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各新聞·社會部記者의 苦心談, 날마다 새로나는 소식은 엇더케 모흐나 - 柳光烈, 柳志永, 朴八陽, 馬濠

이강기 2015. 9. 28. 09:03
잡지명 별건곤 제3호
호수 제3호
발행년월일 1927-01-01
기사제목 各新聞·社會部記者의 苦心談, 날마다 새로나는 소식은 엇더케 모흐나
필자 柳光烈, 柳志永, 朴八陽, 馬濠
기사형태 회고·수기

新聞社會部長으로 苦心하든 이약이 =因山때 이약이, 돈 업는 고생=
柳光烈

내가 社會部長으로 잇슬 때에 고심하든 일을 몃 가지 쓰라는 부탁을 바닷스나 날마다 원고지와 활자 사이로 다니며 씨름하기에 도모지 무엇하나 된 것을 슬 처지가 못 되것마는 독촉은 非常하고 拒絶하기도 박절하야 몃가지 쓴다.
대저 社會部長이란 新聞社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다른 新聞과 제일 정면에 나서서 白兵戰을 하는 社會部面의 총지휘를 하는 사람이 社會部長이며 따라서 實社會와 접촉도 퍽- 만타. 내가 처음 社會部長의 자리에 안기는 4년 전 東亞日報社에 잇슬 때 일이다. 그때 社會部에 가티 잇섯든 분은 지금 靑年文士로 世評잇는 春城
盧子泳氏와 現 東亞社會部長 薛義植氏, 現 每申社會部長 李瑞求氏와, 전까지 朝鮮日報 地方部長이든 朴八陽氏가 잇섯섯는 듯하다. 엇전 일인지 내가 東亞에 잇슬 때에 외근으로는 여러 가지의 감회 깁흔 사건을 맛낫섯스나 部長으로는 별로 이럿타 할 사건을 맛나지 못하엿슬 뿐 아니라 前 記者氏 中 朴八陽氏를 빼고는 모다 그때에도 외근에 老將이라 諸氏가 가저오는 재료를 料理하기에도 猶恐不及이엇슴으로〈24〉 그럭저럭하는 중에 한 1년을 지낫섯다.
그후 朝鮮日報에 가잇슬 때에도 역시 社會部長 자리에 얼마간 잇섯는데 그때에 社會部에 가티 잇든 諸氏는 현재 해외로 漂浪하는
金丹冶氏, 지금 中外에 잇는 鄭寅翼氏, 每申에 잇는 金達鎭氏, 中外에 잇는 朴八陽氏, 朝鮮에 잇는 李吉用氏, 中外에 잇는 徐範錫氏가 함끠 잇섯는 듯하다. 諸氏들은 다- 쟁쟁한 분들이라 諸氏의 末席에서 뒷수습이나 하고 잇섯스니 무슨 고심이 잇스랴. 구태어 차저낸다면 재작년 녀름 大洪水때 일일 것이다. 기자 대부분이 모다 외근으로 나가고 시시각각으로 증가하는 홍수는 한 시간 전에 만드러 노흔 원고가 모다 못 쓰게 되여 버린다. 전화통이 불이 나거라 하고 비발가티 오는 전화가 모다 水害이요. 그것을 시시각각으로 독자에게 보도는 하여야 할 재료가 시시각각으로 전화로 오는 것이 모다 다르다. 號外를 금시에 採字를 식이어 놋코 잇스면 또 딴 전화가 온다. 이럿케 밤을 새이기를 三四日한 것 가티 생각난다. 이런 때이면 먼저 온 報道보다 나종 온 것이 확실성 잇시 보히는 것 외에는 대개 別報로 前後相異한 두 報道를 넛키로 하엿다. 이때 뿐 아니라 엇던 때이든지 외근 기자와의 電話聯絡이 잘 안 될 때가 어려웟섯다. 더구나 외근이 市外에 나가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요. 數爻적은 전화를 가지고 各社에서 경쟁할 때에 엇더케 할가가 문제이엇다. 그후 지금은 업서진 時代日報에 잇술 때 因山日을 당하야 애쓰든 일이다. 그때는 畏友 趙岡熙氏가 部長이엿고 나는 編輯만 할 때 이엿는데 마참 時代社는 경비가 극도로 困難하든 때이다. (그후 얼마 안 되여 社가 경영난으로 破綻이 生함) 그때에 各社가 모다 기사도 기사이려닊?와 사진으로 거의 紙面示威運動을 할 때인데 時代社만은 동판 재료 하나 사지를 못하야 쩔쩔매이니 무슨 수로 사진을 내일 수 잇스랴. 이때 나는 하는 수 업시 이전 쓰든 因山關係銅板을 羅列하야 독자의 눈을 얼숭덜숭 속이고 기사로 보도나 먼저 하리라 하엿다.
因山 전날에 그날에 무슨 일이 잇슬는지 모른다 하야 싀골서 因山求景 올라온 支局長이나 支局 기자들을 『신문 기자로서 求景을 하면 더 낫게 할 수가 잇다』 고 꿀을 먹이어 30여 명을 因山行列 지나는 沿道에 배치하엿섯다. 그래서 取締하는 巡査 몃 명 하이에 한 명씩 배치를 하고 무슨 일이 잇거던 곳 本社로 전화를 걸라 하엿다. 내 생각에는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현재 경비를 퍽퍽 쓰면서 경쟁하는 他社를 익일수 업스니 무슨 사건이 잇스면 그 사건이나 먼저 號外로 발행하야 시민에게 알리리라 하엿다. 과연 授恩洞에서 學生萬歲事件이 나자 제일 먼저 전화가 와서 그것으로 號外를 발행코자 하엿스나 그 亦警察當局의 간섭으로 썩이고 말앗다. 그러나 洞口 안부터 東大門 밧까지 가는 동안에 8차나 나는 일을 그날 그時로 一毫錯誤업시 조사하야 본지를 他社보다 약 2시간 가량 일르게 하야, 此 사건을 시민에 알리는데는 先鞭을 내인 일이 잇섯다. 그때에 싀골서 오신 지국 기자 몃 분 중에는 허리가 부러질 우수은 희극을 演하엿섯다. 전화를 걸되
『여보세요. OO社입닛가. 저는 OOO이올시다. 지금 어대서 무슨 일이 잇는 것가티 群衆이 소란한데 무슨 일인지는〈25〉 모르겟습니다. 巡査에게 무러 보아도 모르다고 하고 群衆에게 무러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나기는 낫습니다.』
이런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잇섯다. 이런 전화를 하려면이야 신문 기자로 그곳에 섯슬 필요가 무엇이랴! 나는 밧분 중에도 苦笑를 不禁하고
『어서 다시 조사하십시요. 아시도록- 그런 전화는 아모 소용 업습니다.』
하엿섯다. 그때에 時代社會部에 가티 잇든 분은 현재 筆禍事件으로 入監 중인
柳完熙兄, 某事件으로 체포되엿다가 병사한 朴純秉兄, 현재 中外에 잇는 金東煥兄이엇섯다. 이 몃자를 草하면서도 벼루를 가티하든 친구가 生離死別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다 압흐다.
그 외에 몃가지 더 말할가. 이것은 對外로 고심하는 것은 아니나 對內로 외근에 대한 것이니 各社 社會部長으로 잇는 諸兄이 모다 당하섯슬 듯하다. 내남직 할 것 업시 신문기자 다니는 분은 多血質이나 神經質이 만타.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怒하기 쉬운데다가 더구나 외근에서 늘- 神經을 몹시 刺戟하는 일을 보고 도라와서 날카로웁게 된데다 무슨 不合한 말을 하면 怒하기 쉬웁다.
자기가 일껏 애서서 어더가저온 재료가 案外로 社會部長 눈에 『뉴-스밸류』 가 적게 보히어 기재치 아니할 때에는 흔히 怒하기 쉬우니 이런 때는 部長이 잘 설명하야 諒解를 구하게 된다. 또 무슨 재료를 딴 신문보다 진 것이 잇슬 때에도 여러 사람 압헤 그 실수를 적발하면 怒하기 쉬우니 아모조록 조용히 가장 遺憾의 뜻을 添하야 말하면 그 責을 달게 밧는다. 또 기사 재료가 외근 가는데서도 어더 오고 또 통신으로 올 때도 잇는데 만일 외근에서 못 알아온 때라도 그런 통신을 내주며
『이 사건을 아르섯습닛가?』
하야 먼저 모르고 왓다는 것을 前提로 말하지 말고
『이 통신을 참고하야 쓰십시요.』
하야 알고 오기는 하엿스나 혹 참고할 것이 잇거던 참고 하라고 하면 가튼 말이라도 퍽-깃부게 듯는다.
또 외근 기자가 무슨 사건을 조사하러 나갓슬 때에는 여러 가지로 念慮되는 일이 만타. 그곳이 위험한 곳이면 무슨 부상이나 하지 아니하엿나? 또 携帶한 『포켓, 모늬』 가 적어서 고생이나 하지 아니하나? 늘- 失禮될는지 모르나 어린애를 해변에 내 보낸 것 가티 마음이 씨인다. 朝鮮日報에 잇슬 때에 水害地 龍山으로
徐範錫兄을 보내고 아츰부터 나가잇는데 날은 저물고 교통은 끈허지고 시시각각으로 물은 더 나고 녀름날이엇만 으스스하게 춥기까지 하는 때인데 徐兄의 주머니에 『포켓, 모늬』 가 얼마나 되는지 의심이다. 그때 마참 徐兄의 전화가 왓기로 먼저 기사 재료부터 밧고 끄트로
『무엇이나 좀 자섯소.』
하고 무르니
『네-지금 주머니에 돈 10錢이 잇서서 종일 굼다가 비지를 사다 먹엇습니다.』〈26〉
하는 대답에 가슴이 뜨끔하엿다. 나갈 때에 돈을 좀 가지고 나가도록 하엿드면 하고...... 後悔하엿다. 또 時代에 잇슬 때는 다른 社는 경비를 不顧하고 돈을 쓰는데 時代만은 외근 기자에게 車馬費 하나 똑똑이 못 치를 때이라 때때로 나의 『포켓, 모늬』 를 터러서 외근에서 쓰게 한 일도 잇섯다.

記者사리 다섯 苦痛
柳志永

신문긔자=사회부 긔자의 고심담을 쓰라고 한다. 필경 나더러 청하는 것을 보니 사회면 긔자 중에도 외근 긔자의 고심담이 소용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춘파 소파 청오 세형이 번가러가며 부탁을 하는데 참아 거절할 수가 업서 승락은 해노앗스나 흐지부지 시일은 촉박해지고 내 본직을 위해서 할 일이 압흐로 태산가터 실로 다만 몃 줄이나마 쓰기가 매우 힘드는 터이요 더군다나 춘파형의 요구는 신문긔자질을 오래동안 해먹엇스니 남의 무슨 괴상한 사건들도 만히 탐뎡해보앗슬 것이니 탐뎡하든 중 가장 복잡다단하고 자미 진진한 것, 그럴 듯한 수단으로 그럴 듯이 알어내인 경험담을 하나 쓰라는 요구를 바덧스나 갑작히 허다한 중에 엇던 것을 잡어 끌어내 써야 할지 갈팡질팡으로 어느 사실 한 가지를 잡어 내지도 못하얏스며 또는 참말 사회면 긔사식으로 오밀조밀하게 쓰자니 굉장히 길어질 모양임으로 또 다시 긔회잇스면 묵은 수첩을 뒤저가지고 순서를 밟어서 한 번 잘 써 볼 료량잡고 이에는 위선 이만큼 써보자 한다.
우리 신문 긔자의 업이란 방금 조선에 잇서서는 만흔 청년들에게 적지 안는 선망을 밧는 업이다. 백 사람의 청년이 모힌 곳에 가면 입끗헤까지 내어 가지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약 오할=오십 명 가량은 되고 입으로는 말이 업스나 속으로 은근히 불어워하는 사람이 약 삼할=삼십 명 가량이나 되고 직업이 업서서 그것이라도 좀 해보앗스면 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약 일할=열 명은 된다. 그리고 보니 백 명에서 마흔 명은 우리의 업을 부러워하는 모양이나 그 중에서 직업이 업서서 부러워하는 사람은 빼여놋코 입끗헤 내부치고나 입 안에 늣코서나 우리 업을 부러워하는 사람만이 약 칠할=칠십 명〈27〉이나 되는 것은 사실이요. 조곰도 과장이 업는 것이겟스며 우리 업은 남보기에 끔직이 조와 보이는 것이 틀님 업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슨 업엔들 고통이 업스랴마는 우리 업에는 다른 업을 가진 사람들이 늣기는 고통도 모다 조곰식 맛보면서도 덧거리로 남이 늣겨 보지 못하는 이와 가튼 고통이 잇다.

一. 시간상 고통
가, 남보기에는 아침 느지막히 열뎜쭘 출근하야 오후 두세 시 가량이면 퇴사를 할 수가 잇스니까 그만큼 편하거니 하나 실상은 신문사에 잇스나 집에 잇스나 어느 노리터에 가잇스나 길을 것고 잇는 중이나 남과 자미잇는 작란을 하고 잇는 중이나 한시도 마음을 놋치 못하고 어느 시간에 어듸로 뛰어가라는 명령이 나릴는지도 몰으겟스며 또는 스사로 무슨 펄펄 날뜀직한 일이 업는가 하는 것을 한시도 방심치 못하고 찻고 잇는 것.
나, 아침에 밧게 나아가 그 전날 오후와 그날 오전을 중심으로 잡고 요사이 세상에 무슨 일이나 잇지 아니한가 하야 아못조록 다른 신문사 동모들보다 한 가지라도 더 알고 한 가지라도 더 듯고 신문사에 들어오면 기사의 장단을 불게 하고 당한 원고 마감 시간 안으로 손목에서 비파 소리가 날찌라도 써노야하는 일.
그리하야 시간상으로는 늘 분초를 다토아가며 잇기 때문에 남이 온전한 한 시간을 지내면 우리들은 그 한 시간을 반 시간 턱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내는 까닭에 다른 사람 이백 년을 살고 다 죽으면 신문 긔자들에 한하야는 이백 년이나 살고 죽어야 남의 백 년 살고 죽은 이만큼 되는 일.
다, 무슨 돌발 사건이 잇는 때는 불끄러 단이는 소방대 모양으로 깁흔 밤이나 요사이가치 서리 바람 찬 새벽이나 단잠을 자지 못하고 시간 업시 끌녀 나오는 일.

二. 정신뎍 고통
가, 남이 조와하나 미워하나 그저 텰면피로 아희들에게나 어른에게나 걸인에게나 량반부자에게나 조고만 게집애에게나 커다란 어른에게나 고위고관에게나 순사고원에게나 죄업시 머리를 숙여야 되는 일.
나, 남의 자랑이나 험담이나 참아 쓰기 실흔 것이라도 알고서는 아니 쓸 수 업스며 참아 하기 실흔 일이며 참아 할 수 업는 일에도 식히는대로 아니 할 수 업는 일.
다, 독자들의 뜻에 합하도록이나 자긔 뜻대로 이 말귀는 이러케 써야만 하겟스며 이 글자는 이 자를 써야만 꼭 되겟것마는 발매금지 발행뎡지 심지어 발행금지 등이 잇슬까바서 마음대로 못쓰고 오직 안탁갑게 지내며 글자 한 자도 주의해 써야만 되는 일.

三. 육신상 고통
가, 깟닥 잘못하면 감옥에 가게 되는 일.
나, 참아 가기 실흔 위험한 곳이며 험상스러운 곳이라도 아니 갈 수 업는 일.〈28〉
다, 무슨 일이 잇는 때는 일에 따라 목숨을 내어놋코 싸와야만 되는 일.

四. 금전상 고통
남들 보기에는 저만치 반주구레하게 차리고 다니니 금전상 수입이 상당할 것갓치 뵈이나 실상은 끔직이 박봉이요. 부자ㅅ집 가난뱅이집 어듸 아니가는 데 업시 어느 때에 어듸를 가게 될른지 몰으며 늘 남과 대하는 몸이라 차림차림이도 불가불 깨긋이하여야 하며 어는 경우에 잇서서는 돈 만흔 사람들이 하는 일도 아니할 수 업는 경우가 잇는 까닭에 월급은 전부 그리 쓰러놋코말고 정작 자긔집안 사람에는 가난뱅이짓을 하게 된다. 이에는 조흔 「에삐쏘트」 가 하나 잇스니 미국서 엇더한 신문긔자 아들이 길밧게서 동리아이들과 놀고 잇다가 그 압흐로 조흔 자동차 한 채가 지내가는 것을 보고 이애들아! 저것 봬라. 우리 아버지도 자동차를 다 타고 간다! 하고 자랑을 흠신 한 일이 잇다고 한다. 이약이가 우리의 금전상 고통에 대한 것을 간단히 잘 말한 줄 샐각한다.
이번에는 아직 이만 쓰고 끈코자 한다. 그러나 끗흐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큰 고통으로 역이는 것은 엇지하야 그리하는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신문긔자들을 대할 때는 외면과 내심이 달으게 대하는 것이다. 얼골로는 좃케 대하나 마음으로는 될 수 잇스면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우리 일에 착오가 생기고 우리 일에 방해가 만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신문긔자로 잇든 사람은 그 직업을 내어 노흐면 다른 뎍합한 업이 업는 것이다.

三大事件에 苦心하든 이약이
朴八陽

新聞記者-더욱이 社會部記者란 언제든지 긴장한 공기 속에서 사는 사람임니다. 그들은 늘 자기자신이 전쟁 마당에 나선 兵卒이나 將校와 갓흔 몹시 긴장한 의식을 가지고서 그날그날 일어나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을 料理하여 나가는 것임니다. 따라서 『放心大敵』이라는 日本 격언은 군대에 적용되는 동시에 新聞戰線第一線에 나선 前衛隊 社會部記者에게 가장 적절히 적용될 말인 줄 암니다. 사실 선지자나 예언자가 안인 이상에 어느 날 어느 時에〈29〉 어떠한 天下를 놀래일 大事件이 이러날지 누가 엇떠케 암닛가. 그럼으로 사회부 기자야 社會的感覺이란 놈은 寢食중에라도 일시를 그의 신경에서 떠나지 안는 것이라고 말슴하여야 되겟지오. 만일 일시라도 방심하엿다가 자기가 맛흔 책임권 내에서 의외의 대사건이 이러나서 평소에 用意가 업섯든 탓으로 보기조케 실패를 하엿다면 그야말로 신문기자 일대의 恥辱이라 할 것임니다. 만일 그런때 日本武士道의 정신으로 본다면 맛당히 割腹自決로써 그 실패에 辯答할 밧게 다른 아모 도리도 업겟지요 엇떠튼 신문기자란 지독한 책임 관념 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보도기자의 고통이란 것도 대개 그러한 곳으로부터 이러나는 것이요 또 보도기자의 명예와 자랑이란 것도 또한 그러한 곳에 잇는 것이라 할 것임니다. 성의잇게 기민하게 그리고 기자로서의 인격을 손상하지 안이하고 자기 책임을 다 하는 사람=그런 사람이라야 훌륭한 기자라 하겟지요.

신문기자에 대한 서두가 너무 길어젓슴니다. 本誌 編輯者로부터 바든 부탁은 그러한 쓸데업는 말보다도 『新聞記者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대가 어떠한 사건을 취급할 때에 제일 스라린 고통을 늣겻나?』 하는 문제엿슴니다.
그런데 필자로 말하면 원래 신문기자 생활 시작한지도 그리 오래지 안이하지만 또 근래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회부 외근보다는 내근 편집을 만히 하게 된 관계상 자연 對外部 社會的活動이란 것이 적엇섯슴니다. 그럼으로 그 방면이나 또 다른 방면이나 老將과 先輩가 만흔 오늘날 우리 신문사회에서 별 경험을 싸허 보지 못한 내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보아 들린 수작일는지 몰음니다. 그러나 외근 기자로 활동하여 본 동안에 당한 몃 가지 감상이란 것이 아조 업지는 안엇스닛까 그대로 써 보겟슴니다. 제일 첫재 외근 기자의 늣기는 고통은 불행하게 된 사람을 방문하는 때임니다. 가령 아들이 慘死를 하엿는데 그 어머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잇서 그를 방문할 때라든지 혹은 남편의 불행에 울고 잇는 부인을 방문하고 비애에 잠겨 잇는 이를 붓잡고서라도 념치 업시 말을 물어 보아야 하게 된 때라든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을 방문할 때임니다. 그런때 신문기자란는 직업이 눈물 잇고 피 잇는 멀정한 사람을 鐵面皮를 만들어 줌니다. 그저 눈 꽉 감고 물을 말 못 물을 말 죄 뭇고야 맘니다.
내가 경험한 일 중에는
-(以下 60행 삭제-원문)-〈30〉
그러고 또 한 가지 외근 기자에게 고통되는 것은 『時間 대이는 고통임니다. 어떠한 새로운 사실을 보도하는데 이것이 오늘 신문에 들어가지 안이하면 來日 신문으로 들어가게 된다=즉 滿 하로를 늦게 보도가 된다. 그것은 시각을 다투는 신문기자에게 잇서서 실로 중대한 문제임니다.
年前 洛東江大洪水 때 龜浦에서 本社=지금은 中外日報에 잇슴니다만은 그때는 朝鮮日報에 잇섯슴니다.=이 電報를 노을 때 시간 대이는 고통을 늣겻슴니다. 그때 龜浦驛 건너편의 大渚島의 촌락의 큰 제방이 문허저서 거의 물 속에 잠긴 형편에 잇서 그 섬과의 교통은 끈허지고 시체 200개가 떠나려왓다는 풍문까지 잇든 때라 나는 그 眞否를 알려고 배를 타고 거세인 洛東江의 탁류를 헤치며 向島에 건너가서 大渚島를 바라보앗슴니다. 물론 거리가 너머 멀어서 肉眼으로는 잘 보이지 안엇슴니다. 그리자 조곰 잇댜가 大渚島로부터의 최초의 배가 와서 大渚島이 避難民은 한 사람도 죽지 안엇다는 확실한 보고를 하엿슴니다. 大渚島 3000 주민 全滅이라고 몹시 근심하고 잇든 向島 사람들은 모다 깃버하엿슴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날 夕刊에 보도하려고 急急히 고가의 賃金을 주어 배 한 척을 사서 『어서어서!』 재촉하며 일변 시계가 오후 한 시 반이나 된 것을 노려보면서 洛東江을 건너 龜浦에 와서 郵便局까지 驅步를 하야 郵便局에서 『生死不明이든 大渚島의 三千住民 全部生存한 것으로 判明』 이라는 電報를 노앗슴니다. 그날 오후 세 시 본사 사회면 締切(시메끼리) 前에 이 전보가 드러가서 그날 신문에 큰 활자로 그 사실이 大書特書된 것을 수일 후 釜山 어늬 旅館에 편히 드러누어서 볼 때에 당시에 넙적 다리까지 빠지는 물구덩이 속으로 단이며 또 시간 대이느라고 고생하든 것을 회상하고 엇떠한 愉快를 늣긴 것은 물론 임니다.
쓸데업는 이약이가 길어젓슴니다만은 이러한 고생 외에 신문기자에게는 좀 다른 의미의 고통이 이슴니다. 신문기자라면 刑事 이상으로 실혀하는 사람과 대하는 고통이라든지 소위 高官이란 이들을 맛나면 그들의 거드름 빼는 모양을 보는 고통이라든지 그 외에도 무엇을 알려는데 알 수 업는 때라든지 자기책임권 내에서 큰 실패를 한 때라든지 말슴하랴면 한이 업슴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만흔 대신에 愉快한 때도 잇는 것만은 또한 사실임니다.
그러나 나도 신문 기자라면 차차 엇전지 실症이 날 때가 만히 잇슴니다.〈31〉

橫領事件 차저 헤매든 이약이
馬濠

社會部記者로서의 나의 고심담-이러한 原稿 부탁을 밧고 錯亂한 편집실 한 모통이에 안저서 생각하여 보앗스나 나에게는 신문 기자 생활이 짧은 것만치 材料蒐集에 그리 고심을 要할 만한 기회가 별로히 업섯다. 그러나 아마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처노코 어느 날 고심하지 안는 날은 업슬 것이다. 남보기에는 洋服땍이나 걸치고 기차 전차를 專用物가치 오르락나리락 料亭劇場을 매일가치 드나들고 『無冠의 帝王이라는 別名알에 아모리 大家名士요 高位高官이라도 명함 한 장으로 당당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비판을 뜻고 이것을 보도하게 되니 실로 男子다웁고 愉快한 직업이요. 호강스러운 직업가치 보이나 직접 당면자인 우리들은 가장 설흔 직업인 것을 항상 서로 늣긴다. 보통 직업은 공휴일이나 잇고 출근 퇴근 시간이나 일정하지만 이 직업은 오전 零時부터 오후 零時까지 一時 24時間 一年 365日이 전혀 직무 시간이다. 그나 그뿐이리요. 각 신문의 재료 경쟁이 잇다. 이것이 아마 朝鮮의 社會記者들의 절대의 활동인 동시에 이로 인하야 문제의 고심이라는 것이 생기는 듯 십다. 서로 재료를 빼앗기지 안흐댜고 또 자기 신문에 먼저 빨리 보도하랴는 즉 「도꾸다네」(特種)를 엇고저 하는데 만흔 고심이 생긴다. 이와 가치 고심 활동한 결과가 심판되는 때는 매일 각 신문이 발행되는 오후 5시 頃인데 종일 마음을 조려 가면서 필경 각 신문을 대조한 후 빼앗긴 재료가 업고 다른 신문에 게재되지 안흔 것이 자기 신문에만 기재되엿슬 때는 마음이 비로소 노히나 만일에 사건의 경중을 물론하고 빼앗긴 기사가 잇고 보면 그때야말로 마음이 붓그럽기가 짝이 업고 편집자에 대하야 社의 幹部에 대하야 얼골이 업서=그때 독자에게 대하야 미 안한 것은 나종으로 돌려진다=마음이 不愉快한데다가 혹시 『OO署出入記者가 누구요?』 또는 『OO記事가 우리 신문에는 게재되지 안헛더라면!』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퍽 미안함니다. 할 말이 업슴니다.』 이쯤 대답은 하엿스나 전신에 풀ㅅ긔는 하나도 업서지고 前日에 몃 가지 특종을 썻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다 살어지고 마는 형편이다.

이제 내가 평소 外勤處에서 市中雜事件의 재료 수집에 고심이라할는지? 한두 가지 기억나는 것을 그려볼가 한다=지난〈32〉 첫 녀름 어느 날이라 담당 外勤處이엿든 OO署에 갓더니 七八名의 동업자들은 선우슴을 처가면서 이방저방으로 도라다닌다. 「무엇이 잇섯나?」 「아무것도?」 하면서 한명식 두명식 도라가기를 시작한다.「아무것도!」 하는 말을 의례히 하는 말이니 그저 아츰 인사격으로 뜻고 나는 나대로 이방저방을 둘러본 후 刑事室인 地下室로 나려갓더니 刑事 한 명이 「이 자식 은행에서 빌어 먹으면 곱게 빌어먹지!」 하면서 양복입은 죄인 한명을 取調室에서 취조를 마치고 留置場으로 끄을고 드러가는 것을 보앗다. 나는 그 당시 무엇보다도 먼저 형사가 가진 留置命令狀에 쓰인 죄인의 성명을 기억한 후 同형사가 도라나오는 것을 기다려 무러보앗스나 죽여라는 듯이 가르처 주지 안는다. 司法主任을 위시하야 알만한 署員들에게 일일히 물어도 보고 넘겨 집허도 보앗스나 역시 緘口不言=그때부터는 『조마쭝』 이 생기기 시작하엿다. 그러는 동안에 「시메끼리」시간은 점점 臨迫하고 한편으로는 사건의 대소는 물론하고 被疑者가 은행원인 만큼 그리 적게 취급할 사건은 아닌데 이것을 독자에 보도할 것은 뒤ㅅ문제이고 다른 신문에만 일제히 기재될 것과 편집자와 밋 간부들에게 대하야 면목이 업슬 것을 생각하고는 도저히 그대로 社에 드러갈 수는 업섯다. 그나마 사건을 전연히 몰랏드면 어느 정도꺼지 안심이나 되겟지만 은행원이라는 것을 알고 또 성명까지 알은 이상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업섯다. 그러타고 수십개소나 되는 京城의 은행을 단시간에 일일히 조사할 수는 업고 또 과연 京城의 은행원인지도 알 수 업섊?다. 그러다가 엇젯든! 하는 생각으로 第一着手로 橫領사건이 頻發하는 OO은행에 전화로서 그 사람을 차젓다. 그러나 실패를 당하고 第二次로 某은행에 전화를 걸엇더니 그 사람은 朝鮮銀行으로 차즈라는 대답에 반갑기가 한량이 업섯다. 니어서 出納係員이라는 것까지 알고는 즉시 朝鮮銀行에 전화로서 그 사람을 차젓든 바 과연 欠勤이라하엿다. 그제는 살엇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하는 동시에 出納係員이니 行金橫領에 틀님이 업다는 것을 認定하고 同은행 지배인을 방문하엿더니 응 이 몃 마듸로 사실을 묵살코저 전연 否認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否認을 認할 수는 업섯슴으로 그대로 도라나와서 門衛에게 그의 주소를 탐지하고 그의 가정상태를 조사하는 한편으로 同은행의 給仕를 매수하야 겨우 橫領金額만을 탐색하여 가지고는 社에를 들어 갓더니 이제는 편집자가 늣게 드러왓다는 짜증에 그 재료가 『特種』 이나 되는 것 갓흐면 한 번 긔운이나 폐보겟지만 다른 신문사에서는 이 이상 상세한 조사가 잇지나 안이한가하야 두 말 못하고 그저 기사를 쓴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날 각 신문의 석간을 기다렷다. 그리하야 시내에서 발행되는 7개 신문을 일일히 對照하엿더니 오즉 우리 신문에만 「朝鮮銀行本店에 不正事件暴露 犯人은 本町署에서 取調中」 이라는 3단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엿슬 때에 비로소 마음이 노혓다.

그러나 그 사건은 범인이 이미 체포되고 성명과 직업을 알엇스니〈33〉 능란한 기자이엇드면 그리 고심하지 안트라도 사건의 진상을 탁색할 수 잇는 일뿐더러 그만한 사건은 외근 기자로서는 때때로 접촉되는 일이다. 그 외에 사건이 임이 세상에 드러나고 일반 독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저 매일 신문을 기대되는 각 신문 기자가 동일한 방면에 全力을 다하는 特殊事件이 잇다. 가령 금년만 하드라도 OOO事件, OO門事件, OO黨事件, 拳銃事件 등이 잇서서 사건의 발단은 이미 세상에서 알게 되고 그 續報의 재료를 탐색하야 敏速하게 보도할랴는 고심과 활동은 적어도 기자 생활에 경험이 업는 사람은 상상할랴도 상상할 수 업는 고심과 활동이 잇다. 昌德宮事件만 하드라도 정식으로 발표하는 것으로만은 도저히 독자의 기대를 만족하게 할 수가 업다. 그러기 때문에 궁중의 모든 凡節를 參酌하야 推測에 創作을 加하고 출입하는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종합하여 가지고 비로소 확실한 재료를 만들기도 하고 또 밤중에 궁중에서 새여나오는 말과 정경을 탐지코저 이 禁止區域에 潛入하야 귀를 기우리고 밤을 새우는 일까지 업지 안타. 또 그 외에 拳銃事件이라든지 OO黨사건 가튼 것은 자기가 범인이 안이고 共犯者가 안인 이상에는 도저히 정확한 사실를 보도하기가 어려운 것만치 그 정확한 사실 내용을 탐색하기에 여간 고심이 들지 안는다.(이러한 사건에는 朝鮮人기자는 立場이 困難한 것을 늣길 때가 恒例이다. 범인을 체포하야 취조하기 전까지는 警察當局者들도 사건의 내용을 아지 못할 것인데 그러하다고 신문으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업다. 이러한 경우를 당한 우리들은 털끗만한 정보라도 엇기에 노력하야 범인의 계통을 탐지한 후 범행 당시의 모든 점과 활동하는 경찰의 踪跡을 尾行하야 비로소 사건의 진상의 大槪을 揭載할 때가 잇다. 또는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신문 지상의 揭載를 금지할 경우도 잇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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