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朝鮮新聞雜誌 沿革及發行史

이강기 2015. 9. 28. 09:06
잡지명 별건곤 제30호
호수 제30호
발행년월일 1930-07-01
기사제목 朝鮮新聞雜誌 沿革及發行史
필자 壽春學人
기사형태 논설

一. 新聞
甲. 世界新聞의 由來
朝鮮 新聞의 由來를 말하자면 먼저 世界 新聞의 由來를 잠간 말하는 것이 便利할 것 갓다. 西洋에 잇서서 最初의 新聞紙는 彼 羅馬의 有名한 英傑 『씨사』의 創設한 『아구다, 세나다스』 『아구다, 데율나, 포푸리, 로마니』니-(西記前 60年頃)-兩者는 共히 官報로서 元老院의 會議 及 其決定에 關한 簡單한 記錄과 國民議會의 記事 及 其他 重要한 公共的 記事를 報道하는 것이엿다. 然而 此 官報의 內容 發表는 石膏를 塗한 板上에 文字를 써서 一般市民에게 公示하얏스니 卽 今日의 揭示板과 비슷하얏고 且 地方住民을 爲하야는 多數의 書記로 此를 筆寫케 하야 要求者에게 發送하얏다.
西洋의 新聞史家들은 이 羅馬의 官報로써 世界 新聞의 元祖라 稱하나 東洋 諸國中 特히 中國에서는 『春秋』라 稱하는 原始的 官報가 上記한 羅馬의 二種 官報보다 約 5, 6百年을 압서서 發行되엿슨 즉 官報로는 이것이 世界 最初의 것이라 하겟다. 그 뒤 唐 玄宗 때에(羅馬 官報 時代보다 約 6百年 後) 이르러서 또 著名한 邸報가 잇섯스니 이 邸報는 當時 唐의 國都 長安에 잇는 16節度使의 私邸에서 發行하야 各其 所管地方에 通報하는 것으로서 그 內容은 皇室의 動靜, 詔勅, 章奏, 官吏의 敍任, 辭令, 朝謁, 賞恤, 廟堂會議 及 其他 私事通信 等이엿섯는데 明代의 『宮門抄』 淸代의 京報와 同質異名의 것이다. 그러나 所謂 近代의 新聞紙의 形式을 具한 新聞은 光緖 26年(西紀1900年)에 이러난 所謂 義和團事件 直後에 發行한 白話愛國報니 此는 中國 新聞의 元祖요. 其次는 光緖 30年(書記1904)에 創刊된 京話日報, 又 其次는 同35年(西紀1909)에 創刊된 北京日報니〈25〉 그 中 北京日報는 ?裁와 內容이 그 中 新聞다웟섯다.
歐羅巴는 彼 歷史上 有名한 羅馬가 滅亡하고 게루만의 蠻族이 全歐洲를 支配하게 된 뒤로 羅馬의 녯 文化가 餘地업시 破壞되고 蠻族의 新文化 建設은 아즉것 前途가 遙遠하야 所謂 暗黑時代에 잇섯슨즉 그때 文明의 程度라던지 社會의 組織狀態는 到底히 新聞의 發行과 가튼 것은 꿈도 뀌지 못할 경우엇섯다. 그리하야 第12世紀 乃至 13世紀 頃에 이르려 겨우 寺院 大學 其他 高僧의 使者間에 限하야 報告 及 信書 送達이 開始된 痕跡이 잇섯고 第14世紀-第15世紀에 이르러서는 商業 及 都市官職에 關한 信書 交通을 爲하야 郵便과 類似한 都市通信機關이 생기엿다. 新聞紙라는 말이 생기기도 이때엿다. 卽 大商業都市 及 交通中心點이 되는 地方에서는 各地로서 輻輳하는 報告를 蒐集 編成하야 書信 또는 그 附錄으로 此를 各方面에 送達하얏스니 此가 卽 所謂 『쓰아이쓰구』 또는 『노이여쓰아이쓰구』라 하는 것이엿다. 此 書信新聞紙의 內容은 政治邊報道를 主로 하고 記事材料는 親知人의 口頭 또는 편지의 報道外에 行商人, 出征軍人, 漫遊外國人, 留學生, 其他 官廷에서 派遣한 使者, 貴族의 書記官 等에서 採取하엿다.
然而 新聞紙가 近代式과 가티 營利的으로 經營하게 되기는 西紀 1566年에 伊太利의 『베니스』에서 創刊된 『노데잇비에, 스쿠럿테』가 嚆矢이니 新聞紙 名稱의 한아로 一般이 使用하는 所謂 『까제트』라 하는 것은 當時 右 新聞 一部의 代價로 使用하던 小貨幣 『까제트』에서 생긴 말이다. 當時 『베니스』는 東西 兩洋 交通의 媒介者로 또는 近來 外交術 及 政治的 通報 事務를 組織한 政府의 所在地로 尙又 世界 各國에서 來하는 重要 新聞의 集積地인즉 이 營利的 新聞 發生은 必然 또 當然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日刊新聞이 언제부터 始作되엿느냐 하는데 關하야는 諸說이 區區하나 只今에 一般이 認定하는 것은 獨逸이 其 發祥地라 稱하나니 卽 1660年에 創刊한 『라이푸치가, 쓰아이슨구』가 그것이오. 其次는 1702年에 英國에서 創刊된 『데-리그란드』 1777年에 佛國에서 發行한 『죠-나-루, 도, 파리』오. 其外 米國은 1784년에 『펜실바니아, 빠겟드, 앤드, 데리, 아도비아-다이싸』를 發行하고 日本은 明治 3年 12月(哲宗 7年 庚午)에 橫濱每日新聞이 最初 日刊新聞으로 發行되엿다.

乙. 朝鮮新聞의 由來
上述함과 가티 官報를 新聞의 元祖라 하면 우리 朝鮮에 잇서서는 官報의 一種인 所謂 『기별지』가 新聞의 元祖라 하겟고 또 民間에 잇서서는 野談, 野史 가튼 것이 또한 新聞의 一種으로 볼 수 잇다. 然而 그 始初된 年代에 이르러서는 아측 詳細한 記錄이 업스나 新羅史에 依하면 神文王 12年 壬辰(西紀682-距今 1248年前)에 薛聰이 吏讀(두)文을 지다 官府文札에 用하얏다 하얏슨즉 그때부터 긔별紙가 始行된 것을 足히 짐작하겟다. 그러나 所謂 近代式의 新聞은〈24〉 李太皇 20年 癸未(距今 47年前)에 日本人 井上角五郞의 主幹 下에 創刊된 漢城旬報니 그때 朝鮮政府에서는 壬午軍亂 卽後에 統理交涉 通商衙門을 新設하고
閔泳翊의 推薦으로 井上氏를 囑託으로 雇聘하얏섯는데 癸未年에 機器局, 典?局, 博文局을 設置하는 同時에 博文局 事業으로 이 旬報를 啓行하게 된 것이엿다.(博文局은 只今 慶雲洞 女高附屬師範學校 寄宿舍址) 그 樣式은 純朝鮮紙에 舊式 鑄字를 그대로 써서 一見하면 古代 文集과 비슷한 感이 잇고 記事의 內容은 宮廷錄事, 內外官吏의 異動, 外交條約等에 不過하고 讀者도 또한 官公吏에 限하얏스니 그 主宰者가 官邊人物이니만치 그 新聞이란 것도 一種 官報의 形式에 지나지 못한 것은 勿論이엿다.

丙. 米國系 新聞=獨立新聞
그 翊年 甲申 10月에
金玉均 一派의 革新運動이 失敗되며 日本의 勢力이 減少하고 淸國의 勢力이 다시 擡頭하니 所謂 文明機關의 新施設은 一掃無餘하게 되야 戊午年(李太玉 25年)에 이르러서는 博文局까지 革罷하게 되니 그때로부터 甲午 日淸戰爭 時代에 이르기까지는 朝鮮에는 新聞의 影字좃차 볼 수 업게 되엿다. 그러다가 乙未年에 日淸馬關條約이 成立되며 朝鮮의 獨立을 世界에 公布하게 되고 그 翌翌年 丁酉 卽 光武 元年에 往者 甲申政變 때 米國으로 亡命하엿던 徐載弼이 歸國하니 當時 李太王은 露國의 勢力을 恃賴하얏스나 露國의 野心이 暴露됨을 따러 다시 以夷制夷의 策으로 當時 世界 富强國이라 宣傳되는 米國과 다시 接近코자 하야 米國에 入籍한 徐氏의 所謂 甲申年 逆賊의 罪名을 蕩斥하고 새로 政府의 顧問으로 聘用하니 그는 李太王의 信任이 多大한 中 一般 新進派의 中樞 人物이 되엿섯다. 때마침 朝鮮의 一般制度를 革新하는 즘이라 그는 多年間 米國에서 訓習한 獨立主義, 平民主義를 高唱하야 大朝鮮은 大韓, 大君主는 大皇帝, 建陽의 年號를 光武로 慕華館은 獨立館, 迎恩門은 獨立門, 南別宮은 ?丘壇으로 變稱하고 官吏의 智識交換所를 擴張하야 獨立協會를 創設하는 同時에 또 機關紙를 發行하얏스니, 此가 卽 有名한 獨立新聞이다. 이 新聞의 內容과 體裁는 勿論 前日 漢城旬報와는 아주 天壤의 差가 잇슬뿐더러 人民의 獨立, 自由의 思想을 鼓吹하야 一個 政治的 敎科書가 되엿다.
이 新聞과 同時에 京城新聞과 每日新聞(只今 每日申報는 勿論 안이다)이 創刊되엿스니 前者는 米國通인
尹致昊氏의 從弟 尹致昭 兄弟의 經營으로 百圓未滿의 小規模로 하엿섯는데 紙面의 大가 손바닥만밧게 안하엿고 每日新聞은 米國人 經營의 學校인 培材學堂의 梁弘?氏 外 某氏의 經營한 것이엿다. 그때 이 몃 各 新聞의 特色은 全部가 純朝鮮文인 것과 系統이 米國 系統인 것과 政治 以外에 基督敎의 냄새가 만흔 것과 階級打破, 奴隷解放, 自由 平等을 主唱한 것이엿다.
그 뒤에 戊戌年 初夏에
獨立協會가 所謂 皇國協會의 反動으로 因하야 敗北되고〈25〉 徐載弼이 다시 米國으로 亡命하며 獨立協會의 會員이 一網打盡으로 驅逐을 當하니 獨立新聞도 따러서 廢刊의 悲運을 當하게 되엿다. 그러나 當時 會員 中 南宮億, 羅壽淵 外 某某氏는 人民을 指導하고 與論을 이르키는데는 무엇보다 新聞이 가장 必要하다 생각하고 南宮, 羅 兩氏는 尹氏의 經營하던 京城新聞을 讓受하야 名稱을 皇城新聞으로 變更하고 位置를 左巡營(現 黃土峴 紀念碑閣 자리)에 置하되 股金制로 經營하고 李鍾一氏는 梁氏의 每日新聞을 引受하야 帝國新聞이라 改稱하며 位置를 漢陽洞(今 敦義洞)에 置하고(朝鮮 最初의 純諺文 新聞) 例의 雄文巨筆로 慷慨, 辛辣한 言論을 하야 當時 政府를 鞭?罵倒하는 同時에 日本人의 經營하는 菊池謙讓의 漢城新報, 萩谷籌夫의 大韓日報, 蟻生十郞의 大東新報와 對峙하야 京城 論壇을 繁盛케 하얏스니 當時 皇城의 張志淵, 柳瑾과 帝國의 鄭雲復 諸氏는 다 斯界의 百戰老將으로 名聲이 錚錚한 中 乙巳新條約 當時에 皇城의 『是日也放聲大哭』과 擲筆大呼의 兩論文은 當時 一般民衆의 熱血을 躍動케 하는 同時 누구나 膾煮하얏고 또 筆禍로 因하야 그 筆者가 또한 ??의 辱까지 當하얏섯다. 그리고 그때 帝國新聞에서 萬壽聖節 記事를 쓰는데 『만세』란 말을 校正이 잘못되야 『망세』라고 하엿다가 社長 李鍾一氏가 不敬罪로 一時 拘禁되엿던 일은 只今까지 斯界에 한 이약이 거리가 되여잇다.

丁. 朝鮮新聞의 全盛時代와 暗黑時代
乙未保護條約 以後로 朝鮮의 政治는 勿論 여러 가지의 말할 수 업는 制限을 바덧지만은 彼老獪無雙한 新統監 伊藤博文은 例의 政治手段을 써서 內外의 人心을 緩和식히고 또한 自己도 一般 與論을 參考하기 爲하야 어느 程度까지 言論의 自由를 容認하얏스니 乙巳年으로부터 庚戌合邦時代까지 約 6年間은 朝鮮에 新聞이 생긴 後 第一 全盛하던 時代라 하겟다. 卽 統監府 機關紙로는 京城日報, 서울푸렛스가 생기고 治外法權의 恩德으로 極端의 排日論을 主唱하야 一般 朝鮮 사람의 大歡心을 사던 英人 裵說氏의 經營인 大韓每日申報도 이때에 생기엿다.
그리고 이때에 特記할 것은 天道敎에서 經營한 萬歲報니 이것은 光武 9年 乙未 6月에 創刊된 바 位置는 會洞(今 旭町 1丁目) 社長은
吳世昌, 主筆은 李人稙이엿섯는데 그들은 다 當時 新進人物로 特히 李氏는 多年間 日本에 滯留하는 中 新聞에 關한 智識을 만히 가진 關係로 그 新聞도 在來 朝鮮式의 新聞보다는 아주 面目을 一新케 하야 段數도 在來 8段이던 것을 10段으로하고 活字도 朝鮮 初有의 루비式 活字를 쓰고 『鬼의 聲』이란 所謂 新小說도 이 新聞에서 嚆矢로 揭載하얏다.(菊初 李人稙作) 그러나 經營의 困難으로 丁未年 秋期에 不幸히 李完用 內閣의 機關紙로 賣渡되야 大韓新聞으로 改號하얏다가 庚戌合邦時에 廢刊되고 또 그와 同時에 一進會의 機關紙인 所謂 國民新報란 것이 美洞(今 黃金町)에서 發行되엿스니 그 主筆은 梅下 崔永年으로〈26〉 合邦建白書까지 公共하게 揭載한 것은 아즉것 吾人의 記憶에 살아질 수 업고 讀者에게 紙上 投票募集을 하기도 此報가 嚆矢엿다. 그 뒤 隆熙 2年頃에 一進會國是遊說團을 對抗하야 天道敎의 策動으로 이러난 大韓協會에서 經營한 新聞이 또 잇섯스니 그것은 卽 大韓民報다. 이 大韓民報는 皇城, 帝國 等과 姉妹가 되는 同時에 政黨의 機關紙이니만침 每號마다 政府를 攻擊非難하는 堂堂한 言論이 만엇섯고 朝鮮 最初의 諷刺漫畵를 揭載함이 큰 特色이엿다. 位置는 (壽松洞 今 鐘路小學校址요. 社長은 大韓協會吳世昌 兼任)
此外에 日本人 經營 新聞으로는 仁川의 朝鮮 新聞을 爲始하야 上記한 漢城新報, 大韓日報, 大東新報 等等 外에 報知, 時事, 國民, 萬朝, 大阪朝日, 同每日 等 여러 支局이 設置되야 一時 京城에는 新聞 看板이 私立學校 看板과 伯仲을 닷툴만치 만케 되엿섯다.
그러다가 庚戌 8月 29日 所謂 日韓合倂이 되고 武斷政治의 代表人物인 寺內 總督이 朝鮮을 統治하게 되니 朝鮮의 言論界는 그의 一刀之下에 餘地업시 抹殺되야 所謂 御用紙 每申(그때 다른 新聞은 다 廢刊식히고 大韓每日은 裵說에게 買收하야 御用紙를 삼는 同時 每日申報라 改稱함) 以外 다른 新聞은 殘命좃차 保存을 못하얏스니 庚戌年으로부터 巳未年까지 約 10年間은 朝鮮 新聞界의 暗黑時代라 可謂하겟다.
그러자 己未年 3月에 萬歲의 소리가 터지며 長谷川 總督이 退歸하고 齋藤 總督이 繼任함에 臨하야 所謂 文化政治를 布告하고 言論의 自由도 多少 緩和되야 몃 個의 新聞(雜誌는 下段에 別論)을 許하게 되엿스니 卽 庚申年(大正 9年) 4月에는
李相協氏 外 某某氏의 發起한 東亞日報가 創刊되고 同年 3月에는 大正親睦會의 經營인 朝鮮日報가 創刊되고(이 朝鮮日報는 勿論 現 朝鮮日報의 前身이나 中間 經營者가 여러 번 變更된 結果 只今에는 大正親睦會와 全然 關係가 업게 되엿다) 그와 同時에 國民協會 機關紙 時事新聞이 發刊되고(約 2個年後 廢刊) 其後 大正 12年 3月 30日에 六堂 崔南善氏의 主幹인 時代日報가 發刊되엿다가 大正 15年 秋期에 廢刊되고 尙又 大正 15年 11月 15日에는 李相協氏의 主幹한 中外日報가 發行되야 只今까지 나려왓섯다. 然而 이 近來에 생겨난 新聞에 關하야는 一般이 이미 잘 아는 바임으로 여긔에 자서이 말치 안코 後日 다른 機會에 자서한 論評을 하겟거니와 此等 新聞은 其 言論의 如何라던지 主義 色彩의 如何는 別問題로 하고 形式과 體裁는 前에 比하야 相當히 進步되엿고 또 輪轉機로 印刷를 하게 된 것도 此等 新聞이 츰이엿다.
-(雜誌에 關하야는 次回에 繼續)- 〈27〉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