觀鎬
同 金東植
同 金中植
發送部 主任 金喆鎬
京販主任 金敎熙 廣告部 部長 金勝文
社員 張錫台
同 趙鍾憲
同 南益
同 權*采
同 申永均
同 林鍾宇
同 李彰宰
同 金權同
同 金權同
工場長 黃泳模〈20〉
新社長의 人物 신임 사장
白寬洙씨란 어떠한 인물인고. 全北 高敞郡 星內面 德山里가 그의
고향이라. 大正 4년에 法專學校 전신이든 專修學校를 마치고 大正 6년에 東京 드러가 明治大學 法科에 입학하였다. 그때 3학년이 되든 때 이든가
在東京 朝鮮人 사회에서 이러난 某種의 정치운동을 하다가 入獄 1년 다시 나와서 9년에 同대학에 復校 그 翌年에 졸업하고는 同 12년에 朝鮮日報
영업국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尹致昊, 宋鎭禹 등 제씨와 함께 이 땅 使節의 1인으로 布?서 열닌
太平洋會議에 參列하였다. 다시 昭和 3년 여름 朝鮮日報를 辭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 부근에서 弘文社라는 인쇄소를 경영. 다시 월간 잡지
『東方評論』을 故 李灌鎔씨 등과 함께 발간하였다. 올에 춘추 48이라.
방금 대내적으로는 社의 재정 회복과 직원 조직의 인사 문제와 대외적으로는 對警務局 對社會 對時局의 幾多 複雜多難한 문제를 모도 다 처리하여 노치
않으면 안될 씨의 重務는 실로 자못 무거운 바 있다 할 것이다.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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