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朝鮮, 中央, 兩新聞 復活內幕, ―오랫동안 잠겻든 문이 엇더케 열려젓나

이강기 2015. 9. 28. 09:09
잡지명 삼천리 제4권 제12호
호수 제4권 제12호
발행년월일 1932-12-01
기사제목 時急뉴-쓰, 朝鮮, 中央, 兩新聞 復活內幕, ―오랫동안 잠겻든 문이 엇더케 열려젓나―
필자 滄浪客記
기사형태 소식

朝鮮日報篇
해외에선
興士團이요 海內에선 同友會의 首腦者 중 一人인 曺晩植氏 등 손으로 停刊 중에 잇든 조선일보가 8개월만에 門戶를 열고 새로 輪轉機 박휘를 돌니게 되엇다. 그러면 문제의 安在鴻 李昇馥씨는 엇더케 되엇는고? 그보다도 版權을 가로차고 안젓든 林景來氏는? 또 申錫雨 崔善益 曺설鉉氏 등의 舊幹部와 50여 명의 社員들은 엇더케 되엇는고? 이러한 人的 관계보다 殖銀에 잡히엇든 輪轉機는 엇더케 되어 풀려나왓고 高等法院에서 재판 중에 잇는 社屋은 엇더케 되엇는고 多數한 舊債의 정리와 압흐로 續刊 비용 등은 어대에서 나오려는고? 이 의문의 실마리를 爲先 今日의 형편대로 푸러보려고 이 붓을 잡엇다.
今年 6월 炎天도 거이 기우러지려하는 하릇저녁 手標町 교육협회에 前사장
兪鎭泰老를 차저서 『신문을 續刊만 시키고 나는 *州의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짓겟슴니다』
하고 책임감을 말하는 一紳士는 15,000원의 在滿救濟金消費때문에 入獄 6개월 하엿다가 數日前에 保釋出獄이 된
安在鴻氏엿다. 과연 安氏는 以來 4개월을 두고 그말대로 제손으로 망친 신문을 부활시켜노려고 가진 애를 다썻다. 그래서 10월 초순에 이르러는 機가 熟하엿다. 曰安城서 ?子組合長으로 잇고 曾經道評의원한 李某氏와 남대문밧 笠子商하는 李某氏와 新堂里의 京城府토지 買收사건으로 一代를 울니든 曾經 京城府 協議員 方圭煥氏 등과 結托하여 萬圓乃至 2萬圓式 모으게 하엿다. 그러나 莫想회사성립의 구체적 계약성립에 들어가매 저마다 제 일홈으로 版權을 넘겨라, 社長을 달나 營業局長 椅子를 달나하게 되어서 35,000원을 모을 작정이든 돈이 紙上空文밧게 더되 잘 것이 업시되엇다. 安在鴻氏는 商利엔 百怜百?한 이 풍꾼들을 밋다가 모든 꿈이 깨어젓다. 한편 12,000원 빗에 版權을 잡고서 明治町 時代일보 집자리에서 辛日鎔 李晶燮 金烱元氏 등을 이끌고 몃칠을 신문을 내든 3일 天下의 林景來氏는 「달뜨자 배떠나자」格으로 版權쥐자 資金難에 걸려 헛풍치든 주식회사 성립도 開城富豪 林漢宣氏의 援助도 모다 無望하게 되자 版權이나 고이 팔어넘겨 제 미천 뽑아내려고 이 사람 저 사람과 版權이동을 盛히 꾀하엿다. 時時刻刻으로 온갓 6曺配布를 다하는 各派의 策動이 나날이 더 심하여 갈 때 11월 2일에 至하여 俄然 警務局에서는 延期에 又延期를 거듭하는 發行人들을 無誠意하다 認하야 여차직하면 發行權이라도〈特別5〉 취소시킬 腹案을 가지고 그날 安在鴻 李昇馥 林景來氏 등을 불너 初5일까지 신문을 발행승? 안으면 취소한다고 선언하엿다. 大驚失色한 諸氏는 나종에야 엇지되엇든 나오든 길로 社에 나와서 5일붓터 續刊함니다하는 號外를 京城 全市에 돌녀노코 관계자가 최후의 회의를 하여 보앗스나 亦 돈잇는 사람은 實權을 잡자하고 녜전 權勢잡엇든 사람은 지위에 戀戀하고 終乃 彼將我將으로 회의는 無軌道열차가 될 밧게 업섯다. 이러할 때에 曺晩植氏가 출현하엿다. 이 아래 中央일보篇에 가서 詳述하겟거니와 曺氏는 平南北에서 벌서 오래전부터 신문을 하려고 奔走하든 분이라 현금 X萬 6千圓을 만드러쥐고 중앙일보를 하려다가 일이 如意치 못하엿든 바로 뒤엇다. 同價紅裳格이라고 그럴 바에는 조선일보를 경영하기로 決意하고 관계자에 교섭하엿스나 잘 진행되지안엇다. 그리되자 警務局서는 曺氏派로 曺晩植 趙炳玉 朱耀翰氏와 舊幹部派로 安在鴻 洪祐崇 李昇馥氏 등과 版權派로 林景來氏를 불너 前記7人으로 理事를 삼고 신문을 하라고 타협식혓다. 그러나 그 자리에선 녜하고 대답하고 나와서 본즉 돈을 내는 曺氏派보다 녯 幹部派의 세력이 절대 과반수요 安在鴻씨를 主幹으로 써라. 又 2百餘 處 支社를 引繼하라 社員을 復職식혀라 50圓式 위로금을 주어라 등등 實로 그 조건이 第三者가 보기에도 너무 치우친 것이 만엇다. 이리되매 무진장한 돈을 쓰고도 實權을 주기 어렵게 되자 曺氏派는 물너안게 되엇다. 그때 警務局서는 또한번 8일까지 신문이 안나오면 두말업시 취소하겟다고 울넛다. 이에 出獄 즉시 兪翁에게 盟誓하든 「내 손으로 신문 죽엿다는 책임을 免하여노코야 말겟다」하든 安在鴻氏派의 誠意로 諸조건이 撤廻 양보되어 舊幹部는 一切 손을 끈코 曺氏 一派에서 경영하기로 되엇다. 云하더니 또 그 양보를 撤回하엿다든가.
아무튼 今後 形勢莫知나 신문는 아마 이 잡지가 市井에 나갈 때에 벌서 나돌지 안을것일가.
輪轉機는 月貰 XX圓으로 新派側에서 마터 쓰기로하고 支局의 債務관계는 一掃되고 이리하야 生新한 地盤을 밟고 朝鮮일보는 今明에 續刊이 될 듯하다. 드르니 舊幹部들은 新聞社內의 방두개를 그냥 쓰기로하고 거기에서 淸算事務를 보리라든가.
風聞에 들니는대로 曺氏 系組閣이나 적고 압흐로 좀 더 形勢를 觀望하기로 하자.
社長에
曺晩植氏가 되리라함은 旣定한 사실인 듯 或者 安島山이 나오면 그때는 島山에게 讓位하리라 云云하나 未來之事를 能誰知리요 副社長에는 版權代로 돈을 치르지 못하게되면 아마 林景來氏가 안게 될 것이요 그러치 안으면 李某氏가 올 것 갓다하며 편집국장에는 朱耀翰氏요 영업국장에 趙炳玉氏 그리고 社員은 아마 대부분 舊社員이 그냥 일을 보게 될 듯 하다고―그야 그 중에 同友會주의 主張과 너무 사이가 잇는 思想人들이야 自退하겟지만―또 한가지 曺氏측에서 安在鴻氏에게 社의 要職에 잇서달나고 請하엿더니 固辭하더라고.

끗흐로 조선일보로하야 生成된 諸비극의 인물들을 記하고 이 붓을 거두자 15,000원의 在滿同胞金 문제로 入獄하엿다가 保釋된
安在鴻 李昇馥 兩氏는 사건이 豫審判事의 손을 떠나 公判에 回附되엇슴으로 이제 판결나는대로 명예스럽지못한 罪名을 질머쓰고 두분은 다시 鐵窓에서 呻吟하게 될는지 몰으고 李商在氏 後를 繼하야 第三代社長이 된 申錫雨氏는 世稱 20萬圓하든 재산도 己倒한데다가 禍不單行이라고 外艱喪까지 당하엿스며 더구나 한때는 鐵條網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까지 가치어 잇섯섯다. 편집국장이든 韓基岳氏는 惱心焦思의 餘에 신경을 傷하여 市外 安養寺에 閉居하고 鐵條窓과 폭력단事變에 重傷하야 2개월을 입원 치료 중이든 權氏 그 밧게 饑餓線上에서 惱苦하든 百餘 社員 諸氏와 幹部로서 개인적으로 破産當한이 등등 그 慘苦을 數하자면 限이 업겟다. 이제 各 支局에 대한 負債와 조히갑 기계갑 등 10萬圓으로 손을 곱든 諸舊社債를 정리하여 나아가는데 따라서 또 얼마나한 슬프고도 긔막힌 苦狀과 비극이 續刊의 幕後에서 장차 반복될는고.
아모튼 多數한 사회민중에게 조흔 정신적 糧食을 제공하든 문화의 一강력한 탕크! 朝鮮일보가 이제 새로운 일군을〈特別6〉 마지하야 문을 여러 햇빗을 맛게 되니 깁부기 그지업다. 다시 이제 閉門 停刊 등의 최악의 경우가 다닥처 오지말기를 切切히 바라노라.

中央日報篇
崔南善氏의 名義로 나왓든 時代日報가 普天敎바람에 붕괴되고 다시 洪命熹氏 등의 손으로 再興되엿다가 그것마저 *地하자 李相協氏손으로 中外日報라고 그 題號가 變更되어 나왓다가 그 亦 悲運에 들어 閉門한 뒤 한참잇다가 다시 그 命脈이 美國철학박사 盧正一氏 手로 중앙일보가 되어서 再現한 波蘭만튼 이 一連된 系統의 신문기관이 今夏 4월에 社運의 悲境으로 休刊이 되고 이어 사원의 籠城 飢餓同盟, 交涉員의 경찰被檢 등 實로 사회를 놀내이든 幾多의 뉴-쓰을 제공하여오든 중앙일보가 11월 1일부터 開門하고 輪轉機가 다시 돌게 되엇다. 이것은 실망과 低調, 침묵에 잠기엇든 우리 언론사회의 空氣를 깨처논 유쾌한 報導의 一이 아니될 수 업다. 나는 이제 그동안 지내여온 모든 經路를 略하리라. 그것은 그 사이에 人的 往來도 너무 만헛고 事端의 갈피도 너무 복잡하엿슴으로 신문전문가 이외에는 그 敍述을 완전히 할 수 업슬 뿐더러 또한 記述하엿다 하여도 그러케 흥미를 끄을 일이 못되리라. 그럼으로 최근 중에도 又 최근 事를 기록하여 보건대 盧박사가 신문을 기여히 續刊하겟다고 警務局 圖書課長과 경찰부장에게 맹세한 날자가 10월 某日이엇다. 그러나 財政의 일꾼이든 金某氏 등을 일코 나안즌 盧박사의 손에는 續刊할 비용이라고 손에 잇섯슬리업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은 잇섯다. 그것은 平南北에 有勢한 地盤을 가지고서 資金운동으로 東西奔走하는 趙炳玉氏 一派와의 ?約이엇다. 사실 趙炳玉氏는 關西의 名望家 曺晩植氏와는 가튼 同友會 同志라는 一點에 잇서 肝膽相照하는 사이엇섯고 新進論客 朱耀翰氏와도 亦 가튼 구룹멘 버-란 점에서 同志사이엇섯다. 이 세분이 3羽鳥가 되어 關西一帶의 자산가와 結托을 맷기 시작한지는 벌서 한두달 사이만이 안이엇다. 今春 上海事變이 이러나고 餘波로 安島山이 잡혀 朝鮮으로 도라오자 風聞대로 적으면 島山이 出獄한 뒤 발부칠 地盤이 업스니 島山을 신문社長에 推戴할 수밧게 업다하야 同友會系에서 신문경영에 뜻을 두엇다 전한다. 엇지하엿든 諸氏의 노력이 空歸되지안어서 현금으로 X萬 6千圓을 모아 쥐고서 10월下旬에 急遽 上京하여 盧正一氏와 版權移轉의 계약을 하려한 즉 벌서 다른 분과 假계약을 하고 난 뒤엇다. 말로는 3시간이 느젓더라고 이리하야 趙炳玉氏는 盧氏의 無信을 憤慨하면서 朝鮮日報에 走하엿다함은 前述한 바와 如하다. 그러면 盧氏는 누구와 先約하엿든고 그는 崔善益氏라 崔善益氏의 일흠은 신문사회에 多少라도 常識잇는 분은 모다 알 前 조선일보 幹部요 開城의 少壯富豪인 東京 早大출신이엇다. 氏는 일즉 朝鮮일보를 위하야 10여 만원을 기우렷다가 申錫雨氏와 의견이 맛지안어 고향에 내려가 實業에 精進할 따름으로 신문사회와는 직접으로 발을 끈코 여러 해를 내려온 분이엇다.
崔氏는 同志한분을 어덧다. 그는 天安의
尹希重氏라 3千石(約20萬圓)을 한다는 지방의 巨富로 殖銀에 토지 얼마가 드러갓다는 說도 잇스나)로 더부러 신문사회에 再擧할 壯圖를 품고 時機를 엿보다가 朝鮮일보의 續刊 交涉이 不如意하게 되매 一轉하야 中央일보에 뜻을 두고 暗密히 計策하야 계약까지 매짐에 이르럿다. 盧正一氏에게 權利金으로 6千圓인가 1萬圓인가를 주고 그리고 社屋과 輪轉機 活字 등의 債務를 그대로 引繼맛고 人事의 까다로운 아모 조건도 업시 계약은 성립되엇다. 崔善益氏가 中央日報를 하게 되엇다는 소리는 長安人士들도 발표당일까지 몰낫다. 그러케 일은 速하엿고 外部에 漏洩됨이 업시 깜족갓치 하엿섯다. 그러면 崔善益氏는 갑작히 어듸에서 數萬의 돈이 생기엇는고하면 風聞에 듯건대 開城에 가지고 잇든 자동차 線路을 팔엇다는데 이제 그 밧게도 電氣회사에 가지고 잇는 株券多數를 팔어 신문사 資金으로 삼으리라든가.
畢竟 어느 時期에 이르러는
崔善益 尹希重〈特別7〉 兩氏는 社의 경영을 東亞일보사 모양으로 株式으로 하든지 合資회사로 하여 一世의 淨財를 모이려 하리라. 이 점에선 續刊하는 조선일보 亦 同一하리라.
중앙일보의 組閣은 그 계약이 신속하엿든만치 非常히 스피-드엇다.
이라 여기에서 거대한 존재를 발견하리라. 그것은 편집국장의 千里駒
金東成氏다. 예ㅅ날 己未후 얼마아닌 때에 東亞일보 기자로서 태평양 기자대회에 참석하여 一躍 副會長의 榮位를 밧어 사회적으로 크게 센세순을 주든 분인데 그 뒤 사정이 잇서 신문사회와 오래 발을 끈엇다가 이제 부활한터이라 氏의 출현에는 多數한 사람이 조흔 의미로 놀낫섯다.
氏는
崔善益氏와 고향을 갓치 하엿고 朝鮮일보에 崔氏 활약할 때에 東成氏도 갓치 손을 맛잡고 일을 보아왓섯다.
엇잿든 이러한 陳容을 가지고 11월 1일부터 오래 잠겻든 신문지가 輪轉機로부터 쏘다저 나오게 되엇다. 듯건대 아직
盧正一氏 名義로 발행인 名義가 그냥 잇서 續刊은 하면서도 굉장히 續刊소리를 못첫스나 압흐로 名義변경이 됨에 따라 8頁신문으로 하여서 大飛躍하리라든가.

이리하야 다첫든 두 신문사의 門은 萬人 歡呼의 소리속에서 다시 續刊되엇다. 이제 東亞日報까지 세 신문사는 엇더케나 불이 날 爭覇戰을 치르러는고 販賣戰으로 廣告戰으로 勢力戰으로―압흐로 人員 배치와 신문판매의 주요地盤 등을 보아 三신문사의 爭覇戰을 다시 隨時 報導하려 하노라.(11월 8일 오전記)〈特別8〉
〈特別5-特別8〉